땅거미가 내려앉는 한적한 시골거리의 횡단보도. 신호등을 응시하고 서있는데 취기가 약간 올랐지만 훤칠한 키에 모자를 눌러 쓴 남성. 그는 일주일 뒤 제대(除隊)를 앞둔 대한민국의 육군이었다. 갑작스레 달려오는 촌스런 붉은색의 대형 트럭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끌고 가다가 멈추어 섰다. 그는 20대 홍안(紅顔)의 나이에 너무나 급하게 하늘나라로 자신의 엄마를 만나러 가고 말았던 것이다.
만날 때마다 담배 갑의 은박지나 껌 종이로 만남을 기뻐하는 추억으로 종이학을 접어주었다. 거기에 날짜와 받는 이와 보내는 이의 서명도 함께. 옷깃만 스쳐도 인연(因緣)이라고 했는데, 천 마리의 종이학을 접으면 접는 자의 소원(所願)이 이루어진다는데, 천 마리의 종이학을 미쳐 못 접어서 나의 첫사랑은 떠났을까?
대학교 4학년 1학기 봄비 내리는 4월, 춘천 죽림동성당에서 그의 영결식이 있었다. 빈 강의실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창밖의 소낙비처럼 내 가슴으로 퍼붓는 눈물을 주체 못하고 있었다. 처음 사랑에 덴 나의 심장은 그 후 어떤 만남에도 그리 애틋할 것도 없었고 봄은 바뀌어도 내 가슴은 설레이지 않는 시간 속으로 흘러만 갔다.
그림 인생을 선택한 후 제일 먼저 나 자신을 위하여 종이학을 나의 일생을 반추(反芻)하는 소재(素材)로,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온 나만의 표현방법으로 나의 인생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 놓기 시작하였다. 종이학은 4귀가 정확한 정사각형의 종이위에 많은 선분(線分)의 만남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결혼, 부부애(愛)도 귀가 맞아야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려서부터 늘 함께 해온 종이학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그림으로 표현(表現)하려고 구상(構想)을 하게 되면서 이 작품의 제목이 떠오른 것이다.
<여인, 학 그 천년의 기다림>의 작품은 2002년 단국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서양화전공 석사학위 청구(請求) 전(展)에 제출한 작품으로 130cm x 130cm, 정방형 크기의 캔버스에 수채화에서 물감을 잘 흡수하는 아르쉬 종이처럼 복잡한 감정의 흡입(吸入)을 표현하기 위해 유화물감에 테레핀(Terpin)을 많이 섞었다. 화폭을 뉘어 놓고 희석(稀釋)된 유화물감을 흘러내리게 드리핑(dripping)을 하였다. 그 전 단계에 고무장갑을 끼고 혼합재료(混合材料)로 다사다난(多事多難) 했던 나의 인생사를 표현하듯 화면에 계곡처럼 밑바탕 처리를 하였다.
여인의 뒷모습은 나를 상징한다. 러시아 레핀 아카데미 유학시절의 습작(習作)인 모노톤(monotone)의 콩테(conte’{프랑스어}) 작품을 중앙에 올려놓았다. 종이학들은 한지(韓紙)위에 그린 후 캔버스에 콜라주 기법으로 부쳐 나가면서 다리가 없는 종이학들이 어느 날 높이 날아갈 수 있도록 나의 다리를 빌려 주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허벅지가 튼튼한 나의 종아리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수없이 꿈꿔 보았던 천 마리의 종이학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꿈의 표현으로 여러 색상의 천 조각을 부쳐 마무리를 한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하면서 회한(悔恨)의 눈물도 흘려야 했고, 기쁨의 눈물로 많이도 울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성취감(成就感)으로 나는 행복하였다. 앞으로의 새로운 시도(試圖)에 대한 불안감에서의 탈출, 계속 탄생되어질 많은 종이학의 춤사위에 대한 기대감으로 말이다. 내 팔의 겨드랑이 밑에서 쑥쑥 날개가 솟아나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당당한 자유로움!, 아~아, 그러나 너무 빨리 먼저가신 나의 애달픈 첫사랑에게 이 작품의 종이학들을 그가 있는 곳으로 날려 보내고 싶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