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동전 모으기
벨기에 초등학교는 방학 숙제라는 것이 없는데, 지난 여름 방학 때는 아이들에게 방학 과제물이 하나 떨어 졌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방학 동안에 유로 동전을 누가 많이 모으나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숙제 아닌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유로 동전은 1, 2, 5, 10, 20, 50 cent, 1, 2 Euro 짜리가 있으며 앞면에 숫자가 쓰인 면은 “European Side” 라고 해서 유로 사용 모든 국가에서 디자인이 정확히 동일합니다. 하지만 뒷면은 “National Side”이며, 각 국마다 독특한 디자인을 넣었습니다. 액면이 같으면 동전의 크기나 무게는 12개국 모두에서 주어진 오차범위 내에서 동일합니다. 이번에는 유럽 사람들의 유로 동전 모으기 열풍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위) 첫 줄은 앞면에 숫자가 쓰인 면은 “European Side"
둘째 줄은 “National Side”이며, 각 국마다 독특한 디자인을 넣는데, 사진은 벨기에의 예입니다.
유로 동전 모으기 열풍은 디자인이 다른 National Side 에서 시작됩니다. 현재 유럽 연합 15개국 중에서 영국, 덴마크, 스웨덴을 제외한 12개 국가에서 유로를 사용하기 때문에 유로 동전은 총 96 종류입니다. 2002년 유로 출범 원년에 사용된 96 가지 종류의 동전을 모두 모아서 영구히 보관하는 일은 수집가들에게는 어쩌면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진짜 수집가들은 일찍이 2002년 1월 1일부터 부지런히 각국의 유로 동전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 같은 일반인들은 6월 정도까지만 해도 유로 동전 모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 여름부터 네델란드의 어느 조그만 회사 때문에 대부분 유럽 가정에서 유로 동전을 모으는 열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평범한 아이디어인데, 그 회사에서 내 놓은 제품은 다름아닌 상표명 “Euro Collector” 였으며, 96개 동전을 끼어 넣도록 홈을 만들어 놓은 판넬이었습니다. 그 판넬이 유럽 각 나라의 수퍼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을 줄은 제조 회사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는 아이들 1명당 Euro Collector 하나씩을 가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IMEC 저희 high-k 팀에서 Euro Collector 를 가지고 있지 않는 가정은 한 집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Euro Collector 때문에 각 나라는 동전을 더 많이 찍어 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각 가정마다 적어도 1 set 씩은 가지고 있으려고 하니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양의 동전이 유통되지 않고 집안에 쳐 박혀 있는 셈입니다.
발행국이 다른 유로 동전일지라도 유럽 연합 국가 내에서는 공통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벨기에에 가만히 앉아서도 주변국의 유로 동전을 모으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수퍼를 다녀 온 후 주의 깊게 거스름 돈으로 받은 동전을 살피면, 벨기에 주변국인 프랑스, 독일, 네델란드 동전은 1 달 이내에 full set 모을 수 있습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좀 멀지만 대륙에 연결되어 있는 큰 나라이기 때문에 벨기에에서도 어렵지 않게 full set를 모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벨기에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섬나라나 조그만 나라의 동전입니다. 섬나라이면서 멀리 떨어진 나라인 그리스, 아일랜드, 핀란드 경우는 벨기에 수퍼에서 몇 개는 모을 수 있지만 full set를 모으기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룩셈부르크 경우는 벨기에와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워낙 작은 나라라서 상대적으로 동전 발행 개수가 적기 때문에 full set를 모으려면 꽤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벨기에도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만약 아일랜드의 어느 아이가 벨기에의 동전을 모으려고 해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앞에서 수집가들이 유로 시작 날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고 했는데, 바로 1, 2 센트 짜리 동전 때문입니다. 이미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1, 2 cent 짜리는 유통시킬 필요가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핀란드의 경우는 유로를 시작할 때 단지 기념으로 얼마의 1, 2 센트짜리를 발행하고는 그 이후부터 아예 발행도 하지 않고 사용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 2 센트는 경제 규모에 비해 너무 소액이기 때문에 현재 핀란드에서는 소매 상거래 최소 단위가 5센트라고 합니다. 따라서 핀란드 내에서도 1, 2 센트 동전은 매우 희귀한 물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발 빠른 수집상들 덕분(?)에 현재 브뤼셀의 어느 화폐상에 가면 핀란드 1, 2 센트를 살 수가 있습니다. 1, 2 센트를 포함한 핀란드 동전 full set의 현재 거래 가격이 100 유로입니다. 유로 동전 1 set 의 총 액면 가격이 정확히 3.88 유로인데, 1, 2 센트 때문에 25 배나 높은 가격으로 거래 되고 있습니다. 다른 유럽 연합 국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의 경우는 많은 여행객들이 그리스에 오기만 하면 기념으로 그리스 동전을 5 set 정도씩 가지고 가기 때문에, 아예 수퍼에서 현재 유통되는 화폐를 판매하는 아이러니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수퍼에서 판매되는 그리스 동전 1 set의 가격이 자그마치 19 유로라고 합니다.
좌우간, 자기가 직접 그 나라로 여행을 하든 아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든 간에 스스로 96 가지 동전 모두를 모으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브뤼셀의 화폐상에서 12개국 full set 는 현재 약 500 유로 (60만원)에 거래되고 있으며, 총 액면가 46.56 유로에 비해 약 10배인 셈입니다.
그럼, 저희 아이의 유로 동전 모으기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말이 아이의 숙제이지 사실 부모가 해 주어야 할 숙제입니다. 놀랍게도 이번 여름에 단 3달 만에 12개국 full set 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모두 모았습니다. 일부러 동전 구하러 멀리 떨어져 있는 현지까지 여행을 간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브뤼셀 화폐상에 가서 full set를 산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비법은 imec 직원들을 총 동원시킨 것입니다. Imec 은 세계 60개국에서 온 연구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유럽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 나라 당 5~10 명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대개 여름 휴가 때는 자기 나라 고향으로 휴가를 가는데, 그 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휴가를 마치고 되돌아 올 때 당신 나라의 동전 set 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저와 친한 사람들이 각 나라마다 1명씩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닙니다. 2~3 명 정도만 알고 있으면, 친구-친구-친구-… 식으로 수소문해서 부탁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유로 동전들을 모으면서 빈 칸이 하나하나 메꾸어 지는 과정을 약 3 달간 지켜 보니까 이제는 96개 동전 모두 금방 보아도 어느 나라 동전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보다 더 자주 지켜본 아이는 모든 나라의 뒷면 디자인을 안 보고도 그림으로까지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방학 숙제 의도는 이렇게 아이들이 바뀐 화폐에 빨리 적응이 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2002.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