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 크루스
그리스도인이 거듭난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육체의 본성은 사라지거나 제거되지 않는데, 어떻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참된 거듭남을 경험할 때에 육체의 죗된 본성이 사라지거나 제거된다고 말하는 대신에, “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죄의 본성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독수리 같은 본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매우 치열한 전쟁인데, 바울은 이 전쟁에서 독수리를 죽이고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옛 사람”은 죗된 본성을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독수리라고 표현하기로 하겠다. 옛 사람(죗된 본성) 즉,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품고 있는 내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는 것이 필요합니까?” 또는 “꼭 죽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죽기를 거절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죽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선한 어떤 것을 계발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죽음과 선의 계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창조와 진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다. 사도 바울은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재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선한 것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진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하늘가는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 경험일까?
독수리를 알아야 독수리를 잡는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태복음 15:18~20.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의 출처는 마음이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계시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만, 사납고 비열하며 이기적인 독수리 같은 본성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면, 독수리와 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게 된다.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를 잡아야 하는데, 독수리의 본성을 잘 이해해야만 그것을 잡을 수 있다. 독수리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독수리는 참새나 비둘기 같으면 전혀 관심도 갖지 않은채 지나쳐 버릴 죽은 송장에게 침을 흘리며 달려든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그는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바로 그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그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나 곡식보다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독수리를 잡아서 그것의 태도와 습관을 잘 길들여서 온순한 동물로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먼저 독수리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서 그 속에 독수리를 넣었다. 그리고 먼저 독수리의 식생활 습관을 변화시키려고 날마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을 주었다. 독수리는 여러 주일 동안 주인이 주는대로 잘 받아 먹다가, 어느날 새장 한 구석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 구멍을 통해 날라가 버렸다.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 떠있다가, 죽어서 쓰러져 있는 당나귀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내려가 작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면서 맛있게 뜯어 먹었다. 주인은 독수리를 위하여 훨씬 더 선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준비해 두었지만, 독수리는 자신의 옛 습관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가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비둘기가 되어야 비둘기처럼 살 수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시여,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의 형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비둘기와 함께 먹이통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또한 비둘기와 함께 어울려서 주인이 주는 모이를 먹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우리를 지켜보지 않거나,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지켜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 가차없이 독수리의 근성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어서 주변에 있는 비둘기들에게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들이댄다. 바로 그 때, 곁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던 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다시 독수리로 돌아간 사실에 대해서 하늘 왕께 보고서를 기록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말씀이다. “네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새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너는 곧 매우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될거야. 그러니 너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너는 깨어 있어야 해!” 주님의 당부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버리고 갈지라도 저는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자, 베드로는 닭이 두번 울 때,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주님께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적어도 베드로는 정직하게 말했다. 그는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참 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예수께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아시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우리의 죗되고 이기적인 본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체면과 위선이 좀더 완벽한 가면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독수리는 그가 살아 있는한 언제까지나 독수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어린 양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독수리를 길들여서 어린 양 흉내를 잘 낼 수 있게 훈련시키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독수리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수리인 우리는 어린 양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좀더 완벽하게 위장된 가면과 위선 속에서 이웃과 가족을 속일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마저 기만하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독수리를 죽이는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독수리를 죽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죽음의 모본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처럼, 우리의 자아도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니” 라고 말했던 것이다(롬 6:6). 그분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할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죗된 자아 즉, 독수리의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매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음으로써 배고픔으로 허덕이게 해야 하며, 외쳐대는 그의 요구를 거절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를 죽일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 속에서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진 용서와 구원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정신이 샘솟게 되며, 동시에 그분처럼 의롭고 경건하며 거룩한 생활을 살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우리 속에서 생긴 이러한 전격적인 변화는 하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마음의 재창조인데, 이러한 변화를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다. 독수리의 요구에 대해서 “안돼”라고 대답하는 거절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점점 세력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전에는 커다란 유혹으로 느껴졌던 시험이 이제는 아무런 유혹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수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두가지 오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독수리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평생을 통하여 계속되는 경험이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돈하고 있는 한가지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경험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한 후일지라도, 때때로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옛 본성으로 인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과 회개를 받지 않으셨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망과 좌절 속에서 방황하다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떠나고 만다. 옛 본성의 요구에 굴복하는 죗된 생애를 살다보면, 결국에는 성경의 진리를 자신의 죗된 경험에 맞추어서 철저하게 합리화 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일단 한번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정죄하지 않으시며,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그 생애가 어떠하던지 간에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위험천만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개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주장을 하게 된다;
1.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 졌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향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값을 완전하게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는 죄를 범해도 좋다는 허가증이 아니라, 죄가 요구하는 댓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인류에게 죄짓기를 중단하라는 그리스도의 피뭇은 호소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권위와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7.
2.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입니다(Once saved, Always saved)” : 옛 본성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 한번 받은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잃어 버릴 수 없으며, 심지어는 구원을 거절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날마다 유지되고 지켜져야 한다. 어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면, 구원은 더 이상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번 구원받았으면, 나의 믿음과 생활이 어떻하든지간에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 는 가르침을 믿고 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늘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도 요한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계 21:17).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한순간의 결정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한번 결정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한번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옛 본성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다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자. 그렇다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인가? 그렇다. 왜 그런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 기 때문이다(갈 5:17). 거듭남을 경험한 후일지라도, 육체의 소욕 즉 옛 사람(독수리의 본성)이 우리 속에서 계속 부르짖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과나 당근처럼 유익하고 선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엇인가 썩고 부패한 것을 원한다. 비록 독수리가 그러한 것들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놀라거나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유혹과 충동을 느끼는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유혹에 굴복하여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끌려다니기로 선택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죄는 성립된다.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유혹과 우리 속에서 그 유혹에 굴복하라고 종용하는 독수리의 요구에 대하여, 우리가 굴복하느냐 아니면 거절하고 승리하느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관건이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선택해야만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 이 쪽에는 십자가가 있고, 저 쪽에는 마음의 보좌가 있다. 우리가 마음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앉도록 모신다면, 옛 사람 즉 독수리 같은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시험과 유혹이 접근해 왔을 때, 우리가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대답한다면, 자신 속에 있는 독수리에 대해서는 “안돼”라고 대답하는 것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매일 경험해야 할 생애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독수리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예”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는 어떤 것도 못박으려고 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지는 않지만, 독수리 역시 못박아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독수리와 예수님과 세상을 함께 모시고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마음 속 보좌에는 오직 예수님 한분만 모시며, 십자가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을 못박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사람만이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독수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소리치고, 협박하는 것일 뿐이다. 못박힌 독수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가라고 부르짖고, 자신이 범하기 원하는 죄를 범하라고 졸라댄다. 자신의 날개와 발에 박힌 못을 빼달라고 애원하며 절규한다. “나를 풀어 주세요! 잠시 풀어 놨다가 다음 주에 다시 못박아도 되쟎아요!” 못에 박힌 독수리는 항상 논리적으로 우리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논리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은 오늘은 독수리를 못박았다가 내일은 풀어주는 생활을 되풀이 하면서, 독수리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피곤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내일이면 또 독수리를 풀어줄텐데” 라는 생각 때문에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어차피 다시 풀어줄 독수리를 구태어 힘들게 못박을 필요가 어디있나?” 라는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아가 죽는다는 말의 의미
이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여기서 우리는 “여길지어다(consider)” 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길지어다” 라는 말에는 “꼭 그러한 것으로 간주하라” 는 뜻이 담겨 있다. 아마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이렇게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에는 죽어야 한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는 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옛 본성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원하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못하거나 부르짖을 수 없는 상태로 되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죽은 것으로 여길지어다” 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열심을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뒤로 후퇴해 가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감적인 기록에 깊은 주의를 모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Messages To Young People, 114.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라
우리 속에 항상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에 대해서 결코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냄새를 피우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그런 추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미워하며, 불신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으로 선한 어떤 것을 사모하게 되는데, 바로 이 때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 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들려주시는 비둘기 같은 성령의 음성과 독수리의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다. 한 음성에 순종하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거절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두마리의 새가 있다. 하나는 죗된 옛 본성을 상징하는 독수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하는 비둘기이다. 우리가 비둘기를 사랑하여 비둘기를 기르기로 선택하였다면, 우리는 비둘기에게만 먹이를 주어야 한다. 반면에 독수리는 굶겨야 한다. 우리는 독수리와 비둘기에게 동일한 먹이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비둘기는 죽은 시체나 썩은 고기는 전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님과 독수리같은 본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에 어떤 먹이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텔레비젼 속에서 튀쳐나오는 각종 썩은 것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그리고 각종 책이나 잡지에서 더럽고 추악한 사상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독수리는 먹이를 찾은 환희의 소리를 크게 지르며 “바로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원하던 것이야! 좀더 자극적이고, 더러운 것들로 나를 즐겁게 해달라!” 고 외치면서 달려드는데, 이런 경우 우리는 힘없이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게 된다. 독수리와 비둘기는 우리가 주는 먹이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만일 우리가 독수리가 좋아하는 먹이로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면, 독수리는 에너지를 얻어서 더욱 활개를 치면서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끌고 다닐 것이다.
우리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할 때에 매우 단호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독수리에게 끌려다니고 있다. “독수리야, 안돼! 나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기 싫어. 그렇지만 그를 은근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괴롭힐 수는 있지. 독수리야, 나는 결코 네가 원하는대로 그 사람의 뺨을 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그의 약점을 아프게 건드림으로써 그를 괴롭힐 수는 있지.”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이러한 모습으로 독수리와 타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일지라도 우리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근성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 속에서 독수리가 다시 머리를 쳐들고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단지 그것은 독수리의 근성이 여전히 내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회개를 통하여 독수리의 근성이 우리를 주장하거나 장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 참된 회개는 독수리를 못박아서 가두어 놓는다. 비록 독수리가 못박혀지고 가두어진채로 우리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부르짖을지라도,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독수리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면 된다.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무시하기로 선택하고, 비둘기 같은 성령님의 호소에만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십자가에 못박힌채 피를 흘리면서 굶어 죽게 된다. 힘을 잃고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의 절규와 애원을 추호도 동정하지 말라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 너희 지체를 ... 하나님께 드려라.” 로마서 6:12~13.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속에 계신 비둘기 같은 성령의 속성을 살찌우게 하자. 독수리는 십자가 형에 처하고,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전진하자.
자아가 죽는다는 의미
그대가 소홀한 취급을 받거나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할 때,
화내거나 맘 상함 없이 온유함을 유지하고 그것을 가치있는 고통으로 여기면서
상대방을 웃음으로 대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어려움, 어떤 귀챦음, 어떤 성가심을 이웃으로부터 받고 있을 때,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스러움과 유쾌한 분위기를 이웃에게 계속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음식, 어떤 외로움, 어떤 직업, 어떤 의복, 어떤 지위,
어떤 방해 하에서도 겸손한 만족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최선의 노력이 오해받고 잘못 전달됨으로서 그대의 소원이 좌절되고,
그대의 충고는 무시되고, 그대의 의견이 비웃음을 당할 때,
그대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억울함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억울함을 생각하면서
그대의 경험을 자신에게 꼭 필요한 교훈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가장 혹독한 시련과 형제의 냉정하고 가혹한 대우로 인하여 생긴 가장 암울하고
우울한 감정이 그대의 영혼을 엄습할 때,
힘찬 찬미를 부르며 오히려 슬픔과 낙담에 빠져있는 가족과 이웃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책망과 충고를 받았을 때,
그대의 육체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자존심과 반발심과 고집을 슬픔의 눈으로 내려다 보시는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하는 긴급한 기도를 드린 후, 감사와 겸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황혼기에서 자신의 영혼을 압도하는 듯한 죽음의 그림자와 외로움과
서러움을 힘있게 밀쳐버리고, 오히려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젊은 자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진리를 위하여 자신의 온 힘과 정력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청장년기에서,
이기적인 경쟁심과 그대를 자극하고,
물질에 대한 욕망이 그대를 사로잡으려고 으르렁거리며,
세상이 주는 유혹이 그대를 압도하려고 할 때,
또한 그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즐기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대가 그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하여 가난해지고
고난을 당하며 그 가운데서 참된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으로부터 날마다 솟구쳐 올라오는
죗된 욕망과 절규를 무시하고 날마다 하늘의 거룩한 법을 순종하기로 선택한다면,
바로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데니스 프리비
죄란 무엇인가?
“죄”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병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받기 위하여 의사를 찾아 갔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인하여 잘못된 처방과 치료를 받는다면, 그대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를 “죄”라는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회복시키는 복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죄”라는 질병에 대하여 오진을 할 경우, 죄의 치료제인 복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라는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 속에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담겨져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죄와 구원에 대한 견해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첫번째 정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잘못된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
정의 1: “사람은 무엇을 잘못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게 된다” : 이러한 잘못된 교리를 믿는 사람은, 신생아가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줌으로써 지옥불의 형벌을 면하게 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오류를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 받은 타락한 본성(육체) 때문에 아무도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한번 구원받으면 나의 생애가 어떠하든지 간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정의 2: “사람은 타락한 본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나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 그 자체 때문에 지옥불의 정죄를 받는 것은 아니다. 오직 타락한 육체의 요구와 사단의 유혹에 스스로 굴복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거절하고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영원한 파멸에 이르는 죄인으로 정죄를 받게 된다.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는 성경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요일 3:4)” :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다. 그러므로 비록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가 죗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의지에게 악을 행하라고 소리칠지라도, 인간의 의지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것을 거절하고 성경 말씀에 일치하는 거룩한 삶을 살기로 선택할 수 있다. 선과 악, 둘 중에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그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능력을 받는 그리스도인마다 타락한 육체의 요구와 사단의 유혹을 거절함으로써 죄를 승리하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첫번째 정의를 믿는 사람은 죄를 태어나는 순간부터 받게 되는 자동적인 것으로 믿으며, 두번째 정의를 믿는 사람은 죄를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믿는다. 첫번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비록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없으며, 율법에 순종하는 승리의 삶은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의인에게 주시는 영화로운 육체를 받을 때까지 불가능하다는 복음을 가지고 산다. 두번째 정의를 믿는 사람은 선택여하에 따라서 사람은 죄를 승리할 수 있는데, 죄에 대한 승리의 선제 조건은 참된 거듭남(회개)라는 복음을 가지고 산다.
악이 유죄가 되는 조건
만일 집안에서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면, 그 고양이는 사람의 발에 자신의 몸을 문지르고 무릅에 올라가서 재롱을 부리기 좋아할 것이다. 훈련을 잘 시키면, 대소변을 가릴 수도 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열려진 문틈을 통하여 고양이가 집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고양이가 비록 잘 길들여져 있다고 할지라도, 고양이의 본성 속에는 야생의 기질이 감추어져 있다. 고양이는 뒷마당에서 쥐를 잡아서 잔인하게 죽였다. 그것도 단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쥐를 가지고 한참 동안 놀다가 서서히 죽인 후에 그것을 물고서 칭찬받기 위하여 주인에게 찾아온 잔혹한 고양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주인은 비록 고양이가 잔혹한 악을 범하였다고 할지라도, 고양이에게 유죄를 선언하고 벌을 줄 수 없다. 왜 그런가? 주인은 비록 고양이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고양이의 뇌 속에는 도덕적인 판단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는 고양이에게 유죄를 선언할 수가 없다.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가 아담과 하와로부터 유전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타락한 본성을 전수받았다고 해서 신생아에게 유죄를 선언하고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을 가할 수 있는가? 신생아가 젖을 달라고 크게 소리내서 운다고 해서 이기적인 죄를 범했다고 정죄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신생아는 악을 행하였지만, 유죄를 선언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생아는 아직 도덕적 판단력이 충분하게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악이 유죄 선언을 받게 되는 조건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판단력(이해력)이 악과 유죄를 구별하는 구분점이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 9:41. 바리새인들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똑같은 본성(육체)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로 인해서 죄인이라는 정죄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지식)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저지른 악에 대하여 정죄를 받았던 것이다. 죄의 문제는 이해와 선택의 문제와 결코 분리시킬 수 없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무지는 악한 행위를 가져올 수 있다. 좀더 잘 알았더라면, 올바르게 행했을 것이지만,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을 죄로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지식은 악을 죄로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이 살았던 타락한 생애나 유전적으로 이어받는 나쁜 본성 때문에 정죄받지 않는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죗된 선택 때문에 정죄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 죗된 선택 때문에 정죄받게 된다. 지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이다.
얼마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확한 복음인가! 죄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거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구원받을 것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소원하신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진정한 뜻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보증하기를,“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신”다 라고 하였다(롬 2:4). 그분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고 계신가? 물론,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12:32). 그분의 사랑은 어떤 정해진 자들에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신다. 그분의 선하심은 모든 영혼을 회개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십자가로 이끌고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부드러운 인도하심과 호소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멸망당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울에게,“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대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실 것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딛 2:11).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는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히브리서 2장 9절은, 예수께서“모든 사람을 위하여”죽음을 맛보셨다고 말한다. 또한“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하셨다(고후 5:18, 영문 성경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모두 구원 받지 못하게 되는 오직 한가지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저항하면서 거절하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에 생기는 변화의 경험
죄는 언제나 두가지 결과를 가지고 오는데, 그것은 악과 정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두가지를 다루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할 경우, 죄인에게 내려진 유죄 선언을 즉시로 제거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죄인에게 내려진 유죄 선언이 제거되면, 죄인에게 내려질 영원한 형벌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회개를 통하여 유죄 선언과 영원한 형벌이 제거될 때에 죄인의 육체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도 함께 제거되는가? 아니다. 죄인이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육체는 고통과 슬픔과 유혹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된다.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육체 속에 숨겨져 있는 타락한 본성은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제거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할 때에 놀라운 변화가 한가지 일어나는데, 그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주님께 드릴 때, 타락한 본성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재창조 해주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바로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본성(육체)의 요구를 거절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으로부터 육체가 죗된 요구를 하고, 밖으로부터 사단이 던지는 유혹이 다가올지라도, 변화된 마음과 의지를 통하여 선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각 개인의 영생과 멸망에 대한 운명을 이미 결정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말할 때에, 죄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변화될 필요가 있는 죄인이다. 모든 사람은 율법 앞에서 어떠한 은혜나 용서도 받을 수 없는 범법자로서 정죄 받는 존재이다. 율법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의로움도 찾을 수 없다. 또한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어떤 능력도 없다. 죄인은 율법의 저주 하에서 정죄받은 상태로 힘없고 무기력하게 있어야만 하다. 그러나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을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 안”에는 이 모든 저주와 정죄로부터 피할 수 있는 변화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가 죄인의 마음 속에 남기는 변화이다.
받기로 선택해야 주어짐
성경은,“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롬 5:18 영문 성경역)다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영혼들을 의롭게 하기 위한 예비책이 마련되었다. 그분의 죽으심은 온 세상을 다 구원하기에 충분하다. 십자가를 통하여, 지극히 합법적인 구원이 영광스런 구속의 경륜으로써“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은, 그것이 개인적으로 인식되고, 개인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각 개인에게 유효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믿음을 전제 조건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경은“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니라”롬 3:24~26.
비록 십자가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해 주었다고 할지라도, 오직“예수 믿는”자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전기 회사가 충분한 전력과 빛을 각 집에 공급해 주고 있지만, 집안에 있는 각 사람이 스위치들을 누르지 않고서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며, 정결케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능력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은혜가 개인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게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상한 갈대
범죄한 인간은 이미 부러졌고, 하챦은 바람에도 또 다시 부러지는 상한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상한 이성과 꺽인 의지를 가지고도 여전히 생각하는 갈대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 상한 갈대 위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을 통하여 이슬처럼 임할 때, 놀랍게도 상한 갈대는 반응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반응하고, 반응할 수 있고, 또 반응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반응하는 인간,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책임이 있는 인간의 참 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죄 때문에 독립할 수 없을만큼 손상되기는 했어도 인간성의 흔적도 없을만큼 파멸되지는 않았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며(사 42:2),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이르기를 원하”셔서(딤전 2:4), “독생자를 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신(요 3:16)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마다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의 계획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이 자신의 운명이 되도록 지금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피해서는 안될 숙명이다. 그대는 어떤 운명을 선택하겠는가?
콜린 스텐디쉬 박사
A.D. 4세기 경, 기독교계는 종교암흑시대를 돌입하면서 깊은 신학적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마리아가 중보자로 등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로서의 위치가 흔들렸으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가르쳐지던 원래의 진리가 거의 사라져갔다.
수많은 종류의 교리들이 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었다. 교회는 여러차례와 회의와 결의문을 통해서 정설을 정립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교회를 점점 더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혼돈 속에서 한사람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으며,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중의 상당 부분이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수립되었다. 슬픈 사실은, 그의 가르침과 신학적 영향력의 그림자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서 수많은 교회들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 과정이 미친 영향
어거스틴은 A.D. 354년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기독교인이었고, 부친은 마니교도였다. 마니교는 3세기경에 마니라는 사람에 의해서 창설되었는데, 이 종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지류로서, 빛과 어두움(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하였다. 즉, 선과 악이 인간의 생애를 함께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스스로 합리화하고 핑계를 댈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단적 신앙의 배경을 가진 부모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다가 20세가 될 무렵에 이태리 밀란에서 비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어렸을 때에 받았던 이교도적 개념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으며, 어린 시절에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렸던 사상이 후에 그의 신학적 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견해는 어거스틴 이후 70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오면서 수많은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을 교육시키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중세기의 교회 안에서 형성된 수많은 신학적 오류들은 거의 모두 어거스틴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그를 추종하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고 확산되었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오류를 받아들인 많은 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세워놓은 오류를 전제로 해서 또 따른 오류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가지 오류가 또 다른 오류를 이끌어 들였다. 한가지 오류를 진리로 입증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예정론이 시작된 배경
이교의 사상에 물들은 어거스틴은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사상,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해서 선과 악 중에 어떤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졌던 이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만 이해했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사상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장면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정론의 시작이 되었다.
태초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당하도록 예정해 놓으셨다는 이론인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도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누가 구원을 얻던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며,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대해서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지정해 놓으셨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도록 지정해 두셨다는 예정론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예정론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오류
어거스틴이 세운 잘못된 견해는 예정론을 만들어 내는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정론의 오류는 논리적으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었다. 즉, 예정론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개념(once saved, always saved)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예정론은 “절대적인 군주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게 된다. 현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죗된 생활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깊은 자기 기만 속에 빠지게 만든다. 예정론은 복음을 전파하는 면에 있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다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궁색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다(디모데전서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인 우리의 죗된 선택과 이기적인 결정으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오류는 죗된 생활을 살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한가지 오류에 대한 믿음이 또 다른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죄에 대한 승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비록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는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단적 견해에 근거를 둔 어거스틴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망상에 불과하다.
자신의 죗된 경험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수립된 신학
어거스틴은 성(sex)을 원죄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주장은 자신의 죗된 생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사생아를 낳음으로써 불법적인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사생활이 경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어거스틴의 생활 속에 있는 이러한 약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죗된 생활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신학적 핑계를 찾도록 유도하였다. 자신의 생애에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원죄의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서 다른 문제에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즉, 태어나기를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죗된 생활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신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나 신학자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이상의 설교와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육과 영 사이에 무서운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이 육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을 때에 생기는 마음의 놀라운 변화 즉, 거듭남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어거스틴,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하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죗된 경험에 맞추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 자체를 죄로 생각하였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죄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죄란 우리가 태어날 때에 이어받는 타락한 본성 자체를 죄라고 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죄란 우리가 태어나는 죗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과 행위로 범하는 불순종을 말하며,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조용한 음성을 거절하면서 선택하는 부도덕한 결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바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승리하고 정복하는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의로운 선택과 의로운 결정을 통해서 말이다.
첫번째 딜레마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어거스틴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셔서 승리의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동일한 육체를 취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생애를 사셨는데, 어거스틴의 생애에는 승리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1.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전혀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억지 논리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신 성육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자가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요.”히 4:15(킹제임스 성경 역).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는 자가 되는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심은 . . .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 히 2:14~18(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혈과 육을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나셨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한 육체를 취하고 태어나셨다는 성육신에 대한 가르침을 뒤집어 엎음으로써, 천주교회를 깊은 암흑 가운데로 이끌어간 무염시태설의 기초를 놓았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몸은 우리 인간들의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몸 역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로 바꾸어야만 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에 기초하여 교회는 점차적으로 무염시태 즉, 성령께서 마리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변화시킨 상태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주장을 교리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육체가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도 인간적인 연약함이 전혀 없는 완전 무결한 상태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진리를 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요일 4:2.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연약한 본성을 가진 몸을 의미한다.
두번째 딜레마
어거스틴이 예수는 인간과는 다른 완전한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세워 놓았지만, 그는 또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이론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는 인류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그리스도의 육체를 인간의 육체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당한 일이 없는 분이 되셨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시험받고 유혹받는 생애와는 전혀 다른 생애를 사셨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인간은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 히 4:15.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이러한 이론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의 모본이 될 수 없으셨으며, 그 결과 인류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셨다. 그리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중보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신학적으로 완전한 논리를 정립하기 위해서, 다른 인간들처럼 유혹을 느낄뿐만 아니라,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짓기도 하는 중보자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인류를 위한 새로운 중보자로 교인들에게 소개하기에 이르렀다(디모데전서 2:5). 나중에는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나가서, 수많은 성인(saints)들을 제정하게 되었으며, 사제들과 신부들에게 중보자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신자들로부터 죄의 고백을 받아서 하나님께 중보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어거스틴의 잘못된 사상과 신학에 기초를 둔 교리의 헛점을 메꾸기 위해서 한번에 한 계단씩 오류에 오류를 더해갈 수 밖에 없었다. 원죄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교회의 신조 때문에 임신이 되는 순간 태아는 영원한 멸망의 정죄를 받게 되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또 하나의 질문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어떻게 하면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교인들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이 “세례(영세)라고 불리우는 의식에 의해서 원죄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의 답변에 뒤이어 또 하나의 질문이 들어 왔는데, 그것은 “세례(영세)받지 않은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참으로 끔직한 것이었는데, “세례(영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서 영원히 타는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세례(영세)를 미처 받기 전에 죽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그러한 답변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중세기는 어린아기의 사망률이 매우 높던 때였다. 자신들의 아기가 영원한 지옥불에서 끝없이 고통당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는 진실하지만 무지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고뇌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즉각적으로 교인들의 고뇌를 해소시킬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연옥”과 “림보”라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발명되게 이르렀다. 연옥은 하늘도 아니며 지옥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지옥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며, 림보는 천당은 아니지만 연옥이나 지옥처럼 불타는 고통은 없는 곳이다. 교회는 이러한 연옥과 림보를 교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제시하는 그러한 해결책으로도 아기를 잃어버린 부모의 아픈 심정을 완전히 달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드디어 “유아 세례”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기로 결정하였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산모의 배 위에 신부가 물을 뿌리면서 이제 유아와 산모가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선언하는 유아 세례야말로 교인들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신학자의 잘못된 사상이 오류에서 오류로 발전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그러한 오류들이 교회의 정식 교리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아퀴나스와 바벌라드 같은 신학자에 의해서 어거스틴의 이론이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6세기 초에 위대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개혁자들이 교회의 부패와 오류에 대해서 대항하였지만, 천년에 걸쳐서 뿌리 깊이 박혀있던 오류의 근원을 송두리채 뽑아내는 일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구교를 대항하여 개신교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어거스틴의 이론은 개신교회 중심부까지 들어와서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루터가 죽고 나서 그의 동료 개혁자인 멜랑톤이 루터 교회를 예정론에서 끌어냈지만, 장로교회를 수립한 요한 칼빈이나 요한 낙스는 예정론을 받아 들였다. 그 후에 감리 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예정론이 거절되고,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오류로서 지적되었지만, 여전히 현대 기독교 안에 이러한 가르침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오류들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거절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거스틴과 그의 후예들이 수립한 거짓 교리들이 소위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파에서도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채택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오늘날 교파가 갖는 의미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어떤 교파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보다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믿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예정론과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십계명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도덕률 폐기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이야말로 교회를 세속적이고 무능력하게 만들어 가는 장본인이다. 누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가? 마지막 시대에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서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이렇게 믿어도 되고 저렇게 믿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너희가 믿음 위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린도후서 13:3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