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마애불이 말하는 것은?
전율을 느꼈던 선운사 마애불과의 조우
마당에 동백꽃이 핀 선운사를 한 바퀴 돈 뒤, 오르막길로 곧장 올라가면 깎아지른 절벽에 조형된 도솔암 마
애불이 나온다. 아, 어느 나라에 간들 이런 부처가 있으랴! 우리는 언제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호남의 질
감, 민중의 정감이 엉킨 황토빛 마애불과 만나게 된다.
절이나 박물관에서 보던 잘 다듬어진 석가모니 불상과 비교해보라. 우리나라 산하에 미륵이 지천으로 널렸지
만, 그러나 황토벽에 무심하게 아무렇게나 그려진 듯, 너무나 소탈한 들꽃 같은 부처, 낮은 현실에 들어온 무명
백성들의 부처, 그 미륵부처와 조우하면 할 말을 잃게 된다.
<나는 처음 이 마애불과 만났을 때 나를 위압해오는 새로운 부처 세계, 그 민초적 민중적 정서에 전율을
느끼고 그 자리에 한 5분 꼼짝을 못하고 서있어야 했다. 아, 어찌 선운사 마애불을 만나지 않고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손화중이 비결을 꺼내다
백제 검단선사(黔丹禪師 : 검은 ‘곰’이고, 단은 ‘檀’이다. 이름으로 볼 때 검단선사는 선불(仙佛 : 전통 신교神敎
와 불교)을 동시에 닦은 인물일 것이다)는 무엇을 하려고, 저기 절벽에다 미륵그림을 새겼는가? 그는 왜 그곳
에 황토빛 민중의 부처를 설하였는가? 그는 미륵하생 신앙이 산촌마다 산재한 돌미륵처럼 민중의 삶속에 들어
오리라 본 것일까?
마애불의 배꼽은 또 언제 만들어졌을까? 검단선사가 만들었을까? 아니면 후대의 소작일까? 거기 배꼽 복장腹
藏에 비결이 감춰져 있는 것은 또 누가 알았을까?
1892년 동학 손화중의 접에서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서 비결서를 꺼낸다. 손화중은 마애불의 배꼽에서 비결
을 꺼낼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손화중은 휘하의 도당들이 꺼내온 비결을 받아들고 그는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송기숙의 <녹두장군>에 나오는 마애불 이야기
송기숙의 <녹두장군>이라는 소설에서, 손화중의 접에서 마애불 비결서를 꺼낼 때 전후 상황을 기록한 모양이
다.
“선운사 석불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어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하며, 비결과 함께 벼
락살도 들어 있으므로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것이었다.
1820년에 전라감사로 왔던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도임한지 얼마 안 된 어느날, 마애불의 배
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사다리를 만들게 하여 직접 올라가서 뚜껑을 쪼아 열어보니 책 한권이 나왔고
, 그 표지에는 ‘이서구 개탁(李書九 開坼: 이서구가 열어본다는 뜻)’이라 씌어 있길래 하도 신기한 일이라 떨리
는 손으로 막 표지를 넘기려는데 해가 쨍쨍 쪼이고 있는 마른 하늘에 느닷없는 날벼락이 치는 바람에, 겁에 질
려서 부리나케 비결을 제자리에 쑤서넣은 다음 그 자리를 회灰로 단단히 봉해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본 것은 ‘이서구 개탁’ 다섯 글자 뿐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서구가 비결을 꺼내려다 실패한 다음부터 이곳에서는 비결을 꺼낼 사람이 동학도 가운데나온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으며, 그 후에는 이 미륵이 얼마전부터 배가 불러지기 시작하는데 그 소리가 사람 소리 같기도
하고 짐승 소리 같기도 하여 예사 때는 무슨 소린지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으나 어쩌다가 바람결에 들리
면 <동학 13주문(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을 외는 소리가 분명하다거니, 이 미륵이 한 밤중에 감쪽같
이 없어졌다가 며칠 만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어디로 갔는지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남원 교룡산
성 꼭대기에 머물다 온다거니 따위였다고 한다.
그 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1년 반 전 임진년(1892년) 8월의 어느 날, 무장현의 대접주인 손화중의 접에
서는 그 비결을 꺼내보자는 말이 나왔으나 모두들 벼락살을 걱정했다.
그러자 오하영이라는 영광 접주가 말하기를 “이서구가 열었을 때 이미 벼락이 쳤으므로 벼락살은 없어졌다”
고 주장하여, 동학도들은 대나무를 엮어서 발판을 만들어 올라가 석불 배꼽을 깨고 비결을 꺼내 갔다고 한다.
이일로 인해 각지의 동학군 수백 명이 무장 현감 조경호에게 잡혀들어가 취조를 당했고, 결국 무장 접주 강경
중, 익산 접주 오지영, 흥덕 접주 고영숙 등 주모자 세 명은 강도 및 역적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아전들을
뇌물로 구워삶은 후 가짜 비결인 <미륵하생경>을 현아에 갖다바치고 모두 빠져나왔으며, 나머지는 태형을 받
고 풀려났다고 한다.”
손화중은 부하들이 가지고 온 비결서를 손에 들고 무엇을 읽었을까? 그는 ‘썩어빠진 세상이 망하고 새 세상이
열리는’ 희망을 본 것일까? 아니면 동학도들이 꺼꾸러지는 패망의 예언을 읽었을까? 아니면 ‘다시 개벽’된 세
상에 미륵이 임재하는 도참을 읽은 것일까?
손화중은 그곳에서 비결을 꺼낸 뒤 “후천개벽의 시대가 왔으며, 머지않아 미륵이 내려와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손화중의 동학과 증산도의 참동학
동학은 사회적으로 보면 ‘농민전쟁’이지만, 그 속에 들어가면 ‘천주’ ‘상제’로부터 시작하는 종교운동이었다.
<동경대전> 첫머리에 나오는 대로, 최수운은 ‘상제’로부터 도통 연원하여 ‘시천주侍天主’ 동학을 창도한다.
그러나 2, 3대 교주 최시형과 손병희는 ‘사인여천’, ‘인내천’ 등의 교리로 동학의 물꼬를 엉뚱한 데로 돌려버
린다.
전봉준의 갑오농민전쟁이 벌어지자, 동학도들은 최수운이 내려준 13자 주문을 읽으며 죽장 들고 탄환 속으로
뛰어 들어가다 수없이 죽어갔다.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하느님 나라 건설한다’는 주문을 외치며...
이때 손화중은 어디에 서있었을까요? 손화중의 동학은 어떤 것일까? 손화중은 ‘상놈을 양반 만들어주고자’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동학전쟁에 참여한 것일까? 그는 비결의 풍문에 나오는, ‘미륵이 내려와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일까? 그는 동학도들을 어떻게 탄환 속으로 내몰 수 있었
을까? 그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동학이 패전한 뒤, 약 6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증산상제님께서 불쌍한 동학 영령들을 해원시켜
주고자 여러 천지공사를 보셨다. 또 동학도들의 내밀한 꿈이었던 ‘하느님 나라 건설’의 서원도 천지공사에 의
해 성취되도록 해주셨다.
손화중의 동학은 겉으로는 외세와 싸움이었지만, 내면으로는 ‘하느님 나라 건설’의 꿈을 우리 역사에 심고 풀
어놓은 동학이었다. 갑오 때 무명 백성들이 품었던 그 숭고한 꿈은 천지공사와 함께 실현이 되는데, 이러한 이
유로 증산상제님의 도가 ‘참동학’이라 이름 불리는 것이다.
검단선사는 선운사 마애불을 창건하여 무엇을 남기고자 한 것일까? 누가 마애불의 배꼽에 복장을 만들어 비
결을 전했을까? 동학 접주 손화중은 비결을 손에 들고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길고 긴 세월동안 전해졌던 선
운사 마애불의 묵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참동학’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