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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기쁨의 싹을 틔우는 집'https://blog.naver.com/gotqlc10/175376041
작가의 눈 18호 (2013년) / 전북작가회의
- 특집 <전북 아동문학>
나는 늘 각오하듯 내게 타이른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련되고 정제된 동시를 쓰고,
무엇보다 삶의 진정성과 감동을
아동청소년들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다소 어설픈 내 글이 어딘가에 부딪히고 깨지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쓰고,
작가끼리 돌려 읽는 작품 말고
일반 독자들이 찾아 읽는 글을 쓰고,
새로운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상상의 날개 밑에
실험의 알, 긍정의 알, 포용의 알을
쉼 없이 품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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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는 나의 ‘밥 그릇’
글 박예분
1. 인터넷에서 놀다가
내가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십여 년 전이다. 결혼 후, 울안에 갇혀서 아이 셋 키우느라 옴짝달싹 못하던 때였다. 바느질 잘하고 감칠맛 나게 수필 잘 쓰는 선배가 인터넷 M문학 사이트를 소개해 줬다. 십년 째 방콕형(방에 콕 쳐 박혀 사는 생활)인간이던 나를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세상을 향한 소통의 창을 마련해준 것이다.
인터넷을 잘 모르던 나는 더듬더듬 주소를 치고 들어가 보았다. 세상천지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그야말로 작가군단이었다. 작가마다 모두 자신의 창작방을(게시판)을 하나 씩 갖고 있었고, 작가 지망생에서 일반인까지 마치 오래된 가족 같은 분위기로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다 재워놓고, 늦저녁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시간에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다. 한동안 작가들의 글을 훑어보며 눈요기하는 것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한두 줄짜리 댓글을 달기 시작했고, 사이트 운영자로부터 게시판을 하나 얻게 되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그간 외적 활동이 없었던 나를 덜 외롭게 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글을 통해 언니동생하며 서로 마음을 헤아려주고, 세상 돌아가는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여간 즐겁지 않았다. 그렇게 두해 정도 신나게 놀았던 것 같다.
나는 문학소녀도 아니었고, 국문학이나 문예창작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 당시 내게 문학은 절실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과 사회 이슈거리나 글을 나누며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내 생각을 시원하게 쏟아내고 깔깔대는 것으로 족했다. 또한 비공개 게시판을 만들어 놓고 일기형식의 글을 쓰기도 했다. IMF이후, 어려워진 내 삶의 스트레스를 덜기 위한 일종의 배설이었고 숨구멍이었다.
그러다가 내 맘대로 시, 수필,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무턱대고 써대기 시작했다. 왜 쓰는지, 무엇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써서 올렸다. 사람들이 내 글에 호응해 주는 댓글을 보고 신바람이 났던 것 같다. 소설가들과 함께 장편소설 챕터마다 순서를 정해 이어쓰기를 하면서 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작가로부터 “님은 왜 그렇게 글을 많이 쓰세요? 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나는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하여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꿈이라니. 내게 꿈이라는 게 있었던가? 나는 그때 서른여덟 살의 평범한 수다쟁이 가정주부였을 뿐이다. 그의 질문에 회피할 수 없어 그만 “내 꿈은 작가”라고 대답해버렸다. 한 번도 꿈꾸거나 고민해보지 않던 직업이다.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간답게 그곳에서 놀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리 대답하고 만 것이다.
그는 곧장 내 안부게시판에 열쇠를 채우고 답장을 남겼다. “그 동안 님의 글을 지켜봤는데, 상당히 이야기꾼 기질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님이 작가가 되고 싶으면, 지금까지 인터넷에 자랑삼아 올린 글들을 모두 내리시고, 앞으로 원고료 받는 작가가 되길 바랍니다.”라며 냉정한 어투로 일침을 놓았다. 나는 별안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했다. 그 순간 자존심이 상해 얼마나 황당하고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당장 그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나는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꿀꺽 삼켜야했다. 그는 베스트셀러를 낼만큼 글 잘 쓰는 소설가라는 걸 알게 되었으므로. 나는 곧 M사이트 운영자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내가 올린 모든 글을 삭제해 달라고 요구했다. 댓글이 많이 달린 글은 내 맘대로 그 글을 내리지 못하도록 권한 설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의심 없이 자판을 다다닥 두드려대던 손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2. 아동문학이 뭔데요?
배설에 지나지 않았던 내 글쓰기가 문학을 흉내 내기까지 남몰래 퍽 가슴앓이를 해댔다. 어디서 창작 강의를 들을 형편도 못되었고 그럴 만한 정보도 없었다. 그즈음 M사이트 운영자이자 동화작가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아동문학 사이트 ‘안데르센 창작교실’을 개설했으니 놀러오라며 “문학은 밥 굶기 십상이지만, 아동문학은 충분히 밥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불쑥 “아동문학이 뭔데요?”하고 그에게 물었더니, 동화와 동시를 일컬어 말한다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때 ‘아동문학’이란 용어를 새롭게 알았다.
그 후 틈나는 대로 ‘안데르센 창작교실’을 기웃거렸다. 좋은 동화와 동시자료가 많았으나, 글이 긴 동화보다 짧은 동시를 주로 읽었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느긋하게 앉아서 긴 글을 읽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시시때때로 엄마 손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는 동화보다 즉각적인 감흥을 자아낼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김용택 시인의 동시「콩, 너는 죽었다」를 읽으며 그 재미와 생동감에 무릎을 치며 즐거워했다. 또한 임길택 시인이 묶은 어린이시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를 읽고, 소외계층의 어린이 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서정시도 좋았지만, 아이들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낸 생활 동시에 더 호감이 갔다.
동시를 읽다보니, 내가 어릴 때 즐겨 불렀던 동요를 하나둘 씩 떠올리며 읊조리게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까마득히 잊고 지냈건만 생각나는 대로 흥얼거려보니 스무 곡이 넘었다. 그 이유는 동요가 갖고 있는 반복적인 리듬감과 즐거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동시에 더욱 흥미를 느꼈고, 내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하찮은 사물에 대한 존귀함과 뭐든 다르게 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고, 사물에 대한 물활론적인 사고는 물론이고, 어린이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개성을 존중하려 노력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눈길을 주고, 자연과 상생하는 자연친화적인 길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그것이 내 몸에 좋은 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동시는 참 쉬워서 금방 쓸 줄 알았는데 시보다 더욱 어려웠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만 끓어서는 안 되었다. 아기가 엄마 품속으로 파고들듯, 나 또한 아이들의 세계 속으로 파고 들어야했다. 말 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과 눈높이를 맞춘답시고 유치한 언어를 조합하기도 하고, 억지스러울 정도로 작위적인 동시를 쓰기도 했다. 또한 문학성을 배제한 어린이들의 입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동시를 쓰기도 했고, 밀도 있게 구성할 줄 몰라서 설명하듯 늘어놓는 바람에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동시도 썼고, 다분히 아이들을 가르치려 드는 어른의 근성을 버리지 못해 어설프기 짝 없는 동시를 쓰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 더듬더듬 터득해가며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도전했다. 그것도 무식 하리 만큼 용감한 선택이었다. 당선되리라는 생각보다, 떨어질 바엔 차라리 중앙지에 응모해서 떨어지면 자존심이 덜 상할 것 같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지없이 낙선소식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다른 신문사와 달리 동화나 동시 중 한 장르만 당선시킨다는 것을 몰랐다. 물론 실력이 없어 떨어졌지만, 그만큼 정보력 없이 무모하게 덤볐다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그때 응모했던 내 동시 ‘나는 홍시야’가 최종심에 걸려 떨어졌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열정만 가지고 도전했던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그 당시 나는 일을 갖는 게 절실한 문제였다. IMF 후유증이 컸다. 밀린 공과금도 내야하고, 쑥쑥 자라는 내 아이들까지 키워야했다. 말하자면, 이력서에 제시 할 스펙이 필요했다. 신춘문예는 떨어졌지만 우선 문예지 등단이라도 해야 했다. 누구에게 물어볼 것 없이 나는 인터넷 검색창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아동문예잡지 중에《아동문예》에 무작정 동시 20편을 뽑아서 보냈다. 문삼석 선생님의 심사로, 동시 ‘하늘의 별 따기’와 ‘나는 알지요’ 2편이 당선되어 그해 5월1일 아동문예문학상을 받았다. ‘동심으로 살면 세상이 아름다워집니다’라는 표어를 내 건 제2회 아동문학의 날, 나는 서울 강남의 반포초등학교 강당에서 ‘아동문예문학상’을 받으며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난생 처음 교과서에 나오는 어효선, 유경환, 신현득 선생님을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시인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이미 고인이 된 유경환 작가가 일부러 나를 손짓하여 부르더니 “앞으로 좋은 동시집 한 권을 내고 싶으면, 다른 시인의 동시집 삼백 권을 읽고 나서 쓰세요,”라고 조용히 다독이듯 말해 주었다. 그만큼 새롭게 써야한다는 말이다. 작가에게 두고두고 얼마나 값진 말인가!
그리고 전북지역의 허호석 선생으로부터 아동문예문학상 받음을 축하한다는 친필편지를 받고, 그분의 안내로 전북아동문학회에 입회(2003년 5월)하게 되었다. 전북지역에 어떤 작가들이 어떤 글을 쓰는지도 모른 채 어른들과 눈이 마주치면 마지못해 인사하기 바빴다. 뒤돌아서면 누가 누군지 기억하기 어려웠고 그것이 나의 한계였다.
나는 아동문예문학상 받은 것을 계기로 집 근처 ‘인후문화의 집’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글쓰기지도를 시작했다. 그해 가을 전국을 휩쓴 태풍 ‘매미’를 보고, 피해 입은 농어민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동시 ‘솟대’를 써서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2004년)에 재도전하여 당선되었다. 그때 심사를 맡았던 이준관 시인을 시상식장에서 처음 보았는데, 목각으로 된 하회탈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활짝 웃는 하회탈과 미소 띤 시인의 얼굴이 어쩜 그리 닮았던지, 나중에 메일 주소를 받고 보니 영문자로 ‘함박눈’이었다. 이미지가 일맥상통했다.
그 당시 이준관 시인(현재 한국동시문학회 회장)이 십여 권의 동시집과 DVD가 담긴 동시낭송집 몇 권을 무겁게 들고 나왔다. 그걸 내게 몽땅 선물하면서 “외도하지 말고, 끝까지 동시를 써 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물론 동화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그 어떤 글을 쓰게 되더라도 ‘동시’는 놓지 말고 꾸준히 쓰라는 말이었다. 상도 타고 상금까지 탔으니, 나는 기분이 좋아서 감사의 표시로 이십 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드렸는데, 이준관 시인은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끝내 뿌리치셨다. 나는 그때 체구 작은 그분의 뒷모습이 그렇게 커 보일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먼 훗날 내가 펜을 잡지 못하고, 자판을 두드리지 못하는 날까지 그분과의 약속을 꼭 지키리라, 그래서 그분이 나를 뽑아주신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도록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맘먹었다.
이후 나는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김자연 작가의 권유로 어떨 결에 전북작가회의에 입회(2005년 1월)하였다. 전북작가회의 정기총회 자리였고, 그 자리엔 내 옆에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자 정재식 작가도 함께 입회하는 자리였다. 그때 김용택 시인이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신입회원 소개 할 때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문병학 시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나 작가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용인즉, 정치적 목적을 두고 입회하는 어떤 사람을 막기 위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정재식 작가와 나는 그 자리가 바늘방석처럼 어려워서 회의 중간 쉬는 시간에 나와 버렸다. 그러니까 전북작가회의 입회 첫걸음에 밥도 못 얻어먹고 나온 셈이다.
전북작가회의에 들어와 보니, 젊은 작가들의 모임이 따로 있어서 매월 작품 합평회를 갖고 토론까지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창작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때 내가 마흔두 살이었는데, 젊은 작가였던 누군가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마흔한 살까지만 젊은 작가모임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되게 서러웠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나이만 주워 먹었나 싶어서 속도 많이 상했다. 전북아동문학회에서는 아가씨 축에 들만큼 어린나이인데 말이다. 그만큼 전북작가회의는 내게 다소 긴장감을 주었고, 내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담금질하게 만들었다.
3. 동시는 나의 ‘밥 그릇’
동시는 내게 줄곧 ‘따뜻한 밥 그릇’이 되어 주었다. 동시로 등단해서 일명 생계형 밥벌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후문화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일간지 <어린이동아>에 2005년 3월부터 <박예분 선생님의 글쓰기교실>을 2년 6개월 동안 연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서기관 아이북랜드에 <행복한 독서논술>칼럼을 2년 넘게 연재하였고, 그 덕분에 자잘한 원고청탁과 작은 수업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동시를 쓰면서 한 가지 가장 아쉬운 점은 독자의 수효가 동화에 비해 형편없이 적다는 것이다. IMF이후, 그림책 시장이 전국적으로 활성화되고 독서활동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부터 일선학교나 독서기관에서는 동화로 독후활동거리를 제공하는 게 당연시 되었다. 실제로 내가 동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러 보았는데, 동화는 아동문학 코너 정면에 몇 개의 서가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반면에 동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직원한테 문의한 결과, 화장실 가는 쪽으로 외진 곳에 두 개의 서가만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새로 나온 동시집보다 해묵은 동시집들이 대부분이어서 너무 실망스러웠다. 동시가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에 내가 과연 동시 쓰는 작가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막막하기도 했다.
나는 전북지역 두 개의 문학회에 소속되었으나, 별다르게 창작 지도를 받거나 아동문학을 함께 나눌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친구도 없고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고 오로지 나 하나 밖에 없었다. 그 부분이 가장 외롭고 힘들었다. 다들 제 각각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 바빴으므로, 더군다나 나는 편찮으신 시모까지 모시고 살았으니 더더욱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편한 숨 쉬며 살아가기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 혼자서 가슴으로 터득해가며 무딘 더듬이로 원고를 썼다.
글을 쓰면서 내게 속삭였다. 작가군단 주소록에 이름 석 자 올려놓고 마는 작가로 남지 말고, 입을 열어 자신을 구차하게 설명하는 작가도 되지 말고, 작품으로 남는 그런 작가가 되어야한다고 세뇌시켰다. 그리고 부지런히 아동문학의 기틀을 다져, 나처럼 외로운 후배가 생기지 않도록 나중에 ‘아동문학창작공간’을 마련하여 적극지원할 수 있도록 그 문을 활짝 열어두기를 소망하였다.
그즈음 한국동시문학회에서 ‘동시읽는어머니모임’을 창립하였다(2004년). 전국에 동시인들이 자발적으로 지부를 발족하여 동시의 저변확대에 힘쓰고 있었다. 나도 전주에 지부를 두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혼자서 감당하기 벅차서 감히 엄두를 못 냈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가슴으로 낳은 내 새끼들이 세상 밝은 빛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했다. 동시를 낳기만 하고,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부모는 되기 싫었다. 어떻게든 이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좋은 동시들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때 전북아동문학회 창단 멤버인 윤이현 작가가 양지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였다. 나는 윤이현 작가에게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동시읽는모임 전주지부‘를 함께 끌어가 보자고 제의했다. 윤이현 작가는 정말 잘 된 일이라며 기뻐했고, 그해 7월에 약칭 ’전주동시모’를 발족하여(2005년) 윤이현 작가를 전주지부장으로 추대하고, 내가 팀 리더를 맡았다.
이후 매월 첫째 주 목요일 오전에 ‘인후 문화의 집’에서 학부모들과 함께 좋은 동시를 읽으며, 잃어버린 동심을 회복하고,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지켜주는 동심의 씨앗을 나누었다. 매해 한국동시문학회 세미나 때, 전국 동시읽는모임(약칭 ‘동시모’) 회원들도 함께 만나서 ‘전국동시모 대회’를 열고 있다. 그렇게 동시는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며 어른 독자들까지 확보하였고, 지금은 전주동시모가 ‘동시읽는모임 전북지부’로 확대되었다. 현재는 내가 ‘전북지부장’을 맡고 있으며, ‘가족과 함께하는 동시화대회’ 및 ‘가족 동시 낭송회’를 진행하고 있다.
2010년 여름, 전주동시모에서 한국동시문학회(회장 이상교)와 전국 동시모 회원을 초청하여, 한옥마을 문학기행 및 전국동시모 대회를 개최하였고, 전주시민들에게 작가의 사인이 담긴 동시집을 나눠주었다. 멀리 미국에서 달려 온 작가부터 교과서 속 시인들까지 대거 참여하여 ‘동학혁명기념관’에서 전주시민과 함께 하는 동시 낭독회를 가졌다. 그때 전북작가회의 회장 이병천 작가와 전주문화재단 이사 이종민 작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전주시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으나 쌍무지개 뜰 만큼 기분 좋은 날이었고, 전국의 동시인들이 예향의 도시 전주한옥마을에 안겨 1박 2일 동안 한스타일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동심으로 교류하였다.
무엇보다 동시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도록 무언의 힘을 주었고, 내게 문학에 대한 새로운 꿈과 희망을 주었다. 또한 아동문학은 창작기능이 발달연령에 따라 세분화 되어서 창작과정이 쉽지 않다. 이 부분을 커버하고 강화하기 위해 나는 시모님이 돌아가신 이듬해부터, 3년 동안 학부생처럼 ‘아동학’을 공부했다. 동시는 현실적 압박감에 쓰러질 것 같은 나를 이처럼 벌떡 일으켜 세워주는 ‘힘센 밥그릇’이 되어주었다. 문광부와 한국도서관협회 후원으로 최명희문학관 파견작가(2009년~2010년)로 선정, 인후시립도서관(2011년)파견작가로 선정되어 동시로 문학 강연을 하는 동안 내 가슴은 풍요로웠다. 또한 전주 mbc 방송국 <여성시대>에서 매주 일요일(2009년 4월부터~ 현재)에 좋은 동시 3편씩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을 읽고 어른인 우리가 살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나는 동시로 기초적인 문장 강화를 한 덕분에, 2009년부터 여러 군데 출판사로부터 그림책 원고 청탁을 받고 비교적 수월하게 쓸 수 있었다. 이후, 그림책 기획 시리즈를 다수 쓰다 보니, 거기에 자연스럽게 살을 붙여 단편동화를 쓰게 되었다. 작년 겨울과 올 봄엔 장편 원고를 청탁 받아, 올해 역사장편 동화책 『두루미를 품은 청자』, 『삼족오를 타고 고구려로』(2012, 대교출판사)두 권을 출간하였다. 또한 2007년도부터 전북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할 때, 일본 해저 탄광을 취재하여 우리 역사의 뼈아픈 이야기를 아동청소년 역사논픽션으로 재구성하였다. 어쩌면 역사의 비화로 묻힐 뻔했던 이야기를 『뿔난 바다』(2008년, 청개구리)로 출간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다.
나는 문학이 뭔지도 모르던 때, 일면식도 없던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듣고 그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출간한 책 30여권 모두 출판사로부터 인세와 원고료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다. 첫 동시집 『햇덩이 달덩이 빵 한 덩이 』(2007년, 청개구리)는 전북 문예진흥기금을 받아 출간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추천되어 전국 도서관에 보급되었으며, 전북아동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두 번째 동시집 『엄마의 지갑에는』(2010년, 신아출판사)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2008년) 1,200만 원을 받아 출간하였다. 첫 동화 『이야기 할머니』(2012년, 신아출판사)도 전북문예진흥기금을 받아서 출간했다. 동시는 내게 문학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내 삶을 이어주는 ‘든든한 밥 그릇’이 되었다.
또한 되도록 지역에 관련된 글을 쓰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최기우 작가의 말을 새겨 듣고, 경기전을 배경으로 ‘경기전 나무거북이’와 이목대 비각 앞 느티나무에서 본 매미허물을 소재로 동시 ‘매미 허물’을 썼고, 인후동 안골 사거리의 노점상을 보고 동시 ‘종이상자집’을 써서 먹고 사는데 적잖은 소출을 거두었다.
나는 늘 각오하듯 내게 타이른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련되고 정제된 동시를 쓰고, 무엇보다 삶의 진정성과 감동을 아동청소년들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다소 어설픈 내 글이 어딘가에 부딪히고 깨지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쓰고, 작가끼리 돌려 읽는 작품 말고 일반 독자들이 찾아 읽는 글을 쓰고, 새로운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상상의 날개 밑에 실험의 알, 긍정의 알, 포용의 알을 쉼 없이 품자고 다짐한다.
나는 어딜 가나 비주류(非酒類)다! 술은 못 마시지만, 내가 얻은 문학의 ‘밥 그릇’을 누구든지 함께 따뜻하게 나눌 수는 있다. 거기에 어떤 의미를 더해 갈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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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분 약력
전북대학교에서 아동학을, 우석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2003년 동시 「하늘의 별따기」 외 1편으로 아동문예문학상을 받고,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솟대」가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동시집 『안녕, 햄스터』 『엄마의 지갑에는』 『햇덩이 달덩이 빵 한 덩이』를 냈고, 동화 『줄탁이』 『부엉이 방귀를 찾아라』 『이야기 할머니』 외 다수, 그림책 『우리 형』 『피아골 아기고래』 『달이의 신랑감은 누구일까?』 외 다수를 냈다.
전북아동문학상,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2회), 아르코 유망작갸선정, 우수문학도서 선정, 세종나눔도서 선정, 올해의 좋은 동시집 수상(2회), 서울시교육청 권장도서, 수원시 희망글판 선정(나무야 나무야) 등등.
전북아동문학회 회장 및 한국동시문학회 지역부회장 역임, 현재 전북동시문학회(회장), 스토리창작지원센터(대표)를 운영하며 교육청 교사연수 및 도서관과 교육문화회관과 협업하며 동시, 동화, 그림책, 디카시 등 창작 강의와 그에 따른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출간을 돕고 작가양성에 힘쓰고 있다.
첫댓글 이 글을 통해 박에분 선생님의 문학 인생 일대기를 알게되었네요.
남다른 각오로 후배를 양성하시는 의지를 알게 되어 감동이예요.
건강과 건필을 함께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