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07/ by. 얼음빙수/
같은 반이지만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친구가
도경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이름은 김태형이었다.
“경수야, 있지. 이번 여름방학 때 왜 보충 안 하는지 물어봐도 돼?”
“무척 조심스럽구나, 태형아. 그냥이라고 대답하면 실망할 거니.”
“아닌데? 내가 너한테 왜 실망해.”
“그럼 바늘망해이~맨”
우지호가 철모르고 나댔다.
도경수의 불쾌지수가 치솟았다.
“야, 지코. 이거 경수랑 나랑 첫 대환데 네가 끼어들어서 이상한 말하면 어떡해. 나는 다시 말할 수도 없는데. 이미 말해서 ㅠㅗㅠ”
“뭐라고? 말을 좀 조리 있게 해봐. 라잌 조리퐁!
그나저나 태태, 지금 ㅗ 날리면서 우는 거야?
나 엿먹으라고? 마치 가락엿!”
우지호는 자신이 고등래퍼라는 사실을 커밍아웃한 이후
일상에서 라임을 숨기지 않았다.
도가 지나친 우지호의 언어유희를 도(경수)가 지나쳤다.
“너 때문에 경수 갔잖아. 꼭 할 말이 있었는데.......”
“나한테 대신하면 안 되는 거야? 태태? 태태태태태탤미.”
아침부터 아주 지랄이었다.
/식물인간/ 07/ by. 얼음빙수/
6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성적표를 받자마자 분쇄기처럼 갈아버린 김성규가 큰 소리로 절규했다.
“이건 음모야.”
“음모오오오오오오~”
김준호가 소 울음소리를 냈다.
방금의 성대모사를 들은 모두가 김준호를 죽이고 싶어했다.
도경수는 김준호의 유머에 취향을 저격당했다.
도경수는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웃음을 참았다.
지금 이 상황에 웃으면 주목받는다.
“김준호, 기분 좋아?”
“야, 창을 열어 날씨를 봐라. 좋겠나.”
날씨가 눈부시게 화창했다.
“난 저런 날씨가 제일 싫더라.”
김준호가 능구렁이같이 말했다.
“그래. 준호는 공부를 잘하니까.”
김준호는 국영수 123 이라는 준수한 등급을 받았지만,
“그럼 뭐하냐. 무조건 지거국 가라는데.”
여전히 서울에 있는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준호네 부모님은 준호를 물가에 내놓기 싫으신가 보다.”
“거기가 왜 물가야.”
한강은 너무 큰 물이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어린애냐?”
스물이라고 어른인가.
김준호는 남몰래 한숨을 삼키려다 용트림을 하고 말았다.
친구들의 김준호 사냥이 시작됐다.
/식물인간/ 07/ by. 얼음빙수/
장성규 선생님이 도경수를 교무실로 불렀다.
도경수는 다시 돌아온 상담순서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놀랍진 않았지만 어색한 건 여전했다.
“경수야, 이제 3학년 1학기가 다 끝나서 수시성적이 마감되는데 원서는 어디 내고 싶은지 생각해봤니? 선생님에게 자유롭게 얘기해주렴. 아주 편한 마음으로.”
생각은 해봤지만, 도경수가 조금이라도 생소한 도전을 하려 치면
뇌 한구석을 차지한 현실이 따끔하게 지적해왔다.
너 돈 있어? 너 그거 잘할 자신 있어?
낯선 데 던져져서 잘살 수 있어?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그래. 말해봐, 경수.”
“말은 못해요.”
“그래? 핳핳. 그렇지. 생각과 말은 별개지. 생각하는 바를 전부 다 말로 뱉어내는 사람은 없어. 경수는 아주 신중한 친구니까 더 그럴 거야. 경수가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나 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경수야. 선생님은 기다릴 수 있어. 경수는 야자 안 하지? 선생님은 오늘 야자감독인데. 그럼 이따 남아서 천천히 상담해보자. 선생님은 널 포기하지 않아. 네가 너를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 오늘은 뭐라도 건져보는 거야. 떡밥은 경수의 호불호고, 건질 물고기는 대학이란다. 콜? 경수야, 콜? 이럴 땐 콜이라고 해주는 거야. 콜?”
장성규 선생님은 도경수 화법의 매력을 잘 알았다.
그러나 쉽게 적응되지 않아 매번 당황했다.
'역시 성규쌤. 자상해. 마음이 따뜻해져버렸어.'
“그럼 이따 다시 올게요.”
도경수는 장성규 선생님에게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돌아섰다.
앉았던 의자에 고마움을 남겨두고.
/식물인간/ 07/ by. 얼음빙수/
도경수는 야자를 하지 않는다.
야자는 ‘야간 자율학습’이 아닌 ‘야간 자기주도학습’의 준말로,
참여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야자를 빼려면 반드시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도경수의 부모님은 도경수 학업성적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알아서 잘하겠지. 경수는 혼자서도 잘하지. 그저 그렇게 믿었다.
도경수는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는 아이도 아니었기에
담임 선생님 역시 도경수를 믿고 야자를 빼줬다.
조용한 아이는 공부를 잘 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이럴 땐 유용했다.
사실이 드러났을 땐 차가운 시선만이 돌아와도.
세상에 호가 없고 불호만 가득한 도경수는
이번 상담에도 건진 대학이 없었다.
여름이라 해가 늦게까지 도경수를 기다려줬건만
끝내 깜깜한 밤이 왔다.
도경수는 집에 가는 길에 사람은 없겠네, 하고 생각했다.
집으로 가려는 도경수를 누군가 불러세웠다.
아침에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김태형이었다.
“오늘은 집에 안 갔네?”
김태형은 야자를 하는 모양이었다.
“응. 상담 때문에.”
도경수와 김태형이 복도 끝 창문 앞에 섰다.
“아까 아침에는 놀랐지? 어. 경수 너랑은 말을 한 번도 안 해본 거 같아서. 너는 아무하고나 웃긴 대화 잘하면서 같이 놀지는 않더라. 나는 너랑 대화도 하고 놀기도 하고 싶었어. 경수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김태형은 말을 아주 열심히 했다.
“그래? 날 제대로 봤네. 감시한 거니?”
“응. 너한테 우리 할아버지네 집 가자고 말하고 싶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김태형은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 하려고 4개월간 나를 쳐다봤어?”
“사실은 작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땐 내가 망설였어. 이젠 말할게. 경수야, 이번 여름방학 때 보충수업 안 하면 나랑 같이 할아버지 집에 가자.”
도경수는 김태형의 언어세계가 마음에 들었다.
“음.......”
도경수는 순간 흔들린 자신이 어이없었다.
‘밤이라 그런가?’
“반딧불이 보여줄게.”
김태형이 청정지역 자생곤충으로 도경수를 유혹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자두농장 해. 와서 일손을 도우라고 하시는데 나는 너랑 가고 싶어.”
김태형이 제철과일의 나무가 가득한 힐링캠프로 도경수를 초대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도경수와 김준면이 대화를 나눴던 창문 앞이었다.
‘장소 때문인가.’
“반딧불이는 저기 저 별보다 빛난다고!”
도경수가 김태형이 가리킨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저건 인공위성이야.”
“별같이 잘 만들었네.”
도경수는 방금의 말을 듣자마자 김태형을 따라가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생각했다.
“콜이야.”
밤과 창문과 김태형이 만들어 낸 매직 오! 매직!
“우와! 고마워!”
도경수야말로.
“그럼 내일 봐.”
도경수가 창문 앞에 고마운 마음을 흘리고 집으로 향했다.
“경수야, 잘 가~”
내일 모레면 방학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