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符都誌 부도지
現存 2017.09.27
符都誌 부도지
제1장
麻姑城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다. 天符를 받들어 선천을 계승하였다. 城 중의 四方에 네명의 天人이 있어 管을 쌓아놓고 音을 만드니 첫째는 黃穹氏요, 둘째는 白巢氏요, 셋째는 靑穹氏요, 넷째는 黑巢氏였다. 두 穹氏의 어머니는 穹姬氏요, 두 巢氏의 어머니는 巢姬氏였다. 穹姬와 巢姬는 모두 麻姑의 딸이었다. 麻姑는 朕世에 태어나 喜怒의 感情이 없으므로 先天을 男子로, 後天을 女子로 하여 배우자 없이 穹姬와 巢姬를 낳았다. 穹姬와 巢姬 역시 先天과 後天의 情을 받아 결혼하지 아니하고 두 天人과 두 天女를 낳았다. 合하여 네 天人과 네 天女였다.
제2장
先天時代에 麻姑大城은 實達城위에 虛達城과 나란히 있었다. 처음에는 햇볕만이 따뜻하게 내려 쪼일 뿐 눈에 보이는 物體라고는 없었다. 오직 8呂의 音만이 하늘에서 들려오니 實達城과 虛達城이 모두 이 音에서 나왔으며, 麻姑大城과 麻姑 또한 이 音에서 나왔다. 이것이 朕世다. 朕世 이전에 律呂가 몇 번 부활하여 별들이 출현하였다. 朕世가 몇 번 종말을 맞이할 때, 麻姑가 穹姬와 巢姬를 낳아 두 딸에게 五音七調의 音節을 맡아보게 하였다.
城에서 地乳가 처음으로 나오니, 穹姬와 巢姬가 또 네 天人과 네 天女를 낳아 地乳를 먹여 그들을 기르고, 네 天女에게는 呂, 네 天人에게는 律을 맡아보게 하였다.
제3장
後天의 運이 열렸다. 律呂가 다시 復活하여 곧 響象을 이루니, 聲과 音이 섞인 것이었다. 麻姑가 實達大城을 끌어당겨 天水의 지역에 떨어뜨리니 實達大城의 기운이 상승하여 水雲의 위를 덮고, 實達의 몸체가 평평하게 열려 물 가운데에 땅이 생겼다. 땅과 바다가 나란히 늘어서고 山川이 넓게 뻗었다. 이에 天水의 地域이 變하여 육지가 되고, 또 여러 차례 변하여 육지가 되고, 또 여러 차례 변하여 水域과 地界가 다 함께 상하를 바꾸며 돌므로 비로소 曆數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氣ㆍ火ㆍ水ㆍ土가 서로 섞여 빛이 낮과 밤, 그리고 四季節을 구분하고 풀과 짐승을 살지게 길러내니, 모든 땅에 일이 많아졌다.
이에 네 天人이 萬物의 本音을 나누어 관장하니, 土를 맡은 자는 黃이 되고 水를 맡은 자는 靑이 되어 각각 穹을 만들어 직책을 수호하였으며, 氣를 맡은 자는 白이 되고 火를 맡은 자는 黑이 되어 각각 巢를 만들어 직책을 지키니, 이로 인하여 姓氏가 되었다.
이로부터 氣와 火가 서로 밀어 하늘에는 찬 기운이 없고 水와 土가 感應하여 땅에는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音象이 위에 있어 언제나 비춰주고 響象이 아래에 있어 듣기를 고르게 해주는 까닭이었다.
제4장
이 때에 本音을 맡아서 다스리는 자가 비록 여덟 사람이었으나 響象을 바르게 밝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만물이 잠깐 사이에 태어났다가 잠깐 사이에 없어지며 調節이 되지 않았다. 麻姑가 곧 네 天人과 네 天女에게 명하여 겨드랑이를 열어 出産하였다. 이에 네 天人이 네 天女와 結婚하여 각각 三男 三女를 낳았다. 이들이 地上에 처음으로 나타난 人間의 始祖였다.
그 男女가 서로 結婚하여 몇 대를 거치는 사이에 族屬이 불어나 각각 三千 사람이 되었다. 이로부터 열두 사람의 始祖는 각각 성문을 지키고, 그 나머지 子孫은 響象을 나누어 관리하며 하늘과 땅의 이치를 바르게 밝히니, 비로소 曆數가 조절되었다. 城 안의 모든 사람은 稟性이 純情하여 능히 調和를 알고, 地乳를 마시므로 血氣가 맑았다. 귀에는 烏金이 있어 天音을 모두 듣고, 길을 갈 때는 능히 뛰고 걸을 수 있으므로 오고감이 자유로웠다.
임무를 마치자 金은 變하여 먼지가 되었으나 그 본바탕을 보전하여, 靈魂의 意識이 일어남에 따라 소리를 내지 않고도 능히 말하고, 때에 따라 魄體가 움직여 형상을 감추고도 능히 행동하여 땅 기운 중에 퍼져 살면서 그 壽命이 한이 없었다.
제5장
白巢氏 族의 支巢氏가 여러 사람과 함께 젖을 마시려고 乳泉에 갔는데, 사람은 많고 샘은 작으므로 여러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다섯 차례나 되었다.
곧 돌아와 보금자리에 오르니 배가 고파 어지러워서 쓰러졌다. 귀에서는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하여 五味를 맛보니, 바로 보금자리 난간의 넝쿨에 달린 포도열매였다. 支巢氏는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의 힘 때문이었다.
곧 보금자리의 난간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노래하기를 넓고도 크 도다 천지여! 내 기운이 능가하도다. 이 어찌 道이리요! 포도의 힘이로다. 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支巢氏의 말을 의심하였다. 支巢氏가 “참으로 좋다”고 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포도를 먹으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에 모든 종족에 포도를 먹은 자가 많았다.
제6장
白巢氏의 사람들이 듣고 크게 놀라 곧 禁止하고 지키니, 이는 禁止하지 아니하더라도 스스로 禁止하는 自在律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열매를 먹는 習慣과 守察을 禁止하는 法이 시작되니, 麻姑가 城門을 닫고 水雲의 위를 덮고 있는 實達大城의 氣運을 거두어버렸다.
열매를 먹고사는 사람들은 모두 齒가 생겼으며, 그 침은 뱀의 毒과 같이 되어버렸다. 이는 강제로 다른 生命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守察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눈이 밝아져서 보기를 올빼미와 같이 하니, 이는 사사로이 公律을 훔쳐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의 피와 살이 濁해지고 心氣가 酷毒해져서 마침내 天性을 잃게 되었다. 귀에 있던 烏金이 變하여 달 속에 있는 모래가 되므로 끝내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발은 무겁고 땅은 단단하여 걷되 뛸 수 없었으며, 萬物을 生成하는 元氣(胎精)가 불순하여 짐승처럼 생긴 사람을 많이 낳게 되었다.
사람의 壽命이 早熟하여 그 죽음이 變하여 바뀌지 못하고 썩게 되었으니, 이는 生命의 數가 얽혀 미혹하게 되고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제7장
이에 사람들이 怨望하고 타박하니, 支巢氏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얼굴이 붉어져서 거느린 무리를 이끌고 城을 나가 멀리 가서 숨어버렸다. 또 포도 열매를 먹은 자와 守察을 하지 아니한 자 역시 모두 城을 나가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가니, 黃穹氏가 그들의 정상을 불쌍하게 여겨 고별하여 말하기를, “여러분의 미혹함이 심히 커서 본 바탕이 변이 한 고로 어찌할 수 없이 城 안에서 같이 살 수 없게 되었오. 그러나 스스로 修證하기를 열심히 하여 미혹함을 깨끗이 씻어 남김이 없으면 자연히 天性을 되찾을(復本)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시오.” 라고 하였다.
이때에 氣와 土가 서로 마주치어 때와 節氣를 만드니 빛이 한쪽에만 생기므로 차고 어두웠으며, 水와 火가 調和를 잃으므로 핏기 있는 모든 것들이 시기하는 마음을 품으니, 이는 빛을 거둬들여서 비추어 주지 아니하고 성문이 닫혀 있어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8장
더구나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밖에 이르러 직접 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復本에 때가 있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 밑을 파헤치니 성터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城 안에 마침내 젖이 마르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므로 混濁이 至極하여 맑고 깨끗함을 保全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黃穹氏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곧 白茅를 묶어 마고 앞에 사죄하여 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지고 復本할 것을 서약하였다. 물러 나와 여러 종족들에게 고하기를, “五味의 재앙이 거꾸로 밀려오니 이는 城을 나간 사람들이 하늘과 땅의 理致와 法道를 알지 못하고 다만 어리석음이 불어났기 때문이다. 淸淨은 이미 없어지고 大城이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를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天人들이 나누어 살기로 뜻을 정하고 大城을 完全하게 保全하고자 하므로, 黃穹氏가 곧 天符를 信標로 나누어주고 칡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法을 가르쳐 四方으로 나누어 살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靑穹氏는 권속을 이끌고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雲海洲로 가고,
白巢氏는 권속을 이끌고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月息洲로 가고,
黑巢氏는 권속을 이끌고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星生洲로 가고,
黃穹氏는 권속을 이끌고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天山洲로 가니,
天山州는 매우 춥고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黃穹氏가 스스로 떠나 復本의 苦痛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제9장
(麻姑城을 떠나) 分居한 모든 種族들이 각 洲에 이르니 어느덧 千年이 지났다. 옛날에 먼저 성을 나간 사람들(五味의 변을 일으키고 나간 支巢氏의 무리들)의 자손이 각지에 섞여 살아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러나 거의가 그 根本을 잃고 성질이 사나와져서 새로 갈라져 나온 種族을 보면 무리를 지어 추적하여 그들을 해하였다. 分居族이 이미 정착하여 居住하니, 바다와 산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거의 왕래가 없었다.
이에 麻姑가 穹姬. 巢姬와 더불어 大城을 보수하여 天水를 부어서 城 안을 청소하고, 大城을 虛達城 위로 옮겨버렸다. 이때 청소한 물이 東과 西에 크게 넘쳐 雲海洲의 땅을 크게 부수고, 月息洲의 사람들을 많이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地界의 中心이 變하여 曆數에 차이가 생기니, 처음으로 朔과 ?의 현상이 있었다.
제10장
黃穹氏가 天山洲에 도착하여 迷惑함을 풀며 復本할 것을 서약하고, 무리에게 天地의 道를 닦고 실천(修證)하는 일에 勤勉하라고 일렀다. 곧 첫째 아들 有因氏에게 명하여 인간세상의 일을 밝히게 하고, 둘째와 셋째 아들에게 모든 洲를 돌아다니게 하였다. 黃穹氏가 곧 天山에 들어가 돌이 되어 길게 調音을 울려 인간세상의 어리석음을 남김없이 없앨 것을 도모하고, 기어이 대성 회복의 서약을 쟁취하였다.
이에 有因氏가 天符三印을 이어 받으니 이것이 곧 天地本音의 象으로 眞實로 根本이 하나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밤에는 어둠에 시달리는 것을 有因氏가 불쌍하게 여겨, 나무를 뚫어서 마찰시켜 불을 일으켜서 밝게 비춰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또 음식물을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치니, 모든 사람들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有因氏가 천 년을 지내고 나서 아들 桓因氏에게 天符를 전하고 곧 산으로 들어가 재앙을 없애는 굿을 전수하며 나오지 아니하였다.
桓因氏가 天符三印을 이어받아 人間世上의 理致를 證據하는 일을 크게 밝히니, 이에 햇빛이 고르게 비추이고 기후가 순조로와 생물이 거의 편암(安堵)함을 얻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괴상한 모습이 점점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는 3世(황궁ㆍ유인ㆍ한인)가 하늘의 道를 닦아 실천하는 3,000년 동안 그 功力을 거의 없어질 만큼 썼기 때문이었다.
제11장
桓因氏의 아들 桓雄氏는 태어날 때부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天符三印을 계승하여 계불(??)의식을 행하였다. 웅대한 하늘(天雄)의 도를 수립하여 사람들에게 그 유래한 바를 알게 하였다. 어느덧 사람들이 입고 먹는 일에만 편중하므로 桓雄氏는 無餘律法 4조를 제정하여 환부(鰥夫)로 하여금 조절하게 하였다.
1조는, 사람의 행적을 언제나 깨끗하게 하여 모르는 사이에 生鬼가 되지 않게 하고, 번거롭게 막혀 마귀가 되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툭 트여 장애가 하나도 없게 하라,
2조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모으고 쌓은 것은 죽은 뒤에 공을 제시하여 生鬼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게 하고, 함부로 허비하여 마귀가 되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이 두루 화합하여 유감이 하나도 없게 하라,
3조는, 고집이 세고 간사하고 迷惑한 자는 광야에 귀양을 보내 때때로 그 邪惑함을 씻게 하여, 사악한 기가 세상에 남지 않게 하라,
4조는 죄를 크게 범한 자는 섬도에 유배시켜 죽은 뒤에 그 시체를 태워서, 罪業이 지상에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또 宮室을 지어 사람들을 살게 하고, 배와 차를 만들어 여행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에 桓雄氏가 처음으로 바다에 배를 띄어 타고 사래를 순방하니, 천부를 비추어서 수신하고, 모든 종족의 소식을 소통하여 근본을 잊지 않을 것을 호소하고, 宮室을 짓고 배와 차를 만들고 화식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桓雄氏가 돌아와 여덟 나라의 말과 두 개의 글을 익히고 역법을 전하고 醫藥術을 수업하며 천문과 지리를 저술하니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였다. 이는 세대는 멀어지고 법은 해이해져서 모든 사람들이 몰래 거짓을 모색하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에, 날마다 쓰는 사물 사이에서 근본의 도를 보전하여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비로 학문을 하는 풍조가 일어나니, 인성이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워서 배우지 아니하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제12장
桓雄氏가 壬儉氏를 낳았으니, 때에 四海의 여러 種族들이 天符의 理致를 익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迷惑에 빠져 世上이 苦痛스러웠다. 壬儉氏가 天下에 깊은 우려를 품고 天雄의 道를 닦아 ??儀式을 행하여 天符三印을 이어 받았다. 갈고, 심고, 누에를 치고, 칡을 먹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壬儉氏가 뿌리를 먹고 이슬을 마시므로 몸에는 털이 길게 자랐는데, 四海를 널리 돌아다니며 여러 종족들을 차례로 방문하니, 백 년 사이에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天符를 비추어서 修信하고 迷惑함을 풀고 根本으로 되돌아 갈 것을 맹세하며 符都(단군조선의 수도, 천부의 도시라는 뜻) 건설을 약속하니, 이는 지역이 멀고 소식은 끊어져서 種族들의 言語와 風俗이 점차 變하여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함께 모여 서로 돕고 和合하는 자리에서 天符의 理致를 익혀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후일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배우고 익히는(會講) 실마리가 되니, 사람들의 일이 번거롭고 바빠 익히지 않으면 (天符의 理致를)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제13장
壬儉氏가 돌아와 符都를 건설할 땅을 택하였다. 즉 동부의 자석이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이는 2와 6이 交感한는 核心 地域이요, 4와 8이 相生하는 結果의 땅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서로 통하여 열 방향으로 갈리어 나가니, 즉 9와 1의 끝과 시작이 다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인삼과 잣과 일곱 가지 색의 옥돌이 金剛의 심장부에 뿌리를 내려 전 지역에 두루 가득하니, 이는 1과 3과 5와 7의 磁朔의 精이 모여 바야흐로 물체를 만드는 복된 땅이었다.
곧 태백산을 밝은 땅 정상에 天符壇을 짓고 사방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였다. 堡壇의 사이는 각각 세 겹의 도랑으로 통하게 하였다. 도랑의 사이는 천 리였으며, 도랑의 좌우에 각각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는 麻姑 本城에서 그 法을 취한 것이었다. 符都의 아랫부분은 나누어 마을을 만들었다. 三海의 주위에 둥그렇게 못에 잠기었다. 네 나루와 네 포구가 천 리 간격으로 연결되어 東西로 줄을 지어 둘러쌌다. 나루와 포구사이에 다시 6부를 설치하였다. 6부에는 여러 種族이 살았다. 符都가 이미 이루어지니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빛나고 밝아서 온 天下를 和合하기에 충분하였으며, 모든 종족의 삶을 지탱해주는 맥박(生脈)이었다.
제14장
이에 黃穹氏의 후예 6만이 (符都에) 이주하여 지키고, 곧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信符를 새겨 天池의 물에 흘려보내 四海의 種族들을 초청하였다. 種族들이 神符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박달나무숲에 神市를 크게 열고, ??로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의 움직이는 모습을 살핀 후, 麻姑의 系譜를 살펴 그 族屬을 밝히고, 天符의 音에 준하여 그 말과 글을 정리하였다.
또 北極星과 七曜의 위치를 정하여 넓고 평평한 돌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제사를 올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天雄의 樂을 연주하였다. 種族들이 方丈山 방호의 굴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天符를 새기고, 그것을 方丈海印이라 하여 七難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 십 년마다 반드시 神市를 여니, 이에 말고 글이 같아지고 天下가 하나로 되어 사람들이 크게 和合하였다. 인하여 바닷가에 城隍을 지어 天符에 祭祀를 올리고, 모든 種族들이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 그 뒤로 1000년 사이에 城隍이 全域에 널리 퍼졌다.
제15장
또 예澧(물이름)와 陽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朝市를 설치하고, 八澤에 海市를 열어 매년 시월 아침에 드리는 제사를 지내니, 四海의 種族들이 모두 지방 土産物을 바쳤다. 산악 종족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종족들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 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받들어 올리니 五味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蒼生의 災殃을 그치게 하네 라고 하였다. 이를 가리켜 ‘朝鮮祭’라 하였다. 이때에 산악과 해양의 種族들이 생선과 고기를 많이 먹으니, 교역하는 물건의 대부분이 절인 어물과 조개와 가죽류였기 때문에, 곧 犧牲祭를 行하여 人間으로 하여금 反省하고 祖上의 恩功에 報答하게 하였다.
피에 손가락을 꽂아 生命을 省察하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에 보답하니, 이는 물체가 대신 五味의 잘못을 보상하여 災殃을 멎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육신고충의 고백이었다.
언제나 새해맞이 제사(歲祭)때에는 物貨가 폭주하므로 네 나루와 네 포구에 海市를 크게 열고, 몸을 깨끗이 하여 地理를 거울삼아 交易의 法을 시행하여 그 값과 분량을 정하며, 物性의 根本을 分別하여 이용하는 법을 밝혔다. 또 符都에 있는 여덟 개의 연못 모양을 본떠서 못을 파고, 굽이굽이 휘어 흐르는 물 사이에서 추수감사제를 지내고, 모여서 잔치하여 모든 물자를 구제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종족들이 봉래산 圓嶠峰에서 五瑞의 열매를 얻으니, 즉 잣나무열매였다. 봉래 海松 이라 하여 은혜롭게 다섯 가지 幸運을 얻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四海에 産業이 일어나서 交易이 旺盛해지므로 天下가 넉넉하여 不足함이 없었다.
제16장
市에 온 사람들은 瀛州 대여산 계곡에서 三靈根을 얻으니, 곧 人蔘이었다. 그것을 瀛州 海蔘이라 하였으며, 능히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가지 德을 보전하고 돌아갔다. 대개 인삼이 그 수와 격을 갖추어 磁朔方에서 난 것은 반드시 長生하니, 40세를 1기로 휴면하고 13기를 1삭으로 정기를 쌓고 4삭을 경과하여 씨를 맺어 화하니 이러한 것은 符都地域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方朔草라 하니 世上에서 不死藥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혹 작은 뿌리라도 符都 地域에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가 神靈한 效驗이 있으므로, 市에 온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구하였다. 대저 三根靈草의 人蔘과 五葉瑞實의 잣과 七色寶玉의 符印은 眞實로 不咸三域의 特産이요, 四海의 種族들에게 하늘의 恩惠였다.
제17장
때에 陶堯가 天山의 남쪽에서 일어났는데, 일차로 성을 나간 사람들의 후예였다. 일찍이 제시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보의 간에게서 道를 배웠다. 그러나 원래 數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9數5中의 理致를 잘 알지 못하고, 中5이외의 8은 1이 즉 8이라고 생각하고 內로써 外를 제어하는 理致라 하여, 五行의 法을 만들어 제왕의 道를 주창하므로, 巢父와 許由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堯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苗裔를 쫓아내었다. 苗裔는 黃穹氏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有因氏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壬儉氏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符都를 나갔기 때문에 그 비어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습격하니, 苗裔가 마침내 東ㆍ西ㆍ北의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堯가 곧 9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中에 사는 제왕이라 칭하여 唐都를 세워 符都와 대립하였다. 때에 거북이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負文 과 蓂莢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神의 啓示라 하여, 그것으로 曆을 만들고 天符의 理致를 廢하여 符都의 曆을 버리니, 이는 人間世上의 두 번째 큰 變이었다.
제18장
이에 壬儉氏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有因氏의 손자 有戶氏 夫子에게 鰥夫와 權士 등 백여 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堯)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堯가 그들을 맞아 명령을 복종하고 공손하게 대접하여 黃河의 물가에서 살게 하였다. 有戶氏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
이보다 먼저 有戶氏가 符都에 있을 때에 칡을 먹고 五味를 먹지 아니 하였으므로, 키는 열 자요,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壬儉氏보다 나이를 백여 살이나 더 먹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壬儉氏를 도와 道를 行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에 이르러 使者가 되어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운 세상을 구제하니, 그가 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에 堯가 有戶氏의 아들 有舜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 다른 뜻이 있어 일을 맡기고 도와주며 두 딸로 誘惑하니, 순이 곧 迷惑하여졌다. 有舜이 일찌기 符都의 法을 行하는 鰥夫가 되어 마침내(能力이) 미치지 못하여 절도가 없더니, 이에 이르러 堯에게 迷惑당하여 두 딸을 몰래 아내로 삼고 어리석게도 堯에 붙어 協助하였다.
제19장
이 때 有戶氏가 수시로 경계하였으나, 순은 “예, 예”하고 대답만 하고는 고치지 않았다.
그는 끝내 堯의 촉탁을 받아들여 賢者를 찾아 죽이며 苗族을 정벌하였다. 有戶氏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꾸짖고 그를 討伐하니, 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堯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舜에게 양위하고 自閉하였다.
有戶氏가 이르기를, “五味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五行의 禍를 만들었으므로 罪는 땅에 가득하고 北斗星은 하늘을 가리어 數事가 많이 어그러져 人間世上이 困難하고 苦痛스러워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부자간이나 형제간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하고 곧 둘째 아들 有象에게 명하여 權士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罪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를 혁파하였다.
堯는 갇혀 있던 중에 죽고 舜은 蒼梧의 들에 도망하여 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堯의 무리 禹가 舜에게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舜의 두 처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禹가 곧 “正義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공을 세운다.”고 말하고 상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有戶氏가 물러나서 禹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禹가 都邑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有戶氏에게 항거하여 자칭 夏王이라 하였다.
제20장
禹가 마침내 符都를 배반하고 塗山에 壇을 설치하였다. 西南의 種族들을 정벌하여 諸侯라 하고 도산에 모이게 하여 조공을 받았다. 이는 符都 祭市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으나 매우 갑작스러웠다. 이에 天下가 시끄러워 符都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禹가 곧 水陸의 길을 차단하여 符都와 연락을 끊고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감히 符都를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에 有戶氏가 서방에서 살면서 苗裔 수습하여 巢父와 許由가 사는 곳과 통하고 西南의 種族들과 연락하니, 그 세력이 심히 왕성하여 스스로 邑을 이루었다. 有戶氏가 곧 權士를 보내 禹에게 타이르기를, “堯는 天數를 몰랐다. 땅을 쪼개서 天地를 제멋대로 하였다. 기회를 틈타 홀로 단을 만들고 사사로이 개나 양을 기르기 위하여 사람을 몰아낸 후 자칭 제왕이 되어 혼자서 처리하였다. 世上은 土石이나 草木처럼 말이 없고 天理는 거꾸로 흘러 虛妄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거짓으로 天權을 훔쳐 私慾의 횡포를 자행한 것이다.
제왕이 만약 天權을 대행하는 것이라면 능히 日月을 開閉하며 萬物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帝王은 數의 要諦요, 사람이 거짓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칭하면 다만 詐欺와 虛妄의 나쁜 장난이 될 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證理요, 世上의 일이란 그 證理 한 사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니, 이 외에 다시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符都의 法은 天數의 理致를 明確하게 證明하여 사람에게 그 원래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그 本福을 받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는 비록 선후는 있으나 높고 낮음이 없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비록 친숙하고 생소한 것은 있으나 끌어들이고 몰아내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해가 평등하여 종족들이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 오직 그 五味의 罪를 속죄하는 것과 大城(麻姑城)의 일을 回復하는 것은 언제나 一人犧牲의 주관 아래 있는 것이요, 여러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이 일은 예로부터 세상일에 섞이지 아니 하였다. 黃穹氏와 有因氏의 예가 바로 이것이다.
제21장
또 소위 五行이라는 것은 天數의 理致에 이러한 法이 있는 것이 아니다. 方位의 中央 5는 交叉의 뜻이요. 달라진 움직임(變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變하는 것은 1부터 9까지이므로 5는 언제나 中央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9가 輪回하여 律과 呂가 서로 調和를 이룬 후에 萬物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基數(=기초로 하여 쓰는 수. 곧 1에서 9까지의 整數)를 이르는 것이요, 그 5ㆍ7이 크게 번지는 고리(大衍之環)에 이르면 그 자리에 5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4ㆍ7이 있는 것이다. 또 그 順逆 生滅의 輪冪은 4요 5가 아니니, 즉 原數의 9는 不變數이기 때문이다. 또 輪冪이 한 번 끝나는 구간은 2■4=8사이의 7이요, 5가 아니다.
또 그 配性之物은 金ㆍ木ㆍ水ㆍ火ㆍ土의 다섯 중에서 金과 土를 왜 따로 구별하는가. 그 약간의 차이 때문에 구별하고자 한다면 氣ㆍ風ㆍ草ㆍ石 따위는 어찌 같이 들지 않는가. 그러므로 다 들자면 수가 없는 것이요. 엄밀히 구별해서 들자면 金ㆍ木ㆍ水ㆍ火 혹은 土ㆍ木ㆍ水ㆍ火의 넷이요. 다섯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 物性을 어떤 이유로 數性에 짝지우는가. 數性之物은 그 原數가 9요, 5가 아니다. 그러므로 五行의 說은 참으로 황당무계한 것이다. 이로 써 人間世上을 證明하여 밝히는 일(證理)을 속여서 미혹(誣惑)하게 하여 곧 하늘의 禍를 만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제22장
또 그 曆制는 天數의 根本을 살피지 못하고 거북이나 명협(蓂莢)과 같은 미물에서 根本을 취하였으니, 堯는 또 무슨 속셈인가. 天地의 萬物이 다 數에서 나와 각각 數를 象徵하고 있는데 하필 거북과 蓂莢뿐이겠는가. 모든 사물에 각각 그 曆이 있으니. 曆은 歷史다. 그러므로 堯의 曆制는 거북과 蓂莢의 曆이요, 人間의 曆이 아니니, 그것이 인간 세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이런 까닭에 三正(性數;1.4.7 法數;2.5.8 體數;3.6.9)을 번복하여 구차스럽게 맞추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마침내 하늘의 죄를 끌어들였다. 曆이라는 것은 人生證理의 기본이므로 그 數는 몸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曆이 바르면 天理와 人事가 證合하여 福이 되고, 曆이 바르지 못하면 天數에 어긋나 禍가 되니, 이는 福은 理致가 存立하는 데 있고, 理致는 바르게 밝히는 데에 存立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曆의 바르고 바르지 못함은 人間世上의 禍福의 發端이니, 가히 삼가지 않을 것인가. 옛날 五味의 禍가 한 사람의 迷惑에서 나와 萬代의 산 사람(生靈)에게 미치고 있는데, 지금 또 다시 曆의 禍가 장차 千世의 진리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기만 하구나.
제23장
天道가 돌고 돌아 終始가 있고, 終始가 또 돌아 4단씩 겹쳐 나가 다시 終始가 있다. 1終始의 사이를 小曆이라 하고, 終始의 終始를 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終始를 大曆이라 한다. 小曆의 1회를 祀(=年)라 하니 祀에는 13期(=月)가 있고 1期(月)에는 28日이 있으며 다시 4曜로 나뉜다.
1曜에는 7日이 있고, 曜가 끝나는 것을 服이라 한다. 그러므로 1祀(=年)에 52曜服이 있으니 즉 364日이다. 이는 1ㆍ4ㆍ7의 性數요.
매 祀(=年)의 시작에 大祀의 旦이 있으니, 旦과 1은 같기 때문에 合하여 365日이 되고, 3祀의 半에 大朔의 ?이 있으니, 판(?)은 祀(=年)의 2分節이다. 이는 2ㆍ5ㆍ8의 法數요, 달이 긴 것이 1日과 같기 때문에 弟4의 祀는 366日이 된다.
10祀의 半에 大晦의 구(晷)가 있으니, 구(晷)는 時의 根源이다. 300구가 1?가 되니, ?는 구(晷)가 눈에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를 지나서 刻 分 時가 1日이 되니 이는 3ㆍ6ㆍ9의 體數다.
이와 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中曆과 大曆에 미쳐서 理數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저 堯의 이 세 가지 잘못은 虛僞의 慾望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 實爲의 道에 비할 수 있겠는가. 虛僞는 안에서 理가 부실하여 마침내 멸망에 이르고, 實爲는 理가 나를 언제나 만족하게 하여 스스로 함께 존립한다.
제24장
有戶氏가 이와 같이 단단히 타일러서 모든 法을 廢止하고 符都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威脅이자 侮辱이라 하여 곧 무리를 이끌고 有戶氏를 攻擊하였다. 그러나 여러 번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茅山의 진지에서 죽었다. 이에 夏나라 백성들이 슬프고 憤하여 죽기를 원하는 자가 數萬이었다. 이는 거의가 禹와 함께 治水를 한 무리들이었다.
禹의 아들 啓가 이 대군을 이끌고 有戶氏의 邑으로 進擊하여 오니, 有戶氏의 군은 불과 수천이었다. 그러나 夏나라 군사는 싸우면 반드시 패하여 한 번도 전적을 드높이지 못하였다. 啓가 마침내 두려워서 退陣하고 다시 攻擊하지 못하자 그 무리가 격앙되었다. 이에 有戶氏가 夏나라 백성이 눈이 먼 것을 보고 고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차 西南의 種族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제25장
이로부터 天山 남쪽 太原 지역이 뒤숭숭하고 떠들썩하며 主人이 없는 것과 같아서, 소위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백성은 장님이 되어 암흑이 거듭 겹쳤다. 强者는 위에 있고 弱者는 아래에 있어, 王과 諸侯를 나라에 봉하고 生民을 제압하는 풍속의 폐해(風弊)가 만연하여 고질이 되고, 마침내 서로 침탈하기에 이르니, 헛되게 生靈을 죽이고 한가지도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夏나라와 殷나라가 다 그 法으로 망하고도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符都에서 떨어져 나가 眞理의 道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이었다.
어느덧 有戶氏가 그 무리를 이끌고 月息ㆍ星生의 땅에 들어가니, 즉 白巢氏와 黑巢氏가 살던 곳이었다. 白巢氏와 黑巢氏의 후예가 오히려 보금자리를 만드는 風俗을 잊지 아니하고 높은 탑과 계단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天符의 本音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유래를 깨닫지 못함으로써, 道를 와전하여 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기를 일삼았다. 麻姑의 일은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남은 흔적이 아주 없어지니, 有戶氏가 두루 여러 종족들의 지역을 돌며 麻姑와 天符의 理致를 말하였으나 모두가 의아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 옛일을 맡아보는 자가 송구스럽게 일어나서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有戶氏가 본래 理致를 말하여 그것을 전하였다.
제26장
壬儉氏가 有戶氏의 행적을 듣고 그 길을 壯하게 여겨 有戶氏의 族에게 敎部에 취업하여 살도록 하였다.
이때에 壬儉氏가 夏나라 땅의 形勢를 심히 걱정하고 마침내 入山하여 解惑復本의 道를 전수하였다. 壬儉氏의 아들 夫婁氏(=2世 檀君)가 天符三印을 이어받아 天地가 하나의 理致로 되는 것을 證明하여 人生이 一族이 되어 크게 父祖의 道를 일으키고, 널리 하늘의 雄大한 法을 행하여 人世 證理의 일에 專念하였다. 일찍이 雲海族(=靑穹氏의 一族)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夏나라가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더니, 異道가 점차 성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夫婁氏가 天符를 아들 ?婁氏에게 傳하고 入山하였다. ?婁氏가 날 때부터 大悲의 願이 있어 天符三印을 이어받고, 夏族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眞理가 거짓의 지역에 떨어진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마침내 明地의 檀에 天符를 봉쇄하고, 곧 입산하여 復本의 大願을 전수하여 백 년 동안 나오지 아니하니, 남은 백성들이 통곡하였다. 壬儉氏가 후천 말세의 초에 태어나 사해의 장래를 미리 살피고 符都建設을 시범하니, 천 년 사이에 그 功業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에 이르러 天符의 전해짐이 끊어져 麻姑 分居 이래로 黃穹ㆍ유인ㆍ한인ㆍ한웅ㆍ壬儉ㆍ夫婁ㆍ?婁의 7세에 天符가 傳해진 것이 7000年이었다.
小符都誌
제27장
殷의 망명자 箕子가 패한 군사와 난민을 이끌고 符都의 서쪽에 도망하여 왔다. 명예를 위하여 唐虞의 法을 행하고 五行三正을 써서 天地大法의 무도(洪範巫咸)를 施行하였다. 天雄의 道와는 절대로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殷의 군사와 백성이 武力으로 符都의 남은 百姓(遺衆)을 抑壓하므로, 그들은 마침내 明地의 壇을 봉해버리고 東海의 물가로 피하여 살았다. 즉 옛날 斯禮筏(탕해가 왕이 되어 서라벌(長旗라는 뜻)로 고쳤다)의 빈 터였다. 斯禮筏은 긴 깃발이니, 광야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두어들여, 먼 곳에 살면서 지키는 사람에게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곧 六村을 설치하고 인접한 종족들과 나누어 함께 지키되 각각 韓이라 하고 保衛하였다. 韓은 保衛의 뜻이다. 北의 馬韓과 南의 弁韓과 東의 辰韓의 三韓이 部族의 자치를 행하고 先世의 道를 굳게 지켜, 이후 천년 사이에 箕子의 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보위 방비하는 일에 전념하여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때 하나라 땅에 쟁탈이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동요와 혼란이 三韓에 파급되므로 六村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고, 서쪽의 화가 점차 임박하여 지켜내기가 장차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이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경계를 정하고 요새를 세워 赫居世를 추대하여 다스리는 일을 위임하였다.
다른 종족들도 역시 수령을 추대하여 방비하였다. 남은 백제요, 북은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곧 북쪽 성의 땅을 회복하여 서침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그 지역을 완전하게 지켜내었다.
제28장
이보다 먼저 六部의 村長들이 藥을 캐는 날에 모여서 仙桃山 壇廟의 聖母가 알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가서 보았다. 동쪽 우물을 보로 덮어 가리고 껍질을 벗겨서 男兒를 얻었다. 몸에서는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컸다. 곧 朴으로써 姓을 삼고 이름을 赫居世라 하였다. 박은 단이 어음이 박달이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여 성을 삼았으며, 赫은 빛이니 즉 光明으로써 암흑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六村의 사람들이 함께 養育하니 점차 자라면서 神靈스러운 氣運이 빼어나게 밝고 大人의 道가 있었다. 열세 살에 여러 사람이 추천하여 居西干이 되니, 居는 据요, 干은 防이요 長이다. 즉 서방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防禦長이라는 뜻이다. 西方은 즉 저들, 西侵하여 거짓도(詐道)를 행하는 자들이다.
제29장
赫居世氏는 天性은 神과 같고 智慧는 聖人과도 같았다. 또 어진 왕비 알영을 맞이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두 聖人이라 하였다. 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先世의 道를 행하며 祭市의 法을 復興하고, 南太白山에 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에 天符壇을 축조하고 東西南北의 사 대에 堡壇을 설치하여 ??儀式을 행하고, 大人으로 하여금 金尺의 理致에 따라 天地始原의 根本을 證理하며, 玉管의 音을 내어 律呂化生法을 修證하였다.
해마다 시월에 白衣祭를 행하였으니, 이는 黃穹氏의 束身 白茅之義를 따른 것이었다. 達丘에 朝市를 베풀고, 栗浦에 海市를 열어 陸海 交易의 制度를 수립하였다. 항상 두루 시찰하며 농상과 방적을 권장하니, 들에는 곡식이 쌓이고 집에는 베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착한 일을 크게 일으켜 여러 사람과 함께 그 고락을 같이 하고, 밖으로 방패와 창을 쓰지 아니하여 이웃과 더불어 平和를 보전하였다.
한 뜻으로 復古하고 重建하는 일에 專念하니, 境內에 道가 있어 옛날과 흡사하였다. 이때에 弁辰의 種族들이 合同하여 協力하니, 비록 경계를 두고 방비하나 나라를 칭하지 아니하고 또 왕을 칭하지 아니하였다. 境內를 다스리는 일은 先世의 法을 준수하여, 祭會에서 의결되지 아니하면 일찍이 한 가지의 일도 행하지 아니하였기에, 우두머리를 이어받는 法 역시 血統을 한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賢明한 사람을 택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제30장
男兒 나이 스무 살이 된, 아름답고 말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馬郞이라는 직을 주고, 명령을 받들어 遠行하게 하였다. 혹 성생. 월식. 의 옛 땅에 나아가며 혹 雲海. 天山의 여러 지역에 가니, 이 遠行은 믿음을 敦篤히 하기 위한 것으로 符都에서 전해진 制度였다.
동해에 피하여 산 지 천여 년 사이에 祭市의 회를 열지 못하여 서로 왕래가 오랫동안 끊어지고, 또 封國爭奪의 풍조가 四海에 만연하여 여러 종족들이 각자 나라를 칭하고 오랜 세월에 전란이 반복되니, 겨레가 종횡으로 나뉘고 말이 잡다하게 변하였다. 天符는 거의 忘却하기에 이르고 혹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도 다 변형되어 音이 다르니, 馬郞들의 遠行이 심히 어려워 忠節을 지켜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馬郞들이 만리 遠行에서도 절조를 지켜 능히 굳은 뜻을 가지고 갖가지 난을 克復하여 사명을 완수하니, 그 거룩한 人格이 진실로 호탕하고 비범하였다. 장하게도 歸還하면 반드시 職事에 임명하여 天文과 地理와 曆數와 博物을 공부하게 하니, 이는 즉 先世에 四海를 두루 아울러 人間世上을 하나의 法에 맞추는 遺業이었다.
제31장
斯禮筏을 서울로 정한 후로 어느덧 三世를 지나니 백여 년이 되었다. 世上의 풍조가 크게 변하여 지켜내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국왕을 세워 대권을 행사하게 하자는 여론이 대두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고 시끄러웠다.
그 반대자들은, “先世의 내려오는 法이 밝고 밝게 天符를 비추니, 지금 비록 시대가 어려우나 보수하고 튼튼히 방비하여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어찌 속임에 굴종하여 스스로 小者가 되어 사리를 어긋난 가운데 모독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이같이 된다면 차라리 의롭게 목숨을 바쳐 진실한 도를 뚜fut하게 나타내어 後世에 남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 찬성하는 사람들은, “외세가 긴박하여 파동이 격심하니 어떻게 방비하겠는가. 담장 안에서도 흩어지고 반란을 일으켜 시끄러움이 그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지켜낸단 말인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같이 경쟁하는 마당에 뛰어들어 부강하게 된 후에 유업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지금 사해의 여러 종족들이 거짓도(詐道)에 미쳐 날뛰어 봉사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우리가 지금 자멸하여 버리면 누가 참다운 도를 드높이며, 후세에 누가 있어 이를 알 것인가.
만약 능히 방비하여 보수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고립되면 새 백 마리 가운데 백로 한 마리가 되어, 오히려 異道가 되고 세상에 존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장차 또 그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 같은 것은 다 옳지 못하며, 오직 택할 바는 나라를 세우고 왕을 높여 대권을 집행하며, 軍馬를 호령하여 破竹之勢로 전진하고 符都 전역을 回復하는 것뿐이다. 符都를 다시 세워 그 根
本을 명시하면 여러 種族들이 비록 완강하더라도 반드시 覺醒하여 根本으로 돌아올 것이다.
제32장
이에 마침내 衆論이 決定되었으므로 세상사람들이 따르고 우러르는 德望이 왕국 수립을 주장하는 昔氏에게로 돌아갔다. 昔氏는 동쪽 작은 성 유배인의 후예로, 옛날부터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지략이 있으므로 南解氏가 딸을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중의 기대에 따라 자리를 이어 脫解王 이라 칭하니, 즉 保守의 桎梏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또 徐羅國이라 칭하고 비로소 방패와 창을 사용하여 境內를 평정하였으나, 용병을 과도하게 하여 필경은 배척당하였다.
중론이 다시 박씨에게로 돌아오니, 이에 박씨가 다시 계승하고 왕국의 칭호를 폐지하였다. 4세를 지나 중론이 또 석씨에게로 돌아갔으나 단 정벌하는 일은 원하지 않으므로, 이에 석씨가 다시 계승하여 무리에게 서약하고 정벌을 행하지 않으니, 이가 伐休氏였다.
석씨4세 사이에 정벌을 다시 시작하니, 중론이 김씨의 中和로 돌아왔다. 김씨는 원래 符都에서 동쪽으로 옮겨와 살던 씨족으로, 따뜻하고 겸손하고 후덕하여 祗摩氏가 손녀를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자리를 이으니, 이가 味鄒氏였다.
이때를 당하여 서북에서 계속해서 우환이 일어나되 하나도 조치된 바가 없으므로, 중론이 석씨에게로 돌아왔다. 이에 석씨가 다시 자리를 이어 3세 사이에 전쟁이 허다하여 백성과 물자를 탕진하므로 크게 시대의 배척을 받았다. 중론이 다시 김씨에게로 돌아가니, 이에 김씨가 다시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제33장
오직 根本을 지키는 우리 종족들이 동해에 피하여 살면서 방비하고 보수한 진 삼백여 년 사이에 衆論의 飜覆이 이와 같으니, 가히 바깥 地域의 風雲이 어떠한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또 가히 天符의 眞理가 邪端의 世上에서도 의연하게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世世 衆論이 반드시 이 道가 무너지지 않는 것에 근거하여, 역대의 우두머리가 오히려 중론의 소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과격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능히 조절하여 보수를 크게 전하였으니, 마침내 오늘의 사람들로 하여금 가히 天符의 실재를 알게 하며, 또 장차 後人으로 하여금 때를 만나 그것을 行하게 하여, 능히 符都를 다시 建設하고 四海를 통화하며 人世가 復本하여 眞理를 明證하게 하면, 당시 昔氏의 주장이 과연 불행 중에서 幸을 成就하는 것이 아니하겠는가.
관설당 박제상의 부도지와 소부도지-의지의 한국인
-05.02.27
-의지의 한국인-|05.02.27부도지26장과 소부도지 7장 합하여 33장은 33다살천과 같고 제야의 종33타종과 같다 .숙독하여 부도를 재건 함이 지당함
-의지의 한국인-|05.02.27부도의 법은 천수의 이치를 명확하게 증명하여 사람에게 그 원래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본복을 받게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