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왕의 길(Queen's Walk)'을 걷다.
램버스 브리지-런던 아이-워털루 브리지-테이트 모던-타워 브리지까지
이번 영국여행에서는 마음먹고 런던 시내 테임즈강변으로 이어지는 '퀸즈 워크' 둘레길을 걸어봤다. 램버스 브리지에서 타워 브리지까지 약 5.2km, 왕복 10.4km의 산책길이다. 갈 때는 남쪽 강변, 돌아올 때는 북쪽 강변으로, 소요시간은 런던 아이, 테이트 갤러리, 타워 브리지, 런던 탑 등 특정명소를 관람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냥 걷는 시간 만 고려할 경우 4-5시간 정도 걸리지만 이런 종류의 트레킹은 소요시간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강변길 벤치에서 쉬기도 하고 유적이나 볼거리를 만나면 구경도 하고 팝에서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요즘 트레킹 코스 개발이 유행이다. 우리가 보통 '둘레길 또는 올레길'이라고 부르는 트레킹 코스는 이곳에서는 Trail이라고 하는데, 영국에는 총 16개, 630마일에 이르는 '내셔날 트레일(National Trail)'이 조성되어 있다. '퀸즈 워크'는 이들 16개 트레일 중 '테임즈 패스(Thames Path)'의 일부 구간이다. 테임즈 패스는 영국의 핏줄이라고 볼 수 있는 테임즈강을 따라 이어진 트레킹 코스로, 런던에서 세익스피어 생가 근처인 코츠월즈라고 부르는 마을까지 이어지는 총 294km에 이르는 트레일이다. 하루에 24km씩 걷고 중간에 몇일간 쉬는 것으로 가정할 때 14일 정도 소요된다.
'퀸즈 워크'라고 해서 여왕이 직접 산책하는 길은 아니고, 영국에서는 내세울 만한 길이나 건물 등에 여왕 또는 왕세자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퀸즈 워크는 램버스 브리지-웨스트민스터 브리지(국회의사당)-런던 아이-워털루 브리지-국립극장-테이트 모던 갤러리-밀레니엄 브리지(세인트 폴 성당)-런던 브리지-런던 시청-타워 브리지(런던 탑) 등으로 이어진다. 런던 테임즈 강변 주변의 주요 관광 포인트는 거의 모두 거치는 셈이다. 강변 길이라 길 자체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관광명소, 갤러리, 극장, 다양한 국가의 레스토랑, 팝, 다리 등 볼거리도 많다.
램버스 브리지를 지나 첫 번째 만나는 다리는 웨스트민스터 브리지. 이 다리를 건너면 영국 국회의사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버킹엄궁전, 그린 파크, 트라팔가 광장 및 내셔널 갤러리(국립미술관) 등을 바로 둘러볼 수 있다. 이곳들은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들이라 굳이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필자가 직장 관계로 영국에 산 건 1986-90년까지 4년간. 영국을 떠난 후 어언 24년이 흘렀다. 그후 업무출장으로 종종 런던에 들르기는 했지만 순수 여행목적으로 다시 영국을 찾은 건 오랫만이다.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이태리 등 유럽의 주요관광지는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다. 선조들이 남겨놓은 유적이나 예술품 등이 대상이기 때문에 특별히 변할 이유가 없다. 필자 자신의 기억 만 점점 변하고 멀어져 갈 뿐이다.
‘퀸즈 워크’ 트레킹 코스 주변에서 필자가 영국을 떠난 후 대표적으로 변한 것이 있다면 테임즈 강변에 '런던 아이((London Eye)’라는 대관람차가 새로 만들어지고 ‘밀레니엄 브리지’ 가 건설된 것이다. 두 개 모두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해 만들어진 것이다.
런던 아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대관람차이며, 높이 면에서도 135m로 이런 종류의 관람기구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이라고 한다. 개장 이후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로 사랑받고 있으며 매년 3천 5백만 명 이상의 내·외국인이 방문한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와 헝거포드다리(Hungerford Bridge) 사이의 테임즈강변에 있는 주빌리 가든(Jubilee Gardens) 내에 위치하고 있다. 1999년 새로운 천년을 기념하여 건축한 것으로 커다란 자전거바퀴 모양을 한 회전 관람차이다. 우주선 캡슐 모양이라서 관람용캡슐이라고 부르는 총 32개 관람차가 돈다. 각 캡슐에 탈 수 있는 인원은 25명.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정도다. 바퀴가 회전하면서 다양한 방향에서 런던 시내를 관람할 수 있다.
약 30분 정도 런던아이를 타본 후 다시 퀸즈 워크를 걷는다.
쥬빌리 가든을 지나 워털루 브리지 아래를 통과한다. 워털루 브리지는 우리들에게 추억의 영화 ‘애수’의 한 장면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애수’는 1940년에 개봉된 고전흑백영화로 원명은 Waterloo Bridge. 비비안 리와 로버트 테일러가 주인공이다. 자살을 앞둔 비비안 리가 안개 자욱한 워털루 다리에 서서 로버트 테일러와의 짧고도 깊은 사랑을 회상하는 장면은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영화 ‘애수’의 한 장면인 안개 낀 워털루 다리는 참으로 아련하고 몽환적이지만 실제 워털루 다리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다리에 불과하다. 보잘 것 없는 곳이라도 시(詩), 소설, 영화 등 문화예술로 각색되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할 수 있다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워털루 브리지를 지나면 내셔널 시어터를 만난다. 셰익스피어, 버나드 쇼로 유명한 영국의 연극활동을 매우 활발한데 이곳은 영국의 연극공연을 대표하는 국립극장이다.
극립극장 앞에는 영국의 대표적 연극배우이며 연출가였던 로렌스 올리비에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중점적으로 상연하는 런던의 올드빅극단에 들어가 비극의 주역으로 셰익스피어 극의 명배우 위치를 굳혔고 영화계와 현대극에서도 다채로운 재능을 발휘한 스타이다. 영화계에서도 활약하여 <폭풍의언덕Wuthering Heights>(1939), <레베카 Rebecca>(1940) 등에서 호평을 받았다. <헨리 5세>(1945), <리처드 3세>(1955)를 감독․·주연하였고, 특히 스스로 감독․·제작․·주연한 <햄릿>은 1948년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1930년 연극배우인 질 에스먼드(Jill Esmond)와 결혼하였고,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한 세계적인 여배우 비비안 리(Vivien Leigh)와 두번째 결혼하였다.
퀸즈 워크 길은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지천인 산책로이다. 강 건너에는 세인트 폴 성당도 보이고 고딕양식의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길가에는 거리의 악사들이 멋진 악기연주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고, 남녀가 조깅하는 모습, 강가를 걷는 남자, 야외카페 또는 팝에서 여유롭게 맥주나 차를 마시는 장면도 볼 수 있다.
흙색문양의 다리 블랙프라이어스 브리지를 지나면 테이트 모던 갤러리를 만난다. 이곳은 세계에서 두 번째 큰 규모의 현대미술관으로 피카소, 모네, 칸딘스키 등 근대 유명작가 뿐 아니라 세계최고의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전에는 테임즈 강북에 있었으나 2000년 테임즈 강변에 세워진 발전소를 개조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7층의 전시홀과 중앙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지하 1층은 터바인 홀(Turbine Hall)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중앙홀과 서점이 위치하고 있고, 주전시홀은 2-4층, 6층은 레스토랑으로 되어 있다. 전시홀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그림, 사진, 조각 등 모든 현대 예술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6층 레스토랑은 식당이지만 테임즈강변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로서도 유명하다.
영국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특별한 전시를 제외하고는 입장료가 무료이다. 중세 이전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데, 현대미술관인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는 플래시 만 터뜨리지않으면 사진촬영이 가능하다. 피카소 등 유명작가의 그림 원본을 직접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진도 찍을 수 있다.
그런데 2015년부터 현대자동차가 향후 11년 동안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중앙홀, 최대특별전시관인 터바인홀을 후원(스폰서)한다고 한다. 또, 현대차는 후원 계약과 별도로 테이트 미술관이 비디오아트의 거장 백남준의 작품 9점을 사도록 후원했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대영박물관 입구 중앙홀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삼성전자 현수막이 걸려 있고, 런던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부 거리인 피카딜리 서커스 대형 광고판에는 삼성전자와 현대차 광고가 밤낮으로 상시 점멸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이 이젠 이 정도까지 컸다니 자랑스럽기도 하다.
테이트 모던에서 2시간여 미술작품을 감상한 후 다시 퀸즈 워크를 걷는다. 테이트 모던 바로 옆에는 아름다운 디자인의 밀레니엄 브리지가 보인다. 밀레니엄을 기념해서 2000년에 세워진 다리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세인트 폴 성당으로 이어진다. 총길이는 370m로, 1894년 타워 브리지 이래 처음으로 만든 보행자용 다리이다. 타워 브리지가 자동차와 사람 모두 이용하는 다리인 반면, 밀레니엄 브리지는 사람 만 다닐 수 있다.
밀레니엄 브리지를 지나면 우측으로 영국 전통주택 양식의 힌색건물을 만난다.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라고 부르는 이 건물은 셰익스피어 시대를 재현해서 1997년에 만들어진 원형극장이다.
블랙프라이어 브리지에서 밀레니엄 브리지, 서더크 브리지에 이르는 일대를 ‘서더크(Southwark)’지역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 뿐 아니라 최고의 극장 ‘로즈 시어터’의 옛터, 피비린내 나는 장면 만을 재현하는 소극장 ‘런던 던전’, 16세기 후반에 개업한 런던 최고령의 팝 ‘조지 인’, 와인의 매력을 소개한 ‘비노폴리스’ 등 다채로운 명소들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16세기 세계 일주 항해를 이뤄낸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범선, 고딕양식의 웅장한 서더크대성당, 1933년에 만들어져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에서 활약한군함 벨파스트호 등도 볼 만하다.
퀸즈 워크 산책로의 끝지역인 타워 브리지 직전에는 특이한 모양의 런던 시청 건물을 만난다. 2002년 7월 문을 연 런던시 신청사는 모양이 달걀처럼 생겨 유리달걀(the glass egg)이라고도 한다. 공사는 1998년에 시작되었으며, 높이 45m, 총 10층이다. 건물외벽은 유리로 되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에너지 절약형 친환경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건물을 남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어 직사광선을 피하고 자연적으로 그늘이 지도록 하였다. 패널 아래쪽에는 단열판을 설치하여 열손실을 줄였다고 한다.
퀸즈 워크 산책로의 마지막 명소는 ‘타워 브리지’ 및 ‘런던 탑’. 국회의사당의 빅벤과 함께 런던의 상징으로 꼽히는 타워 브리지는 1894년 총 길이 805m로 완성되었다. 양 옆으로 솟은 고딕 양식의 탑이 무척 인상적이며, 탑과 탑을 잇는 통로에서 바라보이는 테임즈강 주변 전망 역시 탁월하다. 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마다 다리 가운데가 열리도록 개폐형으로 만들어져 더욱 유명하다.
런던탑은 ‘탑’이라는 명칭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탑이라기 보다 하나의 거대한 성에 가깝다. 런던탑의 역사는 11세기 윌리엄이 왕위에 오른 직후 가장 먼저 지은 탑에서 시작된다. 그 후 역대 국왕들이 확장시켜 10여 개 탑과 높은 성벽으로 이뤄진 지금과 같은 성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한 때는 감옥으로, 한 때는 행정기관으로 또 왕립 보물창고로도 사용되었다. 쓰임이 다양했던 역사답게 런던탑에는 다양한 고문기구, 무기 및 보물들이 전시돼 있다.
런던탑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고문과 유혈 사태가 자행되어 왔다. 헨리 6세가 이곳에서 살해되었고, 에드워드 4세의 아들, 두 명의 '어린 왕자들' 역시 '블러디 타워'에서 살해되었다. 영화 '천일의 앤'으로 잘 알려진 헨리8세 왕비 앤 볼린은 '타워 그린'에 있는 요새에서 참수 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처형은 외부의 타워 힐에서 이루어졌고 그 시체는 음울한 분위기의 예배당인 '세인트 피터 아드 빈쿨라'(사슬에 매인 성 베드로)로 옮겨졌다고 한다.
런던 탑에서 대표적인 명소는 화이트 타워와 크라운 주얼이다. 화이트 타워는 윌리엄이 세운 최초의 탑으로 중앙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이다. 중세시대 쓰였던 전투용 갑옷이나 무기 등이 볼 만하다. 크라운 주얼에는 국왕이 사용했던 왕관, 장신구 등 눈부시게 화려한 보석이 전시돼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아프리카의 별’이라 불리는 530캐럿 다이아몬드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퀸즈 워크’는 ‘걷고 구경하고 사랑하는’ 길이다. (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