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들어 땅고는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층의 거부감이 여전한 상태에서 사회적 용인을 얻어내는 것이 아직 남아있는 과업이었지만, 땅고는 이곳저곳 그럴 듯한 장소에서 추어졌고, 공연 무대나 빨레르모의 나이트클럽에서도 종종 등장했다. 땅고는 이제 더 이상 꼼빠드리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서민들의 공동주택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손풍금 곡조에 맞춰 테라스에서 땅고를 추기 시작했고, 유명하고 인기 있는 무도장들이 문을 열었다. 점점 까페에서 땅고를 많이 추게 되었고, ‘부드러운 땅고’를 볼룸 땅고로 진화시키는 데 일조한 제대로 된 댄스 교습소들도 영업을 했다.
190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 Patio de las Malevas 풍경
1900년대에 이르자 뛰어난 뮤지션들이 땅고 악단에 합류하기 시작하며 땅고 음악은 그 자체로 독보적인 전통을 구축해 간다. 춤으로서의 땅고가 본래의 사납고 공격적이며 에로틱한 성격을 상당 부분 잃어가는(이는 세계의 무도회장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과정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동안, 땅고 음악은 점점 풍성해지고 세련되어져갔으며 그 자체로 대중음악으로서의 전통을 확립해 간다. 이러한 전통은 땅고의 황금기인 1920년대에 만개하게 되지만 그 뿌리는 이 시기에 있었으며, 역사가들은 일종의 형성기인 이 시기를 가리켜 ‘Guardia Vieja’(Old Guard, 원조, 선구자, 창단 멤버 정도의 의미)라고 부른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좀 더 안정적인 앙상블들이 결성되며, 땅고 연주를 위한 최적의 악기 편성도 이루어진다. 그중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근본적인 혁신은 바로 반도네온의 등장이다. 이 아코디언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독일산 악기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땅고 음악에 필수불가결한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땅고 음악계의 스타 연주자는 대부분 반도네온 연주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의 독립 100주년이 몇 해 남지 않은 무렵인 20세기 초, 허름한 부둣가 동네인 라보까La Boca가 순식간에 땅고 음악의 명소로 떠올랐다. 수아레스가Calle Suárez와 네코체아가Calle Necochea의 교차로 주변 까페들에서 3인조 땅고 악단들이 연주를 하고, 흥이 넘치고 시끌벅적한 청중들이 음악을 즐겼다. 이때의 땅고 음악은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었다기보다 듣기 위한 음악이었다. 구두닦이와 페인트공 등의 전직을 거친 젊은 우루과이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프란시스꼬 까나로Francisco Canaro가 당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한 바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이름들을 보면 20세기 초 땅고의 음악적 출생지가 라보까라고 말하는 것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연주자 3명과 피아노가 겨우 올라갈 만한 좁아터진 무대에서 연주했지. 우리가 연주한 곳은 까페 로얄CaféRoyal이었는데, 곱슬머리에 콧수염이 두껍고 허리춤에 값나가는 시곗줄을 늘어뜨리고 다니던 그리스인 사장이 운영하는 곳이었어. 로얄 맞은편에도 분위기가 비슷한 까페가 있었고, 거기서는 비센떼 그레꼬와 도밍고 그레꼬Vicente y Domingo Greco형제가 연주를 했지. 모퉁이 돌아서 30미터쯤 떨어진 수아레스가에는 라 마리나La Marina까페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있는 다른 까페에서는 로베르또 피르뽀Roberto Firpo가 연주했어. 네코체아가에 있는 비슷한 까페에서는 ‘독일인’ 베른스타인Bernstein el Alemán이 맥주로 반쯤 꽐라가 된 상태로 연주를 했지...”
1940년경의La Boca
Suárez가와 Necochea가가 만나는 모퉁이.
2016년 11월에 이곳을 '전통의 땅고 길모퉁이Esquina Tradicional del Tango'로 명명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실제로 이때가 땅고계에서 최초의 스타 음악가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앞서 나온 까나로, 피르뽀, 그레꼬는 물론 걸출한 피아니스트 로센도 멘디사발, ‘반도네온의 호랑이’ 에두아르도 아롤라스Eduardo Arolas, 후안 마글리오Juan Maglio 같은 반도네오니스트 등등.
독립 100주년을 전후한 무렵에는 스타 댄서들도 나왔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전설적인 댄서는 ‘El Cachafaz(악당, 뻔뻔스러운)’라는 별명의 호세 오비디오 비앙께뜨José Ovidio Biaquet였다. 1911년에 열린 댄스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혜성 같이 나타나, 1915년에는 당대 최고의 댄서였던 El Rengo Cotongo와 다이다이로 춤 대결을 벌여 승리하며 모든 무도장 프리패스를 받는다. 그는 깔끔하고 우아하며 정확한 동작으로 칭송 받는 흠잡을 데 없는 볼룸 댄서이기도 했지만, 초창기 땅고의 원시적이고 격렬한 느낌 또한 멋들어지게 살려낼 수 있었다고 한다. 엘 까챠파스는 1942년 Mar del Plata에 있는 무도장에서 <Don Juan>에 춤을 추고 나서 다음 곡을 추기 위해 준비하다가 파트너인 까르멘시따 깔데론Carmencita Calderón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진정한 레전드 땅또..)
El Cachafaz와 Carmencita Calderón.
둘은 1935년부터 파트너를 맺어 말 그대로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함께 춤췄다.
20세기의 첫 십년간인 1900년대에는 영원한 클래식이 되어 버린 땅고 곡들이 많이 나왔다: Angel Villoldo의 <El Choclo>(1903), Ernesto Ponzio의 <Don Juan>(1905), Lorenzo Logatti의 <El Irresistible>(1907), Enrique Saborido의 <La morocha>(1905)와 <Felicia>(1910) 등등. 전축의 보급과 함께 다른 대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음반사들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땅고 음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땅고 음반 녹음은 1902년경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나, 결정적인 순간은 콜롬비아 레코드의 에이전트가 땅고 악단장인 비센떼 그레꼬에게 땅고 곡을 몇 곡 녹음하자고 의뢰한 1911년이었다. 진정한 선구자였던 그레꼬는 원래 반도네온, 바이올린, 기타로 구성된 3인조였던 자신의 악단을 점차 규모를 키워 두 대의 반도네온과 두 대의 바이올린, 피아노와 플루트의 6인조로 확대 편성했다. 또 그레꼬는 전문적으로 땅고 (끄레올) 음악을 연주한다는 뜻으로 ‘orquesta típica criolla’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여기서 criolla라는 단어는 곧 떨어져나가고 이후로 땅고 악단들은 일관되게 'orquesta típica'라는 명칭을 쓰게 된다. 하지만 그레꼬의 음반보다 더 인기 있었던 것은 후안 마글리오Juan Maglio의 음반들이었는데, 그의 악단은 반도네온, 바이올린, 플루트, 기타의 4인조였다.
비센떼 그레꼬 악단. 왼쪽의 반도네오니스트가 비센떼 그레꼬, 가운데 밝은색 양복이 피아노와 기타를 쳤던 그의 형 도밍고 그레꼬.
그리고 맨 왼쪽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앳된 시절의 프란시스꼬 까나로.
후안 마글리오 악단. 맨 우측이 후안 마글리오 '파초pacho'.
'파초'는 그의 별명으로 '미친놈'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pazzo'에서 온 말.
마글리오의 음반이나 땅고 악보들이 엄청나게 팔려나간 것을 보면 1910년대 초반에 땅고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휩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에는 꼬리엔떼스 거리만이 아니라 중심부인 El Centro의 까페와 무도장에 땅고가 흘러넘쳐 지형학적으로는 이미 땅고가 도시를 점령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상류층의 견고한 편견과 반대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귀족층의 젊은 자제들 중에 열광적으로 땅고를 즐기는 부류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무렵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가 벌어진다. 1913-1914년경,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파리와 런던의 댄스플로어를 땅고가 침공하여 그 나라 상류층의 환영을 받은 것이다. 아르헨티나 사회 지도층이 존경하고 동경해 마지않는 바로 그 선진국의 상류층들 말이다. 유럽에서의 땅고 열풍은 땅고에 대한 아르헨티나 상류층의 거부감과 반대를 서서히 누그러뜨렸다.
아르헨티나 귀족 사회 내부적으로도 땅고의 동맹군은 존재했다. 1912년에 전 대통령이었던 Julio Argentino Roca의 사위인 이탈리아 출신 사교계 명사 Antonio de Marchi 남작이, 스케이트장이었다가 같은 해 댄스홀로 개조된 Palais de Glace에서 땅고 무도회를 열었다. 1913년 9월에 그는 한발 더 나아가 꼬리엔떼스 거리의 Palace Theatre에서 3일간의 땅고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이 행사를 열면서 명망 있는 상류층 숙녀들의 모임으로부터 후원을 받았음을 보증했고, 댄서들에게는 거칠고 야한 동작들을 삼가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완전히 지켜지지는 못한 듯 보인)다. 당시의 전언들에 따르면 첫날밤 행사는 몹시 지루했고, 뒤이은 이틀간은 입장료가 낮아지자 활기가 살아났다고 한다.
땅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과 반대가 하룻밤에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중들은 드러내놓고 땅고 음악과 춤을 원했으며 결국 상류층도(내부의 ‘첩자’들로 인해 붕괴하며) 거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어쩌면 여기에서 일종의 계급 갈등의 요소를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1880년대에 비해 1910년대에 이르러 그 규모와 교육 수준에서 크게 성장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중들은, 땅고가 상류층에 의해 배척당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땅고를 옹호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보통의 뽀르떼뇨들에게는 현지 대중문화의 산물인,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창조물인 땅고를 배척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de Marchi 남작의 땅고 페스티벌 이후, 마침내 땅고는 공공연히 중산층 가정과 Barrio Norte의 부유한 대저택까지 영역을 넓혔다. 물론 처음에는 불안함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던 상태였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프란시스꼬 까나로와 그의 악단이 처음으로 대저택 무도회에서 연주하도록 고용되었을 때, 그의 뮤지션들이 여자들에게 껄떡대거나 술에 취해서는 안 된다고 엄격한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 까나로와 동료 뮤지션들은 불편한 야회복 차림으로 품행을 잘 단속해서, 바로 또 다른 부잣집들에 추천되었다고.
사회적 용인에 힘입어 이제 황금기época de oro로의 도약을 준비하던 1910년대 후반, 음악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발전 양상 두 가지가 나타난다. 첫 번째는 스탠다드 6인조 편성이 등장한 것이고, 두 번째는 땅고 음악이 대중가요화될 조짐이 처음으로 보인 것이다. 1910년대 중엽 쯤, 악단장이었던 프란시스꼬 까나로와 로베르또 피르뽀는 악기 편성에 있어 결정적인 변화를 단행했다. 비센떼 그레꼬가 1911년에 했던 반도네온 2대, 바이올린 2대, 피아노와 플루트의 6인조 편성을 토대로 하되, 플루트를 빼는 대신 더블베이스를 추가한 것이다. 이로 인해 땅고 전문 악단인 orquesta típica는 날카롭고 선명한 음색과 깊이 있고 중후한 음색이 어우러진 색깔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로 이러한 편성이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6인조sexteto로 편성된 훌리오 데 까로Julio de Caro의 orquesta típica
까나로나 피르뽀 악단의 레퍼토리에 무수한 땅고 곡들이 있었지만, 이 시기 만들어진 땅고 곡들 중 콕 집어 언급해야 할 한 곡이 있다. 1917년 우루과이 출신 청년 헤라르도 에르난 마토스 로드리게스Gerardo Hernán Matos Rodríguez가 자신이 일원이었던 학생 연합체를 위해 행진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을 땅고로 편곡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당시 몬테비데오 까페에서 악단과 함께 연주하고 있던 로베르또 피르뽀에게 이 곡을 들고 갔고, 약간의 손질을 거친 끝에 땅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노래(aka 땅고 애국가)인 <라 꿈빠르시따La Cumparsita>가 탄생했다.
<La Cumparsita> 악보. 표지 그림을 보면 깃발에 '우루과이 학생 연합'이라고 쓰여있다.
일찍부터 땅고 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부르긴 했지만, 음담패설처럼 저속한 노랫말들이 많았고, 1890년대와 1900년대에 쓰인 땅고 노랫말들은 대부분 가벼운 분위기에 별 내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걸출한 가수들이 등장하는 땅고 황금기 이전의 Guardia Vieja 시기에도 약간의 명성을 얻은 가수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돋보이는 인물로 앙헬 비졸도Angel Villoldo를 들 수 있다. 그가 쓴 가사는 대부분 1인칭 시점으로 불량배와 포주들의 세계를 담아낸 내용이었는데, 땅고가 원래 속했던 고향을 상기시키는 것이긴 했지만 그닥 깊이 있거나 세련되지는 못했다. 땅고 노랫말에 깊이와 세련미를 담아내는 일을 완성한 것은 빠스꾸알 꼰뜨루시Pascual Contursi였다. 땅고의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구둣가게에서 일했지만 연극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1910년대 중반 몬테비데오에 살 때 물랭루쥬나 로얄 피갈 같은 캬바레에 드나들며 땅고 곡들에 맞춰 가사를 짓기 시작했다. 여러 땅고 곡들 중 그가 가장 꽂혔던 노래는 피아니스트 Samuel Castriota가 작곡한 <Lita>라는 곡이었는데, 그가 이 곡에 붙인 가사는 실연의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자의 이야기였고 룬파르도lunfardo를 활용하여 맛을 살렸다. 마침내 제대로 된, 이후 땅고 가사들의 모델이 될 만한 가사가 나온 것이다.
<Lita> 악보 표지
꼰뜨루시는 1916-1917년 경 몬테비데오에서 2인조 포크 가수를 만났는데, 그들이 바로 당시 아르헨티나 쇼 무대에서 가장 핫했던 듀오 까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과 호세 라싸노José Razzano였다. 가르델은 꼰뜨루시가 쓴 <Lita>의 가사가 마음에 들어, 얼마 후 <Mi noche triste(나의 슬픈 밤)>로 제목을 바꿔 공연에서도 부르고 음반도 녹음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까를로스 가르델은 포크 음악으로 국내에서 인기를 누리며 만족하고 있었고, 자신이 레전드 땅고 가수이자 20세기 남미 최고의 대중가수가 되리라는 걸 알 도리도 없었기에, 그가 온전히 땅고 가수로 전향하는 것은 1920년대 초가 되어서였다. 1910년대까지는 아직 가르델-라싸노 듀오를 비롯한 포크/컨트리 뮤지션들이 아르헨티나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포크 음악은 이제 곧 황금기를 맞이한 땅고에 최고의 자리를 내줄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