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근·현대사]35 한국 역사 1백년대 제1대사건.
이승만이 왕조시대 사람이어서 권위적이었다?
김갑수 | 2014-10-31 14:36:17
이승만이 왕조시대 사람이어서 권위적이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산책』 시리즈는 매우 의미 있는 저작물이다.
이 책들은 194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우리 현대사를 23권의 방대한 분량에 담아 놓았다.
이전의 근대사 산책 시리즈 10권을 포함, 무려 33권에 달하는 강 교수의 저작물은 우리 근·현대 역사의 정치,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 부문까지 세심히 기술하고 있다. 저널리즘 전공자로서 이만 한 역사물을 집필했다는 것은 강준만 교수의 저력과 성실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강 교수가 보이는 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점과 견해는 대단히 합리적이고도 상식적이다.
그의 저작물이 갖는 미덕은 별도로 논의하기로 하되, 다만 강 교수의 역사적 관점 중에서 나의 역사적 관점과 크게 다른 것이 있어서 이 글에서 논의해 보기로 한다.
“이승만은 1875년생, 김구는 1876년생이었다. 이는 이들이 30년 가까이 왕정체제하에서 산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해방정국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이미 70대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생물학적 연령으로 인해 극복하기 어려운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 체제는 이조 왕정시대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이승만의 전통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으로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김구는 이승만과는 다른 인물이었지만 동질적인 세대적 특성은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상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권2, 267쪽
강준만 교수는 이런 취지의 인물평을 1940년대 편은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 편에서도 반복하여 강조해 놓았다.
나는 이승만과 김구의 인물됨을 평가하는 그의 견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인격적 결함을 말하면서 그 원인을 조선왕조에서 찾는 식의 견해에는 정면으로 반대한다.
왕정체제의 인물이라서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이 있었다?
이런 진단은 한국 지식인의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구교양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조선에 대한 몰이해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의 말대로 이승만과 김구는 30년 가까이 왕정체제에서 산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격이 조선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느 면에서 그들은 조선왕정체제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인물들이었다.
김구는 물론 이승만 역시 과거에 실패한 전력이 있다. 특히 이승만은 과거에 다섯 번씩이나 낙방했다.
이승만· 김구와는 달리 대단히 조선적이었던 인물은 의외로 많다.
그 중 이상설 선생을 통해 조선적인 인물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승만보다 5살이 많은
이상설 선생(1870~1917)은 1894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수 있는 학자'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고전적인 문인이었다. 이상설은 성균관교수를 역임하고 궁내부 특진관을 맡고 있을 때,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의 저의와 부당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으로 하여금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도록 했다.
그는 의정부 참찬으로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저지하기 위해 회의장 문을 밀치고 들어가려다 일본 헌병의 제지를 받게 되자 헌병 책임자의 어깨를 장죽으로 후려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상설은 고종에게 사직(社稷)과 함께 할 각오로 을사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또한 그는 종로 거리로 나가 군중을 상대로 민영환의 순국 자결을 알리는 가두연설을 하기도 하는 등 말 그대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이 포함된 밀사단의 정사(正使)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임무를 마친 그는 총독부가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해 놓고 있는 조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콜로라도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회의에 연해주 대표로 참가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이승만을 만난다.
당시 이승만은 국내에서 독립협회 사건으로 복역하다가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 조지워싱턴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상설은 연해주 대표로서의 소임 수행을 위해 미국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같은 연해주 대표였던 이승만과 다른 점이었다.
이것은 이상설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이승만의 성향을 알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이승만은 독립운동보다는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우선했으며, 그가 독립운동 내내 취했던 노선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어 독립하는 방법 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이상설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승희, 김학만, 정순만 등과 함께 흥개호 남쪽 봉밀산에 땅을 샀다.
그들은 100여 독립운동가 가정을 규합하여 이주케 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고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그는 일제가 조국을 병탄하자 독립결의선언서를 작성,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교포들을 규합했다.
그는 의병장 유인석을 필두로 하여 8624명의 독립운동가가 서명하는 거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선언서를 중국, 미국, 러시아 등의 정부에 우송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이름을 간직하고 한국인이라는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투쟁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을 의지를 갖고 있음을 내외에 천명한다.”
영어· 불어· 러시아어를 잘 알았던 이상설은 놀랍게 수학에도 천부적 능력이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 수학서인 『산술신서』를 출간해서 청년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독립운동의 통합전선 구축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의병 세력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권업회 결성과 <권업신문> 운영, 광복군 사관학교 설립 운영, 그리고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 등 독립운동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되어야 할 주요한 사업들을 성사시켰다.
그는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의 추대를 받아 대한광복군 정부의 정통령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후 이상설은 국내 진공을 목표로 중국 대륙 내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헌신하지만 국제정세의 변화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상심이 워낙 컸던 탓인지 그는 병을 얻고 말았다.
그는 동지들의 주선으로 러시아 니콜리스크의 한 허름한 병원에 입원했다.
순수한 독립운동가의 좌절된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그는 회복되지 못한 채 이국 낯선 도시의 소독내 나는 병실에서 48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러시아의 차가운 강에 재로 흩뿌려졌다. 그가 남긴 유언은 참으로 침울하고 뼈아프다.
“광복을 못 이루고 죽은 자가 무슨 낯으로 고혼인들 조국에 가겠소?
나는 실패한 인간이니 내 몸과 유품을 전부 불태우시오.
그 재도 모두 바다에 날리시오. 아무도 내 제사를 지내지 마시오.”
이상설 선생은 복벽주의자였다. 복벽주의란 왕조를 부흥하고 임금을 복권시켜야 한다는 주의를 말한다.
이 점에서 선생은 누구보다도 철저히 조선적인 지식인이었다. 조선에 적응하지 못한 이승만과 조선에 잘 적응한 이상설은 어떻게 다른가?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산책>과 이상설 선생
한국 역사 1백년대 제1대사건
부질없는 ‘친미의 맹목’을 깨뜨리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황당하면서도 안타까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대외관계사로 볼 때 가장 황당하고 안타까운 것은 미국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친미주의 성향이 아닐까 한다. 최소한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우리 민족은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후원자였음을 알지 못했다.
지식인들의 무분별한 미국 선망은 민중에게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경우가 더욱 심각했다.
1941년부터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게 되자 조선인의 미국 경도는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8·15를 맞이한 한국인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간주했다. 미군이 기실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우리 민족 분단의 제1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이 시시콜콜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나의 어린 시절만 해도 순진한 한국인들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다가 미군이 승리하는 장면이 나오면 환호성을 내며 박수를 쳤을 정도였다. 한국인들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시기 내내 미국에 대해 부질없이 호감을 보였다.
한국인들은 4·19 직후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리면서도 맥아더의 동상에는 꽃다발을 남겨 놓았다.
한국인들은 당시 시위군중을 헤치고 경무대로 이승만을 찾은 매카나기 주한 미 대사에게도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이어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방한 때에는 서울시청 광장에 수만 명의 환영인파가 운집했다.
이런 분위기는 박정희 정권 시기에도 큰 차이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1985년 5월 23일 서울 5개 대 남녀학생 73명이 서울 미문화원을 기습 점거, 농성을 벌이는 사건이 발발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특히 현대사에 둔감한 기성세대는 당혹과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학생들은 광주민주화운동 계승기간을 맞아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폭로·규탄하기 위해 미문화원 점거농성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미문화원 도서관에 들어간 대학생들은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과하라’는 등의 구호를 내붙이고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 72시간 만에 스스로 농성을 풀고 나와 경찰에 모두 연행됐다.
▲미 문화원 점거농성을 풀고 나오는 대학생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과 고려대생 김선동(전 통합진보당 의원) 등 20명이 구속, 기소됐다.
재판은 사법사상 초유의 피고에 의한 재판거부사태·묵비권행사·재판부기피신청·변호인단 전원 사임 등 파란으로 점철되었다.
이 사건은 과연 미국이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질문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을 우리의 든든한 동맹, 심지어 우리의 든든한 수호자로 여겨왔던 무지몽매한 한국인들을 각성시킨 계기가 된 것이었다.
이런 각성은 결국 외세란 누구건 간에 탐욕적인 약탈자 또는 침략자일 따름이라는 점을 인식시켰다.
최근 들어 미국이 1901년부터 비밀리에 일본을 적극 추동하여 조선 침략을 부추겼으며, 1904년 러일전쟁 때에는 7조 엔이나 되는 전비를 일본에 지원하여 일본의 조선 독식을 사주했다는 충격적인 증언과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일찍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사연구초』에서 ‘조선역사 1천년대 제1대사건’이라는 레토릭을 구사한 바가 있다.
단재에 의하면 한국사는 고유사상이 외래사상과 투쟁하는 역사, 즉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며, 묘청의 난은 고유한 낭가사상이 유교사상에 패함으로 해서 민족이 쇠하는 근본적 계기가 된 ‘1천년대 제1대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1985년에 벌어진 한국 대학생들의 미 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이야말로 ‘한국역사 1백년대 제1대사건’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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