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봉집 제9권 / 묘표(墓表) / 민정중 저
이씨 묘기(李氏墓記)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전평군(全平君) 경정(慶禎)의 딸이다. 어머니는 우씨(禹氏)인데, 그 언니가 여자에 대한 가르침을 잘 받들어 세상에서 ‘어진 여성’이라는 칭송이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기르는 데 적절한 방도가 있었다.
15세가 되어 마땅히 출가할 사람을 택할 적에 내가 듣고서 청하자, 그 어머니와 언니가 모두 말하기를 “민 학사(閔學士)는 유학자이고, 내 딸은 성품과 행실이 현명하고 정숙하니, 내 딸로 하여금 수건과 빗을 들고 시중들게 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고는, 마침내 날을 택하여 시집보냈다.
나는 당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가 발탁되어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고, 북관(北關 함경도)에 관찰사로 나갔다. 관직을 그만둔 뒤 산골로 들어갔고, 배척을 당해 남쪽으로 귀양을 갔는데 모두 따라갔다. 내가 부름을 받아 재상이 되었을 때에도 또 뒤따라 서울로 돌아왔으니, 함께 근심과 즐거움을 나눈 지 거의 30년이었다.
때때로 추워도 솜옷을 입지 못하고, 굶어도 밥을 지어 먹지 못한 적이 있었지만, 또한 있는 힘을 다해 가족들을 건사하였다. 또한 사양하고 받는 데에 매우 조심하여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함부로 취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더욱 예법을 익히고 일마다 조심하여 제전(祭奠)을 도왔다.
갑자년(1684, 숙종10) 5월 13일에 앓던 병도 없이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그 태어난 해인 숭정(崇禎) 임오년(1642, 인조20) 정월 5일부터 따져 보니, 향년 43세였다. 4남 3녀를 낳았으니, 큰딸은 통덕랑(通德郞) 이훤(李煊)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아들 후성(厚成)은 3세에, 성(成)은 12세에, 지성(志成)은 4세에, 넷째 아들은 이름을 짓지도 못하였다. 둘째 딸은 4세에, 막내딸은 5세에 모두 요절하였다. 또 임신을 하여 이미 만삭이 되었는데 분만하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아아, 참혹하도다. 둘째 아들과 막내딸은 모두 선영의 왼쪽 산기슭에 묻었는데, 이해 6월 20일에 두 무덤의 위쪽에 장례 지냈으니, 그 체백(體魄)이 서로 의지하기를 바라서였다. 자손들에게 절기마다 묘소를 살펴 땔나무하고 가축 치는 아이들이 범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8명의 자식을 둔 어미가 끝내는 죽은 뒤를 부탁할 자식이 없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아, 슬플 뿐이다. 선영은 양주(楊州)의 경내 평구역(平丘驛) 서쪽 소가 울면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으니, 큰 강과의 거리는 10리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여흥(驪興) 민정중 대수(閔鼎重大受)이다. 을축년(1685, 숙종 11) 봄에 또 셋째 아들 지성을 천장(遷葬)하여 묘 앞에 함께 부묘하였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서종태 이주형 김건우 유영봉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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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氏墓記
完山李氏。全平君慶禎女。其母禹。其姊有服事女敎。世稱爲良姆。自幼訓養有方。及年十五。擇所宜從。余聞而求之。其母與姊具曰。閔學士儒者。吾女性行明淑。可使侍執巾櫛。遂選日而歸之。余時爲弘文館校理。其擢授東萊。出按北關。解官入峽。遭斥謫南。皆從之。及余被召作相。又從還京師。與同憂樂者。殆三十年。有時寒不能絮。飢不能炊。亦能竭力以濟家衆。又能致謹於辭受。不敢一毫妄取於人。晩益習禮勤事。相助祭奠。甲子五月十三日。無病暴絶。距其生崇禎壬午正月初五日。得年四十三。產四男三女。長女適通德郞李煊。早夭。男曰厚成三歲。曰成十二歲。曰志成四歲。其四未名。次女四歲。季女五歲。皆不育。又有娩已滿而未及分。嗚呼慘矣。其喪第二男及季女。皆瘞之先壟之左麓。用是年六月二十日。葬于二瘞之上。蓋欲其體魄相依也。遺令子孫時節省視。禁戒樵牧。孰謂八子之母。終無身後之托耶。嘻噫。可悲也已。先壟在楊州境平丘驛西牛鳴之地。去大江不十里 。余驪興閔鼎重大受也。乙丑春。又遷第三男志成之葬。同祔于墓前。<끝>
老峯先生文集卷之九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