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 전의 우리는'
2010-01-28 13 : 56 : 52.
이상설, 순종 황제를 부정(否定)하다.
1909. 8. 29.~1910. 8. 29.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이준(李儁)의 무리들은 어떤 흉악한 성품을 부여받았으며 어떤 음모를 품고 있었기에 몰래 해외에 달려가 거짓으로 밀사라 칭하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킴으로써 나라의 외교를 망치게 하였는가? 그들의 소행을 궁구하면 중형에 합치되니 법부에서 법률대로 엄히 처결하라.'(순종실록, 1907. 7. 20.)
1907년 순종이 대한제국의 통치대권을 고종으로부터 넘겨받은 후 첫 번째로 내린 조서였다. 그 결과 8월 8일 열린 궐석재판에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상설은 교수형 선고를 받는다. 그는 순종의 제1호 사형수가 되었다. 탁지부(度支部)와 의정부(議政府)의 관료를 지내며 일본의 침략성을 간파한 이상설은 을사늑약(1905년) 후 고종에게 '순국을 각오한 조약파기'를 여러차례 요청했고, 종로의 수많은 민중앞에서 통곡하다가 머리를 돌에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다.
이듬해 중국으로 건너가 북간도의용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정사(正使)로 파견되었다. 일본의 방해로 임무완수에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상설은 고종의 독립외교 밀사와 순종의 제1호 사형수라는 모순된 신분이 된다. 이후 그의 삶도 두 임금 중 하나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09년 이상설은 미국으로 건너가 국민회 결성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황실이 일본에 이용되고 있다고 통탄하는 논설을 하와이 '신한국보'에 발표했다. '황실은 나라를 망하는 이로운 그릇이 아니라'는 글이 4회(4월 20일, 27일, 5월 4일, 11일)에 걸쳐 연재되었다.
'임금이란 것은 인민이 자기의 사무를 위탁한 공편된 종뿐이요. 인민이란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저의 직역을 진력케 하는 최초 상전이라. 종 된 임금이 사무와 직역을 다하지 못 할지면 상전된 인민의 책망을 도망키 어려우니, 임금이 나라를 보호하고 인민을 구조하는 임무를 게을리 한다면 처단되거나 축출되어야 한다.
루소는 나라가 임금이아니라 인민의 것이라고 하면서 자유평등을 말하였고, 영국은 임금을 처단하거나 쫓아내기도 하여 현재의 존경받는 임금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현재 대한의 황제는 망국의 이용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우리야 차마 황실로 우리인민을 멸망케 하는 좋지 아니한 기계로 보고 우리의 돌과 활을 한 번도 발하지 못하겠느냐. 슬프다.
우리 인민이여.' 이상설은 국가를 멸망하게 하는 황실을 부인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는 망국을 돕는 순종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1910년 6월 그는 러시아에서 유인석 등과 함께 13도 의군을 편성한 뒤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러시아로 파천할 것을 촉구했다.
고종을 복위시키고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1915년에는 중국 상해에서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등과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결성하여 고종을 당수로 추대했다. 1917년 연해주 니코리스크에서 병사하기 직전 그는 "조국의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