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장릉(金浦章陵)
정의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조선 제16대왕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元宗)과 그의 비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의 능.
내용
사적 제202호. 원종의 묘는 처음 양주에 있던 것을 1627년(인조 5)김포에 개장(改葬)하여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고, 1632년 능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이어 상설제도
(象設制度)가 원제(園制)임을 미안하게 여겨 왕릉제(王陵制)로 석물(石物)을 바꾸었다.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두어 쌍릉을 이루고 능 앞에 각각 혼유석(魂遊石) 1좌씩을 두었고
, 중간에 장명등(長明燈)을 세웠으며, 능 남쪽 제2계(階)와 제3계에 문무석(文武石)
한쌍씩을 세웠다. 추봉된 다른 능의 전례를 좇아 난간이 생략되었다
.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대전회통(大典會通)』
『서울육백년사(六百年史)-문화사적편(文化史蹟篇)-』(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사적편(史蹟篇) 상(上)-』(문화재관리국, 197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릉산 산책로 전코스중 장릉에서 하부 절반정도 돌아봄
블친구이신 "짱아님"이 자주 가시는 장릉 풍경길을 가본다
오랫만에 아내랑 둘레길 걷기를 같이 해본다
부천 대학교에서 9008광역 버스를 타고 김포 사우고에 내려 종합 경지장 쪽으로 발걸음을 한다
요즘 날씨가 맑고 자외선 지수가 매우 놓은것 같다
그늘이 많고 코스가 험하지 않은 곳을 찾다 보니 이 길이 딱인 것 같아 선택해 보왔는데
그런대로 괜찬은 듯 ...
김포 종합운동장을 끼고 돈다
내가 어렸을때 가장 존경하던 국가대표 이회택 선수의 고향 인 김포
이회택 축구교실이 운영되고 있는 곳이네 ....
김포 사우동에서 출생하여 한양대학교 룰 거친 국가대표 이회택
이젠 전설이 되어버린신 분이다
나중에 대한 축구협회 임원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햇볕이 강렬하게 비추고 있으나 시원한 가로수 덕분에 걷기는 그런대로
시민회관을 지나고
김포 시청이 보인다
김포시청을 좌로 끼고 돈다
약 1.5km 정도 20여분 걸으니 장릉앞 음식점이 몇개 보이고
세계 문화유산 조선 왕릉 김포 장릉에 도착한다
조선 왕릉 중 한글로 장릉은 3개가 있다
영월의 장릉(莊陵)은 제6대 임금 단종의 릉,
파주 장릉(長陵)은 제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릉
그리고 김포의 장릉(章陵)은 인조의 부모 추존왕인 원종과 인헌왕후의 릉이다
그래서 이를 구분하기 위에 앞에 지역명과 함께 부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장릉 경내를 트레킹한다
아내가 오른쪽 복숭아뼈 쪽이 아프다고 하니
평지나 천천히 걷기로 한다
김포 장릉(章陵)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장릉은 제16대 인조의 부모인 원종(1580~1619)과 인헌왕후(1578~1626) 구 씨를 모신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태도가 신중하고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1604년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 했던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다.
왕을 뜻하는 '종'이라는 묘호를 갖고 있음에도 원종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까닭은 그가 생존 당시의 왕이 아니라 추존된 왕이기 때문이다.
원종은 사망할 때 정원군인 '군'의 신분이었으므로 양주 곡촌리(현재 남양주시 금곡동) 처갓집 선산에 초라하게 묻혀 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이 왕이 되자 이미 고인이 된 정원군은 정원대원군으로 높여졌고,
10년 후에 묘호가 원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묘도 원으로 추승되어 흥경원이라 했다.
이후 원종의 무덤은 현재의 자리인 김포시로 옮겨지면서 장릉이 되었다.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 남다른 대접을 받은 셈이다.
인헌왕후는 아들이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이 되었고 궁호를 계운궁이라 했다.
1626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김포 성산 언덕에 예장했다가 원종의 능인 현재 자리로 천장했다.
타 왕릉에 비해 추존왕이라 그런지 빈약하다
장릉의 구조
정원군은 원래 왕이 아니었으므로 장릉 역시 원제인 육경원으로 조성되었지만 왕으로 추존된 뒤 왕릉제에 따라 석물을 바꾸었다.
육경원을 의미하는 비석의 토대를 2008년에 발견해 비각 옆에 전시했고, 비석도 언젠가 발견될 것으로 추정한다.
재실은 능침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데 현재 관리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솟을대문인 정문은 남다를 것이 없지만 재실 뒤로 후문이 열려 있다.
기본적으로 재실 문은 정문 외에는 좌·우측에 설치하는데 뒤쪽으로 문을 만든 까닭은 그만큼 현실적인 활용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육경원에서 왕릉으로 변경되었지만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은 쌍릉이다.
봉분은 자연과 맞닿은 부분에 아무런 조각이나 무늬도 새기지 않은 초석을 둘렀고 혼유석을 놓았다.
2계와 3계에는 문·무인석을 한 쌍씩 세웠다.
팔각 장명등에는 꽃무늬를 화려하게 새겼으며 석호는 앉아 있지만 석마, 석양은 일반 석물과는 달리 배 부분이 막혀 있지 않아 배가 보인다.
선조-광해-인조 가계도
역사에 기록된 정원군 원종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본다 (백과사전에서 펴온글)
정원군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비범한 관상으로 부왕인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선조가 사망하고 이복형인 광해군이 왕이 되자 정원군은 잠재적인 정적으로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특히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 김 씨의 무덤과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 때문에 광해군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은 성품이 호탕하고 인물이 훤칠하며 무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마침 능창군이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는 상소가 들어왔다.
그러자 광해군은 곧바로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죽였다. 광해군 7년(1615)에 일어난 이른바 '신경희 옥사'다.
정원군이 더욱 낙담한 건 아들을 잃은 지 2년 후였다.
지관 김일룡이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자"라고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새문동터는 정원군이 살던 집터로 광해군은 결국 그곳을 빼앗아 경덕궁(현재의 경희궁)을 짓게 한다.
정원군은 광해군이 나머지 아들들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술로 달래다가 40세의 나이에 화병으로 죽는다.
그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불안한 광해군은 정원군이 무덤 자리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도록 장례 기간을 단축하라고 재촉하며 조문객을 감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새옹지마'에 들어맞는 상황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정원군과 광해군의 싸움에서 광해군이 완승했다.
그러나 정원군이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623년에는 광해군이 쫓겨나고 정원군의 큰아들인 능양군이 왕에 오른다.
광해군이 정원군에게만 신경을 썼지 실제로 왕의 기운은 능양군에게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원군의 부인인 인헌왕후는 아들이 왕이 되자 남편의 한을 풀듯 빼앗긴 새문동 집터(경덕궁)로 되돌아가 몇 년을 살다 1626년에 숨을 거둔다.
편안한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많다
해충이 많아 끈끈이를 설치해 놓왔다
크레 한바퀴 돌아 아래 장릉지로 내려온다
연못에 말풀이 자라 물 반영은 아예 없다
한바퀴 돌아 재실이 있는곳으로 돌아 온다
잘릉에서 나와 장릉 울타리를 끼고 이제 본격적으로 오른쪽 방향으로 둘레 산책길로 ..
뜨거운 도로로도 나 왔다 들어가길 몇차례 계속 하면서 걷는다
조금전 장릉 영내속에 있었던 정릉지를 밖으로 돈다 ㅋㅋㅋㅋ
고려 공원 쪽으로
이곳에서 아내가 발목이 아프다고 해서 더이상 걷기를 중단하고 고려공원 묘지 공원으로 내려가서
고려묘지공원
마을 아파트 촌으로 ...
55번인가 신한2차 아파트 부근에 55번 인가 마을 버스 종점이 있어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사우고 쪽으로
점심 시간이라 쌈밥집에서 쌈밥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부천 집으로 향한다
이별의 김포비행장/ (59)
(離別의 金浦飛行場)
김영일 작사
김부해 편곡
안정애 노래
산데리아 졸고있는 김포비행장
대합실 구석에는 스피카가 운다울어
외로운 나를두고 떠나는 님아
모처럼 성공하고 돌아오세요
언제나 오실날만 기다리겠어요
♥
연분홍빛 안개나린 김포비행장
새파란 신호등이 내가슴을 울려주네
우렁찬 프로펠라 소리도 크고
나혼자 비행장에 외로히 서서
언제나 오실날만 기다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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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