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과 6.25 동란이 이어지는 파란 만장한 격동기 그 시절...목포상업학교, 항도여중, 문태중...등에는 훗날 유명한 시인, 소설가, 화가들이 된 조희관, 박기동, 박정은, 백두성, 백영수..등이 교사진으로 모여 들었다.
그중에서도 항도여중의 교장으로 부임한 소청 조희관은 가장 핵심적인 존재였다. 최현배의 제자(연희전문)로서 한글학자이며 수필가였던 조희관은 목포에 정주하면서 김우정, 이영식, 강보현등을 길렀고 6.25 직후에는 항도여중 교장직을 그만두고 다목동 차재석이 출자한 항도출판사 사장직을 맡는다. 그리고 다목동 차재석은 편집장을 맡는다. 그 시절 목포의 웬만한 문학 지망생이나 문학도들은 소청과 다목동 두 사람의 콤비네이션을 흠모하였다.
소설가 백두성은 차재석의 유고집 「삼학도로 가는 길」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략)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제갈량과 손을 잡고 일국을 이룩한 것처럼 소청 조희관 선생과 다목동 차재석 선생이 서로 만났기에 더욱 목포문학예술에 빛을 남기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소청선생이 60고개를 못 넘겼는데 다목동 선생도 어쩌면 그렇게 60고개를 못 넘겼을까? (후략)’
당시 ‘항도출판사’는 목포시 경동 목여중 앞에 있었다. 시설은 빈약하였지만 여기가 목포문화의 산실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월간지 <갈매기>, 주간지 <전우>...
등의 간행물을 주관 운영하면서 목포문인들의 다양한 작품 활동을 지원하였고, 거기 목포문단이 숨 쉬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었으니 실로 괄목할 문예활동을 주도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6.25 동란 직후 해군 정훈실의 위촉사업으로 위임받은 월간지 「갈매기」와 주간지「전우」등은 훗날 정치인이 되는 양순직 해군대위의 후원으로 간행되었다.
한 장씩 찍어내는 인쇄기와 닳아빠진 활자상자가 시설의 전부였지만 목포에서 발행되는 웬만한 잡지나 단행본은 모두 이곳 ‘항도출판사’에서 찍어냈고 목포여고의
「풍란」을 비롯한 중고등학교의 교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목포출신 문학도들이 이곳 항도출판사에 드나들며 예술적 자양분을 얻어내고 길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 소설가 박화성이 낙향하여 용당리에 있었고 목포에서 고고한 지조를 지키던 소청 조희관은 「철없는 사람」과 같은 수필을 써내고 있었다.
이 무렵 소청 조희관의 고귀한 인품을 흠모하여 많은 문인들이 따랐다. 훗날 조희관 선생을 평하는 후학들의 표현 몇 가지를 옮겨본다.
‘소청 조희관 선생님은 학과 같이 단아한 인상을 지니신 분이었다.’ ( 사진작가 박동호 )
‘그 분은 자애로우면서도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 이었다’ ( 시인 최하림 )
‘소청 선생은 나들이 때면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흰 고무신을 즐겨 신었는데 학자다운 덕망과 성자와 같은 온화한 인품으로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 ( 수필가 김수기 )
박화성의 소설집 ‘고개를 넘으면’의 출판기념회를 조희관, 차재석 두 사람이 주선해서 열었는데 장소는 ‘미네르바’다방이었다. 남농, 취당, 소송, 윤재우, 백영수, 고화흠, 양인옥, 백두성, 차범석, 양수아...등
많은 화가와 문인들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다방에는 늘 소청 조희관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앉아 토론이 활발했으나 소청은 좌중의 대화를 조용히 듣는 편이었고 그 곁에 다목동 차재석이 패기에 찬 눈빛으로 문학이나 미술 등에 관한 새롭고 신선한 정보의 보따리를 펼침으로써 동석한 백홍기, 양수아 화백등... 둘레의 사람들을 옴짝딸싹 못하게 하는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곤 하였다.
차재석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일면을 지니고 있는 조희관 으로부터 문화적 포즈를 배운 셈이다.
소청 조희관이 말년에 병석에 들어 누웠을 때의 이야기다. 차재석은 한쪽다리가 불편한 불구의 몸으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발에 신고 있는 하얀 고무신이 벗겨질 듯 벗겨질 듯 위태로워 보였으나 그런 것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시내 중심지에서는 멀고 먼 서산동 고개 마루턱에 살고 있는 조희관의 집까지 늘 걸어서 문병을 가곤 했는데 소청 조희관 존경하기를 스승보다 더 극진하게 대하였다.
다목동 차재석이 생전에 썼던 조희관 선생에 관한 글의 일부분이다. ‘(전략) 정전이 된 인쇄기계를 손수 발로 구르면서까지 납품기일을 지키려 독려하시던 결백성, 시장 끼가 들면 막걸리 집으로 가자던 분이었고, 아침 커피 한잔을 마실 때가 수년래 유일의 즐거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분이 살림에 쪼들리면서 모든 것에 자신감을 잃어가더니 정신적인 절망상태에 겹친 병환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뼈와 가죽만으로 유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오래도록 걸은 내 인생의 길을 짚새기 신발에 닳아진 잔디밭 길처럼 분명치는 못하나 그러나 결코 달리 생길 수도 없는 자위가 났다 ’ ( 「철없는 사람」중에서 )
(다음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