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동(九月洞)
● 전재울
인천시청이 자리 잡고 있는 구월동은 구한말 주안면(朱雁面)에 들어있던 곳이다.
그때 주안면에 속해 있던 동네 가운데 성리(城里:성말), 구월리(九月里: 구월말), 지상리(地上里:못읫말), 전자리(前子里: 전재울) 등의 마을이 대략 지금의 구월동에 해당한다.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이들 4개 동네를 모두 합해 구월리라 불렀다.
이들 지역 전체를 대표하논 이름으로 구윌말의 ‘구월’이 선택된 셈인데, 이 이름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九月’이 원래 ‘龜月(구월)’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지금 시청이 있는 구월동의 중심 지역이 거북이〈龜〉의 등처럼 휜 언덕배기이고, 어찌 보면 반달〈月〉처럼 휘었다고도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만월산 줄기가 뻗어 내려온 시청 주변 언덕 지역 이 객관적으로 거북이나 반달의 모양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둘째는 옛날 이곳까지 인천 앞바다의 바닷물이 들어와 땅이 질었기 때문에 ‘구리울’ 또는 ‘구울’이라 불리다 ‘구월’이라는 한자로 옮겨갔다는 해석도 있다.
이는 우리말에서 지대가 낮아 늘 물이 괴어있는 땅을 ‘구레’라 하고, 바닥이 낮고 늘 물이 있거나 물길이 좋은 기름진 들을 ‘구렛들’이라 한다는 점에서 유추한 것이다.
이는 앞의 해석보다는 훨씬 논리적이다.
구월동의 지형(地形)은 시청과 교육청 주변 등의 높은 곳과 그 아래로 완만하게 내려간 저지대가 함께 있다. 이린 지형에서 낮은 지역에는 물이 자주 고여 질어지곤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예전에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세기말 인천항이 개항할 당시의 인천 지형도를 보면 ‘원조(元祖) 주안’인 지금의 부평구 십정동과 남동구 간석동 일대로는 바닷물이 들어왔지만 구월동 지역까지 밀려들어오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인근 승기천의 강물이 이곳에서 ‘굽어’ 흐르기 때문에 ‘구리울’이라 불렀다는 해석 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승기천의 물길이 예전에 어디로 흘렀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승기천은 그 물길이 만월산에서 시작한다는 주장과 수봉산에서 시작한다는 주장이 엇걀리고 있다. (- ‘승기천’ 에 대해서는 미추홀구 ‘관교동 + 승기천’ 편 참고)
더구나 지금은 상류 쪽이 모두 복개돼 예전에 어디로 흘렀는지 알 수가 없고, 하류 쪽은 직선화 사업으로 물길이 이전과 달라진 상태이다. 그런 만큼 구월동 일대 어디에서 어느 정도나 굽어 흘렀는지 판단할 길이 없다.
반면, 이들과는 전혀 다르게 언어학적 입장에서 구월을 ‘앞산’의 변형(變形)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
이에 따르면 구월의 ‘구(九)’가 원래 우리말 ‘앞’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잘못 전달되거나 발음이 바뀌어 ‘아홉’이 됐고, 이것이 다시 한자로 바뀌어 ‘九’가 된 것으로 본다.
또 ‘월(月)’은 순 우리말 ‘들’이 한자로 바뀌며 그 뜻이 잘못 전달된 것으로 해석한다.
‘들 ’은 ‘산(山)’ 또는 ‘높다〈高〉’는 뜻을 가진 단어로, 지금은 쓰이지 않는 우리 옛말이다.
하지만 중세국어까지만 해도 지금의 ‘달〈月〉’을 ‘들’이라 했고, 오늘날 ‘매달다’ 할 때의 ‘달다’도 ‘들다’에서 나온 말이다. 하늘에 있는 달이나 어떤 곳에 매다는 것이나 모두 ‘높다, 높은 곳’이라는 뜻과 연결돼 있다.
키가 큰 사람을 말하는 ‘키다리(키 + 달 + 이)’나 방안에 있는 ‘다락(달 + 악)’, 비스듬하게 높은 곳을 말하는 ‘비탈(빗 + 달)’도 모두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들 단어에서의 ‘달’ 역시 ‘높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달(〈들)’은 땅 이름에 많이 쓰이면서 ‘높다’는 뜻 외에 ‘크다, 넓다’ 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나 ‘성(城)’이라는 뜻까지 갖게 된다.
그런데 이 ‘들’은 땅 이름에 쓰인 경우, 그 이름이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내용이 잘못 전달되거나 조금 뜻을 달리해 ‘月(달 월)’이나 ‘鷄(닭 계)’, ‘桂(계수나무 계)’ 등의 글자로 다양하게 변했다.
‘月’이나 ‘鷄’의 뜻인 ‘달’ 또는 ‘닭’이 ‘들’과 비슷한 발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글자를 쓴 것이다. 또 ‘桂’는 ‘鷄’의 발음인 ‘계’와 같은 발음을 가진 글자 가운데 좀더 뜻이 좋은 글자를 가져다 붙인 것이다.
충청남도에 있는 ‘계룡산(鷄龍山)’이나 인천 계양구에 있는 ‘계양산(桂陽山)’ 등이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 생긴 이름이다. 인천 소래와 경계에 있는 경기도 시흥시의 ‘월곶(月串)’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름들의 중심 뜻은 모두 ‘들’, 즉 ‘높은 곳’이다.
하지만 산처럼 아주 높은 곳이 아니어도, 주변 지형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일 때 ‘들’이 붙기도 했다.
이렇게 해석해서 ‘구월’의 ‘월(月)’을 ‘들’이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구(九)’는 ‘앞’이라고 보았으니 결국 ‘구월’은 ‘앞산 마을’ 정도로 풀이가 된다.
그런데 이 해석의 문제는 ‘어디를 기준으로 본 앞산인가’에 있다.
우리 땅 이름에서 ‘앞’은 남쪽을 뜻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남쪽을 앞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곳곳에 남산(南山)이라는 산 이름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인데, 한 마을이나 도읍의 중심이 되는 곳에서 앞에 있는 산을 그냥 남산이라고 불렀다. 지금 서울의 남산도 조선시대 수도였던 한양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런 면에서 구월리를 보면,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의 중심인 도호부관아는 지금의 문학·관교동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구월리가 그 남쪽이라 부르기 곤란한 면이 있다.
또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의 진산(鎭山)은 오늘날 시흥시 쪽에 있는 소래산(蘇萊山)이었기에 그 북쪽에 있논 구월동을 ‘앞’이라 부를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진산’이란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지켜주는 중심 산으로 정하여 제사를 지내던 산을 말한다.
결국 구월의 ‘월’은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 ‘들’의 변형일 가능성이 무척 크지만, ‘구’의 해석에는 논란이 있다.
전재울
구월동 남동경찰서에서 남동공단 방향으로 100여m쯤 내려가다 보면 전재울 사거리가 나온다. 그 근처에 앞서 나온 전자리, 즉 ‘전재울’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 마을 이름에 대해서는 “옛날 이곳에 줄타기 등을 하던 광대나 무당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재주꾼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고 보니 마을 이름도 ‘전부 재주꾼’ 또는 ‘온갖 재주’라는 뜻에서 ‘전재(全才)’가 됐다는 얘기다.
‘울’은 마을, 고을, 골짜기 등을 뜻하는 우리 옛말 ‘골’이 ‘골〉굴〉울’의 단계를 거쳐 바뀐 것으로, ‘까치울’처럼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의 땅 이름에 많이 남아있는 말이다.
이 동네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동네에는 줄을 잘 타는 재인(才人)들이 많이 살았다. 그 중에서도 조선 헌종 때 김씨 성을 가진 줄타기의 명인이 있어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한 번은 궁중의 잔치에 불려갔는데, 임금이 그의 줄 타는 기술을 칭찬하며 ‘우두머리’라는 뜻의 ‘상봉(上峰)’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 뒤로 그는 김상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의 줄타기 묘기는 43 가지나 됐으며, 그의 제자들이 계속 줄타기의 맥을 이어 왔다. 그래서 이 동네에는 김상봉의 지도를 받은 줄타기의 명인들과 그들의 제자가 많았다. 그 외에도 다른 재주를 가진 재인(才人)들이 많이 살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피리 불기와 씨름에 큰 재주를 가졌던 임재근이라는 사람을 끝으로 이 동네에 재인의 맥이 끊겼다. 그는 평생 광대라고 천대받은 삶이 한스러워 자손들에게 그 재주를 끝내 전해주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따른다면, 동네 이름이 줄타기 등 여러 재주를 가진 명인들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야기의 근거가 분명치 않은데다, 아무래도 ‘전부가 재주꾼’이어서 전재울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는 단어의 구조상 억 지스려운 느낌이 강하다.
줄타기꾼의 슬픈 전설이 얽혀있는 경기도 연천의 ‘재인폭포’처럼, 이곳이 재주꾼 때문에 그 이름이 생겼다면 그것은 ‘재인리(才人里)’나 ‘재인골’ 또는 ‘재인말(마을)’과 같은 이름이 돼야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와는 다르게 전재울을 ‘재의 앞〈前〉 동네’로 보는 해석도 있다.
여기서 ‘재’는 성(城〉을 뜻하는 우리 옛말 ‘잣’ 이 ‘자’를 거쳐 변형된 형태다.
이렇게 풀이하는 사람들은 이곳이 인근 문학산에 지금도 일부가 남아있는 산성(山城)의 앞쪽 동네이기 때문에 ‘자앞마율' 또는 ‘자앞말’, ‘성앞말’ 등으로 불렸을 것이라 본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자’가 ‘재’로 발음이 바뀌어 ‘재앞말’이 됐고, 이 이름이 한자로 바뀌며 ‘전재’가 됐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을 뜻하는 ‘前(앞 전)’을 쓰고, ‘재’는 한자의 뜻과는 관계 없이 발음이 비슷한 ‘子(아들 자)’를 써서 ‘前子里’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일반적인 우리말의 한자 표현 방식에 따라 동네 이름이 ‘성전(城前)’이나 ‘재전’이 되지 않고 거꾸로 ‘전재’가 됐다고 하는 설명이 많이 어색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또 하나, 이 동네는 문학산의 남쪽이 아니라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前〉마을’이라 부르기 곤란하다는 문제도 있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전재울의 ‘전재’가 어떤 뜻인지 해석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