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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옮겨온 글
http://blog.naver.com/ngzzang1?Redirect=Log&logNo=40008146130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무엇이 문제인가
일 시 : 2001년 5월 21일-24일 저녁7시(총 4회)
장 소 :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
주 최 : 한국역사연구회·교보문고
일본 우익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원 덕
국민대 교수
1. 머리말
최근 들어 일본의 우경화 추세가 높은 파고를 타고 전개되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과거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려는 우파
지식인들의 주장이 부쩍 강해졌을 뿐 아니라 이 주장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확산되고 있으며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또 국회에서는 그간 심각한 논란을 빚어왔던 國旗, 國歌의 법제화가 이루어졌는가 하면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공식 참배문제가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다. 또 국회의 양원에는 헌법조사회가 공식 설치되어 평화헌법의 개정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태세이다.
우경화를 상징하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전개가 21세기 일본의 국가진로 설정과 관련하여 어떠한 함의를 지니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는 90년대 이후 전개되고 있는 일본 우경화의 양상을
개관하고 더불어 우경화를 촉진하고 있는 배경 및 요인을 분석한 후, 이러한 우경화 추세 속에 전개되고 있는 군사-안보정책의
변화상의 실태와 그것이 지닌 함의를 심층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일본은 냉전종결과 더불어 그간 유지해왔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안보정책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점차 국제사회에서 군사적 역할을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
안보정책의 전환은 한편으로 냉전의 종결에 따른 국제질서의 새로운 재편모색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에 대한 대응의 측면을 띠고 있음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차제에 평화헌법을 비롯한 법제적 제약 속에 묶여 있던 전후 일본의 국가체제를 전면적으로 재편하여 새로운
국가진로를 설정하려는 나름의 계산된 의도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안보정책의 전환을 통해 일본이 추구하려고 있는
국가목표는 이른바 군사적 보통국가의 실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2. 일본의 우익/우경화
일반적으로 우경화란 용어는 이념적으로 보아 우익적 경향이 강화, 확대되어 가는 사회현상을 가르키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우경화를 논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우익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작업일 것이다. 먼저 우익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보수적, 국수적인 사상경향 혹은 그러한 집단이나 인물"을 지칭하며 한편으로 파시즘, 극단적 민족주의, 초국가주의와도 동일시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전후 일본에서 흔히 사용되는 우익의 개념 속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이념을 지니면서도 폭력행위를
수반하는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좌익과 우익으로
대별하는 사고는 구미에서 수입된 것이다. 그러나 구미와 일본에서의 좌,우익에 대한 이해는 다르며 일본의 경우에도 전전과 전후의
이해에도 차이도 있다. 좌익, 우익의 구별은 1789년 프랑스 혁명시 소집된 3부회에서 국왕의 우측에는 귀족과 특권승려가 위치하고
좌측에는 신흥 제3세력이 배치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좌석배치는 혁명의 결과 태어난 국민회의에도 계승되어 의장의
우측에는 온건파가, 좌측에는 급진파가 앉았다.
좌익과 우익의 정치적 구별이 일본에 언제 도입되었는가는 분명치 않지만 대체로
러시아 혁명 후라고 추측되고 있다. 일본에서의 좌익과 우익의 구별은 구미와는 좀 다르다. 그것은 전후에 있어서 특히 현저하다.
전후의 일본에서는 좌익이라는 언어자체가 거의 死語가 되어 버리고 혁신 또는 진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혁신이라는 것은
본래 1930년대에 일본정치의 현상을 타파하고 당시 융성하고 있던 나치스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을 본받아 강력한 전체주의적 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사회주의자의 경향이 강한 입장을 의미하는 우익적인 사고방식의 일종이다. 그것이 전후에 전전의 혁신에 숨겨져 있던
우익적 이미지가 희미해짐과 동시에 좌익정당이 혁신을 지칭하게 되었다. 전후의 혁신은 사회주의 혁명을 연상시키는 좌익보다는 온건한
이미지로 보수보다는 전향적이고 신선하며 또 청결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 전후에 있어서 현행헌법의 옹호를 강조하는 좌익정당이
스스로 좌익이라고 자칭하는데는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후 일본에서 좌익이 거의 死語가 됨과 더불어 우익의
이미지도 극히 단순화되었다. 전후 일본에서 우익이라고 하면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심 한복판에서 제복을 입고 천황을
찬미하거나 군가를 부르며 극단적인 주장을 토해 내는 극소수의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파괴적이며 과격한
행동에만 몰두하는 일종의 폭력단과 비슷한 존재로 보는 것이 일본인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우익이 나쁜 자들이라는 것은
일본에서는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공리와 같은 것이며 특정한 인물을 공격할 때 저자는 우익이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정도이다.
이렇게 볼 때 일본사회의 이념적 정향의 변화를 지칭하는 개념으로서의 우경화란 용어를 위에서 논의한 우익과
직결시켜 논의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극단적인 주장을 내걸고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우익의 존재는 일본사회 속에서
일종의 일탈집단으로서 간주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치안당국에 의해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는 예비 범죄집단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다. 전후일본에 있어서 우익이란 대부분의 일본인의 일상적인 삶과는 유리되어 있는 매우 특수한 소수집단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다지
큰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논의하는 일본의 우경화가 이와 같은 우익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상기의 우익이 강화된다거나 이들에 동조하는 세력이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 현상에 관해서는 사전적인 정의에 따지기에 앞서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상식으로서 정착되어 있는 의미 내지 이미지가 이미 존재한다. 즉, 보통 일본의 우경화를 말하는 경우, 네 가지의 핵심요소와
연관시켜 논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네 가지 요소란 첫째로 과거 일본의 침략사에 대한 역사인식, 둘째로 평화헌법에 대한 개정 입장,
셋째로 이념적으로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에 대한 편향, 마지막으로 군사-안보문제에 있어서의 자주국방론의 입장이다.
첫
째, 19세기 명치혁명 이후 일본이 감행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역사인식 문제는 단순한 역사해석의
문제를 넘어서 향후 일본의 국가진로 향방을 가늠하는 지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문제를 우경화와 연관시켜 파악할 수
있다. 즉, 이 때 말하는 우경화란 일본이 저지른 과거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하는 역사인식의 경향이 강화되는 현상을
지칭한다. 역사인식의 우경화 현상은 흔히 정치가나 각료를 주체로 하는 망언의 표출이나 과거전쟁의 전몰자의 위패를 안치해 놓은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공식참배 강행으로 표현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 침략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역사교과서의 서술을 변경할
것을 요구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종군위안부를 비롯한 전쟁이나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회피하는 언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둘째, 평화헌법의 개정을 주장하는 흐름을 우경화와 관련시켜 파악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평화헌법은 전후
일본이 다시는 국제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하는 침략국으로 부활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미 점령당국의 강력한 의도 하에 제정된 제도적
장치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주지하다시피 평화헌법의 제9조에는 근대국가의 기본속성이라 할 수 있는 군사력의 보유와 교전권을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평화조항이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전후 일본의 보수적인 정치가들은 평화조항이 미군정에 의해 일본에 채워진
족쇄로서 이의 개정을 통한 자주적 헌법을 만들 것을 주장해왔다. 실제로 전후 줄곧 압도적인 우월정당 일본을 지배해 온 자민당은
55년 결당 당시부터 평화헌법의 개헌을 당헌으로 공식 채택하였으며 50년대 하토야마(鳩山一郞)나 기시(岸信介) 수상이나 80년대
나카소네 수상은 헌법개정을 추진한 바도 있다. 현실적으로 혁신세력의 반발에 부딪쳐 현재까지 헌법개정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나
평화헌법을 대신하는 자주적인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은 보수세력의 총의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이념적인 성향으로서
국제협조주의나 코스모폴리타니즘 보다는 자국중심의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고가 강화되는 현상을 우경화와 연관시켜
파악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이념적 우경화 경향은 흔히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의 존재를 신성시하거나 절대화하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히노마루나 기미가요와 같이 일본고유의 국가심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 일본민족에
대한 우월감의 강조나 맹목적인 애국심의 고취를 강조하는 현상도 이념적 우경화의 일단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은 경우에 따라
배외주의적 태도로 발산되어 반미주의나 중국에 대한 무시 혹은 아시아에 대한 멸시 등의 언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넷째,
군사-안보문제에 대한 입장으로서 자주적 방위노선과 자위대의 국제적 역할확대를 적극적으로 제창하는 것을 우경화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전후 일본의 안보정책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하위체계로서 기능해왔기 때문에 일본 나름의
독자노선을 추구하는데는 구조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으며 현재에도 그러한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주일미군의 존재나
미일안보체제가 말해주듯이 일본의 안보정책은 기본적으로 대미의존적인 틀 속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과연 일본의 군사력 증강이나 자위대의 국제적 역할확대 추세를 우경화라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냐의 문제이다. 즉,
군비증강이나 자위대의 역할확대 움직임이 철저하게 미일안보체제의 대미협조 틀 속에서 진행될 경우 그것을 일본의 우경화라고
속단하는데는 약간의 유보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일본의 군비강화 및 군사적 역할의 확대는 일본의 국가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관계없이 일본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제고시키고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완전히 우경화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일본이 펼치는 적극적 안보정책이 우경화와 일정한 함수관계에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3. 일본사회의 우경화 추세
90년대 중반이후 일본사회의 이념적 변화추세를 한 마디로 특징지운다면 그것은 우경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99년은 전후 일본역사에서 기억되는 한해로 기록될 만큼 일본의 우경화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동경도지사 선거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정치가로 알려진 이시하라 신타로가 당선되었다. 또 가이드라인 관련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전후 최초로 중, 참의원에서 개헌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헌법조사회가 설치되었으며,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법제화가 이루어지는 등
일본 우경화의 징표들이 99년 한 해 동안 봇물 터진 듯 표출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건들이 정당정치의 차원 혹은
국민여론 차원에서 별다른 커다란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 흐름은 이미 일본국내의 어떤 세력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전개는 불과 10년 전만 하다라도 일본에서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지던 것이었다는 점에서 격세지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우경화를 인상 지우는 몇가지 사건 및 현상들을 조금 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첫째, 군국 일본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완전히 복권되었다. 일본국회는 99년
7월 22일 중의원에 이어 8월 9일에는 참의원에서 그간 논란이 되어왔던 국기-국가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일장기로 불리운
히노마루와 천황의 찬가인 기미가요가 패전 55년만에 다시 일본의 공식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사회의 이념적 기류로
파악하면 보수우경화로의 회기를 뜻하는 것이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과거 침략적인 일본군국주의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제기된 일부의 반대는 묵살되고 이미 일본국의 상징으로서 국민의식 속에 충분히 에 정착되어 있다는 찬성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법안의 중의원 통과에서 주목되는 것은 찬반표의 분포이다. 찬성이 403, 반대가 86표라는 사실은 일본국민의
대다수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복권을 요구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간 일본사회에서 히노마루의 게양과 기미가요의 제창은
일종의 사회적 금기였다. 각급 학교 등의 공공기관의 공적 행사에서 그 같은 금기는 불문율로 지켜져 왔다. 거기에는 과거사에 대한
국민적 참회의 실천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사회적 관행은 이제 공식적으로 끝났다. 일본대중은 이제 국기와
국가의 부활을 통해 일본 민족주의 회생을 실감하게 되었다.
둘째, 99년 7월 일본 중의원은 헌법조사회 설치를 위한 국회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로써 평화헌법 시행 52년만에 처음으로 국회 내에 헌법문제를 논의하는 정식기관이 설치되게
된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 정권 때 헌법조사회가 설치된 적이 있지만 그때는 개헌으로 직결될 것이라는 제1야당 사회당의 반발로
국회가 아닌 내각에 두었고 결과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2000년 정기국회 때부터 중,참 양원에 설치될 새 헌법조사회는 국권의
최고기관이자 개헌발의권을 가진 국회에 설치된다는 점에서 과거 조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헌법개정 논의의 초점이 군사력 보유와
전쟁의 포기를 명기한 제9조에 개정여부에 모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국회에서의 헌법조사회 설치 배경으로
국민여론의 헌법에 대한 인식변화가 뒷받침되었다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다. 평화헌법 제정 50주년을 맞이하여 헌법논의가 봇물처럼
쏟아졌던 1997년에는 헌법에 대한 입장을 묻는 다양한 여론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이 중 요미우리 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이 63%에 이르고 세대별로 볼 때 젊은 층일수록 개헌찬성 비율이 높아 20대의 경우 76%가 개헌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후 줄곧 평화국가 일본의 상징으로 기능해왔던 평화헌법은 90년대 후반이후 다수의 일본국민들 사이에 이제 거추장스러운
족쇄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셋째, 24년전 자민당 후보로서 미노베(美濃部亮吉) 혁신 지사동경에 도전하여 패배했던 이시하라가
99년 도지사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타 유력후보를 크게 누르고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4반세기에 걸친 일본의 기류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90년대 중반이후 55년 체제하에서 결속력을 과시했던 혁신 연합이 완전히
해체되었다는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물론 이시하라의 당선을 두고 다수의 동경도민이 그의 민족주의적 주장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인 지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이시하라의 당선은 다수의 유력후보가 출마하여 혼전을 벌인 선거라는 점과 지방선거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한 점을 유념한다 하더라도 이시하라의 당선이 일본의 우경화와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55년체제의 붕괴이후 일본의 유권자의 보수화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많은 유권자가 이시하라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일본의 침략전쟁 정당화 주장을, 지사로서 선출하는데 문제로 삼지
않을 만큼 보수 우경화로 기울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넷째, 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독서계에 일고 있는 우익적
출판물의 범람현상도 일본 우경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징표로 지적할 수 있다. 일본의 서점에서는 근년들어 일본의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심지어 미화하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역사 수정주의 계열의 서적 및 잡지들이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즉, 일본의 서점에는 '자유주의사관 연구회',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수정주의 그룹들이 일본
중심주의적 역사관을 전국민 차원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서적 및 잡지, 팜플렛 등의 각종 출판물들이 넘쳐나고 있다.
또
허무맹랑한 전쟁 속의 일본의 영광 스토리를 그리고 있는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 {전쟁론}이 수십만부의 판배 부수를 기록하는
베스트 셀러에 오르고 있다는 것은 90년대 후반의 일본의 우경화의 실태를 보여주는 상징의 단면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을 전후하여 {사피오}, {바트}, {뷰으즈} {This is 요미우리} 등 공공연하게 애국심의 고취와 수정주의적
역사해석을 주장하고 있는 우익적 대중잡지가 잇따라 창간되어 10만부가 넘는 발행부수를 올리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는 현상이다. 이들
대중잡지들은 그 이전부터 민족주의적 논조를 펼쳐오며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보수적 매체인 {문예춘추}, {제군},
{정론}, {보이스} 등과 합류하여 하나의 무리를 이루면서 1990년대 일본 내셔널리즘의 논의를 한층 가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4. 일본 우경화의 배경과 요인
90년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일본사회의 우경화는 국제정세의 급변과 동아시아 안보정세의 변동, 국내정치의 지각변동,
금융위기 및 경제침체와 그에 따른 사회적 불안심리의 확산 등 여러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경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말해 일본인들은 90년대 이후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혼란, 경제의 장기불황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사회심리적인 차원에서도 일찍이 전후체제 하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미증유의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우경화 추세는 이러한 정치경제적, 사회심리적 상황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첫
째, 일본인들은 냉전종결에 따른 세계질서의 급변상황과 그에 따른 동아시아의 안보정세 변화에 대해 일본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걸프전쟁에서 130억의 전비를 지출하고도 '땀과 피를 흘리지 않은 얼굴없는 국제공헌'이라는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자 일본인들은 전후국가 일본의 취약성을 새삼스럽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 의한 감행된 핵개발
시도, 대포동 로켓의 개발 및 실험발사 그리고 중국의 핵실험이나 대만위기사태 등 동아시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안보위협사태에 대해
일본이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피동적인 자세밖에 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일본인이 늘어나게 되었다.
두
번째로 90년대 일본의 우경화를 촉진시키는 배경으로서 들 수 있는 것은 일본경제의 총체적 위기현상을 들 수 있다. 일본경제는
90년대 초반부터 10년이 넘도록 극심한 경제침체와 고실업률의 기록, 잇따른 금융기관의 도산 및 기업의 채산성 악화 등의 악재에
직면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90년대 초반의 거품경제 붕괴현상과 더불어 시작된 일본의 장기불황은 10년이 지나도록
지속되고 있으며 좀처럼 회복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90년대 초엽 들어 진행된 일본경제의 버블 붕괴로 소실된
자산가치(1100조엔)가 2차 대전 때 피해액의 2배에 달한다고 한다.
많은 일본인들은 일본경제의 이러한 총체적 위기상황을
제2차세계대전의 패전에 이은 제2의 패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경제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인들은 그들의
경제현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한편으로 경제를 이러한 상황에 빠트린 국가 관료기구에 대한 불신은 더욱 심화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 관료들의 부패 스캔들과 비효율성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그 동안 관료들이 장악하고 있던 각종의 인허가권과
규제장치가 경제의 비능률을 초래하는 원흉이라는 인식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전후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온
것으로 여겨져 왔던 관료제의 신화는 사실상 붕괴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위식으로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지금이야말로 명치혁명 및
전후개혁에 이은 제3의 국가개혁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인식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셋째, 정치경제적 상황변화 이외에도
90년대 일본에는 대규모 자연재해, 사회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여 사회심리적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1995년에 발생한 한신대지진은
일본인을 경악케 하였으며 이어서 발생한 지하철 사린사건, 오움진리교 사건 또한 일본열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남미의
패루에서 벌어진 일본인 인질사건, 도카이무라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방사능 누출사건은 일본인의 불안심리를 더 한층 자극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일본사회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질서 잡힌 사회라는 믿음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지니고 있던 일종의 '안전신화'가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우경화 경향은 정치경제 시스템의 동요에 따른 불신의 누적과
더불어 사회적 불안심리의 심화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촉진시키고 있는 정당정치 차원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55년체제의 붕괴와 그에 수반한 혁신적 정치세력의 몰락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1993년 총선의 결과
출현한 비자민 8개정파에 호소카와(細川護熙) 정권의 수립은 55년이후 38년간 일본을 지배해 왔던 자민당 정권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비자민 연립정권은 오래가지 못하고 단명하고 말았다. 1년여에 걸쳐 정권을 담당했던 호소카와 정권은
하타(羽田孔)정권으로 이어졌으나 결국 3개월의 단명정권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서 출현한 사회당 당수
무라야마(村山富市)를 수반으로 하는 자·사 연립정권도 1년여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3년에 걸쳐 전개된 잇따른
연립정권의 대두와 몰락을 경험하면서 일본의 정당체제는 극심한 혼란과 동요를 겪게 되었다. 새로운 정당이 연이어 출몰하였으며
정당간의 이합집산과 정치인들의 합종연횡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는 사회당의 완전한 몰락이었다.
55년체제 하에서 집권 자민당의 보수노선에 대항하는 강력한 저항세력을 결집하여 제일야당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왔던 사회당(사민당으로
개칭)은 두 번에 걸친 총선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하여 일개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결과 일본정치는 이제 혁신세력이
소수파로 전락하고 이른바 정당의 총보수화로 귀결되게 된 것이다.
정치의 총보수화가 진행되는 속에서 자민당은 96년 이후
일본정치의 압도적인 핵심세력으로 다시금 부상하게 되었다. 이른바 96년체제의 도래이다. 하타바다케는 55년 체제 붕괴이후 단기간에
걸친 공백기를 거쳐 재건된 새로운 자민당 지배체제를 96년 체제라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96년 체제는 다음의 특질을 갖는다
첫째, 자민당은 이미 득표수에 있어서 과반수를 점하는 힘을 가지기는 어렵게 되었다. 특히 소선거구적인 과잉대표 효과가 작은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를 차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중의원에서도 자민당의 과반수는 늘 위협받기 십상이다. 둘째,
이러한 의미에서 96년 체제는 자민당을 기축으로 하면서도 연립정권의 모습을 띠게 된다. 연립을 구성하는 소수정파는 자민당의 정권에
참가하여 수정을 요구하거나 또 대신이나 차관 포스트를 요구한다. 따라서 자민당의 연립파트너 대상인 소수야당은 소속의원 수보다 큰
발언권을 지니고 자민당은 이에 따른 제약을 안게 된다.
그러나 주목을 요하는 것은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96년체제하에서 자민당의 권력은 55년체제하에 비해 기본적으로 훨씬 강화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민당의 기본정책에 반대하는
55년체제 하의 사회당과 같은 강력한 야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이후 사회당은 헌법, 자위대, 미일안보 등의
기본정책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노선전환을 감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사실상의 해체가 초래되었다. 그러한 변화를 촉발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사회당의 연립정권에의 참여였다. 사회당의 기본노선 전환이 없었더라면 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이 그처럼 손쉽게 의회를 통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96년체제 하에서 자민당의 기축정당으로서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최대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자민당의
지위가 변동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되었다. 한편 야당은 이념적, 조직적으로 자민당과 대립할 기반을 만들 수 없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야당은 늘 자민당에게 동조하여 연립정권 내에 들어갈 기회만을 엿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96년체제 하의 야당은 공산당을 제외하면 모두 자민당으로부터 프로포즈를 기다리는 구애자이며 이 선택권은 일방적으로 자민당만이
갖는다. 결국 96년체제 하의 연립정권에서 최종적인 정책결정권을 누리는 것은 다름 아닌 자민당이며 이러한 속에서 자민당이 주도하는
우경적 속성이 농후한 법제안이 국회에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속속 통과되고 있는 것이다.
5. 군사적 보통국가론
90년대 접어들면서 일본사회에서는 국가의 정체성 및 진로모색이라는 연관 속에서 안전보장 정책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공론화
되었다. 안보논쟁의 성격을 띤 국가진로에 관한 담론이 활성화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냉전종식과 걸프전이라는 외부적 충격에
의해서였다. 냉전종식에 따른 안보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더불어 일본이 소극적인 안보역할에서 탈피하여 국제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한다는 미국의 압력이 증진되었으며 일본내부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국제공헌에 나서야한다는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걸프전은
그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자위대의 해외파병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30억불에 이르는 재정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비난과 고립감은 일본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걸프전은 자위대 해외파병에 반대하는 일본의 여론을 지지로
선회시켜 PKO법안이 통과되는 사태로 진전되었다.
90년대 일본의 정치권에서 안보정책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1993년의 저서 {일본개조계획}에서 보통국가론을 주창한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였다. 오자와는 이 책에서 냉전종식을 계기로
일본이 소극적이고 비정상적인 국가에서 탈피하여 국제사회에서 국력에 걸맞는 외교, 안보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통국가론에는 이 주장의 창시자인 격인 오자와가 강조하는 유엔 중심의 집단안보와 국제정치의 현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대미동맹에 기반한 집단방위의 두 가지가 있는데 양자간에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일본의 군사역할 확대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첫째, 일본의 집단안보 참가이다. 보통국가론을 주장하고 있는 오자와가 추구하고
있는 안보정책의 핵심은 일본이 집단안보활동에 참가함으로서 국제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자와는 헌법과 미일안보조약이
국제사회의 영예로운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유엔의 강화를 위해 협력하는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으므로 자위대는 임시든
상설이든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참가해야 하며 이는 기존의 헌법해석으로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헌법9조에서 자위대의 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국제분쟁이란 집단안전보장 체제의 작동이 아닌 주권국가간의 분쟁이므로 자위대의 활동이 가능한 집단안보체제란 기본적으로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의한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PKO나 PKF에 자위대가 참가하는 것은 헌법상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자와는 또 자신의 "일본국 헌법개정 시안"에서 헌법 제9조에 자위권과 그를 위한 전력의 보유를
분명히 하는 제3항을 추가하고 헌법 제10조를 신설하여 "일본국민은 평화에 대한 위협, 파괴 및 침략행위로부터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 회복하기 위해 평화활동에 솔선해서 참가하여, 병력의 제공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세계평화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삽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일본의 활동은 국제연합의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
바, 헌법9조에서 말하는 국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집단적 자위권에 초점을 맞추어 보통국가론을
주장하는 그룹은 오자와의 유엔중심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즉, 유엔의 활동은 미국이 원하더라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결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 보다는 미일간의 안보협력관계를 축으로 일본의 안보역할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일본의 개별적 자위권 뿐 아니라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헌법해석의 변경, 혹은 필요하다면 헌법자체의
개정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미일안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적극적인 방위분담에 나서야 하며, 단순한
주일미군에 대한 비용분담을 넘어서 유사시 미군의 후방지역 지원을 직접 담당할 것을 요구한다.
이들 두 가지
주장에서 나타나는 약간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양자 모두 일본이 냉전체제 하에 유지해왔던 소극적 안보역할에서 벗어나
보통국가의 적극적 안보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보통국가론자들은 기본적으로 평화헌법이 일본의 안보역할
확대에 결정적인 제약요소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즉, 헌법9조가 장애가 된다면 해석을 바꾸든지 헌법해석의 개정이 여의치 않다면
헌법자체를 개정하면 된다는 논리이다. 또 대미동맹에 대해서는 방위비 비용분담의 한계를 넘어서 지역내 긴급사태시 최소한 군사적
후방지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통국가론자들의 대부분은 주일미군의 존재를 옹호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유럽에서 영국이
하는 역할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역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통국가론은 90년대 중반에
들어 일본의 국가전략 논의의 주류로 이미 자리잡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전후 일본 국가전략의 핵심 개념으로 이해되던 상인국가나
통상국가 혹은 발전지향국가는 이미 용도폐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90년대 일본안보정책 담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보통국가론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대항논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소프트 파워론이다. 이 주장은 비록 보통국가론
만큼의 폭넓은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냉전종식후 거의 완전히 세력을 상실한 혁신적 평화주의의 공백을 대체할 수 있는
진보진영의 유일한 대안으로 이해된다. 소프트 파워론은 글로벌 시빌리언 파워를 주창하고 있는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와 '작지만
빛나는 나라 일본'을 내세운 바 있는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 등에 의해 대표된다.
이 주장의 기본적인 발상의 출발점은
현재의 지배적인 국제질서나 가치관을 고정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변화 가능한 것, 개혁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데 있다.
후나바시는 시빌리언 파워에 대하여 "시빌리언 파워란 정글의 법칙이 지배적인 국제사회 관계를 문명화,시빌리언화 하는 힘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성숙과 국제사회의 상호의존이 심화됨에 따라 생성하고 성장해 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국제사회가 무력에 의한
세력균형보다는 상호협력에 의한 비군사적이고 다자적인 수단에 의해 유지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으며 일본이야말로 이러한 국제사회의
진화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시각은 평화헌법은 모든 국가들이 지향해야 할
이상이므로 개정이나 재해석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금과옥조처럼 유지시켜야 한다고 요구한다. 대미동맹에 대해서 시민파워론은 당장의
전환기에는 미일안보체제를 유지해야 하지만 장래의 방향에 관해서는 상시주둔 없는 안보론 혹은 미군병력의 감축론을 제창한다.
동아시아의 위기상황에 대해서도 일보은 헌법이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외국에서 군사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은 엄수되어야 하며 중국, 대만 문제나 핵확산 금지 등의 문제에 있어서 미국으로부터 독립된 일본나름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 자위대 문제에 관해서 시민 파워론은 현행대로 전수방위의 원칙을 고수하고 유엔 평화유지활동의 참여는
어디까지나 비군사적인 역할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핵, 미사일 등의 대량학살무기의 통제에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이 시각은 일본은 미일안보 동맹에의 의존도를 줄이고 다자안보체제의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주장에 따르면 국제평화와 안보문제에 있어서 일본은 문민파워에 기반한 비군사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방향으로 국가전략을 짜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시민파워론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지식인이나 일부 정치인의 주장에 불과할 뿐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체적으로 보아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검토되던 일본국가 진로에 관한 논의는
보통국가론의 방향으로 수속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6. 평가와 전망
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은 전후 유지해왔던 국가체제를 대폭 개편하여 21세기의 새로운
국가전략을 추구한다는 목적 하에 정치, 안보,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친 대대적인 변혁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변화 움직임은 일본 내외로부터 명치혁명과 전후개혁에 비견되는 제3의 개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 속에서
무엇보다도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 사회전반의 급속한 우경화 추세이다. 90년대 중반부터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추세는 역사인식의 반동화와 국가 상징의 강화 그리고 우익적 담론의 대중화 등으로 점차 표면화되고 있다. 이러한 우경화 추세는
기본적으로 냉전체제의 종결에 따른 일본의 새로운 국가진로 모색과정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일
본에 있어서 사회전반의 우경화 추세와 더불어 주목되는 또 하나의 움직임은 90년대 이후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는 안보정책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위대의 PKO참여와 가이드라인의 개정, 주변사태법의 제정 등으로 표출되고 있는 일본 안보정책의 새로운
전개는 급기야 평화헌법 개정 논의로까지 그 외연이 확장되고 있다. 냉전체제 하에서 대외적 군사역할을 최대한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해왔던 일본은 90년대 이후 안보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을 추구하고 있다. 일본은 기존의 소극적인 안보정책을 탈피하여 안보
면에서의 국제적 역할을 능동적으로 추구해 나가기 위한 행보를 모색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전후 유지해왔던 평화국가의 외피를 벗어
던지고 군사적 보통국가로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안보정책 전환은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첫째, 일본 안보정책의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PKO참여를 통한 자위대의 해외파견이다. 1992년
6월 유엔 PKO협력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래 자위대의 PKO부대는 캄보디아, 모잠비크, 자이레, 고란 고원 등지에 파견되어
본격적인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자위대의 PKO 참여는 군사적 분쟁행위의 종식을 전제로 하여 수행되는 비전투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엄밀한 의미의 해외 군사행동으로 해석하는 데는 약간의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냉전시기만 하더라도 자위대의
해외파견 문제는 그 형태를 불문하고 논의 자체가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자위대의 해외파견
실현은 그 자체로서 일본 안보정책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1995년 12월에 책정된 신방위대강을
통해 일본은 방위력의 역할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로써 자위대는 일본방위 뿐 아니라 재해 등 각종 사태에의 대응
및 보다 안정된 안보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공헌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각종 사태에는 한반도를 비롯한 일본주변
지역에서 벌어지는 안보상 유사사태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구체적으로 자위대가 한반도 유사시 난민의 도래에 대한
대응이나 긴급대피 등의 업무 등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일본은 미일안보체제의 재정의를 통해
향후에도 대미군사동맹 노선을 굳건하게 견지해 나간다는 방향을 확립하였다. 미일신안보 선언에서는 미일안보 체제가 동아시아의 대소
군사동맹으로서의 의미를 넘어서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긴밀한 미일 군사협력을 추진하는 발판의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미일안보체제의 광역화와 이에 따른 미일 역할 분담을 명시한 것이다. 일본은 극동의 유사는 물론이려니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유사상황이 전개될 경우, 전개될 미군의 작전에 적극적인 협력을 제공하겠다는 정책을 표명하였다.
군사
적 역할의 확대 노선으로 압축될 수 있는 탈냉전기 일본의 안보정책은 구체적으로 한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투영되어
나타날 것인가? 이 경우 핵심적인 관건은 일본이, 한반도 유사시 미군이 전방에서 전개할 한반도 작전에 대하여 어떤 범위와 형태의
후방지원 및 협력을 수행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신가이드라인의 책정과 연이은 주변사태법의 제정을 통해
한반도, 대만, 남사군도를 포괄하는 일본주변사태를 최대의 안보위협으로 상정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은 주변사태에 대해 미국을 매개로
한 적극적인 군사적 대응에 나설 것을 선언하고 있다. 즉, 신 가이드라인에서는 주변유사시 일본의 대미 군사지원 방안을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해상자위대에 의한 공해상에서의 기뢰제거 및 유엔 경제제재 결의시의 해상검사 등 자위대의 역할의 폭을
획기적으로 확대해 놓았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우경화 추세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본의 군사적 역할확대가 나아가
지역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공동번영의 추구에 심각한 장애물로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일본의 강성 안보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문제가 되고 있는 중국의 군사력 증강을 부축임은 물론 나아가 동아시아의 전체를 군비경쟁의 안순환과 지역패권의 대결구도로 빠뜨릴
위험성이 있다. 과거 군국주의 일본으로부터 온갖 희생을 강요받았던 아시아인들은 현재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군사적 보통국가화
프로젝트를 경계와 불신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은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과제는 동북아 해당국가들간의 대화를 통한 안보정책의 투명성 제고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추구하고 있는 대미동맹의
강화노선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군사적 역할을 중심적으로 담당하고 일본이 이를 후방지원 하는 구도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구도
하에서 일본이 독자적으로 군사대국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은 비교적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미일안보체제는 역설적으로
일본의 독자적인 군사노선을 견제하고 아시아제국이 잠재적으로 우려하고 있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억제하는 메카니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일본의 한반도 안보정책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나 자체붕괴 등이 초래할 한반도
유사사태에 대한 미일 이국간 차원의 군사협력 기반을 구축하는데 주된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일차적인 당사자인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 유사사태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일본의 대한반도 안보정책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과제는 일본의 군사적 개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한반도의 유사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차원의 노력을 경주하는
일이다. 즉, 북한의 호전성과 자체붕괴의 위험성을 최소화하고 북한이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안고 있는 제일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동북아 각국은 상호간에 군사적 투명성과 신뢰성 제고를 통해 동북아지역의
다자적 안전보장의 틀을 형성해 나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제4강
우리의 역사교육은 올바른가?
지 수 걸
공주대 교수
1. 교과서 왜곡논쟁의 쟁점
** 이번의 역사왜곡 논쟁은, 이른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모임'으로 줄여 씀)측이 작년 4월 문부과학성에 제출한 '중학교용 일본사 교과서 검정신청본(일명 백지본)'의 내용이 일본의 언론과 시민단체들에 의해 폭로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신청본'의 한국관련 서술 가운데 왜곡된 내용이 많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관련 학회와 시민단체들은 앞을 다투어 일본의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신문들도 모처럼 형성된 반일전선에서 누가 더 애국적 신문인가를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올해 2월 국회의원 93명은 일본국의 역사교과서 왜곡 중단을 촉구하는 5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며, 대통령도 삼일절 경축사를 통해 일본측의 역사왜곡에 엄중히 항의하였다. 이처럼 일본 내외의 비판여론이 고조되자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비난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모임측의 신청본에 대해 2차례에 걸쳐 상당한 수준의 수정지시를 내렸으나 '모임'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른바 '대담한 양보, 컨셉(concept)의 골격 유지'라는 전술에 입각하여 두차례의 검정절차를 모두 통과하였다.
**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우리 정부는 지난 5월 8일 35개에 달하는 [수정 요구 의견]('모임'측 제출본 25개, 7종의 기타 제출본 10개)을 마련한 뒤 이를 일본정부에 공식 전달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임라일본부설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설이다 임진왜란을 출병으로 기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중에 발생한 인적·물적 피해사실을 은폐했다" "한국병합 과정의 침략행위와 강제성을 은폐하였다"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수혜론의 관점에서 '수탈을 위한 개발'을 마치 조선주민을 위한 것처럼 왜곡했다" "군대 위안부문제를 고의로 누락시켜 잔혹행위의 실체를 은폐했다" 등이라고 한다. 이 같은 수정요구가 일본정부에 의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나, '모임'측이 그동안 견지해온 '대담한 양보, 컨셉의 골격 유지'라는 전술을 감안할 때, 또다시 '부분적인 양보'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판단된다.
** 그러면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여론들이 생성되었을까? '사실' 왜곡에 대한 비판은 거의 공통적이라 할 수 있으나, "차제에 우리의 역사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우리 내부에도 크게 두 개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컨대, 그 하나는 국사교과를 필수로 하고 수업시간 수도 늘리는 등 현행의 국사교육을 대폭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모임'측의 무책임한 역사왜곡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의 국사교과서도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번 특강에서는 후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국사교육, 특히 국사교과서에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가를 살피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 그럴 때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은, 거듭된 양보에도 불구하고 '모임'측이 끝까지 사수하려 하고 있는 이른바 '컨셉의 골격', 달리 말하면 '신청본'의 전편에 배어있는 '역사관', 혹은 '역사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저들이 사수하고자 하는 '컨셉의 골격'을 모임측의 '신청본'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로 관철하고 있는 교과서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임'측이 끝까지 관철하고자 하는 '컨셉의 골격'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부터 살피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 자주 언급되어 왔듯이, '모임'측이 제출한 '신청본'은 국민 개개인의 이익과 국가·민족의 이익을 일체화하고, 개인·사회·국가간의 모순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국가유기체적' 관점 일본 국가가 과거에 범한 대외관계상의 잘못(침략전쟁)을 인정하는 일을 한마디로 '자학'이라 단정하면서 국가의 무오류성과 신성성을 강조하는 관점 고대부터 현대역사에 이르기까지 천황을 사회통합의 상징으로서 위치 지으려는 관점을 드러난 형태, 혹은 감춰진 형태로 일관되게 관철하고 있는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신청본'은, 전근대사 부분은 일본문화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서술, 근현대사는 일본의 근대화전략이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이들이 사수하고자 하는 '컨셉의 골격'은 바로 이런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신청본의 기본 컨셉은 "일본이라는 국가와 민족, 혹은 천황을 초역사적 존재로 부당 전제한 뒤, 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 이같은 '컨셉의 골격'은 위 '모임'의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이른바 니시오간지(西尾幹二) 著 {國民の歷史}(産經新聞社, 1999)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책의 제목이 '國民'의 역사임을 주목해야 한다). 위 '모임'의 이데올르그들은 그동안 자국의 역사를 비하하는 '자학사관(自虐史觀=自己惡役史觀)', 패전 이후 연합국이 강요한 '동경재판사관(東京裁判史觀)', 소련의 영향하에서 자라온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史觀' 등의 극복을 주장하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쳐왔는데, 34개의 토픽으로 구성된 {國民의 歷史}에는, 일본역사는 세계 4대문명권 이상으로 유구할 뿐만 아니라 독자적이며, 우수하다 인도까지 포함한 세계대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도요도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스페인의 필레페2세에 버금가는 영웅이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은 조선 더 나아가서는 동양의 독립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명치유신은 프랑스혁명이나 소비에트혁명보다 훨씬더 혁명적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책임은 6대4 혹은 7대3이다. 일본이 진 것은 현실의 전쟁이 아니라 '전후의 전쟁'이었다는 등의 주장이 실려있다.
** 미리 결론을 밝히자면 불행하게도 우리의 {국사}('국가의 역사', 혹은 '국민의 역사'의 줄인 말일 것이다)교과서는
제목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이 말하는 '컨셉의 골격'을 훨씬 더 배타적으로 관철하고 있는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 교과서도 '모임'측의 '신청본'과 마찬가지로, 조국과 민족을 초역사적 존재로 부당 전제한 뒤, 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닮은꼴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교육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는
제6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삭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체성을 바탕으로 하여 외부세계의 변화(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개방적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있기는 하나 '기본 골격'이나 전체 역사상은 '국적(國籍)있는 교육'이
강조되던 시절의 교과서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1972년 '10월유신'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1972년 3월 대구실내 체육관에서 열린 <총력안보를 위한 전국교육자대회>에서 박정희대통령이 [올바른 국가관에 입각한
우리 교육]이라는 치사를 통해 '국적있는 교육'과 '주체적 민족사관 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문교부는 그해 5월 대통령
'諭示'에 따라 국사교육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국사를 독립과목으로 추가하여 30점을 배정하고 국사 연구비를
대폭 증액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였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발표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73년 6월이었다.
** 이런 대목에서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것은, 만약 {국민의 역사}를 읽고 커다란 감동을 느낀 일본의 열혈청년들이, "애국심과 민족 정체의식(identity)을 함양하기 위해 '국적(國籍) 있는 교육'을 좀 해보겠다는데, 왠 간섭이냐"라고 반격해온다면 도대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는 과학이 아니라 物語(談論)이다. 너희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라는 주장까지 곁들인다면 우리의 대답은 더욱 옹색해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물론이고 [국민교육헌장]이나 國定 {國史}에 길들여져 온 우리 국민들은 이런 역습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기억될 뿐만 아니라 쉽게 바뀌지 않은 역사의식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교과서에 기술된 복잡한 사실이나 사건들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주조해내는 전체적인 분위기 즉 역사상이다. 그리고 역사상, 즉 교과서의 전체 이미지는 이른바 '컨셉의 골격'에 의해 좌우된다. 요컨대, 컨셉의 골격은 드러난 형태, 혹은 감춰진 형태로 교과서 전체 분위기, 즉 역사상을 좌지우지한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모임'측의 전술은 교과서나 역사교육이 무엇인가를 아는 대단히 교묘한 전술이라 할 수 있다. '모임'측의 '신청본'이든, 우리의 국사교과서든, 왜곡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런 대목을 문제삼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작업은 양국간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정립하는데 있어 더없이 긴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임'측의 역사왜곡을 정면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컨셉의 골격'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국사교과서의 기본 골격부터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취지에서 이번 특강에서는 우리 {고등학교 국사}교과서(1996년 초판 발행, 제6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와 제7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 준거안({사회과 교육 과정}, 교육부 고시 제1997-15호 [별책 7])의 기본 골격, 달리 표현하자면 '기본 코드'가 무엇인가를 간략히 정리한뒤, 이어서 바람직한 역사교육의 방향에 대해 내 나름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2. 우리 역사교과서는 어떠한가?
** 근대 국민국가들은 자국의 근대화전략에 합당한 '이상적인 교육목표'([교육칙어]나 [국민교육헌장])를 설정한 뒤,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여러 형태와 내용의 제도를 발전시켜왔는데, 사범학교제도나 국정(검인정)교과서제도는 그 대표적인 소산물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도 갑오을미개혁 시기에 이미 사범학교제도와 교과서제도가 마련되었는데, 구한말에 편찬된 통사체 역사책(김택영, 현채 등이 저술한 通史)은 대부분 학부(學部) 주도로 편찬된 일종의 '국사교과서'였다. 현재 사범학교제도는 거의 유명무실화되었으나 국정교과서제도는 시대착오라는 비판여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면 우리 {국사}의 '기본 골격', 혹은 '기본 코드'는 과연 무엇일까?
<국가(국민), 민족 중심의 역사서술>
** {국사}의 기본 골격을 살필 때 먼저 주목되는 것은, {국사}라는 제목(일본역사 교과서의 제목은 {국사}가 아니라
{일본사}다)에서도 암시되고 있듯이 모든 한국(사회, 사람)의 역사를 국가('우리 나라', '우리 국민')와 민족('우리
민족')의 관점에서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고등학교 {국사}의 [머리말]에 보이는 "우리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살아온
발자취로서, 우리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삶의 뿌리이기도 하다"는 표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수 있을 것이다.
{국사}에 보이는 모든 역사과정의 위기(특히 대외전쟁과 내란)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이며, 또 위기의 극복주체도 항상 국가와
민족이다. 이런 특성은 전쟁사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쉽게 확인할수 있다. 전쟁사 서술을 보면 상당수의 주어(主語)가 '우리
민족'이다.
#. "고구려가 중국의 통일제국인 수당의 침략을 잇따라 격퇴한 것은 중국과의 대결을 통한 발전의 한
모습이었으며, 아울러 백제, 신라까지 보호하는 민족 수호의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국사, 59쪽) "고구려가 중국 및 북방
민족과 대결하면서 외세의 침입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음을 이해한다(교육과정, 112쪽).
#. "왜란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둘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지닌 잠재적 역량이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은 신분의 귀천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문화적인 우월감에 가득차 있어서 자발적인 전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국사 상, 188쪽)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극복할수 있었던 요인을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잠재역량에서 이해한다"(교육과정, 115쪽)
#. "근대사회의
전개과정은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대항하면서 국권의 수호와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이해한다"(교육과정, 116쪽) "우리 민족은 방곡령 시행, 상권수호운동, 이권수호운동, 국채보상운동 등 경제적 침략을
저지하려는 운동을 벌였다"(국사 하, 103쪽) Ⅲ 민족의 독립운동 단원개관에 보이는, '민족의 생존권', '민족적 위기'등의
표현. "우리 민족은 이와같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국사 하, 126쪽).
** 이같은 전쟁사 서술들은 교과서의 전체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전쟁의 역사적 의미는 애국애족론에 압도되어 거의 부각되지 않고 있다. 전쟁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다양한 계급계층, 특히 힘없고 빽없는 민중들이나 여성들의 생활에 미친 영향 등이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과거의 전쟁에서 제대로 된 역사적 교훈을 얻지 못한 민족', '전쟁에 대한 윤리적 판단력, 혹은 비판적 성찰력이 부족한 민족', '전쟁위기가 고조되어도 이를 거부하지 못하고 사재기에만 열을 올리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사교과를 통해서도 전쟁의 야만성을 가르치는 반전평화교육을 수행해야 한다.
** 국가·민족 중심의 역사서술은 사실 수준에서 볼 때도 문제가 많다. 전근대사회 농민들의 집단적 자의식(정체의식)을 살필 때, 국가·민족 단위의 의식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들이 많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그 무엇' 가운데는, 국가·민족의식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혈연과 지연 혹은 신분과 계급 등등이 그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도 국가나 민족을 중심으로 한 정체의식, 어느 정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과 같은 국가·민족의식은 근대사회의 산물이다. '역사상의 모든 위기는 민족의 위기이다'라거나 '우리 민족이 침략에 저항했다'는 식의 지극히 비역사적이며, 초역사적인 역사교육은 중단되어야 마땅하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그 무엇'이 우리의 역사전개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역사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 국가·민족 단위의 삶에만 애정과 정체의식, 혹은 도덕과 윤리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학교·지역·직장·한반도·동아시아·세계를 단위로 한 삶, 혹은 노동자·여성·청년적 삶 등에도 그 나름의 애정과 정체의식, 도덕과 윤리가 필요하다. 건전한 국민·민족의식만이 아니라 건전한 계급의식과 시민의식도 필요하다. 물론 근대사회는 국가·민족간 경쟁이 치열한 사회였으므로 다른 무엇보다 국가·민족 단위의 삶이 소중했다. 식민지시대에 절실히 경험했듯이 국가와 민족이 망하면 그에 소속된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말과 동시에 '지방화'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오늘날 '역사적 경험의 반성적 성찰'은 국가·민족 단위의 삶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양한 단위, 다양한 관계와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적 삶을 총체적으로 반성하는데 기여하는 역사교육"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 민족의 신성성, 초역사성을 강조하는 역사서술>
**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신성성, 초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을 강요 혹은 설득하고자 할 때 '역사적 실재'로서의 국가(권력)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며, 설득력도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교과서는 곳곳에서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이라는 초역사적 표현을 통해 현실의 국가권력을 '탈역사화'하고
있다. 우리 교과서가 국가와 민족의 신성성과 초역사성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주로 활용되는 주어는 예외 없이 '우리 나라', 혹은
'우리 민족'이다.
#. '통일신라시대론'이든, '남북국시대론'이든, '우리 민족', '우리 국가'의 '통일'이라는
화두에서 출발한 역사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신라가 자주적인 민족통일을 이루었다는 근거를 제시할수 있다"(교육과정,
112쪽)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주체가 되어 건국된 우리 민족국가였음을 이해한다"(교육과정, 113쪽).
** 거칠게 말한다면 '임나일본부'가 실재로 존재했다고 해서 일제의 한국 지배가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사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은 이를 동일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 그때의 국가와 민족을 오늘날의 (우리)국가와
(우리)민족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국사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만약 '임라일본부설'이 사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면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거꾸로 삼한 분국이 일본내에 존재했다고 하면 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만주땅은 고구려땅이었지
현재의 우리 국가와 민족의 땅이 아니다. 만주땅은 '우리 것'이라는 착각, 그같은 멘탈리티가 앞으로 어떠한 역사적 불행을 초래할지
우려스럽다.
** 초역사적 존재로서의 '우리 나라', '우리 민족'론에 이른바 '正統論的 관점'까지 개입되면
그야말로 점입가경에 이르게 된다. 정통론(신라인가 고구려인가? 서울인가 평양인가?)은 어찌보면 현실국가의 신성성이나 초역사성을
정당화하는 매개고리라 할 수 있다. 초역사적 존재인 '우리 나라'의 정통, '우리 민족'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 정통을 계승한 정부"라는 인식도 결국은 국가의 신성성, 초역사성을 강조하는 서술이라 할 수
있다.
#. "광복 직전의 건국준비활동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중심으로 이해한다"(교육과정, 176쪽),
"유엔의 결의에 따라 5.10 총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설명할 수 있다"(교육과정,
176쪽)
** {국사}는 현실국가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는 항상 일반 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긍정적인 권력으로
미화하고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권력의 성격을 드러내는 서술은 턱없이 부족하다. 예를 들면 교육과정에 보이는 "민족사의
전개과정에서 이루어진 정치활동을 내재적인 발전과정으로 인식하고, 통치구조의 변화과정이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임을 이해한다"(교육과정, 111쪽)는 설명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새국가 성립을
이해하면, 그 국가권력의 성격은 항상 긍정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 "15세기에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으로
조선사회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발전하여 근세국가로 전환되었음을 이해한다"(교육과정, 115쪽)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민본사상에 기초한 정치이념이 확립되어, 전시대에 비하여 여론이 중시되고 개인의 능력이 존중되었음을 이해한다"(교육과정,
115쪽).
** 이에 반해 북한의 중등학교용 역사교과서인 {조선력사}(고등중학교 2, 3, 4학년용)는 조선왕조권력, 가령, 초기 법과 제도를 "양반지주놈들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는 반인민적 법과 제도"로 평가한다. "1392년 7월에 세워진 리조 봉건국가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량반지주놈들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는 반인민적 정권이였다. 리조국가가 반인민적인 정권이였다는 것은 리조 봉건통치배들이 실시한 초기 정책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료동원정은 그때의 력사적 조건에서 매우 정당한 것이였고 또 모든 정세로 보아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으나 이성계가 "이 유리한 기회를 정권을 가로채기 위한 목적에 이용함으로써 료동원정을 말아먹고 말았다"
<국가·민족 내부의 계급·계층적 갈등을 축소 왜곡하는 역사서술>
** {국사}에는 국가와 민족 내부의 계급 계층적 갈등관계, 이런 관계속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실과 사건에 대한 설명을 회피하거나 은폐하고 있는데, 이런 서술은 '모임'측의 신청본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이자 초역사적 존재로 묘사하고자 하는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사}는 국가의 법·제도·정책이 가진 계급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투쟁(內戰)을 축소 서술하고 있다. 북한의 교과서와 비교해 보면 이런 특징이 더욱 뚜렷이 확인된다.
** 북한 교과서인 {조선력사}에서 주목되는 특징은 국가·민족의 관점 이외에 인민의 관점, 즉 계급적 관점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위기는 인민생존의 위기로, 투쟁 또한 인민 주도의 투쟁으로 설명된다. {국사}와는 달리 {조선력사}는 인민들의
대내외적 투쟁을 자주 장절 제목으로 노출시키고 있다. 하지만 {국사}의 장절 구성을 보면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소절을 제외하면
어디에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갈등을 구체적으로 다룬 대목이 없다. {국사}는 심지어 일제하의 소작쟁의나 노동쟁의도 [사회경제적
민족운동], 혹은 [경제적 독립운동]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국사 하, 166-168쪽). 권력의 배분이나 소유문제를
둘러싼 갈등과정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점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한 교육은 필수적이라 할수 있다.
#. {조선력사}는 각 장을 시기별, 주제별로 구분하고 있는데, 2학년용은 3개장 즉 [제1장 원시사회], [제2장
노예사회, 고대국가들], [제3장 첫 봉건국가들] 3학년용은 5개 장, [제1장 발해와 후기신라], [제2장 10-12세기의
고려] [제3장 13-14세기의 고려], [제4장 15세기 리조 봉건국가의 강화발전], [제5장 1592년-1598년
임진조국전쟁] 4학년용은 [제1장 17-18세기 전반기 상품화폐경제의 장성], [2장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 봉건적 착취를
반대한 인민들의 투쟁], [제3장 개화사상의 발생, 구미 자본주의 침략을 반대한 인민들의 투쟁] [제4장 개화파의 형성,
1882년 임오군인 폭동], [제5장 1884년 부르죠아 개혁, 1894년 농민전쟁과 부르죠아 개혁], [제6장 반일의병운동과
애국문화운동], [제7장 1919년 3·1인민봉기], [제8장 1920년대 대중운동의 창성과 초기공산주의운동] 등으로 교과서를
구성하였다.
** 법·제도·정책의 계급성을 왜곡 서술하고 있는 부분도 많다. 앞서 언급한 조선왕조 초기의 국가제도 정비과정에 대한 설명은 그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더 들면, 고조선의 '8조범금'에 대한 남북한 교과서의 해석 차이가 그것이다. 우리의 {교육과정}에는 "당시의 사회가 생명과 사유재산에 대한 보호를 중시하였음을 설명할수 있다"(교육과정, 111쪽)는 '지시'가 보이나, {조선력사}에는 "노예주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고 노예를 비롯한 인민들의 반항을 억누르기 위한 법이었다"는 '교시'가 보인다.
<민족(문화)의 기원에 대한 어정쩡한(?) 서술>
** '모임'측의 '신청본'은 유별나게 일본민족, 일본문화의 유구성,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국민의 역사}에
보이는 [하나의 문명권으로서의 일본 열도] [세계 최고의 繩文土器 문명] [일본어 확립의 고투] [신화와 역사]
등의 토픽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것들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의 국가 교과서는 객관적(과학적), 보편적 시각을 강조하면서
민족(문화)의 유구성, 독자성에 설명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분명히 국사교과서의 '기본코드'를 벗어난
서술이다. 분명치는 않으나 이는 이른바 '재야사학계'(?)의 도발적 비판(항의시위 및 법정소송)에 대한 '강단사학계'(?)의
'거부감'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 "선사시대의 각 단계별 변화상을 고고학이나 인류학의 토대 위에서
도구의 발달 및 생산력의 증대와 연관지어 이해하며, 한민족의 형성과 민족문화의 기원을 보편적 시각에서 파악한다"(교육과정,
109쪽) "어느나라의 역사에 있어서나, 모든 종족은 인근의 종족과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족을 형성해 왔다……그
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국사 상, 16쪽). "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BC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고조선의 건국사실을 전하는 '단군이야기'(신화라 하지 않고 이야기라
표현하고 있다)는 우리 민족의 시조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단군의 기록은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국사 상, 27-28쪽)
** {국사}와는 달리 북한의 {조선력사}는 민족의 기원이나 형성문제를 서술할 때 핏줄과 언어의 고유성이나 유구성을
유별나게 강조한다. {조선력사}는 현대 조선사람의 직접적인 조상을 북창군(평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4만에서 2만년전
사람 화석', 즉 '풍곡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조선사람들(고조선, 부여, 구려=고구려 이전시기 국가, 진국)이
우리 고유의 '신지글자'를 썼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조선사람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랜 시기(세계사 교과서는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출현시기를 약 3만∼4만년전으로 보고 있다 --필자)에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다른
지역의 인종들과 구별되는 <조선사람>으로 발생하였다"({조선력사})
#. 고대 조선사람들(고조선, 부여,
구려, 진국)은 신지글자를 썼다. 훈민정음은 고대부터 써오던 신지글자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낸 글자이다. 한글이 만들어짐으로써
우리 인민은 발전된 자기의 민족글자를 자지고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수 있었다.({조선력사})
#. "단군은
5천여년전인 기원전 3018년에 산좋고 물많은 평양에서 이름 높은 종족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단군은 어린시절과 청년시절 무술을
꾸준히 닦아 나갔다". {조선력사}는 평양시 강동군에 소재한 단군릉에서 '단군과 그 안해의 뼈와 다른 유물'이 나왔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편향적인 일제 침략사=지배정책사 서술>
** 앞서 언급한 우리 정부의 [수정요구의견] 가운데는 일제의 조선침략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이와 관련된 {국사}와
'신청본'의 서술을 비교하면, 양측면 중 어느 한 측면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차이가 엿보인다. 가령, 개발이냐 수탈이냐?
혹은 저항했는가, 반겼는가? 등을 둘러싼 양 교과서의 설명 차이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에
의한 국권의 피탈로 자주적인 근대화가 중단되고, 식민통치하에서 탄압과 수탈을 당하였으나…"(교육과정, 117쪽), 혹은 [민족의
시련](국사 하, 131-141)이라는 절 제목 자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국사}는 일제의 모든 지배정책을 '수탈론적인
관점'에서만 설명하고 있다. 즉 일제시기에 이루어진 인적·물적 자원 개발, 즉 식민지화와 동시에 진전된 '식민지적 근대화'의
사실조차 부정한다. {국사}는 근대를 인간역사의 최종적 도달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근대'는 부정의 대상이기도
했다. 게다가 {국사}는 '개발(수탈을 위한 개발)'로 말미암아 일부의 조선인 지주나 자본가들이 그 나름의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점을 아예 거론조차하지 않거나, 아니면 왜곡하고 있다.
#. "일제 식민 통치시기가 민족사의 일대 수난기임을
인식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이 한국의 근대화를 저해하였음을 파악한다"(교육과정, 163쪽) "일제의 식민통치를 단계별로
파악하고, 그러한 식민정책이 한국의 근대화를 저해하였음을 이해한다"(교육과정, 170쪽).
#. "한국인의 기업활동이
억압되고 민족산업의 성장이 저해되었다", "민족자본은 위축되고, 경제발전의 길도 막히게 되었다"(국사 하, 138쪽).
"민족기업의 활동은 1920년대에 비하여 크게 위축되지 않을수 없었다"(국사 하, 165쪽) "1930년대의 (소작)쟁의는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더욱 격렬해져 갔다". 소작쟁의 건수 증가 표 제시, 1921년 27건
1934년 7,544건(국사 하, 167쪽).
#. 우리 교과서가 그리고 있는 '近代社會'는,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참정권이 전제되는 민주정치가 구현되는 사회' '사회적으로는 사회 각 계층이 평등한 사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
'사상적으로는 절대적 가치체계에 의한 불합리한 구질서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적 경험을 존중하는 사회'(국사
하, 6-7쪽)이다.
** 다른 한편, 우리 근대역사의 온갖 부정성을 일본(왜*), 일제(현대사의 경우는 공산주의, 혹은 북한)에서 구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우리 근현대 역사의 모든 부정적 측면, 실패와 오류는 모두 그들 탓이다. 일본과 일제는 달리 말하면 꽤
그럴듯한 '희생양'(?)이다. 이런 역사교육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편향적인, 어떤 경우는 대단히 이중적인 일본관이 형성되었다.
일본국 혹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일본인=악마, 한국인=천사"로 부당하게 전제한 뒤, 우리
근대역사의 모든 비극을 그 악마들 때문으로 설명해서는 곤란하다.
#. [남바쓰리]라는 영화에 나온다는 대사 한 토막, "일본놈은 딱 두 종류가 있어. *만한 새끼와 *같은 새끼". 어떤 맥락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는가는 알 수 없으나 대단히 위험한 선동이다.
**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엄혹한 제국주의 시대에도 한국과 중국과 일본에는 '동아시아 민중연대론'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온 아름다운 청춘들이 있었다. 평범한 일본인 노동자로서 흥남지역에서 조선인 노동자들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되어 10년동안 옥중생활을 한 적이 있는 이소가야스에지(磯谷季次)의 회고({우리 청춘의 조선}, 사계절, 1988)에 보이는 바바 마사오의 임종 이야기는 그 하나의 사례라 할수 있다.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하다가 함흥형무소에서 폐병으로 사망한 바바 마사오는 감옥에서 임종을 맞으면서 그를 헌신적으로 간호해준 김재규(단천농조운동 지도자)의 손을 잡고 비록 육친이 간호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정성 어림을 이 이상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는 자는 자학사관론자?>
** 친일파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있는 점, 설명하는 경우도 '소수'였다거나 혹은 교묘한 '공작'이나 '강요'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우리 정부의 [수정요구의견] 가운데 보이는, '모임'측 신청본의 "한국
국내에서는, 일부에서 병합을 수용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등의 서술은, "한국병합 과정에서의 침략행위와 강제성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 옳다. 하지만 극소수의 '저질 인간', 예컨대 '을사5적'만이 '합방'에 찬성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그것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게다가 '강요'나 '공작' 때문에 그리된 것만도 아니었다. 친일파 형성문제에 대한 '구조적
접근'({국사}는 [머리말]에서 민족사를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필요하다.
#. "(항일의병운동의 시작)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벌과 조약 폐기를 황제에게 요구하는 상소운동", "5적 암살단을
조직하고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했다"(국사 하, 96-97쪽). 이전의 교과서와는 달리
'을사5적'의 이름을 하나도 거론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완용'도 모른다.
#. "(식민지 지배정책의 변화)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는 실제로는 소수의 친일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의식 성장을
오도"하였다(국사 하, 135쪽). 지배정책의 결과 형성된 각계각층 친일세력에 대한 설명이 철저히 축소, 은폐(더 정확한
표현)되어 있다.
#. "(민족예술)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일제는 모든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조선 문인 협회, 조선 음악가 협회, 조선 연극 협회 등을 조직하고, 모든 활동을 침략전쟁과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이와 같은 내용이 아닌 것은 모두 활동을 금지시켰다"(국사 하, 184).
#. "(건국 초기의 국내정세)
먼저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서 제헌국회에서는 친일파(일제시기사 서술 속에는 그 실체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발표자)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반공정책을 우선하였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친일파 처단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국사 하, 197).
** 일제의 조선지배를 지지했던(결과적으로는 '반겼던') 계급·계층·사회적 범주들, 그로 말미암아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조선사람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실, 해방 이후 이들은 대부분 출세했으나(친미파로의 변신),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은 대부분 패가망신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그런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조국과 민족을 지키고 가꾸어 가야 하는가, 왜 애국심이나 정체성 확보가 중요한가를 납득할 수 있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식민지화의 과정, 혹은 친일파문제를 서술하는 대목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모임'측이 주장하는 '自虐史觀', '自己惡役史觀' 극복, 우리 교과서는 이미 지나치게, 넘치게 달성했다고 보아야 한다.
3. 우리의 역사교육,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 지금까지 우리 국사교과서의 '기본 골격', '기본 코드'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국사교과서의 그것과 '모임'측 신청본의 그것이 대단히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남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허물을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내 생각은 이런데서 연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지 한 10년쯤 되었다. 그동안 많은 현장 교사들과 만나 국사교육의 문제점과 개선책을 논의해 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본 바람직한 국사교육의 방향과 방법을 몇 가지로 나누어 요약하면서 강의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국가·민족사 중심의 역사교육, 바뀌어야 한다. 우리 교육의 최고 목표는 조국과 민족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국민'이 아니라 '홍익인간'을 키워내는 것이다>
** 지금대로의 국사교육을 통해서는 우리 교육의 최고목표인 '홍익인간', 즉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 하는" 인간을 길러내기란 하늘에서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국사}교과서에는 참다운
홍익인간이 아니라 [국민교육헌장]의 표현대로 조국과 민족의 이익, 조국과 민족의 명령(민족사적 사명)에 따라 죽고 사는 국민과
민족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사회는 국가간 경쟁, 민족간 경쟁이 치열한 사회이므로 애국심과 민족국가 정체의식, 조국과
민족의 이익을 위한 단결은 매우 소중하다 할 수 있다. 근대사회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발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애국주의, 혹은 민족주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모임'측의 역사왜곡은 물론이고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위패가
모셔진 '1급 전범'들조차도 비판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몸에 배인 국민윤리나 민족의식'이 '인간으로서의
도리(양심)'와 충돌할 때 이를 진지하게 고민할 줄 아는 사람, 즉 진정한 '홍익인간'을 길러내는 데 기여하는 교육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민족 단위의 삶뿐만 아니라 지역·직장·동아시아·세계 단위의 삶, 또는 노동자·여성을 포함하여 '조국과
민족의 역사'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삶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읽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역사화'해야 한다). 요즘
여러 논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는, '신화화된 국가·민족사상을 해체하는 역사교육', '추상적 민족을 넘어 대중들의 생활세계에
밀착된 역사교육', '시민사회의 내재적 자율성에 기반한 공공의 역사교육'은 이런 노력이 진전될 때,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 작년 12월 야스쿠니신사를 답사했다. 안내 팜프릿에 따르면, やすくに란 '明治天皇'이 命名한 것으로서,
"國을 平安하게 하여, 평화로운 國을 만들어 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야스쿠니에는 군인이나 정치가들만이 "종군간호부를 비롯하여
주부, 소·중학교 아동·생도, 2살도 채 안된 어린이"의 위패까지도 모셔져 있다. 神社 입구에는 陸軍上等兵 田中金之助(1943년
12월 21세의 나이로 安徽省에서 戰死)가 썼다는 다음과 유서가 게시되어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죽습니다] "一. 천황폐하
만세/ 小臣 다나까는 기쁜 마음으로 죽습니다/ 우리 황국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천황폐하를 위해 그리
하겠습니다// 一. 부모님께 고합니다/ 우리 몸은 우리 개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요/ 나의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살아서 효도도 제대로 못하고 부모님 보다 먼저 죽는 이 불효자식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大孝'를 위한
죽음이니 너무 슬퍼하지는 마십시오/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몸은 비록 죽습니다만 '報國의 赤誠'은 영원히 살아
大日本帝國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건강에 유의하셔서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불효자
金之助)". 글을 읽으면서 코끝이 짠해져옴을 느꼈다. 하지만 곧이어, "아! 여기는 야스쿠니지"하는 생각과 동시에, "누가, 그
무엇이 스물한살의 꽃다운 청춘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초역사적 국가·민족담론을 해체하는 역사교육,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범해진 범죄와 오류를 비판적으로 성장하는 역사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애국심과 정체의식은 이런 역사교육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 국가와 민족은 우리의 역사현실에서 생성되고 발전되어온 역사적 실재이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 없이 진정한 애국심과 정체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게다가 '현실민족주의', '현실국가'의 한계나 약점을 신비화된 국가·민족담론을 통해서 은폐하거나 왜곡하려 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민족자주를 통한 국제협력, 남북화합을 통한 평화통일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열린 민족주의"로 그 성격을 규정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의 현실민족주의는 일본의 민족주의와는 달리 형성초기부터 억압성보다는 해방성이 훨씬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자 멘탈리티였다. 하지만 우리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자)가 항상 '정의의 사도' 역할만을 수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에 한국의 민족주의(자)는 민족의 이익을 표방하면서 일제의 중국침략을 방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투쟁조차도 민족대단결을 저해하는 반민족 행위로 폄하하였다. 게다가 분단체제가 형성된 이후에는 조국과 민족의 이름, 특히 '반공민족주의'나 '한국적 민족주의'의 이름 아래 반민중, 반민주적인 범죄행위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우리의 현실민족주의를 건강하게 만드는 첫걸음은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범해진 이같은 범죄와 오류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모임'측의 '자학사관론'처럼, "학생들에게 '자학적', '부정적'인 역사의식(국가·민족의식)만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예단일 뿐이다. 진정한 애국심과 정체의식은 조국과 민족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반성적 성찰 가운데서만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이다. 베트남전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한 우리 군인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태평양전쟁에 참여한 일본 군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시정하지 않는 가운데 일제의 민중수탈을 운운하는 것도 옳지 않다. 현실민족주의는 '열려라 참깨' 한다고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 교육과 실천을 통해서라만 비로소 열릴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민족주의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일은 '통일지향적인 역사인식'을 정립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 흔히, "남북한의 상호 이해와 신뢰는 같은 민족으로서의 오랜 공동 경험을 확인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서" 나올 수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낭만적으로 '같은 민족으로서의 오랜 공동체적 삶의 경험'을 상상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역사적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다시 불러내고 일깨워줘야 할 잃어버린 민족전통이나 공동체의식(특히 애국심)이란 없다. 다만 남북한의 현실 역사과정에서 그 나름의 필요에 따라 주조(조작)된 '민족사'와 '인민사·수령사'가 존재할 따름이다. 게다가 충성과 복종의 대상이 다르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남북 역사학계는 통일 지향 역사학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사회의 민족주의, 자기 사회의 역사교육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솔선수범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낡은 민족담론을 해체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또다시 낡은 국가·민족담론을 특권화하여 통일운동에 활용하고자 한다면 남북의 역사학은 '배반당한 통일'에 기여하는 학문이라는 불명예를 짊어지기가 십상일 것이다. 조국과 민족의 통일이라는 '신성한 대의'를 앞세우며, 또다시 억압과 수탈, 학살과 구금과 같은 '야만'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우리 민족에게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일본·일제', 혹은 '북한·공산주의'라는 희생양을 등장시켜 국가·민족사의 부정성을 가리려는 시도, 중단해야 한다>
** 일제의 지배(개발과 수탈)로 말미암아 다수 한국인들이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불어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도운 사람, 그를 통해 돈과 빽을 증식시킨 사람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속되게 표현하면 해방 후에도 다 '잘 나갔다'. 하지만 일제하에서 꾸준히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은 상당수가 '패가망신'했다. 그래서 '나서지 마라' 라는 말이 생겼다. 이런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는 가운데, 반민특위 문제에 대해, "반공정책을 우선하였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친일파 처단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국사 하, 197)고 서술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이런 논리에 젖어들 경우,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 처단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라는 질문에 우리 학생들은 <우선 반공을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얼마나 치졸한 은폐와 왜곡인가? 이런 대목에서 희생양이 하나 더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불어 일제하의 공산주의운동도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분이었으며, 우리 역사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일정하게 수행하였다는 사실(국가보훈처는 일제하의 공산주의운동도 민족운동으로 간주하여 유공자 포상을 하고 있다) 등을 가감 없이 가르치는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람직한 역사교육을 위해서는 국가의 역사독점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정교과서제를 폐지하고 바람직한 검인정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 일본의 경우, '모임'측의 교과서를 비롯하여 '다양한 색깔'(?)의 검정 교과서가 8종이나 출판되고 있다. 부러워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교과서는 국정일 뿐만 아니라 서술내용도 철저히 교과서 준거안에 의거하여 연역되고 있다. 가령 근현대사 교과서 준거안'에 보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중추기관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설명할수 있다", "유엔의 결의에 따라 5·10총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설명할수 있다"는 식의 설명, 그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시, 필요하다 하더라도 가급적 피해야 한다. [7차교육과정의 성격]에 명시되어 있는대로 국사교육 과정에서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교육', '자율성과 창의성을 신장하는 교육'이 실천되어야 한다. 과거와 역사가 다를 수 있다는 점, 교과서에 제시된 사실과 역사상, 결코 '절대배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점, 인식시켜야 한다. 참고삼아 이야기한다면 역사의 국가독점 현상, 북한의 경우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조선력사}에는 김일성 '교시(敎示)'가 63회, 김정일 '말씀'이 34회 등장하고 있는데, 모든 역사해석이나 설명은 철저하게 그로부터 연역되고 있다.
<역사로부터 소외된 민중주체의 글쓰기운동을 장려해야 한다. 모든 학생들이, "이제 더 이상 외우기는 싫다, 차라리 내가 쓰겠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역사교육이 필요하다.>
** 민주주의는 '주체적, 비판적인 의사소통'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발달할 수 없다. 과거 역사는 '주체적, 비판적
의사소통'의 주요한 수단일 수 있다. 어떤 국가, 어떤 민족이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도 과거 역사를 매개한 '주체적,
비판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형성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맨발의 역사가'를 자칭하는 독일의 아마추어 역사가들이 주도한 이른바
'역사공방(歷史工房)운동'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운동의 주체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일상적인 삶의 역사 속에서 '자기
발견과 각성의 계기', 예를 들면 '자신의 정치사회적 결정과 행동에 대한 역사적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교육과정의 국사 준거안들은 모든 항목을 '이해(파악)한다', '설명(말)할수 있다', '근거를 제시할수
있다(탐구한다)', '추론한다(할수 있다)', '토론한다'로 끝맺고 있다. 하지만 실재로는 '외운다'라는 표현이 훨씬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꿈같은 이야기일지 모르나 학생들이, "이제 더 이상 외우기는 싫다, 차라리 내가 쓰겠다"고 말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와야 우리의 역사교육에도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 '차라리 내가 쓰겠다'(작년 공주대 역사교육학과
학생들이 주최한 학술심포지움의 구호였다)는 대목을 쓰다가 조한혜정 선생님이 어떤 글에서 인용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가 생각났다. "됐어 됐어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내사투리로 내가 늘어놓을래/ …전국의 구백만
아이들의 머리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 넣고 있어/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언제쯤 그들의
'사투리'로 쓰여진 '한국사'를 읽어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현실의 '한국사'는 지나치게
'엄숙'하기 때문이다.
**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일은 중요하다. 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역사왜곡논쟁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면 '같은 잣대'로 우리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바로잡으려는 자세가 갖추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과거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바로잡는 첫걸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조국과 민족의 과오나 범죄조차도 가감 없이 사실대로 가르치는 역사교육,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국과 민족을 지키고 가꾸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애국심과 정체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면서 강의를 마치고자 한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관련 자료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한 학술회의에 참가한 한국의 역사학 관련 학회 공동성명>
일본 역사교과서의 改惡을 우려한다.
현재 일본에서는 2002학년도부터 중학교에서 사용하게 될 역사교과서의 마지막 단계의 검정이 행해지고 있다. 검정을 받고 있는
교과서 가운데는 종래의 7종 이외에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교과서도 들어 있다.
이번에
검정을 받고 있는 '새 역사교과서' 및 기존의 역사교과서들이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역사의 진실을 전하는 데에 매우 부적절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이에 한국의 역사학 관련 학회들은,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한 학술회의를 개최하기에 앞서, 일본
역사교과서의 시각이 구시대의 皇國史觀으로 回歸하고 있으며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데 인식을 공유하는 한편 정확하고 성실한
역사서술이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의 전제라는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첫째, 역사교과서가 가까운 나라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부당하게 말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촉구한다. 검정을 신청한 종래의 일본 역사교과서는 일본의 침략을 '진출'로 변경했을 뿐만 아니라, '종군위안부'를 비롯한 일제의 식민지지배와 관련된 사실을 대폭 삭제했다. 더욱이 '새 역사교과서'는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오히려 합법적이고 발전적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번에 검정을 받고 있는 교과서들은 한국 민족이 치열하게 전개한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서술을 대부분 생략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역사교과서의 이러한 개악은 일제의 침략을 경험했던, 한국을 비롯한 이웃 여러 나라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행위다. 우리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도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진솔한 인식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 역사교과서는 침략전쟁을 미화하거나 인종대립을 부추기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되며, 기성세대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평화를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 '새 역사교과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본이 서양 백색인의 지배로부터 아시아 유색인을 해방시키기 위해 벌인 聖戰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거꾸로 해석하는 극치일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의 역사를 찬미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역사를 폄하하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지금 세계는 국제화·개방화가 진전되어 국가간·민족간의 상호이해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된다. 이러한 시대적인 추세에 역행하여 일본이 전쟁을 미화하고 인종대립을 선동하는 듯한 역사교과서를 출판하는 일은 反人類的 범죄행위이며, 反平和的 작태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의 국민과 학생들이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기대한다.
셋째, 이번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몇몇 자구를 수정하거나 사실을 첨삭하는 수준에서 해결되기를 우리는 원치 않는다. 역사교과서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해 미래에 나아갈 바를 가르치는 중요한 학습교재이다. 따라서 유네스코 등에서조차 역사교과서는 국제이해와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서술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지금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이러한 방침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편협한 자기나라 중심주의 내지 자기민족 중심주의에서 탈피하여 국제이해의 정신 아래 인류의 화해와 공존을 지향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한국과 일본은 그간 공동의 역사인식을 통해 과거의 불행을 씻고 서로간의 돈독한 이해와 화해·협력을 추구해 왔고, 그 결과
최근에는 괄목할 정도로 우호친선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교과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한국민을 매우 당황스럽게
만들고 이웃 나라 국민들의 분노를 격발시키고 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에 있다. 일반 한국인은 일본 상품과 문화에 대한
개방, 두 나라 수뇌 사이의 '파트너십 공동선언',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등으로 한일관계가 아주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이번에 제기된 역사교과서 문제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다시 확산시키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한일관계를 시대역행적인 단계로 이끄는 것이며, 두 나라 모두에게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과거사를 정리하고 선린 우호를 증진시켜 인류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책임을 지고 있다. 따라서 일본정부와 역사교과서 편찬에
관여하는 인사들, 그리고 일본국민은 모처럼 개선되고 있는 한일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정부와 역사학자, 그리고 한국민은 앞으로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일관계를 저해하는 어떠한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를 예의
주시하면서 필요한 조처를 강구해야 한다.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바람직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2001년 3월 19일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한 학술회의에 참가한 한국의 역사학 관련 학회
동양사학회·서양사학회·역사교육연구회·역사학회·진단학회·한국고대사학회·한국근대사학회·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한국민족운동사학회·한국사연구회(주관)·한국사학사학회·한국사학회·한국역사연구회·한일관계사학회
(가나다 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 및 대응 비교>
<<중앙일보>> 2001년 05월 01일 05면(10판)
<인상깊은 교과서 대응> {한겨레} 2001. 5. 14
일본 우익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쪽의 후소샤 역사교과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검토보고서가 지난 8일 일본 정부에
전달됐다. 한 나라의 정부가 이웃나라의 역사교과서에 대해 전문 역사학자의 검토를 거쳐 이렇게 상세하고 구체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이 교과서에 대한 한국 국민·정계·학계·언론계의 비판과 반발이 강하다는 것이 일본에도 전해져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한국 정부의 의견서는 절도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서론의 첫머리를 '국제화시대의
교과서를 보는 시점'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훌륭한 서술방식이다. 학생들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국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을 통해 "객관적이고 열려진 태도"를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보편적인 원칙이다.
'검토의 이유와 목적'이
서술돼 있는 곳에서는 후소샤 교과서를 중심으로 한 교과서 내용이 근린제국 조항과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의 담화,
98년의 한-일 공동선언의 취지 등과 "현저하게 어긋난 내용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한국 관련 내용의 오류와 왜곡은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가 근린제국 조항을 기준으로 삼아 검정작업을 한 것을 먼저 사실로 인정한 뒤 검정의 불충분과
부족, 불철저함을 비판하는 편이 좀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요구로서 '오류와 왜곡'의 시정이라고 표현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이 점은 검토방법을 설명한 부분에서 첫째 '사실과 기술의 잘못', 둘째 '해석과 설명'의 '왜곡', 셋째 내용의
'축소와 누락'을 든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후소샤 교과서와 관련해 '역사인식의 문제'를 9가지로 지적한 뒤 25개 주제에
대해 '수정요구'를 내놨다. 그 가운데 11곳이 전근대사, 14곳이 근·현대사 부분이다. 전근대사에 있어서는 한국 학계의 권위로
지적했기 때문에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나는 아라이 신이치, 운노 후쿠주, 스미야 미키오, 다카사키 소지, 미즈노
나오키, 미조구치 유조 등 6명의 역사학자와 함께 지난달 후소샤 교과서의 근·현대사 부분에 대해 51곳의 잘못과 문제점을 지적한
문서를 발표한 바 있다. 한국 정부의 의견서 가운데 우리들이 지적과 겹치지 않은 것은 군대위안부와 한국전쟁에 관한 것 등 두
가지뿐이다.
한국 정부의 수정 요구에 대해 후소샤를 거느리고 있는 <산케이신문>은 그렇다 치고
<요미우리신문>이 사설에서 "한국의 수정 요구는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정부는
신중하게 대응하겠다고 표명했다. 특히 문부과학성은 전문 학자들이 한국 정부의 요구를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반적인
재수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하고 있으나, 그와 함께 잘못이 있으면 수정은 필요하다는 것은 문부과학성도 재삼 밝힌 바
있다. 한국 정부의 신중한 문제제기가 노린 대로 재검토가 이뤄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후소샤는 검정을 통과한 책을
인쇄해 견본본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고 이달 말에는 책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이 국면에서 일본의 역사학자 가운데서도 후소샤
책의 '사실과 기술의 잘못'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한국 정부의 의견서 검토와 함께 이들 일본 역사가가 낸
의견서의 검토도 병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후소샤의 견본본은 잘못투성이의 결함 교과서라는 게 밝혀지고
채택을 추진하는 쪽도 커다란 곤란에 봉착할 것이다.
문부과학성의 검토 결과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사항이 나타나면 후소샤에
대한 행정지도가 행해지고 잘못의 수정이라는 형태로 재수정이 이뤄질 것이다. 이는 '만드는 모임'에는 제2의 패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검정기구의 실수를 인정한 것이 되므로 문부과학성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한국 정부의 수정요구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전에 없이 한국·중국·일본 역사학자에 의한 공동연구·공동토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한-일간 위원회가 성과
없이 끝난 것을 알고 있지만 다시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인선하는 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간·학계의 자주적인 움직임을 양국 정부가 지원하는 형식으로 복수의 팀이 만들어져 논의한 뒤 성과를 공표하고,
이를 양 국민과 정부의 검토에 부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후소샤의 교과서가 학교에서 어느 정도 채택되는가에 관계없이
'만드는 모임'쪽 사람들은 21세기를 사는 젊은 세대를 위해 현재 요구되고 있는 역사교과서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한국 정부의 의견서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객관적이고 열려진 태도'를 기르는 역사교과서를 한·일 역사가의 공동 노력을
통해 양국에 제안해가는 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을 이루는 길이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정부가 국민 모두의 강한 관심을 모아 의견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에 보내준 것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린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역사학
<일지>
(1) 일본교과서 검정 통과 일지
1993. 8. 집권 자민당, 역사검토위원회 설치. 침략 가해를 부정하고 이를 역사인식으로 정착시키는 국민운동 제창
1995. 1. 우파학자 중심 '자유주의사관' 연구회 발족
1996. 1. 산케이신문,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연재
1996. 6. 산케이신문 기존 교과서 공격 캠페인
1996. 12. 니시오 간지 전기통신대 교수 등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창립 기자회견
1997. 1.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하 만드는 모임) 설립 총회
1997. 2. 우파 교과서 제작 지원 위해 자민당 내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 결성
1997. 8. '이에나가 교과서재판' 서 원고측 일부 승소(731부대 기술에 대한 검정 위법)
1998. 3. 마치무라 노부타카 문부과학상, 기존 역사교과서의 편향성 지적
1998. 7. '만드는 모임' 제1차 총회
1998. 2. '만드는 모임' 광역지방자치단체 지부 설립
1999. 11. 니시오 간지, 역사 교과서 모태가 된 '국민의 역사' 발간
1999. 12. '만드는 모임' 회원 1만명 돌파
2000. 4. '만드는 모임' 중학교 역사 및 공민교과서 검정 신청
2000. 9. 한국 외무장관, 일본의 신중한 대응 요청
2001. 2. 총리 주재 관계부처 대책회의 개최
2001. 3. 김대중 대통령,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의 올바른 역사인식 언급
2001. 3. 7. 공민교과서 수정 지시, 국가주의 및 핵무기관련 내용에서
3. 17. 일본 우익 교과서 사실상 검정 통과
4. 4. 새역모교과서 최종본에 대한 문제점 정부 지적
4. 13. "위안부 역사는 화장실 역사" 새역모교과서 저자 발언 파문
4. 14. 일본 우파 학자들 '망언 퍼레이드'
5. 1. 정부, 일본교과서 재수정 요구안 확정(유네스코 교육 권고안과 일본교과서의 위배내용 서술)
(2) 정부대응-일본반박(한국·일본 및 기타국가들의 관련동정)
2000. 8. 16. 최상룡 주일대사 아사히신문 인터뷰.
9. 15. 정부, 8월말 주한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 역사교과서 왜곡 유감 표명
11. 6.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교과서문제 등 논의
2001. 2. 19. 정부, 일본교과서 문제 심각성 분석, 중국도 외교공세 펼 방침
2. 19. 정부, 강경대응 결정
2. 21. 정부, 일본교과서 검정 통과 땐 '불채택운동' 전개 방침
2. 22. 일본 정부, 교과서문제에 정치적 개입 않기로 결정
3. 1. 28일, 일본교과서문제와 관련 외교통상부, 문화관광부 등 관계부처 합동대책회의, 이정빈 외교, 주한일본대사 만나 정부입장 전달, 국회, 본회의에서 '결의안 채택
3. 1. 일본 내 '내정간섭' 논란
3. 1. 모리, 교과서유출 경위에 불쾌감 표시
3. 2. 김대중 3.1절 기념사에서 일본교과서문제 언급
3. 2. 이만섭 국회의장, 3.1 기념식에서 격렬한 일본 비난
3. 2. 한국의 일본역사교과서 비난에 대한 일본 내 다양한 반응
3. 2. 일본 후쿠다 야스오 관방청장, 한국정부 유감과 관계없이 적절한 검정 실시될 것
3. 7. 중국 "왜곡 교과서 통과땐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경고
3. 9. JP, 모리총리 만나 한국정부의 일본교과서 우려 전달
3. 16. 주룽지 "역사교과서 왜곡 일본 정부 책임"
3. 29. 정부, 29일 일본교과서 대책회의(외교통상부·청와대·국무조정실·교육인적자원부·공보처)
4. 4. 외교통상부 공식성명 "일본, 과거잘못 합리화 유감"
4. 4. 중국외교부, "강렬한 분노와 불만" 표시
4. 5. 외교통상부, 주한일본대사에 유감의사 전달
4. 5. 정치권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항의
4. 5. 한승수 외교, 주한일본대사 접견
4. 5. 4일 고노 요헤이 외상, "교과서 바뀔 일은 없다. 교과서채택에 외무성 개입 불가" 발언
4. 6. 정부, 본 사태와 관련,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반대 검토
4. 6. 정부의 단기, 중기 대응원칙
4. 7. 대만, 베트남 일본역사왜곡 비판
4. 7. 교과서왜곡 문제 파장으로 한. 일 제3차 각료회의 연기
4. 9. 북한외무성, 8일 일본역사왜곡 비난성명 발표
4. 10. 10일 최상룡 주일 대사 전격 소환
4. 10. 한일의원연맹 일본 항의방문
4. 10. 국회 교육위 소속 의원, 9일 일본대사관 항의방문, 항의서한 전달
4. 11. 9일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남북한과 일본, 역사왜곡 문제로 격론
4. 12. 김대통령, 11일 청와대에서 한일경제협회 일본측 회장단, 일본대사 접견하고 일본교과서 재수정 촉구
4. 12. 중국, 제57차 유엔 인권위(11일)에서 일본역사왜곡 규탄
4. 13. 중국 외교부, 주중 일본대사 불러 일본 역사교과서 재수정 요구
4. 13 한일의원연맹 대표단, 문부성 항의방문
4. 17. 일본 외상, 한승수 외교에 친서 보냄
4. 18. 최대사 귀임 논란
4. 19. 한국·일본 공동 해상수색구조훈련 무기 연기
4. 20. 최대사 19일 귀임, 일본외상에 친서 전달
4. 20. 정부, 일본 역사왜곡 종합대책 수립일정 늦추기로
4. 20. 최대사 귀임후 도쿄 주재 한국특파원 회견
4. 23. 정부, 일본에 교과서 재수정 공식 요구할 방침
4. 26. 재수정 요구 정부방침 확정할 예정
4. 28. 김대통령, 27일 고이즈미 신임 총리에 교과서 성의 촉구
4. 30. 정부, 일본교과서 40여개 항목 재수정 요구 결정
5. 1. 정부, 일본교과서 30여개 항목 재수정 요구 결정, 대책위원회 설치키로
5. 1. 문부과학성, 재수정 요구에 강경입장
5. 3. 한승수 외교, 방한한 일본민주당 대표 면담, 교과서문제 협력 요청
5. 4. 30여항 재수정요구안 4일 전달
5. 4. 김대통령, 일본민주당의원단 접견석상에서 교과서문제 유감표시, 협조 요청
5. 5. 일본 총리, 4일 김대통령에게 친서 전달
5. 5. 외교통상부, 유엔인권위에서 교과서 수정요구 권고결의안 채택 추진
5. 7. 주한일본대사관, 4월말 국회에 서신 "교과서 日정부 무관"
5. 7. 9일 일본 도쿄(東京)지법에 '왜곡 역사 교과서 제조 및 판매 금지 가처분 소송' 낼 예정
5. 9. 8일 외교통상부 장관실에서 정부 재수정요구서 전달 (외교장관 주한일본대사)
5. 9. 일본총리, 기자회견에서 재수정 요구 수긍불가 입장 밝힘
5. 9. 관방장관, 문부과학상 "재수정은 현행제도상 불가" 강조
5. 11. 일본정부, '교과서 검토위원회' 설치, 역사적 사실관계 검토 방침
(3) 새역모 반대 민간대응 일지
2000. 10. 31. 일본 역사교과서 검정조사 심의위원, 새역모 교과서 불합격시켜야 한다고 주장
11. 7. 한일관계사학회 심포지엄에서 일본 역사학자, 일본역사교과서 개악 실상 폭로
12. 21. (일본) 역사학자 60명, '역사연구자·교육자 호소회' 결성. 성명 발표
2001. 2. 15. (일본) 와다하루키 등 일본지식인 889명, 긴급성명 통해 새역모교과서 검정통과 반대
2. 26. (일본) 와다하루키 등 일본지식인 16명, 기자회견에서 "검정 통과시 재검정운동 펼칠 것"
2.
28. (미국) 강제징용경력 재미동포, 일본기업 미쓰비시, 미쓰이를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 (한국) 흥사단, 일본제품 불매
등 대일항의운동 펼치기로, 전남 여수 한배달 민족정기 선양위원회, 일제가 설치한 혈침 제거. 전국 항의집회.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수요집회, 독도향우회, 독립유공자유족회 탑골공원 시위
3. 1. (일본) 중국 귀환자연락회.일중우호 원(元)군인회·부전(不戰)병사 및 시민회 등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옛 일본군 모임인 3개 단체, 새역모 반대성명 발표,
3. 1. (일본)야마즈미 마사코 전 도쿄도립대학장 등 교육자 18명, 새역모교과서 비난
3. 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일본역사왜곡 비난성명 발표.
3. #. (평양) 남북역사학자, 공동성명 발표
3. 2. (일본) 전범처벌자모임인 '중국귀환자연락회'등 세 단체 회원 9명, 문부과학성 기자회견장에서 '문부과학성 장관에게 보내는 요망서' 발표, 새역모교과서 검정통과 반대
3. 8. (일본) 저널리스트 와니 유키오, 명치유신부터 현재까지 지배층의 역사왜곡사 추적한 저서 출간
3. 16. (일본) 오에 겐자부로 등 지식인 17명, 검정불합격 주장 기자회견
3. 19. 국내 14개 역사학 단체 일본교과서 왜곡 규탄 성명
3. 24. 한·일 시민단체들, 일본교과서 왜곡 항의집회
3. 28. (일본) 도쿄대 졸업식에서, 서울대·도쿄대 총장, 일본역사왜곡 반성 촉구
3. 31. 국내 네티즌 3.31 온라인 시위 파장
4. 3. 한국교총, 전교조, 교육현장에서 문제제기하기로, 중앙고, 수요집회 참가키로 결정
일본 역사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본부, 기자회견
민주노총, 비난성명, 관련국들과 공동대응 촉구
(일본)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 21' 등 12개 시민단체, 왜곡교과서 불채택운동 전개하기로
4. 4. 독도향우회, '일본의 독도 강탈 음모 및 역사교과서 왜곡 분쇄 한민족 결의대회' 개최, 교과서 왜곡 항의 혈서
수요집회, '왜곡교과서 채택 반대' 입장
한국교총, '일본교과서 역사왜곡 특별수업안' 발표,
교원노조 '공동수업안' 발표키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규탄성명 발표
4. 5. 와다하루키, 검정 통과 비난
4. 6. 전교조 대구지부, 역사왜곡 올바른 이해 위해 시범수업하기로 결정, 발표
중앙고, 첫 특별수업 진행.
울산에서 일본교과서 화형식, 울산 병영 삼일봉제회 주도
4. 8. 유럽 14개국 한국학자, "일본 역사왜곡 깊은 우려" 공식 표명
4. 10. 서울 초등생 항의가두행진
시민단체 국제연대 항의 추진
네티즌, 일본 문부과학성 등 6곳 대상으로 사이버시위 재개
4. 11. 수요집회에 중국, 일본, 캐나다 등 외국인들 참석, 함께 왜곡교과서 규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성명 발표
4. 13. 교과서왜곡문제로 한·일네티즌 채팅 전쟁 열기(자동번역 시스템으로 실시간 채팅)
사이버공간에서 일본 비판
4. 13. (일본) 간사이지역 언론노조, 검정통과규탄성명 발표
4. 15. (일본) '새역모 교과서 채택을 반대하는 부모들의 모임' 조직, 학부모 10여명, 새역모교과서 채택 반대 서명운동
4. 17. (미국) LA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재미한인 시위(LA 미국총영사관,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애틀랜타 등 10여개 한인회 각 지역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시위)
4. 24. 한국, 미국, 일본, 미국 워싱턴 허드슨연구소 주최 한일교과서세미나에서 논전
4. 25. (일본) 일본 지식인 5명, 일본 참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 새역모교과서 史實기술 51곳 오류 지적, 재수정 촉구
4. 26. (일본) 일본 언론·문화·정보 노조회의, 새역모교과서 우려성명 발표
(일본) 민주당, 새역모교과서가 "주변 국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지침과 맞지 않다고 지적.
4. 27. 일본 외상, 새역모 '역사왜곡'이라고 비판
5. 2. (일본) 아사히신문 보도, "전국 47개 교육위원회 중 29곳이 교사의 교과서 채택 권한 무력화, 교사들 반발 예상"
5. 3. (일본) 민주당대표 한국 방문, 새역모교과서 역사관 비판
5. 4. (일본) 공명당 간사장, "새역모교과서 역사사실오류 부분 재수정 당연"
(일본) 민주당대표, 새역모불채택운동 당 차원에서 벌여나가겠다고 밝힘
5. 11. 재미한국인 10여 단체 100여명, 워싱턴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