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7월6일 제주를 출발한 우리는 오후 8시경 중국 복건성 하문공항에 도착했다. 사실 환승시간을 제하면 3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로 제주에서 직선거리로 약 6,000리, 2,400km다.
이방익 일행 8명은 제주바다에서 표류를 시작하여 돛도 노도 삿대도 없는 일엽편주로 무려 16일간 표류하여 하문 앞바다 팽호도에 닿았다. 먹은 것이라곤 표류 10여일 만에 배에 뛰어오른 물고기 한 마리뿐이었다. 대만 병부(지금의 대남)에 이르러 입국신고를 마친 이방익 일행은 하문으로 이송되는데 항해 길인 천진(川津) 앞바다에는 해적선들이 들끓어 여러 선박들이 떼를 지어 움직여야 한다. 천진은 지금의 금문제도를 이른다. 이방익 일행은 대만에서 10일 만에 하문에 도착한다.
우리가 이 먼 길을 찾아 이방익의 발자취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이방익표류기』의 기초자료로 활용한 『표해가』, 『표해록』 등에서 그의 행적을 명증하고 그가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이 진실임을 밝히는데도 의의가 있다.
이번의 이방익 표류노선 탐방은 주제주중화인민공화국총영사관의 초청에 의한 것이다.
평소 본 영사관 행사에 적극 참여해 주신데 대해 사의를 표합니다.
중국 복건성(福建省)꽈 제주 간의 인문교류를 강화하고 이방익과 관련된 중한 교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해 심규호 교수님과 권무일 소설가님을 비롯한 6명을 “이방익 표류 노선 탐방단”을 구성하여 7월6일부터 14일까지 복건성을 방문하도록 초청하고자 합니다. 복건성 하문시(廈門市)와 천주시(泉州市), 남평시(南平市), 복주시(福州市)를 방문하여 이방익 표류노선을 탐방하고 현지 연구자와 교류하도록 하겠습니다. 귀 방문단의 중국내 숙식, 교통 등 비용은 총영사관에서 부담합니다.
초청명단: 심규호(제주국제대 중국어과 교수), 권무일(소설가), 진선희(한라일보 기자), 고봉균(한라일보 기자), 유소영(심규호 부인), 노인숙(권무일 부인)
하문공항에 내리니 늦은 시간임에도 복건성 인민정부 외사판공실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고 총명해 보이는 30초반의 왕이펀(王益芬)이라는 여인으로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그녀의 싹싹하고 유능해 보이는 면모로 인해 여행의 8박9일간의 여행에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오늘의 시작점부터 우리가 여행을 마칠 때까지 우리와 동행한다고 한다.
우리는 중국측에서 마련한 19인승 버스에 올라 하문 시내의 어느 5성급 호텔로 향했다. 공항에서 15분 거리였다.
7월7일 아침 9시에 우리는 호텔에서 나와 차에 올랐는데 나화(羅華)라는 젊은 가이드가 차내에서 자기소개를 끝내기가 바쁘게 ‘우리 하문’으로 시작되는 하문 소개에 열을 올렸다. 나화는 복건성 외사판공실에서 일시 고용한 청년으로 남평시에서도 우리를 안내하게 된다.
하문은 중국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로 2002년 유네스코로부터 ‘살기 좋은 국제공원도시’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정말로 반도와 섬으로 이루어진 하문은 푸른 바다, 파란 하늘, 짙푸른 가로수, 온종일 밝게 빛나는 태양,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를 다 갖고 있다. 가이드는 하문을 자랑하느라 입에 거품을 문다. 하문에는 오토바이가 없으며 하문섬에 여기저기 보이는 호수는 담수호가 아닌 해수호, 인구는 400만인데 그 중 2/3가 하문섬에 살며, 나머지는 동안구 등 내륙에 산다. 하문은 아편전쟁 이후 발달한 도시라는 등, 말은 서툰 한국말이지만 목청을 한껏 높인 설명은 차가 중산공원 후문에 대기까지 이어진다.
하문은 구룡강을 끼고 동남쪽으로 장주(漳州)와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으로는 천주( 泉州)와 맞닿아있는 현대화된 항구도시로 중국의 5대 경제 특구의 하나이다. 대만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으며, 경치가 수려하고 여름에는 무덥지 않고 겨울에는 춥지 않아 생활하기에 매우 좋다. 하문 시민들은 열정적이고 교양이 있으며 소박하고 온화하고 따스한 생활을 하고 있어 사업, 학습, 생활하기 가장 적합한 도시중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문은 천주(泉州) 내지 동안현(同安縣)의 일부로 진시황 때는 민중군에 속했으며 송나라 때 지금의 동안현이 설치되었고 하문섬은 해적이 들끓던 섬으로 가목서(嘉木嶼)라고 불렀다. 정성공이 이곳에 요새를 설치하여 청나라와 맞서 싸울 때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사명성(思明城)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성공은 여기 하문에서 버티다 세 불리하자 대만으로 군사를 이동시켰고 그 후 청나라는 여기서 발진하여 대만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방익이 하문에 도착할 당시인 18세기는 대항해시대로 영국, 스페인, 포르트갈 선박이 드나들었고 장주, 동안, 천주의 많은 한인들이 하문을 통하여 대만으로 건너가거나 동남아 등지로 진출하여 화교가 되었다.
‘세계 화교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복건에서도 하문은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이 1842년 난징 조약으로 상하이, 광저우, 푸저우와 함께 개항하면서 하문 사람들의 해외 진출이 가속화되었다. 1980년 등소평이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 중 하나로 지정하면서 자본주의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정착시켰다. 또 하문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차(茶)를 해외에 알린 도시이다. 무이산(武夷山)에서 생산된 우롱차 철관음(鐵觀音)은 하문을 통해 해외로 수출되었다.
하문대학교는 싱가포르의 고무왕으로 불리는 저명한 화교지도자 진가경(陳嘉庚)이1921년에 고향 하문에 투자하여 설립한 중국 근대교육 역사상 최초로 창설한 대학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 직속 대학, 국가중점대학 중 하나로 중국 동남지역에서 학술수준이 가장 높은 종합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샤먼대학은 완벽한 교육, 과학연구 설비와 공공 서비스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학교 면적은 560만㎡이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하고 있어 중국에서 공인하는 제일 아름다운 캠퍼스중 하나이다. 현재 재학생은 약 4만여 명이고 2,500여명으로 된 교수진을 갖추고 있다.
당초에 우리는 하문대학교를 방문해 이방익 및 한중 학술교류에 관련하여 교수진과 면담할 계획이었으나 그 쪽 사정으로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하여 이방익과 꼭 관련은 없지만 우리는 다른 유적지를 방문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차는 중산공원 후문에 당도하였다. 우리는 골목 안쪽에 위치한 동악묘(東嶽廟)를 찾았다. 동악묘는 중국 태산(泰山)의 신을 모신 사당으로 본존(本尊)은 동악대제(東嶽大帝)이며, 본존 양편으로 낭랑(娘娘), 문창(文昌) 등 많은 도교(道敎)의 신들이 모셔져 있었다. 중국 특히 남중국에는 이렇듯 도교적 신앙이 널리 퍼져 있다. 면면히 이어온 중국의 민간신앙에 대해서는 더 많이 보고 참예하면서 별도로 검토의 기회를 가질 작정이다.
이어서 우리는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남보타사(南普陀寺)를 찾았는데 이 사찰은 복건성에서 가장 큰 사찰로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처마와 용마루의 화려한 조소(彫塑) 장식이 눈길을 끈다. 이 사찰은 매일같이 불교 신도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화교가 유난히 많이 방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타국에 정착한 화교에게 불교는 중국인이라는 문화적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륵불이 안치된 천왕전(天王殿)을 시작으로 산자락을 따라 올라가면서 대웅보전(大雄宝殿), 대비전(大悲殿), 장경각(藏經閣) 등을 둘러본다. 마침 삼세불(三世佛)이 모셔진 대웅보전에서는 스님들이 모여 경을 읽고 법회를 하고 있었다. 8각 지붕이 화려한 대비전은 천수관음상을 돌며 기도하는 중국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거구의 스님(이름을 물어보았으나 그 스님은 빙그레 웃기만 한다.)은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다는 장경각의 문을 열어 주었다. 거기에는 국보급에 해당하는 작은 불상이 즐비하게 보존되어 있고 불교경전이 두터운 책장에 꽂혀있다. 불교와 도교에 관한 지식을 가진 심규호 교수는 그 스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보물들을 감상하고 있었지만 그 방면에 문외한인 나는 그냥 뒤따르기만 할 뿐이었다. 남보타사 관람을 마친 우리는 경내의 식당에서 소채식(素菜食)으로 점심식사를 했는데 야채로만 요리한 음식이 이렇듯 다양하고 맛이 있는데 놀랐다.
점심식사 후 우리는 이방익이 하문에 상륙하자마자 방문했다는 주자서원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주자서원은 주자(朱子)의 호를 따서 자양서원(紫陽書院)이라고도 부른다. 주자(1130-1200)는 남송의 유학자로 본명은 (朱熹)이고 호는 자양(紫陽) 또는 회암(晦庵)이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하여 완성시켰다. 그의 학설은 명·청 시대 유학의 정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의 사상과 학풍은 후세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공자와 맹자 다음으로 숭배되었고, 풍부한 독서와 세밀한 분석을 중시하는 그의 학풍은 후세 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고려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하였는데 주자에 심취한 안향은 주자의 호 회암(晦庵)을 따서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지었고 주자가 세운 백록서원(白鹿書院)을 본떠 백운서원(白雲書院)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다. 그 후 주자의 사상체계는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자리를 잡았고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이라는 대학자의 사상체계로 이어졌다. 주희는 18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동안현 주부로 첫 관직을 시작하였다. 동안현의 자양서원은 주자가 처음으로 세운 서원으로 그 의미가 각별히 크다. 박지원은 『서이방익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주자가 동안현(同安縣)의 주부(主簿)로 있을 때에 고사헌(高士軒)을 지어 여러 유생과 더불어 그곳에서 강습한 일이 있는데 지금의 서원이 서 있는 자리는 아마도 그 옛터인 듯합니다. 또 원나라 지정(至正-원나라 순제의 연호1341-1367) 연간에 고을 수령 공공준(孔公俊)이 서원을 세우고 황제께 청하여 대동서원이란 액호(額號)를 하사 받았는데 바로 이 서원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남보타사에서 출발하여 다리를 건너 서북쪽으로 한 시간여 달렸다. 오전산(吳田山) 기슭에 웅장한 범천사(梵天寺)가 보인다. 범천사 옆길을 따라 높은 언덕으로 오르니 자양서원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우리 모두 흥분하여 주자상을 껴안고 사진을 찍고 주자체(朱子體)의 여러 글씨를 감상하고 있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의구심을 갖는 첫째는 이 서원이 큰 산 기슭에 있긴 한데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어 이방익이 거기까지 갈 리가 없고 『승정원일기』에는 이방익이 '하문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려 자양서원에 머물렀다'고 했으며, 둘째 자양서원이 절 앞에 있다고 했는데 이곳의 서원은 절 뒤에 있다는 점, 셋째 이방익은 절 이름이 향불사라 했는데 이름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안내자 왕이펀 선생이 즉시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동안구의 사(寺)‧묘(廟)‧궁(宮)을 연구하는 향토 사학자 임홍도(林宏途) 선생(하문시동안구민족종교사무국의 주임과원)이 달려왔다. 내가 『표해록』의 기록을 설명(왕이펀이 통역)하면서 의문을 제기하자 그 또한 2002년 어느 독지가에 의해서 지어진 이 서원은 박지원이 말한 <대동서원> 옛터에 지어진 것일 수는 있으나 『표해록』에 나타난 서원은 아닌 것 같다고 공감했다.
이방익이 방문했던 자양서원의 유적이 지금까지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고 남아있다면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겠지만 시간이 촉박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와 상상력을 동원하여 동안구 남쪽의 상안구(翔安區)로 달렸다. 남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북쪽으로는 큰 산이 뻗어있으며 산마루에 향산암이라는 절이 있기 때문이다. 이방익이 향산암을 향불사로 기억할 수도 있고 이름이 바뀌어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안구는 범천사에서 멀었다. 우리는 남쪽으로 한참이나 달렸다. 고갯길을 오르고 산정에서 고개를 넘었다. 거기에 향산암이 있었다. 이렇듯 산중에 선비들이 찾던 서원이 있을 리 없다며 나는 괜한 걸음을 했다고 운전기사와 일행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산록의 향산암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향산암 앞의 허름한 상점 위에 낡은 패방(牌坊)이 걸렸는데 <徽國文公祀(휘국문공사)>라는 금박의 글씨가 뚜렷이 보였다. 휘국과 문공은 더불어 주자에게 내려진 시호(諡號)다. 절 앞 광장과 연못은 현재 유원지로 활용되어 있고 패방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돌다리가 있으며 큰 돌이 우뚝 서있다. 눈 아래에는 넓은 평원이 펼쳐진 저 아래 바다가 출렁거리고 바다 건너 저편에 금문도와 대등도가 보인다. 이방익 일행은 금문도를 거쳐 해안에 당도하여 이곳 자양서원을 찾은 것일 게다.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다중이 이용하는 서원이나 사찰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丁巳 正月初四日에 廈門府에 드러가니
紫陽書院 네 글자를 黃金으로 메웟는대
甲紗帳 둘너치고 左右翼廊 奢麗하다
내 비록 區區하나 禮儀之國 사람이다
이 書院 지나가며 엇지 瞻拜 아니리오
拜禮를 畢한 後에 殿밧게 나와보니
數百 儒生 갈나안져 酒饌으로 推讓한다
(『표해가』)
②정사년 정월 초4일 하문부에 이르니 큰 산이 있고 산 앞에 큰 절이 있는데 이름은 향불사라고 한다. 절 앞에는 반석이 있고 그 아래 돌을 깎아 암자를 지었는데 돌 위의 큰 다리가 10장이 넘고 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는 돌이 서있는데 반석 위에는 큰 소나무가 있다. 여기가 주자서원이다. 서원에 주자 화상을 모셨다 하여 참배하기를 청하니 사자가 이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귀공이 만 리 타국 사람으로 어찌 주자를 아십니까?”
내가 또한 정색을 하며 대답하였다.
“조선은 본디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라 삼척동자라도 주자가 성인인 줄을 다 압니다.”
사자가 내 말을 듣고 공손히 다시 앉으며, “조선이 예의지국이라 하는 뜻을 오늘에야 쾌히 알게 되었습니다.” 한다.
사자의 인도를 받아 자양서원에 들어가는데 큰 문 밖 좌우에 기화녹초가 난만히 심어져 있고 현판에는 <자양서원>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금박으로 메웠다. 동편 작은 문으로 들어가서 보니 좌우의 익랑과 정전이 우리나라 성균관과 같으나 형용키 어려울 만큼 넓고 깨끗했다. 갑사(甲紗) 비단장을 정전 4면에 두르고 전 앞에 세 쌍의 인물상을 만들어 세웠는데 금수(錦繡)로 만든 옷을 입고 향촉과 서책을 들고 있었다.
참배할 때 유사(有司)들이 좌우로 나뉘어 전 밖에 서서 예수(禮數)의 예를 치르고 연이어 분향하니 향기가 코를 찌른다. 배례를 마치고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니 엄정한 기운이 사람들에게 전달될 뿐만 아니라 무슨 교화의 말씀을 하시는 듯 이마와 눈썹 언저리에 검은 사마귀가 비쳤다.
배례를 필하고 정전 밖에 나오니 수백 명의 유생들이 갈라서서 일제히 읍하고 당에 먼저 오르라고 한다. 그들에게 답례하고 주객의 예로 사양하니 유생들이 또 사양한다. 마지못해 오르니 차를 먼저 권하고 즉시 주찬을 내오니 음식은 쇄락하고 유생들의 예모(禮貌)가 공손하였다.(『표해록』)
③ 배를 탄 지 10일 만에 하문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려 자양서원에 머물러 쉬었습니다. 서원 안에 주자의 화상이 있기에 들어가 경배하였더니 서원에 거주하는 유생 수백인이 모두 나와서 보고는 매우 정답고 친밀한 뜻을 보였습니다. (登舟十日到廈門下陸 止舍於紫陽書院 院中有朱子畵像 入去祗拜居接儒生數百人 皆出來見之頗示款曲之意) (『승정원일기』)
이방익 일행이 이 서원에 머무는 동안 하문부의 주쉬(主倅-관부장) 표공(表公)이 찾아와 연이틀 동안 산해진미로 주찬을 베풀었는데 처음 보는 음식이었고 담화하는 동안 그 관부장은 이방익을 주빈으로 예를 갖추니 그 접대예절이 매우 공순하였다.
우리가 방문한 자양서원 유적지가 있는 상안구는 하문섬 북쪽의 반도인데 고지도를 살펴보면 송명대 하문은
천추부 동안현에 속했으나 청대에 이르러 반대로 동안현이 천주부에서 분리된 하문부의 속현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문부 관부장 표공은 하문섬의 관부에서 바다를 건너 이방익을 찾아온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이방익의 위상과 중국 관부의 접대예절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방익은 하문부에서 정월 16일까지 13일간 머물렀는데 이는 상부인 복주의 복건성 포정사(布政司)에 발문(發文)을 띄워 하명을 받는 절차 때문일 것이다.
첫댓글 역사를 실제로 더듬으며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참으로 값지고 좋은 여행이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