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군 능원리를 지나 갈담리로 접어들면 멀리로 병풍같은 산과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데, 이 곳 동쪽에는 정광산(563m)과 노고봉(574m)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곳은 국민학교 국어책에도 나오는 시조(時調),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를 지은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의 사당과 묘가 있다.
약천(藥泉) 선생의 유택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이 의령(宜寧)이며,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이다.
사마시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정세가 바뀌어 남인이 득세하자 약천은 강릉으로 유배 당하였다가 풀려 났고, 갑술옥사(甲戌獄事) 후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었다.
약천은 장희빈에게 죄를 가볍게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가 반대파의 주장에 의하여 조정에서 물러났고, 그 이후는 경사(經史)와 문장(文章)에 전념하였다. 약천이라는 호는 강릉으로 가는 도중 강원도 동해시 약천동에 들린데서 연유하였다.
그 곳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샘물이 있었는데, 경치도 뛰어나고, 물 맛도 좋아 아에 그 곳에 집을 짓고 학문과 풍류의 세월을 보냈다. 서당을 열어 백성들에게 학문과 생업을 가르친 약천은 샘물의 이름을 자기의 호로 삼은 것이다.
포은의 유택에서 ‘자연농원’으로 가는 길에는 ꡐ개성 왕씨 봉천비(開城王氏奉遷碑)ꡑ가 있다. 이 비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이성계는 왕씨의 씨를 말리고자 닥치는대로 왕씨를 죽였고,
화를 피해 전국을 떠돌다 정착한 왕씨에 대한 기념비이다. 모현면 초부리에는 약천의 사당이나 유적을 안내하는 표지가 없어 찾는데 애를 먹었으나, 다행히 약천의 종부(宗夫)를 만나 사당이 낡아 허물어진 일과 묘가 있는 곳에 대하여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묘는 마을에서 나와 초부리 방면으로 약 500m 쯤 가다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991년 봄(辛未年)에 세운 것으로, 비석를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와 비신 위의 이수(螭首)가 한낮의 햇볕에 백옥처럼 빛난다.
신도비 한쪽 옆에 따로 세운 까만 비석에, ꡒ산소는 여기서 약 300보 윗쪽에 있는데, 이 자리는 그 당시 고승(高僧)이었던 일우(一愚) 스님이 약천께 명당으로 천거한 곳으로 동쪽으로는 청련사(靑蓮寺), 서쪽으로는 용연(龍淵)이 있어 대지(大地)이기 때문이다.
이에 약천은 부인인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별세하자 먼저 이 곳에 모셨고, 꽃골에 있는 선조 산소에 석물(石物)을 올릴 때 여기에도 상석과 망부석만을 세웠다. 1711년 3월 17일(辛卯) 약천이 별세하자 양주의 충경공 묘 오른쪽 언덕에 국장으로 모셨다.
이는 그 당시 이 곳에 모시기를 반대하는 어떤 송사(訟事)가 있었던 탓이라 하며, 10년 후에 이 곳으로 이장을 하였다. 묘 이장 당시 먼저 묘의 석물은 가져 오지 않고 약천의 친필을 새긴 비석만 가져 왔는데, 이는 약천의 청렴 검소하신 뜻을 따른 것이다.
묘가 쓸쓸하고 적막한 채 300년을 지내다가 현재에 이르러 자손들이 장명등․호석등을 비롯하여, 신도비와 유허비를 세웠다.ꡓ 라고 약천 유택의 약사(略史)를 기록하였다.
비문은 한글과 한문을 섞어 썼는데, 다른 사람에게 글씨를 받지 않고 후손이 직접 썼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약천의 청렴함을 후손이 빛내는 것이며, 자연스러움이 있어 그 어떤 명필의 글씨 보다도 좋다.
묘는 이 곳에서 산 모퉁이를 돌아 약 500m 쯤 떨어진 마을을 굽어보는 산등성이에 있다. 낮은 호석을 두른 큼직한 봉분은 장명등과 상석만 근래에 세운 것이고 묘비며 망주석․향로석은 옛 것 그대로이다.
본래 청렴한 분이라 석물을 간소하게 하려는 후손의 뜻은 알지만, 영의정까지 지낸 분의 묘 앞에 문인석이 없으니 무언가 격식이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묘비에는 ‘朝鮮領議政致仕文忠 南公諱九萬之墓. 貞敬夫人 東萊鄭氏祔右’라 쓰여 있다. 보통 부인을 왼쪽에 모시는데 약천의 묘는 특이하게 오른쪽에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약천의 묘 옆에는 생원을 지낸 남극관(南克寬)이란 분의 묘가 있는데, 그 묘 한쪽에 ‘열녀비(烈女碑)’가 서 있어 눈길을 끌었다.
생원 남극관(南克寬, 1689~1714)은 약천의 손자로 호가 사시(謝施)이고, 문장에 능하였으나 26세로 요절한 분이다. 그러나 사시가 남긴 시가 몇 수 전하니, 그는 죽었어도 시심(詩心)은 남은 셈이다.
〈 폭 포 (瀑 布) 〉
하얀 눈이 엣부터 걸렸나니 (白雪挂終古)
천둥 소리 계곡을 흔드네 (驚雷殷一壑)
저녘이 되니 더욱 맑고 장하여 (晩來更淸壯)
높은 봉우리에서 가을 비가 내리네 (高峰秋雨落)
부인은 대구 서씨(徐氏)로, 열녀로 정려가 내려진 연유는 알기 어려우나, 사시가 요절한 뒤 절개를 지킨 것이 아닌가 싶다.
친전불수산(親煎佛手散)
약천(藥泉)은 70세가 넘어서 부실을 얻었고, 그 부실이 임신하여 마침내 해산을 하게 되었다. 늘그막에 자식을 얻은 약천은 산모가 진통을 하자 기쁨에 안절부절 못하면서 급히 약방을 들려 해산을 쉽게 해주는 불수산(佛手散)을 지어와 뒷 마당에서 달이고 있었다.
마침 종수(從嫂)되는 유씨(柳氏)가 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 놀리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약천 남상공을 (藥泉南相公)
세상에서는 비록 기력이 다 했다 하지만 (誰云氣力盡)
행년 76세에 (行年七十六)
손수 불수산을 다리고 있네 (親煎佛手散)
약천은 당시의 많은 석학들과도 교류하였는데, 경주에 사는 어떤 벗을 그리며 지은 시는 그리움이 넘치는 명문이다.
나는 흐르는 물과 같아 돌아 갈 수 없지만 (我如流水無歸去)
너는 뜬 구름과 같아 마음대로 오가네 (爾似浮雲任往還)
여관에서 만나니 봄은 저무는데 (旅館相逢春欲暮)
엄나무 지는 꽃이 뜰에 가득하네 (刺桐花落滿庭斑)
용인군 이동면에는 ‘어비(魚肥)울’이라는 특이한 땅 이름이 있었다. 이 곳은 안성군과 경계인 이동 저수지 남쪽 마을의 이름으로 통도사가 있는 곳인데,
이 이름은 1895년 민비 시해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당시 고종은 민비를 시해한 일본의 사주를 받아 수립된 김홍집 내각에 위험을 느껴 외국 공관에 피신하는 등 민심은 몹시 흉흉하였다.
그 해 섣달 그믐께 당시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이 이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아무도 몰래 여인이 타는 가마를 타고 고향인 보은으로 낙향하던 중이었다.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호가 일제(一齊)며 본관은 함종(咸從)인데,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박정양(朴定陽) 등과 함께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가 이 어비울에 도착하여 주막에 여장을 풀고 마을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주모가 ‘어비울’이라고 말하자 그는 혼비백산하여 다시 행장을 갖추고 이웃 동네로 거처를 옮겼다.
왜냐하면 주모는 마을 이름을 ‘고기가 살 찌는 곳’ 즉 ‘魚肥울’이라고 말하여 주었는데, 그는 ‘어비읍(魚悲泣)’ 즉 ‘어씨가 슬피 우는 곳’으로 알아 들은 것이다. 불길한 예감에 거처를 옮긴 그는 결국 그 것이 화근이 되어 신분이 노출되었고,
마을 장정들에게 붙잡혀 강변에서 몽둥이로 타살 당한 뒤 이내 장작더미에 얹어져 불태워졌다. ‘이동저수지’가 생기면서 당시의 마을은 그 언덕 너머로 이주하였는데,
그 사건이 있고 난 뒤에는 어비울 강변에서 밤마다, “어탁지, 어탁지” 하고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한다. 그러나 이 곳에 저수지가 생겨 ‘내가 넓고 고기가 살찐다’는 옛 명성을 되찾게 되었으니, 땅 이름과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