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健元陵 丁字閣]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전기 건원릉의 능 아래에 건립한 정자각(丁字閣). 능건축. 보물.
개설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자각은 산릉에서 행해지는 상례의 중심건물로서 국장의례가 끝나고 삼년동안 산릉의 조석상식과 주다례를 행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장례기간이 끝나면 길례가 행해지는 곳이다. 건원릉 정자각은 1408년(태종8) 태조의 능침인 건원릉을 조성하면서 함께 건립되었으며, 능침제도에 따라 능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 변천
건원릉 정자각은 1408년(태종 8) 태조의 재궁을 안장한 건원릉을 조성하면서 함께 지어졌다. 이후 1586년(선조 19)에 중수했다고 전하며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방화하려 했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숙종은 건원릉 봉심 후 수리하려 했지만 왜란의 신기한 사연을 듣고 손대지 않았다고 숙종실록에 전한다. 그러나 1764년(영조 40) 건물이 크게 퇴락하여 중수도감을 설치하고 건물을 수리했다. 1784년(정조 8)에도 소규모 수리가 있었으며, 『일성록(日省錄)』에는 1879년(고종16)에 정자각의 첨계석(簷階石)을 수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1988년과 2006년에 기단석 해체보수 및 연목이상 해체 후 부식재 교체, 번와보수, 단청공사 등이 이루어졌다.
내용
『국조오례의』길례 단묘도설에는 ‘산릉의 침전(寢殿)은 능실(陵室) 남쪽에 있는데, 북쪽에 자리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모두 3칸으로서, 동쪽과 서쪽에 계단이 있고, 신좌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한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丁자형 정자각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건원릉 정자각도 이와 같이 정전과 배위청이 직각으로 연결된 丁자형 건물이다. 장대석을 4단 이상 쌓은 기단 위에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정자각은 정전이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배위청은 정면 1칸, 측면 2칸이다. 정전은 전면 3칸에 모두 사분합 세살문을 설치하고, 후면은 가운데만 능을 향해 열 수 있도록 문을 두고 있다. 정전은 기능상 내부를 통칸으로 구성하고, 배위청은 창호 없이 외부와 개방된 구조이다. 공포는 정전이 1출목 2익공이고 배위청은 출목없이 2익공으로 꾸며서 정전과 차이를 두었다. 공포의 세부적인 수법은 18세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1764년 중수 때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집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취두와 용두, 잡상을 설치하고 있다.
특징
건원릉 정자각은 1408년(태종 8) 건립이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지만 『국조오례의』길례 단묘도설과 비교해 볼 때 전형적인 정자각의 규모와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공포 등 세부 수법에서는 1764년(영조 40) 중수 할 때의 시대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건원릉은 고려 왕릉인 현정릉의 제도를 기본적으로 따르며 세부적으로는 곡장의 설치 및 석물의 배치 등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이후 건원릉의 능제는 조선 왕릉의 표준으로 작용하였다. 건원릉 정자각 또한 조선의 창업군주 태조의 능, 건원릉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적 의미 뿐 아니라 조선 왕릉 정자각의 본보기가 된 건물로서 가장 전형적인 규모와 형태를 취하고 있고, 세부적 수법은 18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지닌 건축물이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일성록(日省錄)』
「산릉도감을 통해본 17세기 정자각의 복원적 고찰」(구선이, 김동욱, 한국건축역사학회추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11)
「조선후기 영악전 기능수용에 따른 정자각 평면 변화 고찰 」(신지혜, 건축역사연구, 2009)
「조선시대 산릉 정자각의 연원 소고」(김동욱,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
「조선왕릉 8간 정자각 고찰」(김왕직,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
문화재청(www.cha.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구리태조건원릉신도비 [九里太祖健元陵神道碑]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에 세워진 신도비. 보물.
개설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내에 위치한 건원릉 신도비는 1409년(태종 9) 4월에 건립되었다. 태종의 명을 받아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비문을 짓고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글씨를 썼으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정구(鄭矩)가 전액(篆額)을 담당하였다. 비의 음기(陰記)는 예조좌참의(禮曹左參議)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지었고 역시 성석린이 글씨를 썼다. 총 높이 448㎝의 규모에 귀부이수(龜趺螭首) 양식을 갖추었다. 1691년(숙종 17)에 건립한 비각에 안치되어 있다.
역사적 변천
1408년 9월 건원릉을 조성하고 다음 해인 1409년 4월 능상(陵上) 아래 동남쪽 방향에 신도비를 세웠다. 1452년(문종 2) 풍수학자 문맹검(文孟儉)이 비각 층계의 섬돌인 계체(階砌)와 주변 배수로의 정비를 주청하였다. 비각이 훼손되자 숙종이 1690년 10월 비각의 건립을 지시하였고 1691년 헌릉신도비의 비각을 참고하여 완성하였다. 1764년(영조 40)과 1879년(고종 16) 정자각을 고치면서 비각도 함께 개수(改修)하였다. 그리고 1900년(광무 4) 신도비 옆에 능표석이 추가로 세워지면서 비각의 규모를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익공식 팔작지붕 건물로 확장하여 지금에 이른다.
내용
비신(碑身)의 앞면에는 권근이 지은 비문이 성석린의 단정한 해서체(楷書體)로 쓰여 있다. 비문에는 태조가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탁월한 무공(武功)과 정치력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거쳐 조선을 개국한 후 왕위에 올라 선정을 펼친 전 과정이 개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비문의 첫 머리에 “유명(有明) 시강헌(諡康獻) 조선국태조(朝鮮國太祖)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건원릉신도비명병서(健元陵神道碑銘幷序)”라 표기되어 있고 비신의 상단 중앙에 새긴 전액이 “태조건원릉비(太祖健元陵碑)”라 되어 있어 건원릉 신도비임을 알 수 있다. 비문 말미에 새겨진 “영락(永樂) 칠년(七年) 사월(四月) 일(日) 입석(立石)”이라는 연대를 통해 1409년(태종 9) 4월에 건립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신도비 비신의 뒷면에는 변계량이 짓고 성석린이 쓴 비음기가 새겨져 있다. 비음기에는 태종의 특명으로 51명의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운 22명의 정사공신(定社功臣)과 1400년(태종 원년) 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43명의 좌명공신(佐命功臣) 등 총 116명의 공신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에 태종을 도와 공신이 된 인물들의 명단을 새긴 것은 태종의 왕위계승 정통성을 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비음기 말미에 성석린이 글씨를 썼을 때의 나이가 72세였다는 특이한 기록이 남아 있다. 태종은 글씨를 쓴 공로를 표창하고자 성석린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면서 칠십이 넘었음에도 필력이 매우 뛰어나니 후세 사람이 보면 크게 탄복할 것이라며 칭찬하였다고 한다.
특징
건원릉 신도비는 비석 양식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귀부이수 양식을 갖추고 있다. 당대 최고의 공장(工匠)들이 참여하여 조각 수준도 매우 높고 사실적이다. 귀부이수 양식은 통일신라 때 중국 당나라를 통해 유입되어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한 양식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가 대표적이다. 건원릉 신도비 이수는 태종무열왕릉비 이수 구도와 거의 동일하다. 용이 비신 상단을 입에 꽉 물고 승천하는 형상을 표현하였다. 태종무열왕릉비 이수가 좌우 각각 3마리씩 모두 6마리인 반면, 건원릉 신도비 이수는 좌우 각각 2마리씩 총 4마리인 점이 다를 뿐이다. 이수 가운데에 공간을 마련하여 비의 명칭을 전서(篆書)로 쓴 점 또한 두 비가 동일하다. 건원릉 신도비의 이수와 비신은 한 덩어리의 대리석을 다듬어 만들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귀부는 수많은 연잎이 거북이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거북이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몸체를 두른 귀갑(龜甲) 밖에는 꼬리와 네 발이 나와 있고 귀갑 위에 마련된 비좌(碑座) 위로 비신이 세워져 있다. 귀부 아래에는 직사각형의 복련(覆蓮) 대좌(臺座)가 설치되어 더욱 위엄있게 보인다.
의의와 평가
건원릉 신도비는 조선시대 왕릉에 건립된 최초의 신도비다. 양식과 장식이 화려하고 장엄하여 이후 건립되는 왕릉 신도비와 사대부 신도비의 귀감이 되었다. 현존하는 왕릉 신도비 중에서 유일하게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 초기 왕릉제도와 석조 미술 연구의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건원릉지(健元陵誌)』(1910)
『건원릉중수도감의궤(健元陵重修都監儀軌)』(1764)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조선시대 능비의 건립과 어필비의 등장」(황정연, 『문화재』42-4,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조선시대 능묘비에 관한 연구」(이민식, 한성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건원릉[健元陵]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능. 왕릉. 사적.
특징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된 동구릉(東九陵)의 하나이다. 봉분의 기부(基部 : 밑부분)는 십이각(十二角)의 호석(護石)으로 쌓고, 각각 중심에 태극(太極)이 있는 영탁영저문(靈鐸靈杵文 : 신령스러움을 상징하는 방울이나 공이모양의 무늬)을 좌우에 양각하였다. 각 면에는 와운문(渦雲文 :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무늬) 중에 수관인신(獸冠人身 : 머리는 동물이고 몸은 사람)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역시 양각하고, 면석(面石)·우석(隅石) 아래쪽에는 영지(靈芝 :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표시)를 새겼다. 호석 밖으로는 돌난간을 돌리고, 그 밖으로는 석호(石虎 : 돌로 만든 호랑이) 넷, 석양(石羊 : 돌로 만든 양) 넷을 엇바꾸어 밖을 향해 배치하고 있다. 능 앞면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그 양쪽에는 망주석(望柱石)이 하나씩 서 있다. 능의 관리를 위해 영 1인, 참봉 1인을 두었으며, 참봉은 종친부(宗親府)에서 대군이나 왕자군의 봉사손(奉祀孫 : 제사를 받들 수 있는 후손)을 자유로이 임용하도록 하였다. 태조가 생존하였을 때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정릉(貞陵)은 고려의 능제로 경영하였으나, 이 능은 조선왕조의 능제로 경영하였으므로 그 표본이 된다. 그 곳에는 조선왕가의 능이 9개 있으므로 ‘동구릉’이라고도 부른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사적편(史蹟篇)-』(문화재관리국, 1975)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9-14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