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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아침이다. 나는 내가 가진 화장품들을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다. 스킨로션이다. 파운데이션이다. 컨실러다. 마스카라다. 아이라이너다. 립스틱이다. 이것들만 있으면 어딜 가든 당당하게 다닐 수 있다. 거울을 본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과 비슷하다. 든든. 대견. 흡족. 얼굴에 걸맞은 표정을 준비한 후 밖으로 나간다. 걷는다. 사람들은 커다란 눈을 본다. 뾰족한 코를 본다. 빨갛게 칠해진 입술을 본다. 그리고 말한다. 지금 내 곁으로 ‘얼짱’이 지나갔어.
지금 내 곁으로 선한 사람이 지나갔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내 곁으로 맑은 사람이 지나갔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내 곁으로 기분 좋은 사람이 지나갔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 곁을 지나간 건 분명 난데 나를 본 사람은 없다. 내 눈동자를, 내 표정을, 내 마음을 본 사람은 없다. 외모지상주의가 나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었으니.
그런데 어이쿠. 이제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한다. 해방이다. 시선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평가로부터의 해방이다. 연예인처럼 칠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내 얼굴을 보여주느라 나를 보여줄 틈이 없었다. 남들도 내 얼굴에 눈이 빼앗겨 나를 보려하지 않았다. 이제는 눈으로 말할 수 있다. 눈빛으로 대화할 수 있다.
눈은 거짓말은 못한다. 생각이 감정을 만나는 순간 마음은 흔들리고 그 움직임은 눈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난다. 입은 거짓말을 해도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 가슴에서 감정의 정수가 잉태돼 등 떠밀려 바깥세상으로 나오는 그것을 눈물이라 한다. 입은 그나마 속일 수 있다. 이리저리 꼼수를 쓰며 궤변을 뱉어낼 수 있다. 온갖 미사어구를 갖다 붙이면 제법 그럴듯한 표현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눈은 안 통한다. 눈은 마음이다. 눈(eye)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雪)을 닮았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깊은 곳에는 순정이 있다. 그러니 사람을 대할 때는 눈부터 봐야 한다. 눈동자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 있을 테니. 대화할 때는 웬만하면 윙크도 금지.
예쁜 사람을 판단하는 유일한 방법은 눈을 보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아름다움도 진심이 통해야 느껴진다. 사랑도 눈이 만들고 행복도 눈이 만든다.
통찰과 주목도 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 작문입니다. 통찰 면에서는 평범하거나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나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장점이 있지만, 인상적인 표현은 부족합니다. 통찰 면에서 차별성을 보이려면 눈이 왜 입과 다르게 특별한지, 눈은 왜 마음을 반영하는지 등에 관한 깊이있는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논증 수준으로 논리적으로 밝히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점을 읽는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몇 문장 중 일부 내용은 뜬금없는 내용도 있고, 너무 뻔하거나 교훈조의 내용도 있어서 부적절합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짧고 경쾌하게 쓰는 점은 좋은데 인상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없는 단점을 극복해야 합니다.
# 12.
<지구정복 정예부대를 위한 마스크 사용법>
친애하는 부대원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대표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은하계 최고의 전투능력과 지능지수를 가진 여러분들이 힘을 합친다면, 태양계의 ‘푸른 별’이라 불리는 지구를 정복하는 날도 머지않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잘 알다시피 지금껏 우리 은하에서는 수차례 지구침공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우리 렙틸리언 동지들이었습니다만, 이들 역시 전 인류를 통제하는 것엔 실패했습니다. 다국적기업 오너나 주요국 통치자, 심지어 유명 연예인으로까지 둔갑해 인간 사회의 꼭대기를 장악해 나갔지만, 0.1%의 엘리트로 99.9%의 인간들을 제어할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은하연합군은 새로운 지구정복 전략을 수립하고, 군사기술개발팀의 분골쇄신 끝에 그 계획을 실현시켜줄 최첨단 장비를 개발했습니다. 위에서부터가 아닌,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인간 사회를 장악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침공전략입니다. 이를 도와줄 장비는 이름하야 ‘소셜 라이프 마스크’! 안면 하단부에 간단히 부착하는 방식의 이 장비를 착용하면, 부대원 여러분은 자연스레 보통의 인간들 사이에 녹아들 수 있게 됩니다.
소셜 라이프 마스크에는 총 세 가지 모드가 있습니다. 이 사용법을 잘 익혀두시고, 적절한 타이밍에 필요한 모드를 실행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체념’ 모드입니다. 우리는 인간들이 일상에서 각자의 자아를 실현해나간다고 배웠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인간들은 하루의 3분 1이,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자아를 억누릅니다. 늘 같은 시간에 출근해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단조로운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서지요. 자신을 둘러싼 무미건조한 환경이나, 때때로 억압적이기까지 한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진정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선 이러한 선택이 불가피합니다. 인간들과 달리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 안드로메다 은하 사람들은 구조의 억압에 쉽게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이때 ‘체념’ 모드를 사용하면 부대원 여러분의 자아 발현이 잠시 억제됩니다. 그 어떤 부당한 상황에서도 생글생글 웃는 입모양을 유지하고, “넵”,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같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허나 명심하세요, 주 52시간 이 기능을 사용하면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가 점차 깎여나갈 수 있습니다.
다음은 ‘매력’ 모드입니다. 지구인들은 종종 자신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변신을 합니다. 이때의 변신은 단기적으로 외양을 바꾸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지구인의 변신이란 온갖 자격증, 인맥, 경력을 장기간에 걸쳐 쌓아 올리는 것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신의 ‘상품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을 포함하죠. ‘성공’과 ‘성과’라는 기치가 최우선시 되며, 이해관계를 기준 삼아 자신의 매력을 재조합하기도 합니다. 기실 이런 발버둥은 사회적 안전망이 탄탄해 개인 간의 능력차가 곧 삶의 질의 격차로 직결되지 않는 우리 안드로메다 은하 사람들에겐 필요 없습니다만, 지구는 다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기 혼자 짊어져야 하는 구조이기에, 유동하는 시장 경제의 요구에 맞춰 끊임없이 자신의 ‘매력’을 쌓아올리는 것이죠. 부대원 여러분들께서 마스크를 ‘매력’ 모드로 조정할 경우, 여러분이 이러한 승자독식의 구조논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주 중요한 요소인 ‘말발’과 ‘면접스킬’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예외도 있습니다. 탄생 시점부터 기득권에 위치한 인간들 앞에선 마스크가 제공하는 매력이 무효화됩니다.
마지막 모드는 극도로 신중을 요하는, 은하연합군 지구정복 전략의 핵심인 ‘연대’ 기능입니다. 이 모드를 적용하면 반경 3km에 위치한 인간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여러 명의 입을 빌려 국가와 사회에 우리 안드로메다 은하계 사람들의 정착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것을 큰 소리로 외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체념’ 모드와 ‘연대’ 모드 모두 부대원 여러분과 지구인들의 목소리를 일치시킨다는 점에선 같습니다. 다만, ‘체념’ 모드를 사용할 경우 억압적 환경과 이에 순응해버린 지구인들에게 여러분을 일치시키는 것을 통해 표면적인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고작이라면, ‘연대’ 모드는 지구인과 여러분을 하나의 거대 세력으로 엮어 근본적 갈등에 정면 돌파 할 수 있게끔 만들어줍니다. 개인이 집단과 구조에 체념할 땐 그 병폐가 더욱 심화되지만, 개인이 집단으로 뭉쳐 구조에 저항할 땐 그 폐단의 전환이 가능해지는 것이 지구의 규칙입니다.
부대원 여러분들께서는 우선 소셜 라이프 마스크의 앞선 두 가지 기능을 적절히 사용해 인간사회에 깊게 뿌리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환경에 체념하거나, 그 속에서 매력을 뽐내는 두 방식을 모두 이용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의 행세를 해내 주십시오. 전 세계 각지에 파견된 부대원들 모두가 인간 사회에 깊게 침투한 것이 확인된 순간, 은하연합군 총사령부에서 ‘연대’ 모드의 일제 발동을 지시내릴 것입니다.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명령발동 코드명은 "이렇게는 못 살겠다!" 입니다.
그럼 지구를 정복하는 그날까지, 우리 은하연합군은 여러분을 향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잘 쓴 글입니다. 통찰의 차별성도 있고 주목도도 높은 글로 읽힙니다. 생각할 여지가 있는 중심맥락인데 체념, 매력, 연대라는 키워드도 적절해서 눈길이 갑니다. 집중하고 몰입하게 하는 구성이나 흐름입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후반부로 갈수록 설명조의 문장 톤이 강해지고, 교훈적 내용이 많아지는데 이런 점들은 눈에 거슬리는 대목입니다. 다시 쓰기를 할 때 그런 점을 고려해서 다시 써보기 바랍니다.
# 13.
수호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게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다고 했다. 돌잡이 때 청진기를 잡은 이후 자라온 19년 동안 그 꿈만 바라보며 살았다. 6살, 고사리 같던 손과 빵빵한 볼을 가지고 있던 수호는 청력을 잃었다. 한 밤 중에 거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깼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맞고 있는 걸 목격하고 달려들었다.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의 종아리를 그 작은 주먹으로 꽉꽉 때리며 울어 댔었다. 수호는 발로 채였고 넘어지며 머리를 쿵 찧었다. 뚝, 울음을 멈췄다. 수호의 어머니 나희 씨는 그 작은 핏덩이를 안고 병원으로 뛰었다. 별 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그저 많이 놀랬을 뿐이라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다시 나간 걸 깨닫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잠시나마 찾아온 평화에 수호를 맡기고 잠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이혼 절차를 밟았다. 나희 씨는 자신에 대한 폭력은 참아도 아이를 때리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 걱정의 무게가 나희 씨 가슴을 짓누르고 있을 무렵, 유치원에서 연락이 왔다. 수호가 소리에 반응하지 않아요. 수호야! 하고 불렀다. 수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이비인후과를 가 청력 테스트를 했다. 반응이 없다. 후천적 청각장애. 이 아이가 평생 지고가야 할 이름이 되었다.
지금 수호는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 나희 씨를 위해. 어머니의 피와 땀으로, 수호는 조금 발음 문제를 빼면 구화도 잘했다. 독순을 해 의사소통에도 큰 문제없이 자라왔다. 안 들리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개척하고 싶었다. 학교에서 진학 상담을 받았다. 학업 성적도 좋았고, 최저만 맞출 수 있다면 충분했다. 희망이 보였다. 이제 그 결실을 맺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 덕에 현직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날로 수호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다. 꿈이 무너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차오르는 분노와 억울함. 오로지 수호 몫이었다.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견하지만,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수호에게 이야기했다. 수호는 그 입술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수술할 때 모두 마스크를 낀다고. 간호사도, 의사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안 들려요!”는 수호가 절대 하지 않던 말이었다. 빠른 눈치로 항상 잘 이겨냈었다. 안 들린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안 들린다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을 필요 없다. 남들과 다른 점 하나도 없다고.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어온 세상이 깨졌다. “안 들려요!”가 아닌, “안 보여요!”가 장애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픽션 스토리로 쓸 때 주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점은 개연성과 핍진성입니다. 그럴 듯한 플롯이어야 개연성이 높아질 수 있고 디테일에 살아있어야 핍진성이 높아집니다. 두 가지 요소가 낮을 경우에는 꾸며낸 가공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 글에 대한 집중감과 몰입도가 낮아지게 됩니다. 이 글은 통찰의 요소를 꾀했을 수도 있고, 공감/감동의 측면을 주요하게 꾀했을 수도 있는 글인데 앞서 지적한 이유로 인해서 그런 요소들이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연성과 핍진성이 낮고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극적인 흐름을 가진 이이기이지만, 그런 극적인 흐름과 구성에 걸맞은 적당한 효과가 적게 나기 때문에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감정이입을 하기가 어려운 편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스토리를 써보는 연습을 더해보기 바랍니다.
# 14.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남자친구와 5년째 연애 중인 내 친구 수연이. 그녀는 내 친구들 중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 특히 여행과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수연이는 남자친구와 함께 전국 팔도를 누비며 둘 만의 아름다운 추억을 사진으로 남겼다. 수연이의 카카오톡 프로필과 배경은 늘 남자친구와의 여행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자유로운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 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1년 전 임용고시에 합격했다며 삼겹살집에서 방방 뛰며 기뻐하던 그녀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그렇게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이 후 어느 샌가 수연이의 카카오톡은 칙칙하기 그지 없는, 그녀의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난 그녀의 변화가 궁금해 아름다운 추억이 왜 다 사라졌는지 물은 적이 있다. ‘야, 너 왜 카톡에 여행갔던 사진들 다 없앴어? 진짜 예뻤는데 사진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아..어느 학부모가 남자친구랑 둘이 여행간 사진은 좀 학생들이 보기 민망하지 않냐고 그러더라고.’ 커뮤니티에서만 보던 그런 일이 내 친구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그녀의 프로필은 가짜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내 친구 수연이와 선생님으로서의 수연이는 그렇게 달라야 하는 걸까. 그 학부모의 말과 생각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의 일을 위해 진짜 자기 모습을 감춰야만 하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카오톡 프로필은 단순히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 이상으로 한 개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는 그 공간에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을 채우고, 누군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으로 채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모두에게 공개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공적인 관계의 사람들과는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우리에겐 개인의 사생활을 가려줄 마스크, 즉 ‘가면’이 필요하다.
최근, 카카오는 멀티 프로필 서비스 도입을 밝혔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거나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기존의 카카오톡에서는 프로필에 띄운 사생활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에 상관없이 모든 대화상대에게 똑같은 프로필을 보여줘야 했다. 특히 직장 등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분이 어려워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던 그 공간은 개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직장인으로서의 내 모습, 사랑하는 연인과 여행 가기를 좋아하는 ‘내’가 존재한다. 개인적인 영역까지 직장 동료 혹은 상사와 공유할 필요는 없다. 일과 개인의 생활은 분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 날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가면’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통찰과 주목도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 글로 읽힙니다. 전반부 사례와 후반부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에 중심맥락이 조금 더 분명하게 정돈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핵심 사례가 의미하는 바와 중심맥락이 전달하려는 내용이 불일치하거나 부조응하게 되면 통찰의 차별성을 꾀하기 어려워집니다. 주목도 면에서 보면 문장들이 전반적으로 설명조여서 인상적으로 읽히지 못합니다. 경쾌하고 함축적인 문장으로 쓰는 연습을 더해야 하고 몇 군데 인상적인 표현을 써서 눈길을 끌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 15.
[기획칼럼] 인류학자의 2040년 풍속도
2039년, 태어날 때부터 마스크를 썼던 마스크 세대가 스무살이 되었다. 마스크 원년인 2020년, 사람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2022년에는 종식될 것이고 마스크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2021년에 더 전염력 강하고 치사율 높은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전세계를 휩쓸었다. 그 이후로 한 바이러스가 없어지면 다른 바이러스가, 그 바이러스가 없어지면 또 다른 바이러스가 주기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결국 인간은 바이러스 없는 세상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2030년쯤에 확실히 깨닫고 체념했다. 마스크를 벗지 못한 채 십 년이 되는 동안 놀랍게도 인간은 마스크에도 모두 적응해버렸다.
2020년에 77억명에 달했던 인구가 2100년에는 109억명이 되어 정점을 찍을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끊임없는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인구 수가 줄기는 커녕 60억명까지 줄어들었다. 백신학과가 없는 대학이 없어졌으며, 모든 대학 통틀어 취업이 가장 잘 되는 학과로 경쟁률도 가장 치열하다. 감염학은 수능 필수과목이 되었다. 바이러스는 더이상 일상의 변이가 아닌 일상 그 자체가 된지 오래다. 한편 급진적 환경운동가들은 ‘바이러스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이자 선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구 수가 감소함에 따라 환경파괴의 속도가 조금이나마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극단적인 몇몇 사람들은 “바이러스 생명도 소중하다”(Virus Lives Matters, VLM)이라는 단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바이러스를 죽이는 행위도 생명을 죽이는 행위와 같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 백신반대운동을 펼치며 마스크를 거부하는 유일한 집단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것을 목격할 수는 없다. 마스크를 벗고 활보하거나 공공시설에 진입하는 즉시 벌금 100만원이 부과되며 구치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마스크를 씌우는 법이 대부분 국가에서 시행된지 오래기 때문이다. 마스크가 인권침해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도 종식된 지 오래다. 마스크가 곧 인권이다. 이 명제를 모든 나라가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딘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소문이 들려오는 VLM의 구성원들은 자신들만의 아지트에서 아무도 모르게 마스크 없이 모여서 음식을 나눠먹는다. 소문에 따르면 그 장소에서는 키스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면 마스크 세대들은 경악하고만다. 음식을 나눠먹는다니? 키스라니? 짐승들인가? 그렇다. 마스크 세대에게 키스란, 그 이전 세대가 섹스에 대해 갖는 무게감과 같다. 혹은 더할지도 모른다. 마스크가 보편화되기 이전 만들어진 드라마나 영화에서 키스 장면이 나오는 작품들은 이제 전부 청소년관람불가 작품이 되었다.
마스크 세대에게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정말 내밀한 사이에서만 가능해졌다. 같이 밥을 먹는 문화도 사라졌다. 모든 음식점에는 불투명 칸막이가 설치되어, 칸막이 너머로 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집에서도 마스크를 하고 있는 게 일상이 되었다. 가족 내 감염을 막아야 감염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며 “혼자 먹으면 더 맛있어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시행한 이래로 가족들이 함께 밥을 먹는 광경도 찾기 힘들어졌다. 마스크를 너무 어릴 적부터 해서 마스크를 안 하는 게 너무 어색한 상태가 되어버린 마스크 세대는 방에 혼자 있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마스크 없이 호흡하는 걸 그리워했던 이전 세대도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갔다.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도 아나운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화장품 가게에서도 립 라인은 보습 같은 기능성 화장품만 남아있고 눈화장 섹션만 거대해졌다. 성형외과에서도 코와 입의 성형은 줄어들고 눈 성형 기술만이 휘황찬란하게 변천해왔다. 의외로 주목받기 시작한 신체는 귀다. 적절한 귀걸이를 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미덕이 됐다. 이전에 입술을 붉게 칠했다면, 이젠 귀 끝을 붉게 칠해 젊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탱탱한 귓바퀴에 흐르는 붉은기가 성적인 코드가 되었다. 이제 연인들은 손을 잡고 나서 입을 맞추지 않고 서로의 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어코노미’로 불리는 귀 관련 뷰티용품, 건강용품 시장은 해가 다르게 성장해가고 있다.
마스크 세대가 이 글을 읽는다면 뭐 이런 당연한 얘길 대단한 것처럼 쓰고 있냐며 웃어넘기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지금 2040년의 모습은 2020년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미래였다. 2060년에는 또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또 인간은 적응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이 인류가 그 오랜시간 지적 존재로 발전해온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잘 쓴 글입니다. 통찰의 차별성도 있고, 주목도도 높은 글입니다. 미래의 시점으로 픽션 스토리를 쓸 때 중요한 점은 현재의 어떤 특징이 미래로 뻗어나갈 때 그런 미래가 가능하겠구나, 하는 점이 잘 살아나 있어야 개연성이나 핍진성이 높아진다는 것인데 이 글에서는 그런 점들이 잘 살아 있습니다.
# 17.
전 씨는 도색 공장 하청의 하청 업체에서 일하는 용접공이다. 작업장은 그렇게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용접 마스크와 작업복은 구비되어 있었다. 여느 날처럼 용접 작업을 하던 중 작업복에 불티가 튀었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금방 불길을 잡았지만,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다. 흉터가 짙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 씨를 보고 흠칫했다. 그날 이후로 봄여름가을겨울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마스크를 벗은 적이 없다. 전 씨에게 마스크는 시선으로부터의 도피처였다.
사상 초유의 감염병 창궐 사태는 전 세계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국가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각종 행정명령을 동원했다. 이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과태료를 문다. 지구 반대편에선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달라며 반 마스크 시위가 일어났다. 마스크는 바이러스 예방 도구와 동시에 억압 도구가 됐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세상이 된 지금, 전 씨는 ‘왜 마스크를 쓰고 다니냐’는 질문을 더 이상 받지 않는다. 모두의 억압이 그에겐 해방이었다.
마스크 해방의 날을 위해 각국에서 백신 개발에 힘쓰고 있다. 하루빨리 그날을 맞기 위해 모두가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며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전 씨의 해방을 위해 힘쓰고 있는가. 2018년, 경비원 이 모 씨는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체감 온도 영하 19.3도의 한파 상황에서 좁고 추운 초소에서 3~4시간 취침한 상태였다. 2019년, 택시기사 임 모 씨는 운전석에 앉은 채 숨진 채로 발견됐다. 주당 72시간 이상 근무했던 고인은 사망 전날 회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방치됐다. 2020년, 일용직 흙막이 설치 공인 김 모 씨는 작업 중 토사에 매몰됐다. 작업계획서 절차가 현장에서 준수되지 않았다.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부르짖으며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된 지금이다.
전 씨의 작업복이 가연성이 아니었다면, 용접 마스크가 수동형이 아닌 헬멧형이었다면 어땠을까. 작업 환경이 정상적이었다면 전 씨에게 마스크는 남들과 같은 의미였을 수 있었다. 중대 재해기업 처벌법을 위시한 전태일 3법이 연내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이 땅의 수많은 전태일을 위한 세상의 노력이 지속되길. 그리하여 모두가 마스크 해방을 맞이할 날, 전 씨 또한 같은 의미의 해방을 맞을 수 있길.
중심맥락이 뚜렷하게 읽히는 점은 장점이지만, 중심맥락을 전달하는 방식이 설명조이기 때문에 작문으로서의 효과가 덜 나는 편입니다. 중심맥락의 내용도 예상 가능한 범주안에 포함됩니다. 노동환경의 열악함을 고발하고 노동자의 삶의 개선을 주장하는 내용의 글은 예상가능한 맥락인데 그것을 어떻게 인상적으로 읽히도록 할 것인가의 고민이 더 필요해보입니다. 주목도 측면에서 보면, 문장들이 설명조이면서 교훈조이고 딱딱한 편입니다. 조금 더 잘 읽히고, 인상적으로 읽힐 수 있도록 쓰는 연습을 더 해야 합니다.
# 18.
“밝게 뛰놀지 못하였다. 남들처럼 배워보지도 못하였다. 시장의 우리 속에서 갇혀 시들어왔다. 웃음이 없는 세월, 원망스러운 세월이었다.” 생존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살던 노동자의 일기 중 일부분이다. 혹자는 그를 ‘밑바닥 인생’이라 칭하면서 일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열심히 일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을 살지 않으려면 공부만이 답이라는 결론을 늘어놓으면서다. ‘똑똑해야 탈출할 수 있다.’ 일부 타자에게 50년 전 그의 일기는 그렇게 읽히기 일쑤였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의식이 자리 잡자 연대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었고, 차별은 공고화됐다. 코로나19는 이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코로나19 집단 감염의 매개가 되었던 콜센터의 노동 현장은 ‘축사’를 연상케 했다. 밀폐된 환경에서 많은 수의 상담사가 마주 보며 계속 통화한다. 화장실을 가는 순번마저 관리된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에 중요하다던 환기는 언감생심이다. 창문을 열면 바깥소리가 들어와 항의가 빗발쳐서다. 1인당 업무 공간마저 넉넉히 정해졌더라면 이 직업이 코로나19를 확산시킨 주범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유감스럽게도 이를 명시한 매뉴얼은 우리 사회에 아직 없다.
A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지급된 마스크는 사소하지만 만연한 차별을 대표한다. 그가 마스크를 벗자 분진으로 뒤덮인 얼굴이 드러났다. 분진에 노출될 경우 폐에 구멍이 생기거나 각막 등에 질병이 유발될 수 있는데도 부실한 성능의 방진 마스크를 받은 것이다. 고성능 3M 마스크를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안전은 차치하고 임금이라도 보전해달라는 목소리도 거세다. H투어는 최근 무급휴직 기간을 추가 연장했다. 유급휴직의 경우 정부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지만, 무급휴직은 180일만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다. 지원 기간이 만료된 H투어가 무급휴직을 선택했기 때문에, 직원들의 월급은 4달간 ‘0원’이다. 사실상 희망퇴직이나 정리해고 수순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 이들은 저마다의 마스크를 쓰고 거리로 나선다. 연일 세 자릿수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에서 열리는 아슬아슬한 집회. 언론은 코로나 확진자 수와 집회 강행 소식을 배치하며 노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기에 바쁘다. 야당은 광복절 집회 당시 주동자를 ‘살인자’로 칭한 노영민 실장의 발언을 빌미 삼아 노조에 대한 견해도 내놓으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거리로 나온 노동자들은 침묵으로 얘기한다. 진짜 아슬아슬한 삶은 본인들이 이겨내고 있다고. 진짜 ‘살인자’는 집회의 주동자도, 참석자도 아니라 산업재해나 정리해고의 위험을 방관하는 기업과 정부에 있다고. 밧줄 하나에 의지해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관심이라고 말이다.
제시어와의 연관성이 부족한 글로 읽힙니다. 제시어가 소재로 쓰였지만, 존재감이 미미한 편입니다. 제시어를 소재로 쓸 수 있지만, 주요한 소재이거나 기억에 남는 소재로 써야 제시어와의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노동자나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강화됐다는 맥락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쓰되 중심맥락이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뻗어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통찰의 차별성을 확보한 글이 될 수 있습니다.
# 19.
“야 너 마이크 떨어뜨렸다”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친구가 던진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이 녀석이 이미 뭘 알고 있는 건가’ 싶어서.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우리가 얼마 만에 보는 건데...’ 짧게 몇 가지 생각이 스쳐가는 사이, 동석한 다른 친구들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야! 마스크지, 마이크가 뭐냐’면서. 내 눈엔 그제서야 의자 옆으로 떨어진 하얀 마스크가 보였다.
난데 없는 소리에 당황했던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이제 아나운서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리고 마이크란 곧 내 직업을 가리키는 상징과도 같은 오브제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지금 소속된 회사와 나의 계약 마지막 해였다. 내년에 또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올해는 정말 후회없이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설날 즈음 라디오를 통해 처음 접한 중국 우한시의 괴질은, 2020년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말았다. 모든 스포츠행사가 취소되고 연기 되었다. ‘스포츠 캐스터’인 나는 그저 손 놓고 이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입에서 마이크는 떨어지고, 마스크가 그 자리를 막았다. 말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 이는 거세당한 것과도 같은 상실감이었다. 7월부터 대부분의 스포츠리그가 재개되었지만, 텅 빈 관중석이 대신 말해주었다. 이건 ‘진짜’가 아니라고. 내가 생각했던 이별 또한 이런 게 아니었다. 내게는 그저 ‘보통의 1년’이 필요했다. 그러면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겠는데, 내겐 그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이놈의 바이러스는 마치 이제 그만 이별을 준비하라는 듯이, 머뭇거리는 나에게서 마이크를 떨어뜨려놓고, 마스크를 붙여주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을.
몇 년 전부터 북미에서 유행했던 ‘밈’으로, ‘MIC drop’이라는 것이 있다. 주로 흑인들을 위시한 힙합문화권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이런 거다.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한껏 자신을 뽐낸 후에, 마이크를 쥔 손을 앞으로 쭉 뻗어 마이크를 자유낙하 시킨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난다. 그 뒷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군중들, 이까지가 ‘MIC drop’을 완성 시키는 요소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트럼프 행정부에 정권을 넘겨주기 직전에 이와 같은 행동을 하며 ‘OBAMA OUT’이라 읊조렸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단을 떠났다. 8년간 후회를 남기지 않은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MIC drop은 차치하고, MASK drop도 어려운 지금, 나는 그들처럼 멋있는 이별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대신 조심스럽게 다른 방식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천성이 둥글지 못하니 프리랜서로 살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계약이 끝나고 바닥에 내던져지기 전에, 다른 좋은 회사로 환승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저 기자 준비해볼까 해요.’ 지난 봄에 취해서 뱉은 말을 조금씩 구체화시키려는 중이다. 운이 좋다면 방송기자로 새로운 마이크를 잡게 될지도 모르지. 그 날이 온다면 나는 비로소 애증이 섞인 ‘중계 마이크’를 ‘미련’과 함께 떨어뜨리면서 한마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정호 OUT’
주목도가 평균보다 약간 더 높은 편이고, 다른 요소들은 중간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글입니다. 어느 한 요소에서 임팩트가 강한 효과가 나면 좋겠는데 그런 점이 부족합니다. 통찰, 공감/감동, 주목도 중에서 어떤 점을 메인으로 삼아서 확실한 효과를 내야겠구나, 하는 식으로 계획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세워서 글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작문이 요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다시써보기 바랍니다.
# 20.
시작은 2020년이었다. 마스크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 되었던 것은. 인류 전체에 퍼진 바이러스를 세계의 언론은 연일 대서특필했다. 나도 그 바이러스와 예방법에 대한 기사를 남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약 1년 후, 또 다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전 지구를 덮치기 전까지는.
새롭게 나타난 놈은 더 지독했다. 대부분의 비말 감염을 막아준다는 KF-94 마스크도 무용지물이었다. 치사율이 50%에 달하며 감염자와 사망자 수가 치솟았다.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집 안에 가뒀다. 이미 1년 동안 비대면으로 사는 것에 적응된 인류는 비교적 잘 이겨내는 듯 했다. 그러나 경제가 말썽이었다. 바이러스로 인해 죽는 수만큼 자살하는 이들이 많았다. 국가를 향한 원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부는 이 새로운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 마스크를 개발해냈다. 수술을 통해 기도에 직접 얇은 필터를 장착해서, 감염을 100% 예방할 수 있는 마스크였다. 기존의 마스크와 다르게 체내에 삽입하는 방식이 오히려 마스크 자체가 갖는 불편함을 없앤다는 것이 큰 장점처럼 다가왔다.
노인과 아이들이 수술의 1순위가 되었다. 약 500여명의 수술이 전국에서 동시 실시된 이후, 이 마스크의 큰 결함이 발견됐다. 기도에 장착한 얇은 필터가 근육의 미세한 떨림과 공기의 흐름을 방해해서, 발성을 불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목소리를 잃은 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한 국회의원은 백신이 개발된 후 필터를 제거하면 될 일이라며, 수술 후 인터뷰에서 ‘말했다’. 백신 개발이나 몸 속에서 일정 시간을 보낸 필터를 제거하는 일이 모두 가능한 것일지 아무도 몰랐지만, 현실의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가 사람들을 병원으로 떠밀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목소리를 잃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보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한 대학생은, 이미 비대면 수업에서도,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과도 채팅을 통해서만 소통해왔기 때문에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직접 사람을 만나면 불편하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스마트폰이 있잖아요.”라고 답장했다. 그가 자주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같이 있어도 채팅 어플을 이용하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고. 스마트 기기 사용이 어려운 노인과 아이들은 수화를 배웠다. 모든 서비스는 말하지 못하는 이들 중심으로 개편됐다. 사람들은 집 밖에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만족했다. 개중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바이러스 전파자 취급을 받았다. 아직도 수술을 받지 않았냐는 비난의 눈빛은 미개인을 바라보는 듯 했다. 다수가 말하지 않는 세상에서, 말할 줄 아는 것은 오히려 불편한 일이 됐다.
위기 상황 속에 훌륭한 해결책을 내고 리더십을 보여준 대통령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연임을 해냈다. 국민들의 높은 신뢰도가 여론 조사를 통해 드러나고, 국민의 뜻이라는 명분을 얻은 헌법 개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바이러스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조차 비대면으로 이루어졌지만, 여론 조사에 걸맞는 결과였기에 시민들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술 반대론자들이 등장한 것은 이때 쯤이다. 이들은 수술이 인간만이 가진 언어라는 특징을 해치고, 사람 간의 소통을 막는다고 주장했다. 음모론자들도 끼어들었다. 수술은 시민의 목소리를 빼앗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정부의 계략이며, 비대면 대화는 모두 정부에 의해 감시 당하고 있다고 외쳤다. 수술에 필수적인 필터를 제작하는 업체가 대통령의 자식의 처 명의라는 것이 그들 주장의 근거였다. 수술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집회나 시위에 참여할 수 없다는 개정된 법 아래, 이들의 주장은 인터넷 괴담처럼 온라인 공간만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수술 반대론자였던 일가족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언론은 수술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했고, 수술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과태료가 부과되기 시작했다. 반대론자와 음모론자들에 대한 일말의 관심은 자연스레 잠들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정부는 백신 개발이 불가능함을 알렸고 국민들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면서 더 이상 ‘말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런 삶에 익숙해졌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상주하는 삶보다는 이 편이 나았다. 도시는 천만 인구를 달성한 이래,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다.
하나의 스토리를 완결적으로 완성하는 능력이 있는 점은 장점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통찰 면에서 보통이거나 그보다 약간 더 높은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주목도 면에서도 비슷한 평가가 가능합니다. 중심맥락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바는 비교적 뚜렷하게 잘 정리돼 있는 편이고 그 중심맥락에 대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하는 요소도 일정 수준 이상 있습니다. 스토리의 전개나 흐름이 조금 더 그럴 듯하면 좋겠습니다. 스토리가 추구해야 하는 개연성과 핍진성의 수준이 아직은 미숙한 편이어서 작위적으로 읽히는 부분들이 있으니 그런 부분들을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고치는 방식으로 다시쓰기를 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