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령-마산봉-병풍바위봉-대간령-도원계곡
20211219
백두대간 남쪽의 마지막 진부령 구간을 산행하였다. 기온이 급강하여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다. 진부령에서 백두대간 남쪽 구간을 완주한 회원들에게 종주패를 수여하는 기념식을 마치고 진부령에서 남진한다.
칼날바람이 세차게 불어 뺨을 에인다. 눈이 내려 산길은 미끄럽고 낙엽이 쌓여서 걷기가 몹시 불편했다. 쌓인 낙엽은 발걸음에 어느 정도 힘을 주어야 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게 하여 몸이 위태롭게 뒤뚱거렸다. 바람과 눈과 낙엽의 장애물을 위태롭게 견디며 백두대간 진부령-마산봉-대간령 구간을 걸었다.
마산봉과 병풍바위봉에서 남쪽의 설악산, 북쪽의 향로봉과 금강산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설악의 대청봉에서 황철봉-신선상봉-신선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줄기, 중청봉에서 귀때기청봉, 안산으로 이어지는 설악 서북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향로봉과 금강산이 가까이서 소리쳐 부른다.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하여 남북의 자유왕래가 어서 열리기를 염원한다. 그리하여 국토의 등줄기 백두대간을 걸어 금강산, 백두산까지 이어야 한다.
인제군과 고성군의 경계가 되는 대간령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계곡으로 내려오는 옛길은 산행 오름길보다 훨씬 힘겨웠다. 급경사 비탈에 S자로 굽이도는 옛길에 쌓인 낙엽과 눈 때문에 애를 먹었다. 낙엽에 푹푹 빠지고 쭈욱 미끄러지다가 발길로 낙엽을 차면서 걸었다. 도원임도로 내려서서 평탄한 숲길을 걸어 도원유원지 주차장에서 산행을 마쳤다.
이번 백두대간 남쪽 마지막 구간 진부령-대간령 산행은 2021년 송년 산행이 되었다. 내년에 남쪽 지리산 웅석봉을 시작으로 하여 백두대간을 다시 이어가는 대장정을 시작하겠다.
진부령(陳富嶺)은 오랜 옛날 동서를 잇는 유일한 오솔길로 보부상(褓負商)이 넘나들던 길로서, 문헌에 의하면 1631년 간성 현감 택당(澤堂) 이식(李植)께서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개설하였다. 그 후 1930년에 차량 1대가 겨우 넘을 수 있는 비포장 지방도로로 보수, 관리하여 오다가 1981년 국도 46호선으로 6년여 공사 끝에 1987년 9월 20일 2차선 도로로 확, 포장되었으며, 1989년 영상(嶺上) 도로 측면에 위치한 향로봉 전투전적비를 이전하면서 이 표지석을 세움
1989년 8월 18일
고성 군수
西行正値北風時(서행정치북풍시) 한양으로 승차되어 가는길 북풍이 불고
雪嶺參천鳥道危(설령참천조도위) 하늘에 높이 솟은 눈 덮인 영마루 새도 넘기 험한 길
自是人情傷惜別(자시인정상석별) 나는 이제 인정에 마음이 아픈 아쉬운 이별을 하며
君來饑我我留詩(군래기아아유시) 그대들 배 주리며 나를 따라왔는데 나는 이별시를 남기네.
문정공 이식(李植) 선생의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택구거사(擇癯居士)요, 조선조 四大 문장가이고 한문학의 태두이며 덕수인(德水人)이다. 광해2년 문과에 급제하여 많은 화관을 두루 거처 형조, 예조, 이조판서에 오르고 대제학을 네 번이나 역임하였으며 선조실록 개수와 광해일기를 수정하여 영의정에 특증되고 여주 기천서원, 경성 화곡서원, 지동 부연사에 배향되었고 택당집 외에 많은 저서를 저술하였다.
1631년(인조9년) 8월에 대사간 재임시 인조대왕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증함이 고례가 아님을 주장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간성현감으로 좌천되어 임지에 부임하여 낙후된 소읍이라고 소홀히 하지 아니하고 監司에게 청하여 관아와 사원 보수하고, 자혜성경으로 피폐된 민심을 수습하고 향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양사재(養士齋)를 창건하고 유생을 모집하여 강학에 힘쓰는 한편, 개간사업을 장려하여 소득증대에 기여했다. 당시 진부령의 도로는 한 사람씩 다니는 소로, 길마저도 유실되어 통행이 두절되는 등 통행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승려와 군민을 동원하여 우마차가 다니는 길로 확창하여 내륙 지방과의 유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산업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간성지(杆城誌)를 발간하여 개간사업과 연혁사, 문화유적, 해안도서, 산천, 인구현황, 행정구역을 알리는 등 많은 자취를 남기었다.
1633년(인조11) 1월 부제학을 제수받아 떠나갈 때에 간성군민들은 치정(治情)을 못 잊어 눈덮인 진부령까지 따라와 전송하니 선생은 인정에 못 잊어 유별시(留別詩)를 남기었다. 조정에 들어가서 영동치정의 폐단인 태강실신(汰講失信), 전결자각(田結自覺), 역졸급전(驛卒給田), 여정도산(餘丁逃散)을 상소하여 폐단을 없게 하였으며, 유생들이 조정에 출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선생이 떠난 후 군민들은 거사비를 세우고 경택재를 지어 강학을 하였으며, 선생이 하세하자 군민들은 은공을 못잊어 해물(海物)을 취합하여 부의(賻儀)하고, 부인이 하세하였을 때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에 360여 년이 지난후 고성군청과 고성문화원에서는 선정사역(善政史歷)과 치자의 치민의 정을 잊지 못하여 진부령 개설사 및 당시 군민의 정성이 담긴 유별시와 기문을 돌에 새기어 후대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우노라.
2006년(丙戌) 10월 24일
고 성 군 수 함 형 구
고성 문화원장 황 연 인
이 길 오른쪽에 백두대간 종주기념공원이 있고, 이 길을 굽이돌면 왼쪽에 대간등로가 나온다.
뒤쪽 숲 왼편의 진부령관광농원에서 오른쪽으로 걸어 이곳으로 내려왔다. 뒤쪽에 향로봉 능선이 보인다.
이 마을에서 흘리삼거리까지는 비닐하우스 집단설치 지역이다.
대간등로를 타지 않고 걸어오는 흘리길
흘리령길을 따라 올라왔지만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라오면 이곳으로 나온다.
마산봉 0.94km 이정목 지점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마산봉이 올려 보인다.
앞 산봉이 890m 암봉이고, 그 오른쪽 뒤 뾰족한 산봉이 병풍바위봉이며 움푹 파인 안부 오른쪽 산봉이 마산봉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