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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북태권도전문체육관 원문보기 글쓴이: 임영선
러시아 쌀레하르드(SALEKHARD)시 야말로-네네쯔크주 방문
2006년 9월 27일~10월 3일까지
2004년 러시아 쌀레하르(SALEKHARD)시 야말로-네네쯔크주 체육 위원장(예브게니) 영북 태권도 체육관 방문으로 시작하여, 이번 2006년 9월 27일~10월 3일 일정으로 영북 영북 초등학교 태권도 선수 김상현(KIM SANG HYEON), 이승호(LEE SENNG HO), 강예은(KANG YEEUN), 김은지(KIM EUN JI) 선수가 국제 태권도 경기 겸 문화 체험을 하였다.
친구 김두식(학교동창)과 본인 임영선 단장으로 하여 9월27일 07:00 체육관 봉고로 임원규 선배님의 도움을 받아 운천에서 의정부 종점 앞 리무진 주차장까지 도착, 08:30분에 의정부 출발해서 고향, 일산, 김포공항을 지나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단체짐(선물, 라면, 김치등)과 개인짐을 부친 뒤 12:30분에 러시아SU600편을 타고 인천공항(INCHEON)을 출발 하였다.
9시간 비행 중 2번의 식사와 2권의 책을 독서하니 러시아 모스크바(MOSC0W) 도착, 1박을 하고 28일 모스크바(MOSC0W)에서 쌀레하르(SALEKHARD)시 야말로-네네쯔크주 17:00경 도착하였다.
도착공항에서 3개의 TV와 4개의 신문사 인터뷰를 마치고 그들이 준비한 파카를 입고 호텔숙소로 향하였다.
도시거리는 2001년도 러시아 대통령특별지시로 인구 40,000에 도시를 아주 신도시 건물(단층)로 전 도시를 새롭게 건설 하였다. 이곳 주 생산물을 시베리아 민물고기 종류와 러시아 46% 석유와 94%가스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는 도시다. 원주민과 그곳에 부유층은 80%가 고려인을 자리를 잡고 있다. 한결 마음 과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석유 와 가스, 고기, 순록 600,000만 마리는 정말 하느님이 주신 자연의 선물 같았다.
숙소는 선수들 숙소와 VIP 숙소로 구분이 되여 친구 김두식과 최명철 관장은 VIP 숙소로 향하고 선수들과 본인은 선수들 숙소로 도착하여 짐 정리를 하였다.
한국 팀 선수단과 본인에 대한 예우가 남다르게 준비를 하여 따뜻한 기분으로 아이들 점검을 하고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한다.
이른 아침에(현지시간05:30분) 아침구보를 혼자 호텔주변에서 40분정도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아이들을 집합하여, 아침식사를 하기위하여 선수식당으로 출발 하였다. 한국 선수들을 위하여 봉고차량 1대 기사(안드레)와 여대생 2명 도우미(쇼냐, 안나) 제브시카 (한국어 : 아가씨) 수고를 하여 주었다.
아침식사는 러시아식으로 준비가 되었다.(햄, 소세지, 과일, 빵종류, 음료수, 커피, 쥬스 등) 아이들도 내 마음처럼 한국에서 온지 이틀 만에 김치와 국 종류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식사 후 쌀레하르(SALEKHARD)시 구경과 2,000년 역사를 가진 원주민 동네와 최초의 러시아 성과 교회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은 차안에서 쇼냐와 안나는 영어, 한국말, 일본어, 러시아어, 바디랭귀지로 하하, 호호하며 차량 이동을 하였다. 시내에 시민들의 복장은 한국의 한겨울 옷차림으로 빠쁜 걸음으로 어디로인가 움직이고 있다.
도착한 곳은 최초의 북극 쌀레하르(SALEKHARD)시 성을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먼저 온 시청 담당자가 성을 소개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포(함포) 4대를 러시아 정부에서 주둔 군인들에게 배치하였다고 한다. 훗날 이곳 시에서 그 4대의 함포를 러시아 정부에 다시 반납 하였다 그 후로는 아무도 이곳에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앞에는 오부강과 저수지, 늪지대가 3분에 1로 구성된 시로서 절대적인 천연 요새이며 길고 긴 겨울을 외부 손님들에게 그리 빨리 입성을 허락하지 않아 함포를 반납 하였다고 한다.
전체성을 소나무로 만들었다. 통나무로만 연결하여 자연의 성으로 보인다.
다 함께 기념사진 촬영 후 러시아 정교회로 방문을 하였다. 성에 도착 하여 체육위원장 (예브게니)와 초를 우리 인원수로 구입하여 아이들에 안전과 우승을 기원하였다. 예브게니는 자기나라에 종교를 존경하여 주었다고 너무도 감사하는 말과 행동으로 나에게 민망하도록 예우를 한다. 정말 민망했다.
전원차량으로 이동을 약 30분정도 가니, 기념탑 인지 기념비 인지 우리를 반긴다. 모두 하차하자 시청 직원이 미리 와서 안내를 하여 준다.
이 기념비에서 오른쪽은 남, 왼쪽은 북 남과 북쪽의 경계선을 알리는 경계선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를 걸으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한명씩 소원을 빌며 기념 촬영 과 소원을 빌어본다. 본인도 이런 소원을 빌어본다. (우리 가족 부인, 딸과 형제의 건강을 빌어 본다.)
경계선 기념비을 멀리하고 우리일행을 이 곳 원주민 동네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잠시 차안에서 달콤한 수면을 하고 차가 정차를 하여 내린 곳이 2,000년 전부터 살던 원주민 동네 입구였다.
입구 앞에는 추장인 듯한 나무동상이 있다.
가이드인양 한 여자 분이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너무도 우리 한국 동네 아줌마 인상이다.
우리에게 인사를 하는데 러시아 말로 인사를 한다. 나는 문득 TV에서 본 언어학적으로는 우리민족이 우랄 알타이족에 속한다 하는 역사설을 본 기억을 되살려본다.
우리 6명은 태권도 팀으로는 우랄 알타이족을 처음 만나는 것이다. 조금은 흥분이 된다. 흥분이 가시기전에 가이드는 계속적으로 우리를 안내 한다.
우리 선수단을 소개 하는동안 아이들은 이곳에 순록과 강아지. 눈썰매 그들의 고유 생활문화에 호기심으로 산만하게 이곳 저곳을 보고 만지고는 한다. 나도 친구와 막사 한곳을 가보니 에스키모의 옷과 곰.산돼지를 잡는 사냥기구. 음식과 곡식을 가꾸는 연장에 많은 관심이 간다. 잠시 그들의 고유 옷을 입고 기념 사진 찰영을 해본다. 정말 내가 에스키모인인지 징기스칸인지 모르겠다 . 한참을 그곳에서 구경을 하니 허기가 진다. 화장실을 잠시 다녀오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 나를 놀리려 어디론다 숨은듯 하다 이곳저곳을 살피어 보니 한곳 운막에서 연기가 솟아 오른다. 그곳 운막앞에 가보니 안에서 깔깔대고 웃음을 참지못해서 나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움막에 천막을 열고보니 그 곳에는 우리 선수단과 안내원 그리고 그곳 원주민이 식사와 술.차를 미리 준비 하여 에스키모인들의 전통 음식을 준비를 하고 나를 맞이하였다. 감사하고 대접에 준비성에 감격을 하였다.
전통음식인 에스키모인들의 민물고기 잡는즉시 냉동이 된 고기를 칼로 잘라 먹는다. 이고기 맛은 정말 지구상에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본인은 외국 음식에적응이 아직 되지않아 외국 방문시 매일매번 고생을 하는데 이고기 맛은 정말로 지구상에 최고의 맛이다 할수 있다고 자신해서 말하고 싶다.
식사와 러시아에 전통 술 보트카 와 에스키모인의 물고기 음식. 그들의 문화를 보고 기념 사진과 여담을 나누고 숙소로 행하였다.
선수단 숙소에는 다른 곳에서 온 선수단이 숙소 배정을 어수선 하다. 사활린 선수단이 도착 하였고, 또 멀리
예까쩨린부르그( 볼셰비키 혁명 당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꼴라이 2세 일가의 처형지로 악명을 떨쳐왔던 도시 인곳 또한 군사 도시이며 과학도시. 공과대학으로 유명한 곳) 선수단이 도착 하였다. 예까쩨린부르그는 2번을 그 곳을 방문 하였고, 러시아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시 우리학교와 영북종합 고등학교 와 자매결연을 한 곳이다.
나에게는 러시아와 인연을 시작 한곳있다. 아무든 선수단 20여명과 코치. 감독이 도착 하여 숙소 배정을 하고 있다. 그의로 노보씨비르스크(러시아 무리 .우주 . 각 종목 종합대 대학교로 구성된 도시있고,오비강의 강변의 모래사장은 시베리이아 사람들에 편견을 다시생각 하는 시민에 모습을 보게 된다. 벌써 노보씨비르스키는 4번방문 도시가 되였다)띰 하바롭스크띰(고려인 과 한일 운동 그리고 현재 한국인이 가장 투자를 많이 하고자 하는 도시 중하나다.) 블라디보스톡 띰(러시아 태평양 함대 주돈지 이고 러시아 최첨단 부동향인 곳 본인은 이 곳에 8번재 방문을 하였고, 태권도와 약간에 비즈니스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여러 곳에서 온띰과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 숙소 정검후 휴식에 시간은 갓는다.
태권도 시합 계획식을 시작 한다. 먼저 주지사와 시창 그리고 귀빈 소개를 한다. 이자리에는 대한민국 실업연맹 태권도 이사며, 포천시청 감독,경동대학교 교수, 그리고 포천시 사절단으로 (본인 임영선)사회자가 소개를하고 김두식 친구도 강원도 강능시 태권도 협회 부회장 겸 방문 사절 대표로 소개를 하여 준다. 계획식에서는 본인과 한국 대표띰에게 예우. 예의를 아끼지 않는다. 훌룡한 대회에 공식 행사를 진행 하였다. 이자리에서 본인을 축사 겸 인사말에 준비한 대회 경기장. 숙소.식사.이벤드 준비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아니 하였다.
3일시합에 한국 선수단은 금 1개 은2개 동 2개를 획득하고 하루 관광과 쇼핑 준비를 하였다.
김상현(KIM SANG HYEON), 이승호(LEE SENNG HO), 강예은(KANG YEEUN), 김은지(KIM EUN JI) 우리 선수들은 국내 시합도 한번도 출전하지 못하고 외국 시합을 하면서 심적으로 부담감을 가지고 경기에 입하는 모습이 안스럽다.
선수들 자세에서 후날 자신을 위하여 태권도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아 훌룡한 경헙과 그 자질과 소질을 본인의 판단으로 가능성을 본 대회라고 생각 한다. 우리 4명의 선수들에게 이런말을 하고 십다. 너희들은 후날 다시한번 그곳에 가보아라. 그때 너는 성공한 자신을 볼수 있다고 ......
주지사. 시장. 태권도 협회장 러시아 측 기관장을 내일 출국을 앞에둔 한국 선수단에게 회식자리와 선물 두식 친구에게는 귀중한 돌이라면서 특별한 선물을 전달 하였고 나에게는 금으로 된 원유 ( )를 선물 하였다.
한국측 과 문화. 체육. 사업을 지속적으로 교류를 하고자 약속을 하고 14시경 잠자리를 하였다.
(모스크바소개)
대체 모스크바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소개해야할까. 벌쎄 모스크바를 10번째인가, 15번째인가? 기물가물 한다. 10분이 머다하고 머리 속을 뒤흔드는 러시아에 대한 환멸, 익숙해지는 순간 사람 사는 모습이 다 그렇지 싶을 정도로 만연해 있는 부조리, 곤혹스러운 시민들의 불친절….(이해하지 못하는 친절..) 하지만 왜 모스크바를 다녀온 사람들은 그 지독한 모스크바 중독에 걸려 밤마다 신음하는 것일까.
"정원에서는 나뭇잎의 바스락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이곳의 모든 것은 아침까지 멈추어 있네. 모스크바의 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대가 알 수만 있다면 … (중략) … 아침 여명이 점점 밝아오고 있네. 그대도 잊지 마오. 모스크바의 여름밤을…" 러시아의 대중가수 블라지미르 뜨로쉰(1926년 출생)이 부른 노래 <모스크바의 밤(IIoдmockobhbIe Beyepa:빠드마스꼬브늬예 베체라)>의 가사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역사와정교회의 전통, 소비에뜨 혁명의 권위를 대변하는 러시아의 수도이다. '러시아 문화 · 예술의 어머니' 라는 별칭답게 모스크바는 건축과 미술 · 음악으로 유명하다. 거대한 공산주의 제구 USSR(YCCP)의 수도였다는 자조님, 이들의 맨얼굴로 불어닥친 변혁의 바람은 이제 10년을 훌쩍 넘겨 점차 익숙한 생활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행 중 도매시장이나 가스뜨로놈(대중음식점)에 가본다면 그 깊은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의 활기와 강한 자립의지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끄레믈(성벽)을 위시한 장엄한 건축물들, 발쇼이 극장의 화려한 박수갈채부터 만원을 이루는 마을 소극장까지, 시민들의 일상 속에 예술이 있고 그 속에 러시아가 있다. 젊은 미녀들과 인형처럼 예쁜 꼬마들, 수도가 지니는 상징적 성채들과 자본주의의 쉴 틈 없는 개발의 바람, 그 변혁의 현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자연 · 응용과학 · 문학 · 예술을 배우러 온 각국의 유학생들, 골목 곳곳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체제 전환의 바람과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발버둥치는 이들의 모습…. 감히 카메라 렌즈조차 갖다대기 무색할 만큼 모스크바는 오늘도 치열하게 돌아가고 있다.
모스크바의 역사
모스크바(도시명은 '모스크바 강'에서 유래되었다)가 최초로 역사에 언급된 것은 1147년 류릭 가문의 유리 돌가루끼 왕자의 영지로 소개되면서부터이며, 9~10세기에 이미 대규모 군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키예프 공화국이 와해되고 고대 루시의 중심 세력이 동북부 대륙을 향해 이동할 당시만 해도 모스크바는 블라지미르-수즈달공화국의 별 볼일 없는 영지에 불과했다.
모스크바는 돌가루끼 왕자 집권기에 들어 겨우 목조성벽이 있는 작은 도읍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13세기 중엽부터 약 200년 동안 동부 러시아 전체가 몽골-따따르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다가 모스크바 공국의 이름으로 따따르 종주 세력과의 타협과 대결을 통해 블라지미르, 뜨볘르, 랴잔 등 주변 소공국들을 제압하면서 러시아의 중심부로 성장했다. 이때부터 모스크바는 슬라브 전통 아래 비잔틴 문화가 융합돼 오리엔트의 감성이 살아 있는 도시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4세기 후반 들어 러시아는 모스크바 대공국(마스끄바-벨리끼)을 중심으로 킵차크 한국과 맹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북동부 러시아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됐다. 1367년 리투아니아군을 물리치기 위해 끄레믈에 석조성벽이 구축되었고, 15세기 말경 모스크바 공국은 동부 러시아 일대까지 통합해 서쪽으로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북쪽으로는 스웨덴, 동남쪽으로는 따따르 세력에 대항해 러시아 민족 전체를 보화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15세기 들어 모스크바는 외적(특히 크림-따따르족)의 침입에 대비해 견고한 방벽을 구축해다. 끼따이 고러드가 1535~1558년, 외곽의 벨르이 고러드는 1586~1593년에 석조성벽(19세기 초 철거, 현재는 순환도로가 됨)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주변에는 요새화된 수도원이 배치됐다.
1613년 외세(폴란드 · 리투아니아)를 완전히 물리치고 미하일 로마노프가 왕위에 추대됨으로써 모스크바는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로 복귀하게 된다. 오늘날 남아 있는 끄레믈의 석조건축물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이다. 끄레믈을 중심으로 도시가 점차 팽창하면서 이반 뇌제 집권기에는 오늘날의 불봐르 순환도로를 따라 석조 외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으며, 16세기 말에는 현재 싸도보예 깔쪼까지 목조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확대됐다.
17세기에는 시역이 영국의 런던을 능가하게 되고, 중심부에는 장려한 성당과 궁전, 귀족의 석조주택이 들어섰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건축물은 목조 단층 건물에 지나지 않았고, 시내에서 농사를 짓는 모습도 흔히 발전됐다. 경제적으로는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해 전 러시아 시장의 중심이 됐지만, 짜르의 권력에 기생하는 일부 계급을 제외하고는 자주저인 길드조직이나 자치조직이 자생활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았다.
1712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가 뻬쩨르부르그로 옮겨지면서, 18세기부터 모스크바는 정치 중심부에서 경제(섬유 공업, 대외무역) 중심부로의 변모를 꾀하게 된다. 한편 최초의 대중극장(1702년), 신문(1703년),대학(1755년),문예잡지(1784년)의 건설과 발간이 이어짐에 따라 모스크바는 명실상부한 러시아 문화의 중심부로 부상한다.
1811년 28만 명이던 인구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과 시가지의 파괴로 감소됐지만, 섬유 · 금속가공 · 화학분야의 공업 부문 발전이 가속화됨으로써 1863년에는 35만 2천 명의 인구를 기록했다. 농노 해방 후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모스크바는 철도 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며, 러시아 최대의 상업 중심부이자 뻬쩨르부르그 다음 가는 공업 중심부로 발전, 1899년에는 인국 100만 명의 메트로폴리스로 성장했다.
하지만 급속히 증가한 노동자와 도시 하층민의 생활에 대해 정부 당국과 자본가가 등한시하며 자신들의 배만 불리자, 주택 문제와 공중위생 문제 등 하층민의 빈곤에서 비롯된 도시 문제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노동운동이 조직되기 시작했으며, 뻬쩨르부르그와 더불어 혁명 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모스크바는 러시아 사회주의공화국(소비에뜨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의 수도로 지목됐다. 도시 규모는 총면적 879㎢으로, 거주 인구 역시 약 900만 명으로 확대됐으며, 종주국 수도로서의 위용을 자라아는 새로운 양식(스딸린양식)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속속 들어서는가 하면, 옛 성달들은 무신론 확산에 저해된다는 이유로 파기되거나 방치되었다. 1935년부터는 모스크바 경제 개발 10개년 계획을 실시, 도로와 공원이 신설되고 주택 건설 붐 역시 대규모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60년에 실시한 개발 계획에 따라 인접 위성도시들이 모스크바 시에 합병됐으며, 시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환상도로 안쪽은 주거 지역과 공업 지역, 녹색지대 등으로 구분 됐다.
소연방 해체 후, 특히 1997년 정도 850년을 계기로 모스크바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러시아 정교회 성당 같은 제정러시아의 산물들이 되살아나고, 세계화와 시장경제 시대의 도래에 걸맞은 서구형 건물들이 속속 생겨났다. 혁명가들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은 예 제정러시아 시대의 원래 이름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