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 12월 6일부터 10일까지는 노벨 주간(Nobel Week)입니다. 매년 10월에 발표되는 노벨상 수상자 시상식과 강연(수상 소감)이 이어지며 마지막 날인 10일에는 스톡홀름 시청에서 수상자들을 위한 노벨 만찬(Nobel Banquet)이 열립니다. 노벨 만찬은 언제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데, 날짜가 12월 10일인 건 이날이 노벨상 제정자인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생일이어서입니다. 만찬에는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경제학상 수상자와 그 가족, 스웨덴 왕실과 귀족, 그 밖의 초대 손님 등 약 1,300명이 참석합니다. 작년 만찬 사진과 테이블 세팅을 보면 이보다 더 화려하고 고급스럽고 세련된 저녁 모임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습니다. (평화상 수상식과 만찬은 노르웨이에서 따로 열립니다.)
1974년 노벨주간에 경제학상 수상자로서 영광과 축하를 누렸던 이는 스웨덴 경제학자인 군나르 뮈르달(1898~1987)과 F. A. 하이에크(1899~1992)였습니다. 그런데, 하이에크는 원래 명단에 없었는데 스웨덴 학자에게 경제학상을 주고 싶었던 주최 측(스웨덴 왕립아카데미와 스웨덴 중앙은행)이 뮈르달의 수상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한물간’ 하이에크를 끼워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잘 나가던 뮈르달은 우습게 봐온 하이에크와 공동수상자가 된 것에 화를 낸 반면 하이에크는 자기를 끼워준 걸 감지덕지하고 …, 하지만 정작 오늘날 인류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하이에크다, 뭐 그런 내용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 시상되기 시작한 다른 상과는 달리 1968년에 첫 시상됐습니다. 그해에 창립 300주년을 맞은 스웨덴 중앙은행이 그 기념으로 왕립아카데미에 “상금은 우리가 마련할 테니 상 받을 사람만 정해주시오”라고 부탁해 제정된 겁니다. 하이에크가 상을 받은 1974년은 경제학상이 제정된 지 5년이 지난 해입니다. 스웨덴 중앙은행과 왕립아카데미는 “이쯤 됐으니 이제 여섯 번째 경제학상은 우리 스웨덴 경제학자가 받아도 되잖아?”라는 생각에 경제학자이면서 무역상업부 장관과 국제연합 유럽경제위원회 상임간사도 지낸 거물 뮈르달에게 상을 주려다가 자국 사람에게만 상을 주는 게 아직은 좀 ‘거시기’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주최 측의 농간’이라는 뒷말이 나올 걸 꺼렸는지 하이에크를 끼워 넣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 주장은 뒷이야기입니다. 정사에는 안 나오는 이 주장을 한 사람은 2년 뒤인 1976년에 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1912~2006)입니다. 앨런 에벤스틴이라는 미국 경제학자는 '하이에크 전기(F.A. Hayek:a Biography)'를 쓰면서 프리드먼의 이 주장을 옮겨 넣었는데, 이 전기에는 하이에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먼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상을 받을 당시 하이에크는 경제학계에서 반쯤은 잊힌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하이에크는 30대 초반에 영국으로 건너가 교수로서, 경제학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영국에 가자마자 이미 세계적 경제학자로서 이름이 굳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와 당시 경제 현안(물가안정, 실업 퇴치, 경기회복 방안 등등)을 놓고 치열한 논전을 벌여 학계의 주목을 받은 하이에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경제는 정부나 당의 몇 사람이 수립한 계획을 따라야 한다는 사회주의는 인간을 그 입안자의 노예로 만드는 이념이므로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 게 골자인 ‘노예의 길’을 출간, 유럽과 미국의 일반 대중에게서도 깊은 관심을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이에크에 대한 이런 관심과 주목은 오래지 않아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를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 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멋대로 굴러가지 않도록 간섭해 다 잘 먹고 잘살게 해주겠다”라는 사회주의의 구호는 “경제는 간섭하는 게 아니야, 그대로 두면 다 알아서 잘 굴러가는 게 경제란 말이야”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가르침보다 더 매력적이었던 겁니다. “하라는 대로 하면 잘살 수 있게 된다”는 것과 “너가 열심히 노력하면 잘살 수 있게 된다”는 두 구호 중 다수의 학자와 대중은 앞의 구호에 더 솔깃했던 겁니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을 쓴 후에도 몇 권의 저작을 내놓았지만, 그 가치는 아는 사람만 알았을 뿐 전처럼 높은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주의는 쇠퇴하고 사회주의가 전 지구를 덮을 것처럼 기세를 한창 올릴 때였던 겁니다.
이 무렵 하이에크의 개인적 삶도 크게 불편해졌습니다. 20대 초반, 첫사랑을 두고 미국으로 유학 간 하이에크는 귀국 후 첫사랑이 이미 결혼한 걸 알고는 첫사랑을 닮은 여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만, 첫사랑이 남편과 사별한 소식을 듣자 부인과 정식 이혼하기도 전에 첫사랑과 결합했습니다. 교수 월급과 얼마 되지 않는 인세 수입으로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두 자녀와 첫사랑이 데리고 온 아이 등 두 가족을 돌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법원에서 이혼 판결을 받는 데도 시간과 노력,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얼마나 쪼들렸느냐면, 희귀한 고서와 앞 세대 유명 학자들의 서한 같은 것을 찾아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던 하이에크는 장서가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생활비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애지중지해온 장서를 오스트리아의 어떤 ‘명성 낮은’ 대학교에 통째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러고는 그 책들 옆에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그 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유명 대학’ 교수로 있다가 연구와 생활 여건이 훨씬 못한 대학으로 근거를 옮기면서 상한 자존심 때문인지 하이에크는 건강까지 악화됩니다. 눈이 침침해지고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다친 귀도 더 어두워져 좋아하는 오페라 감상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습니다. 학문에 대한 열의도 시들해졌겠지요. 이처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명예는 물론 상금도 상당한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 본인은 물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 날아왔으니 얼마나 놀랍고 기뻤겠습니까. 하지만 뮈르달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뮈르달은 공동수상자 명단과 보도자료에 자신의 이름이 먼저 명기되어 있었음에도 “하필이면 하이에크와 공동수상이냐?”라며 언짢아했다는 겁니다. 평등과 복지정책으로 모든 사람이 골고루 잘살 수 있다는 사회주의적 믿음을 지녔던 뮈르달은 자신과 정반대되는 사상을 지닌 자유주의자 하이에크의 이름이 자기 이름 뒤에 붙어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요. 사실 뮈르달은 하이에크가 경제학자로 두각을 나타냈던 1930년대 후반 하이에크의 경제이론에 날 선 비판을 한 적도 있습니다. 뮈르달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경제학은 경제학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하이에크의 뒤를 이어 프리드먼까지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되자 “사회주의가 이룩한 진보를 되돌리려는 반동주의자들에게까지 주는 상이라면 없어지는 게 옳다”라며 노벨 경제학상을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내놓았습니다.
거액의 상금으로 하이에크를 경제적으로 회춘시킨 노벨상은 육체적 학문적으로도 그를 되살려 놓았습니다. 노벨상으로 다시 세상의 관심을 끌게 된 하이에크는 ‘눈과 귀 등 건강이 그냥 다시 좋아져’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인과 함께 세계 각국의 대학과 은행 등 경제 관련 단체나 기구의 초청을 받아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설파했습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의 사상을 연구, 발전시키려는 학자들이 잇달아 나타났습니다. 1978년에는 한국도 방문, 전경련에서 강연하고 울산 공업단지를 방문했습니다. 1979년에 영국 총리가 된 마가릿 대처와 1980년에 미국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이 하이에크의 사상을 자신들의 경제정책 기초로 삼았다는 건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이에크의 말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예화는 1989년 노환으로 병상에 누워 있던 그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면서 아들에게 “얘야, 내가 뭐랬니. 사회주의는 망한다고 하지 않았니?”라고 했다는 거지요. 그런데 사회주의-소련 공산주의-가 그냥 망했겠습니까? 하이에크를 비롯한 자유주의, 시장경제 신봉자들의 그치지 않은 경고, ‘사회주의는 인류와 문명의 존속을 위협하는 이념’이라는 경고가 아니었더라면 그 세력이 그때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시 ‘노벨 경제학상 주최 측’이 자신들의 중립성-사회주의자가 아니어도 이 상을 받을 수 있음-을 보이려고 '한물간' 자유주의 시장경제학자 하이에크를 끼워 넣은 건 인류를 위해 큰 다행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그가 '우연히' 노벨상을 받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20세기 후반 인류가 사회주의의 물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인간의 역사는 그가 말한 대로 '몇 사람의 계획에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단한 사례로 꼽아야 할 겁니다.
이 글을 쓰면서 구글 검색을 했더니 하이에크의 이름(Friedrich A. Hayek)으로는 587만 개 항목이 뜨는데, 뮈르달의 이름(Gunnar Myrdal)으로는 117만 개가 뜹니다. 올 초에 검색했을 때보다 차이가 더 벌어졌습니다. "끼워 팔린 하이에크가 대박을 쳤다"는 말이 경망스럽긴 해도 틀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