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29
(일본의 통치와 민족주의 발흥)
1. 일본의 통치와 민족주의 발흥
일제의 만행을 처음부터
제 3자 입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이들은
국내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외국인과
외국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나라에
한국 실정을 소개할 때
일본의 침략행위를 직접, 간접으로
비판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인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기도 하였는데 그 예로 이화학당,
배재학당, 숭의 여학교, 정신학교 등
많은 학교가 일제시대에 설립되었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미션스쿨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기독교 민족주의 의식과
서양역사와 문학을 통해
서양 근대 민주주의 정신을 함양시킨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켰다.
이를 간파한 일본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미션스쿨을
당국에 등록하게 하고 당국에 등록된 학교는
종교교육과 종교의식은 불허한다는 규정을 발표한다.
선교사들 중에는 어려운 형편의
한국인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협력하지만
그와 같은 행동을 선교사들의
정치적 행동으로 몰아가는 당시의
현실 때문에 돕고 싶어도
그로인해 선교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자제하기도 하였다.
형식적으로는 비정치적이면서
일제의 한국통치를 당연하게 하는 입장은
일제 치하에서의 선교사역을 위해서는
어느정도 이해는 가지만
중립주의는 확실히 공평한 태도라고는 할수 없다.
이같은 선교사역애서의 중립주의를
(일본의 한국총차애 대한 시각)
어느 정도 수정해 준 것이 105인 사건이었다.
2. 105인 사건과 일제의 기독교 탄압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기독교는 한국의 문화,
사회 전반에 놀라운 영향을 끼치는데
기독교가 금주, 금연, 노비해방, 천민구호,
조혼의 폐습 등 사회개혁과 교육 ,의료실시로
국민을 개몽시키는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아 갔으며
사회전반에 대한 개혁운동,
기독교의 성장으로 인한 도덕성의 개혁을 본
한국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는
교회에서 자신들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선교회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비정치화를 표방하지만 총독부는
한국교회가 발전함에 우려를 나타냈다.
1909년 이또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 당하고 후임으로 온 데라지세이기는
자신을 암살할 음모를 계획했다는
사건을 날조하여 선교사들과
윤치호, 영기석, 유동철, 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와 기독교인 70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에 105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105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유죄판결이 날 때까지 많은 사람이
고문 당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있지도 않은 사건을 있게 만들려니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고통과 날조가 있었겠는가!
105인 피고 중 가장 어린 사람의 수기가
남아 있어 적어본다.
"김근형과 정희순은 악형을 받고 죽었으며
어떤 사람은 팔을 잃고
어떤 사람은 눈알이 뽑혀서
빈사상태에서 피를 토하고
하루에도 몇번이나 졸도하고
음식도 주지않으며 물 조차 주지 않고
잠도 재워주지 않아 광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데라우찌가 정치를 시작하자
한국인 애국자와 기독교인에게
큰 타격을 주기위해 서둘러서 터무니없는
데라우찌 총독 암살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이것을 사실로 하기 위해
우리에게 심한 고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일본의 식민 통치정책을
중립적인 시각으로 보는 선교사들에개
부정적 시각으로 전환시켜 주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일본의 조직적인 기독교 박해는
한국 교회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쳐
전체 교인수는 줄었으나 예배당 수와
세례교인의 수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늘어난 교회가 박해를 통해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에서 이탈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세례교인들은 흔들임이 없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탈된 교인들은 대부분 초신자이거나
학습교인이었던 것이다.
초대 교회사에서 본 것처럼
박해기간에는 오히려 교회가 신앙을 다지는
기회가 되고 완화된 후에는
교회가 외형적인 성장을 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