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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고행의 쉰움산, 두타산 산행
1. 일자 : 2012. 7. 7 (토)
2. 장소 : 쉰움산(683m), 두타산(1353m)
3. 행로 및 시간
[일주문(12:20) -> 천은사(12:25) -> 너덜(12:41) -> 은사암(12:55) -> (샘터) -> 쉰움산(13:20) -> (중식 -13:35) -> (헬기장, 평지-오르막) -> 두타산성 갈림길(14:37) -> 두타산(15:15, 박달재 2.3km) -> (비탈-평지) -> 박달재(14:12, 관리사무소 5.7km) -> 박달계곡 초입(17:00) -> 이정표(17:32, 관리사무소 3.5km) -> 적벽지대(17:43) -> 쌍폭(17:54) -> 삼화사(18:12) -> 두타동천(18:32) -> 주차장(18:40)]
4. 동행 : 홀로
< 쉰움-두타(-청옥산) 산행을 준비하여 >
오랜 가뭄 끝에 장맛비가 세차게 내린다. 중부지방이 100년 만에 가뭄이라 하는데 때마침 장마가 찾아와 만물에 생기가 돈다. 장마의 우리말 표현은 ‘오란비’이다. 오랜 기간 내리는 비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오란비가 장마라는 표현보다 어감이 곱다. 산에서 내리는 비는 임우(霖雨)라 한다. 비 내리는 숲이 연상되는 말이다. 바야흐로 계절은 비와 무더위가 절정인 성하(盛夏)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달 오대산 산행 이후 낮은 산만을 올랐더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먼 곳, 높은 곳으로 떠나야겠다. 대부분의 산악회에서 이미 다녀온 산을 안내하기에 뭐 좀 새로운 것이 없을까 하여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마침 안전산악회에서 7주년 기념행사로 삼척의 명산 3곳 연계 산행을 제시하기에 망설임 없이 예약을 했다. 쉰움산, 두타산, 청옥산 종주 산행이다.
두타산은 이미 다녀 온 경험이 있는 산이기에 옛 자료를 뒤적인다. 뇌 깊은 곳에서 저장되어 있다가 조금씩 사라져 가던 기억이 활자를 속에서 되살아 난다.‘두타산 정상에서의 짧은 휴식을 끝내고 하산 길에 나선다. 산성12폭포와 거북바위를 지나 머지 않은 곳에 오늘의 하이라이트, 두타산성 전망바위에 도착했다. 천애절벽에 난 너른 반석 뒤편으로 높다란 산이 솟아 있고 그 중앙에 절 집(관음암)이 보인다. 좌측으로 두타산에서 박달령을 지나 청옥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모습이 선명하고,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계곡이 능선 아래로 이어진다. 선경(仙境)이다. 황홀한 풍경의 극치다. (중략) 출발 전 두타행(頭陀行)의 의미를 세기면서 속세를 등지고 정진의 길을 떠난다 하였다. 5시간이 넘는 산행을 마치고 다시 속세로 돌아와 보니, 정진이 꼭 산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낀다. 무릉반석 옆 들꽃의 모습을 보며, 편안한 흙 길을 걸으며, 구름이 이는 산을 올려다 보며, 물가 바위에서 지나온 능선의 모습을 다시 보며 욕심 없이 생각에 잠기는 것도 구도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작은 사실을 침소봉대하고 자기 합리화시키려는 습성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아 피시 웃음이 나온다.
반나절 만에 3곳의 만만치 않은 산을 넘어야 한다. 머릿속에 가야 할 길을 그려본다. 이승휴의 제왕운기 집필 처로 유명한
천은사를 들머리 삼아 1.5km, 1시간을 오르면 쉰움산에 도착할 것이고,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3.5km, 100분을
올라 두타산(1353m)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두타산에서
박달재를 거쳐 3.7km, 100분의 대간 길을 걸어 청옥산에 도착할 것이며, 학등을 거쳐 80분을 걸어 문간재에 닿고, 이후 1시간을 더 가야 삼화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총 7시간이 (그것도
쉼 없이 몸을 부지런히 놀러야 가능할) 소요되는 장거리 산행이다. 산행을
마치고 나면 최근 근교산만 다녀서 몸이 근질근질 했다는 표현은 당분간 못할 것 같다.
두타산이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반열에 오른 이유는 ‘무릉계곡 등 경관이 아름다운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삼화사, 관음암, 두타산성이 있음. 바위에 50여 개의 크고 작은 구멍이 패여 산 이름이 붙여졌으며, 예로부터
기우제를 지내는 등 토속신앙의 기도처인 쉰움산(五十井山)도
유명’이다. 한마디로 경관이 좋은 산이라는 말이다.
< 지난 산행의 추억 >
< 희망사항 >
다시 두타행(頭陀行)에 나선다. 이번에는 두타산만 가는 것이 아니고 쉰움산-두타산-청옥산 종주 산행이다. 지난 두타산 산행 하산 길, 두타산성 전망대에서 멋진 풍광에 취해, '번뇌와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깨끗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을 뜻하는 두타의 의미를 어줍지 않게 되새겨 보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오늘 산행은 이런 거창한 수행이 아닌 그저 멋진 산 길을 걸으며 내가 살아 있음을 느껴 보고 싶다. 기온 높고 습기 많은 계절에 7시간이 넘는 힘겨운 산행을 마치고 느끼는 작은 성취감에 취해 보고 싶다.
산 길에서 만날 명소를 마음으로 그려본다. 고려시대 이승휴의 명저 제왕운기의 기운이 남아있는 천은사, 거대바위인 은사암, 오 십 개가 넘는 돌확과도 같은 곰보바위 (석회암 지대에 빗물이 보여 움푹 들어간 도리네), 쉰움산에서의 숨 막하게 멋진 주변 풍광과 멀리 삼척 시가지와 동해 바다, 해풍에 시달렸음에도 그 줄기가 완고하리만치 튼튼한 노송, 쉰움산에서 두타산으로 향하는 길의 빽빽한 숲, 두타산에서 청옥산에 걸친 3.7km의 대간 길, 학등, 근처에 가서도 가 보지 않으면 두고 두고 후회한다는 용추폭포, 쌍폭의 위용, 양사언의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이라는 싯구가 살아 숨쉬는 두타계곡, 유서 깊은 삼화사, 이 모두가 사진으로 보고 머릿속으로 상상만해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속에 푹 빠져 보고 싶다.
두타산성 갈림길에서 두타산 길과 쌍폭에서 삼화사 길을 제외하곤 처녀 길이다. 새로운 산행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다. 고찰과 암릉, 대간 길, 계곡, 폭포가 어우러진 최고의 산 길을 기대한다.
장호 선행은 100대 명산기에서 ‘두타산은 한반도의 등뼈, 국토의 한 가운데 배꼽 뒤를 받쳐주는 성체이다’라 했다. 장마와 무더위를 이겨낼 명산의 기운을 듬뿍 받고 서울행 버스에 오르고 싶다.
(여기까지는 산행을 준비하는 과정의 기록이고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삼척 가는 길에 >
복정에서 삼척 천은사까지의 거리는 275km다. 멀다. 동해에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서도 국도와 지방도를 따라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지난 5월 덕항산 여행 길에, 오늘 가야 할 천은사로 향하는 길의 ‘멈과 고단함’을 알아 버렸기에 여정이 마냥 낭만적으로 다가 오지만은 않는다.
07:30 복정역, 7주년 기념 산행이라 하더니 역시 버스가 2대 출발한다. 이천휴게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시원한 김치 콩나물국을 먹고 나니 힘이 난다. 버스 TV에서 추신수 선수가 출전하는 야구경기가 생중계 되고 있다. 배부르고 좋아하는 야구 경기도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 즈음 길이 막힌다. 간 밤에 잠을 설쳐 수면을 좀 취해 두어야 하는데 잠들기가 쉽지 않다. 비몽사몽 하는 사이 10시 가까이에 여주를 지난다. 도착시간이 많이 늦어질 것 같다.
오늘 산악회에서 안내하는 산행코스는 A : 천등사-쉰움산-산성갈림-삼화사, B : 천등사-두타산-박달재-삼화사, C : 천등사-두타산-청옥산-삼화사로 나뉘는데, 출발시간이 지연되고 계곡의 물이 불어 C코스는 산행이 어렵다고 한다. 당초 계획한 청옥산 등산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겠다. 특히 물이 불은 계곡 산행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강릉을 지나 동해로 접어든다. 7번 국도 넘어 바다가 넘실거린다. 그 푸른 물 짓에 가슴이 시원해 진다. 12시 15분, 애매한 시간에 버스는 천등사 일주문 앞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자! 늦었지만 부지런히 산에 붙자.
< 천등사에서 쉰움산 >
일주문을 지나 작은 다리를 지나 숲을 따라 길게 길이 보인다.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된다. 습기 찬 공기가 서늘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난 안다. 이 습기가 초반 산행에 얼마나 큰 적이 될 줄을 난 잘 안다. 시원함은 곧 기분 나쁜 축축함으로 변할 것이다. 길을 나선 후 5분만에 우측으로 천등사의 절 집이 보인다. 잠시 들려 이승휴 선생의 체취를 느껴보고 싶지만 시간 여유가 없다. 먼 발치에서 대웅전 지붕만 바라보다 이내 산으로 올라 붙는다.
< 일주문 앞 들머리 >
지난 비로 인해 계곡의 물살이 거세다. 습기가 몰려온다. 순 십간에 몸이 땀 범벅이 된다. 작은 다리를 2개 넘어서 고도를 점점 높여간다. 시작 고도가 200미터 수준이니 쉰움산까지 꼬박 1시간은 올라야 할 것이다. 계곡의 습기가 만들어내는 연무에 풍경은 흐릿하다. 너덜을 지난다. 덕분에 잠시 하늘이 열린다. 연무와 구름 뒤에는 분명 푸른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있다. 쉰움산에 오를 즈음에 하늘이 활짝 열리고 햇살이 비취기를 기대하면 고도를 높여간다.
12시 50분, 쉰움산 특유의 소나무와 갈색 암릉이 어우러진 풍광이 조금씩 본색을 드러낸다. 곳곳이 바위 전망대이다. 너른 전망대를 지나자 은사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강송의 붉은 기운과 암갈색의 우람한 바위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 쉰움산 오름 길에 풍경 >
40분 정도의 오름짓에도 땀이 온 몸을 적시고 있다. 유독 습기 많은 날의 산행은 나를 힘들게 한다. 게다가 지난 밤의 수면부족까지 겹쳐 몸이 무겁다. 그래도 멀리 산과 산 사이로 이어지는 풍경 끝에 마을이 보이니 눈이나마 시원해 좋다.
고사목 지대를 지난다. 무심코 지나치다 순간적으로 ‘흔치 않은 구도’ 라 판단되어 돌아 서, 카메라를 꺼내 급히 셔터를 눌렸다. 전문가 평가는 어떨지 몰라도 내 판단으론 걸작이다. 산에서 한 두 그루의 고사목을 목격하는 것은 흔해도 이렇게 여러 나무가 밀집하여 서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작은 성취감에 힘을 얻어 다시 길을 나선다. 작은 샘을 지난다. (누군가의 산행기에 샘에 쇠그릇 있다고 한 것을 읽었는데)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스텐리스 밥그릇이 소중한 물 그릇이 되고 있다. 작은 배려가 여러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 고사목 군락 >
11시 20분 1시간의 힘겨운 오름짓 끝에 오늘의 첫 목표 쉰움산에 올랐다. 연무에 젖었지만 명불허전이다. 곳곳에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고여 있고 그 안에는 신기하게도 개구리도 보인다. 무른 석회암지대에 오랜 시간 바람과 비가 이런 ‘우물’을 만들어 놓았다 하니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우물가 한 켠을 빌어 조촐한 식당을 차린다. 오름 길에 힘겨움은 단지 고도와의 싸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콩나물 국에 말아 먹은 밥 만으로는 이 힘겨운 산을 넘기에는 부족했을 것이다. 내 몸에 에너지를 불어 넣어야겠다.
< 쉰움산 정상에서 >
배가 부르니 주위를 둘러 볼 여유가 생긴다. 바위 틈 한 줌 흙에 의지하여 선 소나무가 늠름하다. 멀리 두타산성 반대편으로 거대한 암름이 솟아 있는 모습이 연무 속에서도 또렸하다. 분명 쉰움산은 보통 산은 아니다.
< 쉰움산에서 본 전경 / 두타산 가는 길의 숲 >
< 쉰움산에서 두타산 >
오늘 산행의 두 번째 목표를 향해 길을 나선다. 돌비석 지대와 너덜을 지나자 헬기장이 나오고, 헬기장을 지나자 언제나처럼 평지 능선 길이 이어진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숲은 싱그러웠다. 소로가 이어지고 짙은 숲에 하늘은 열리지 않는다. 길도 평지 길이고, 점심으로 먹은 음식이 에너지로 변해 몸에 힘이 조금씩 붙는다.
두타산성 갈림까지 1시간을 예상하고 걷는다. 30분쯤을 걸었을까 길의 고도가 서서히 높아가고 있다. 쉰움산의 고도가 683미터, 두타산이 1353미터이니 700미터 정도를 끌어 올려야 한다. 대세 오르막은 당연지사다. 힘겹지만 쉰움산을 오를 때 보다는 몸이 산에 잘 적응하는 것 같다.
여자 대장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린다. “여기는 선두, 두타산 정상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다”. 날씨가 좋다 하니 반갑지만, 내가 두타산 정상에 가려면 아직 1시간 정도가 남았는데 그들은 벌써 정상이라니, 힘이 빠진다. 고수가 되려면 아직 난 한참 멀었나 보다. 그래도 발에 힘을 준다. 내 길을 가자.
2시 37분, 두타산성 갈림에 도착했다. 그간 시끄럽게 앞 길을 막던 한 떼의 산객들과 이별을 고하자 사위가 다시 조용해 진다. 두타산으로 향하는 길, 우측으로 하늘이 열리고 너울지는 산 들 사이로 구름이 몰려온다. 장관이다. 모든 것이 높고 멀다. 빠르게 흐르는 구름 사이로 산들이 없어졌다 나타났다 한다. 흐릿한 하늘에 흰 구름, 녹색의 숲이 몽환적이다.
< 구름이 피어나는 산 / 가야 할 두타산 >
기억은 두타산에서 이곳 산성 갈림까지의 길이 몹시 험했다 한다. 그러나 마냥 오르막만 있는 것은 아니고 평지와 바위길 비탈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 걸을 만 한다. 무엇보다 하늘이 열려 볼 것이 많아진다. 눈 앞에 커다란 봉우리가 나타난다. 두타산이겠지 하고 오르니 아니다. 두타는 그 뒤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계가 3시를 지난다. 두타산을 향해 마지막 힘을 쏟는다. 산이 만들어 내는 오르내림에 익숙해져 간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산은 쉽게 정상으로의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숨이 목 끝까지 차 오를 즈음 두타산의 정수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3년이 조금 못되어 다시 두타산 정상에 선다. 정상은 제법 큰 평지다. 한 켠에 정상석이 있고 반대편에는 야생화가 흐드러진 풀 밭이다. 그 동안 구경하지 못했던 햇살이 솟아진다.
< 두타산 정상에서 >
얼마 전 등산잡지에서 양승태 대법원장과 산에 오르며 쓴 글을 읽었다. 왜 등산을 하느냐? 는 우문에, 노 법률가는 “타고난 성품과 맞다. 마음속에 나도 깨닫지 못하는 방랑벽이 있기 때문이다. 등산은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의 평정을 주며 무한한 인내심을 길러 줍다” 라는 취지의 대답을 했다. 오랜 경륜이 묻어 나는 진솔한 답이다.
< 두타산 정상에서의 풍경 >
정상에서 멀리 이웃 산을 본다. 풍경 속에 추억이 깊어 진다. 발 아래에선 초록의 기운이 약동한다. 내가 산을 찾는 또 다른 이유다. 이제 대간 길을 걸어 박달재로 내려 가야 한다.
< 두타산에서 박달재 >
등산 길이 험했는데 하산 길이 편할 리 없다. 초반 0.5km는 잔 돌이 많은 비탈이다. 물기를 머금은 돌 길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산행기에 두타산에서 청옥산으로 가는 길은 평탄한 능선 길이라 했다. 경험상 능선은 평지가 아니다. 더구나 이 길은 1350미터 에서 1100미터 다시 1400미터로 오르내림이 있어 녹녹하지 않다.
20분을 걸어 내려오니 이정표가 보인다. 박달령까지 1.6km가 남았다. 이곳부터 길이 완만해 진다. 걷기에 그만이다. 그러나 그 많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산성 갈림을 지나며부터 일행들을 보지 못했다. 내가 빠른 건지 늦은 건지 감을 잡지 못하겠다. 이왕 혼자가 된 것, 한적함을 즐기자 하는 마음으로 박달재를 향해 터벅터벅 걷는다. 내심 40분이면 되겠지 하고 걷는데 산 길 2.3km는 40분에 걷기엔 무리였다. 박달령에 도착하니 약 55분이 소요되었다. 이런 속도로 당초 청옥산을 오르려 했으니 내 실력을 한참 과대평가 했다.
박달령에 도착하니 다시 허기가 진다. 남겨둔 빵을 우적우적 먹고 있는데 후미대장이 나타난다.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청옥산에서 하산 하는 길 뿐만 아니라 박달계곡 길도 물이 불어 위험하니 두타산으로 돌아 가서 하산하란다. 대부분 그 길로 하산하고 있다고 하면서 강하게 몰아 붙인다.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후미대장은 어떻게든 박달계곡으로 하산하겠다 맞받아 친다. 먼저 내려간 인솔자가 있다 하니 서로 무전을 하며 조심하며 하산 하기로 한다.
발에 힘이 들어간다. 정신도 바짝 든다.
< 박달재 / 수국(水菊) >
< 박달재에서 무릉계곡 >
4시 20분 조금씩 어두워지는 숲 속으로 길을 나선다. 비가 와서 먼지를 씻어 내린 깨끗한 내리막이다. 그러나 물은 머금은 돌은 잘못 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조심에 조심을 기한다.
고도가 거의 10분에 100미터씩 낮아진다. 언제 계곡을 만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일단 600미터쯤으로 추정을 한다. 한 삼 십 분쯤 내려 왔을까, 연이어 비명을 듣는다. 미끄러운 돌에 부상자가 속출한다. 배낭이 쿠션이 되어 주어 그나마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위험천만하다. 신발끈을 다시 멘다. 몸도 마음도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길가에 수국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흰색과 보라색의 청초한 조화가 눈 길을 오래 잡아 멘다. 내 산 벗을 닮았다.
계류가 나타났다. 고도계를 보니 600미터가 조금 넘는다. 추측이 맞았다. 산세를 읽는 눈이 밝아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계류는 물이 조금만 더 불었으면 건너기 쉽지 않아 보였다. 크게 돋음을 하여 겨우 계곡을 건넜다. 한시름 놓았다 싶어 길을 걷는데 방심은 금물, 길 사정이 점점 더 험해진다. 세찬 물 살이 낭만이 아닌 위험으로 다가 온다. 곳곳에서 폭포가 목격된다.
당초 1시간이면 내려가겠지 한 박달계곡은 생각보다 길었다. 5시 20분 너른 바위가 있는 계류에 도착했다. 쉼 없이 내려왔는데 앞으로 얼마를 가야 할 지 모르겠다. 5시 30분 이정표를 만난다. 박달재 2.3km, 관리사무소 3.5km. 이정이 있다는 것은 길의 변화가 있다는 증거이다.
< 박달계곡의 전경 >
역시나 길 사정이 조금씩 나아진다. 급기야 철제 계단이 나타났다. 지난 덕항산 산행에서 익숙한 초록색 페인트가 인상적인 철계단, 그래 이곳은 덕항산과 같은 삼척의 산인 것이다. 길 좌측으로 거대한 암벽이 서 있다. 암갈색의 거대한 돌기둥과 암릉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 있다. 힘겨운 발걸음에 힘이 난다. 험한 길을 걸어 온 보상을 이렇게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해 진다.
< 거대한 암갈색 암벽이 있는 풍경 >
그렇게 10여분 폭포와 암릉과 철다리가 앙상블을 이루는 길을 내려서니 두 줄기 폭포가 세차게 떨어진다. 어둑어둑해 가는 숲 뒤편으로 쌍폭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거대한 물줄기를 내리꽂고 있다. 장엄 그 자체다.
< 쌍폭의 전경 / 무릉반석 전경 >
용추폭포가 가는 길은 포기하고 넓어진 길을 따라 내려온다. 6시가 넘어가고 있다. 늦어지면 2호 차를 먼저 출발시킨다 했는데 두고 온 짐이 걱정된다. 산에서나 내려와서나 이래저래 걱정이 많아진다. 학소대를 지나고 삼화사를 지나도 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산행 전 대장은 6시까지 내려오라 했지만 식사 말고는 거의 쉼 없이 걷기만 했는데 무릉반석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니 6시 40분이다. 먼 여로(旅路)가 끝났다는 안도감보다는 허무(虛無)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왜? 산에 오르는가?
< 에필로그 >
오늘 산행은 크게 네 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비 온 뒤 계곡의 습도에 땀 범벅이 된 쉰움산 길, 짧은 평지에 긴 오르막이 대세인 두타산 길, 박달재 대간 길, 박달계곡과 두타동천 길. 비 온 뒷날의 계곡 산행이 얼마나 힘겨운 길인지를 다시 확인한 산행이었다. 산행지 선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청옥산을 다녀 오지 못한 것이 마음의 짐으로 남았지만, 그곳까지 다녀 왔으면 아마도 8시가 넘어 컴컴한 밤에 하산을 완료했을 것 같다. 애당초 산악회에서 제시한 쉰움-두타-청옥 종주산행 6시간 30분은 초고수나 가능한 시간이었나 보다.
지나고 보니 쉰움산은 그 높이에 비해 볼 것이 참 많은 산이었고, 다시 찾은 두타산은 역시 늠름했다. 박달재까지 대간 길을 걸었고, 박달계곡에서 경험한 수많은 폭포와 적벽으로 대변되는 암릉의 기세는 장관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길 막힘으로 인해 삼척 도착이 너무 늦어 산행 내내 시간 압박에 시달린 것이다. 늘 애면글면 하고 사는데 두타행을 나서서도 그 버릇 고치지 못하고 다시 세상에 내려와 버렸다. 노곤한 피로에 젖어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산 벗과 함께 하루를 또 이렇게 마무리 한다. 늘 벗과 산이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