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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공부 73회
23.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자 그리스도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Who then can condemn us? Will Christ? No! For he is the one who died for us and came back to life again for us and is sitting at the place of highest honor next to God, pleading for us there in heaven.
(누가 우리를 벌하겠는가? 그리스도일까? 아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사셨고, 하나님의 곁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분이다.)
이 34절은 31절부터 시작된 반어적인 물음 네 가지 중 세 번째에 해당된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고발하리요? 그리고 오늘 누가 정죄하리요? 하고 묻는다.
특히 이 ‘정죄하리요?’ 하는 물음은 8장 1절에서 이미 그 대답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어 더 이상 무슨 말을 더할 필요가 없다. 33절 ‘누가 고발하리요?’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법정을 상상하자고 했었다. 고발하는 이는 사탄이며 우리는 고소당하는 피고인 신분이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여 그 고소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을 말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재판장이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다시 한 번 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안전한 구원의 상태에 있는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4절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그리고 지금 하시는 일로 나누어 생각하기로 한다.
1)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므로 자기 아들을 내주셨고 택하신 자들을 의롭다 하셨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묻는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으니 그럼 그리스도가 정죄할까?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흠도 없고, 죄도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깨끗하지 않다고 죄인으로 벌하지 않을까 가정해보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가? 왜 부활하셨는가? 그리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우리들을 위해 간구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벌한다는 것은 얼토당토하지 않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읽은 영어성경에서는 ‘for us’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 돌아가신 것과 부활하신 것은 과거형(died, came back)이다. 그러나 간구하는 것은 ‘he is pleading’이라고 하여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계속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놓은 일, 죽음과 부활을 생각해 보자.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대담하게 나아갔다. 죽기 위해서 가셨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반복해서 미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 라는 말씀대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이 구절은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많이 보았던 내용이다.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이 언제쯤 출현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바울 사도가 이것을 쓰던 무렵에 일부분이 이미 나오지 않았는가 보기도 한다(쓰카모토).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후속 문장과 이구절의 ‘심판의 장면’은 쉽게 연결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인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듣고 배운 사실이나 그의 부활이 우리를 위해서라는 것에 관해서는 좀더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관련된 성경구절을 보며 풀이해 보고자 한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던 말씀대로 우리를 의로 칭하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심으로 언뜻보면 아무런 대책없이 그냥 돌아가시고 로마군과 유대인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죽음을 뛰어넘어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무덤과 지옥에 대해 장엄한 승리의 선언을 하였다. 원수의 승리는 잠깐이었고, 영원히 패배하였다.
사망은 ‘죄의 삯’이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사망은 우리들의 죄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 그리고 우리를 흔들어 구원을 반신반의하게 하고 심판 아래로 끌고 가려 한다. 사망(사탄)은 우리를 끊임없이 고소한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지만 이런 이런 죄를 지었다.”라고 우리들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고자 총력을 기울인다. 우리가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헛되이 하는 것이 된다.
베드로 사도도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긍휼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신다.”(벧전1:3)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 우리도 함께 살리셨다는 말이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뿐 아니라 다시 사신 것도 우리를 위해 하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은 모두 우리를 위해서 계획되고 실현된 의미깊은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맏형으로서 이 일들을 이루었고, 우리들은 그에게 붙어 동참하게 되는 영광을 받은 사람들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하늘로 올라가신 일은 많은 증인들이 목격했던 역사적 사실이었다(행 1:9-10).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은 그의 구속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증거이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히 10:11-12)”
우편에 계신다는 표현은 오른쪽에 있다는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엡 1:21-22). 또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빌2:9-11).
그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그가 어떠한 분이었던가를 가르쳐주며,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표요, 중보자로서, 지체인 우리들의 머리로써 거기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그리고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신다.(Since that time he waits for his enemies to be made his footstool.) 발등상은 footstool, 발을 올려놓는 발판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원수들이 완전히 힘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말이다.
2)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시는 일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그리스도, 지금 그분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절대로 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우리 주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을 들어 증거하고 있다. “여러분이 보고 들었다시피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리워 하나님곁에 계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기까지 하지 않는가.” 하고 또 다시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가 지상의 몸(受肉)에서 일단 애초의 하늘의 영적 존재로 부활했을 때, 저는 비로소 자유로운 우리의 內住 영으로서 지상 우리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보혜사(保惠師), 즉 조력자가 되고, 한편 또 하늘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지상의 부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변호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요한14:26, 히브리7:25). 구속자가 변호와 조정자의 역할까지 행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지상 천상을 통한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노평구)
왜 이렇게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남을 입은 성도가 되었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신자들이 부닥치는 죄의 문제를 확실히 정리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딤전 1:15)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은 조금의 불안도 갖지않고 있다. 그처럼 죄에 대해 민감한 사람이 최후의 심판에 대해 전혀 불안을 갖지 않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쓰카모토 선생은 말하였다.
왜 그럴까. 첫째는 회심의 경험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경험에 의해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모습때문일 것이다. 그는 죄로 허덕이던 어제의 자신에 비해 어린 아이처럼 생기발랄한 오늘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생생한 현실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하였던 시편(118:6)의 말씀 그대로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자’라고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 “예수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4-25) 하나님 우편에 우리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얼마나 확실한 보증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께 긍휼을 얻을 수 있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때를 따라 도와주시는 은혜’를 얻고 있다.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거저 받는 은총을 누리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이다. 주님은 이렇게 매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바로 이렇게 간구해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온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은 모든 지혜와 은혜를 우리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거쳐서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흔히 하나님을 모습을 이야기할 때 공의를 실현하는 엄정한 모습과 한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으로 구분한다. 특히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구약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진노의 하나님을 상상하여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공의가 오히려 그리스도인을 보호하는 장치가 되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다.
요한 일서 1장 8-9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는 것이며,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다”(8-9) 미쁘다는 말은 ‘미덥다, 믿음성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의 신실성과 공의로 용서하실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죄를 이미 벌하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 의, 거룩’은 두려움의 원천이었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안전장치가 되며, 우리가 정죄받지 않음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말이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지금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공포의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믿음직한 방패막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구분할 수 없다. 공의 속에 사랑이 들어있고, 사랑 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빛난다. 칼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라고 바울이 이 말씀을 덧붙인 것은, 그리스도의 신적 위엄으로 인하여 우리가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에서라고 풀이했다.
우리는 가끔씩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가족이나 신앙의 친구들에게 기도해주기를 부탁하고, 또 기도해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위로를 얻곤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있다고 바울 사도는 가르치고 있다.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3) 하나님과 예수님의 편애
지금까지 공부한 31절부터 34절까지의 내용은 전혀 공정하지 않은 법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만 죄인임에 틀림없는 피고인이 있다. 공의의 위엄으로 재판장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죄인을 향하여 “저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다.”라고 선언하신다. 그곁에 계시는 예수님은 피고를 위해 계속 간절히 변호한다. 벌을 선고하기는 커녕 재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광경이다.
우리에게 왜 이렇게 과분한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사랑받을만한 구석이라도 있다면 말이 되지만 하나님 마음에 들만한 행동이라고는 도무지 하지않는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한까지 주셨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까지 예약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진정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공의라는 존엄자의 모습 뒤에 한없는 사랑을 숨기고 계시며, 그리스도는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을 퍼부어 주신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혜택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편애를 받고 있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뿐 할 말이 없다.
땅에서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주며, 하늘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가 간구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온 인류를 향한 것이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문이 열려있다.(關根正雄) 그중 어찌하여 나같은 자도 그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의롭게 여기신다. 어떤 일, 즉 신자로서의 높은 신앙적 행동같은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말씀에 내세울 것이 아무도 없는 나는 감사하며 위로를 받는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편애를 받고 있는 우리들, 몸둘 바를 모르겠다.
첫댓글 하나님과 예수님의 편애. 인류를 향한 무한 짝사랑.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편애를 받고 있다?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하 그러게요 나같은 아무쓸모 없는 자를 사랑의 대상자로 선정해 주시고 또 죄악으로 가득한 자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심에 그저 감사 황공무지할 뿐입니다
하나님의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있다는 바울의 가르침! 에 우리는 위로를 받고 평안속에 주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한 그 진리를 믿고 깨닫는 자의 행복은 신앙하는 자들의 특권일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신앙이라는 그릇을 가지고 빈손 ,빈마음으로 나갈뿐, 그뿐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좋은말씀 감사히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