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에서 아브람과 그의 믿음은 저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에 회자되는 믿음으로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극찬을 받는다(15,6) 그리고 하느님과 사뭇 ‘비장한 계약’을 체결했다(15.10)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적장자 이사악의 잉태 소식(15,4), 수많은 자손(15,5), 그리고 땅의 가나안 땅을 축복하고 약속하셨다(15,18) 그러나 짧은 15장이 끝나고 막바로 이어지는 16장 본문에서 사라이는 아들을 낳아 주지 못하고 있다. 미안하고 조급해진 사라이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무시하고 인간적 방편을 취하며 남편과 하가르를 그 도구로 취한다.
믿음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하며 살 수 있는가? 우리의 과제이다. 믿어야 하겠는데 현실이 아니다. 인간의 판단은 현실을 토대로 하는 이성과 감정을 근거로 해서 꽤 설득력이 있다. 사라이는 하느님의 생각과 뜻을 앞지르고 남편을 회유한다, 마치 하와처럼, 인간의 조급함도 무지와 탐욕의 얼굴을 가진 불신앙이다. 조급하면 원칙을 무시하고 편법을 쓰게 된다. 그리고 편법은 당시에는 그럴싸하지만 결국 자기 꾀로 자기를 묶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15장에서 명백하게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지만, 사라이는 자신의 계획을 앞세우고 만다. 명백한 야훼 하느님 신앙 기망이다.
아브라함은 또 어떠한가?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손에 달린 종이니 당신 좋을대로 하구려” 아브라함의 계속되는 무책임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제는 하갈이 비참한 운명에 처해진다. 하가르가 아직 아들을 낳기도 전 그저 임신하기만 했을 뿐인데 교만이 태산처럼 높아져 벌써 그 위세로 여주인을 업신여겼다 가소롭게. 고대 사회에서 자손이 없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것은 세력이다. 따라서 무자녀는 배우자와 가족으로부터 외면과 버림을 의미한다. 야곱의 두 부인 레아와 라헬은 각자도생의 세력을 위해 여종까지 앞세워 아들들을 생산한다.(창 29,15-30,24) 아브라함 사라이 하가르는 갈등 관계에 직면하게 되고 이것은 상당 기간 세 사람을 힘들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사라이는 본인이 계획하고 추진한 것을 받아들인 아브라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킨다(16,5) 견디다 못한 아브라함은 사라이의 손을 들어주어 하가르는 이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아브람과 사라이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죄보다 더 큰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요, 실수보다 더 큰 것은 하느님의 구세사이기 때문이다.
주인에게 쫓겨나 어렵고 힘든 광야에 놓여진 하가를 하느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구원해 주신다. 이렇게 여기서도 하느님은 물릴 수도 없도 되돌릴 수도 없는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파란만장하게 이어가신다.
덧붙임
이글은 인터넷에서 복사했는데, 죄송하게도 출처를 놓쳤어요.
좋은 글 올려주신 분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