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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고통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것이고 아픔이 없다면 소망도 없을 것이다. 남의 아픔을 내가 겪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진정한 위로도 줄 수 없음을 안다.
이제 우리 가정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우리처럼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쓴다.
1986년 9월 26일
이제 막 첫돌이 지난 딸아이의 재롱을 보며 나날이 즐거움이 더해 가는 날들이었다. 남편은 부모님을 일찍 여읜지라 새로 꾸민 가정에 대한 애착과 가족들에게 쏟는 정성과 사랑이 지극했다.
그 날도 아직 말은 못하지만 손짓으로 빠이빠이 하는 딸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뽀뽀를 받으며 남편은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했다.
그 며칠 전부터 뒷머리가 당기면서 아프다는 말을 자주해서 병원에 들러 진찰을 받았으나 피곤해서 오는 두통이라며 잠시 쉬라는 정도로 가볍게 얘기했다. 하긴 그 많은 짐을 싣고 내리고, 시내로 시외로, 식사시간도 제대로 챙길 수 없는 과중한 노동을 혼자서 다 해냈으니...... 그러나 나의 무디고 둔한 마음은 이 위기의 순간을 모르고 있었다.
좀더 일찍이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할 것을 권유했어야 했건만 나는 남편의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체구를 너무 믿고 있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저미는 후회가 밀려온다.
저녁밥을 지을 무렵에 회사로부터 남편이 입원했다는 연락이 왔다. '입원'이라는 그 한마디에 온갖 불길한 상상이 다 떠올랐다. 평소에 건강하던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교통사고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온 몸에 공포가 엄습하여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주머니 속에 든 아파트 열쇠를 찾지 못하여 온 방을 몇 번이나 뒤질 정도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병원에 가는 동안도 침착성을 잃어버리고 내 발자국은 허공을 밟는 듯 높낮이를 구분하지 못해 땅을 헛딛고 있었다.
목숨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간절히 염원하면서 병원에 도착해보니 상처는 하나도 없고 약물로 인해 잠을 자고 있었으므로 순간적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잠시 후 깨어난 남편의 고통은 혈압 강하제, 진통제 그 무슨 약물로도 덜어주지 못했다.
과로로 인한 뇌졸중이 남편의 병명이었다. 과로로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나는 행복에만 취해 있었던가?
남편이 과묵하기도 했지만 나의 우매함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의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날로 심해져서 이제 자제할 힘마저 잃어버려 고통을 참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울부짖었다.
닥치는 대로 던지고 욕하며, 링겔줄을 이빨로 끊어 버리고, 뛰어내리려고 창문으로 달려가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하고 있었다.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남편을 장정 서너 명이 팔다리를 침대 모서리에 묶을 수밖에 없었던 그 때의 비정한 광경을 나는 가슴을 저며내는 아픔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행복은 같이 누렸건만 이 극심한 고통의 만 분의 일도 나누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력함과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내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눈물만이 나의 유일한 의식인 듯 했다.
갈수록 고통은 심해져서 일 주일 만에 백병원으로 옮겼다. 피를 말리는 고통 속에서 모든 검사를 마치는 것은 마치 긴 터널에 갇힌 듯한 괴롭고도 힘든 시간이었다. 몇 시간의 타는 듯한 고통이 나의 입술을 온통 부르트게 했고 입안은 온통 헐어 버렸다.
밤늦게서야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다. 그 곳에서는 하룻밤에도 몇 차례씩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인간의 보잘것없는 생과 허망한 죽음을 보며 처음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가슴으로 느껴야 했다.
검사한 결과, 뇌의 혈관수축이 심하여 도저히 수술을 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선언 속에 약물로 혈관수축이 완화되기만을 기다리며 치료했지만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상태는 더욱 악화되고 이틀 후에는 온 몸이 마비되고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동공은 확장되어 불빛에 대한 반응이 없고 가슴은 꼬집고 비틀어서 시커멓게 멍이 들어도 감각할 수 없는 말로만 듣던 식물인간 상태로 되어 버린 것이었다.
입과 코는 아무 기능을 할 수 없어 수많은 호스로 연결되고 수시로 가래를 진공흡입기로 빼 주어야 했다. 게다가 장출혈이 겹쳐 수혈과 링겔액을 계속 투입하였지만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일 주일 후, 도저히 가망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퇴원권고를 받았을 때 나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라도 조금이나마 생명을 연장시켜 보겠다고 울부짖었다. 이 상태의 퇴원은 우리들을 영원히 갈라놓는 최후의 시간을 앞당길 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객사를 면하자는 가족들의 이기심이 울부짖는 나를 뿌리치고 남편을 앰블런스에 옮겨 실었고 절망으로 되돌아 온 집에서 의사와 간호사는 비정하게 산소호흡기를 제거했다.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음이 가득한 건강한 모습으로 배웅을 받고 나간 몸이 보름만에 가족들의 울부짖음 속에 아랫목에 뉘어졌다.
친지들이 모두 모여 침통한 표정으로 장지를 의논할 때 아무 것도 모르는 딸아이는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이 예전과 달라서 그러는지 얼굴로 다가가서 뽀뽀를 하며 뭐라고 옹알거려 방안에 모인 모든 친지들은 통곡을 터뜨렸다.
정말로 남편은 어린 딸과 나를 남겨 두고 이 삶의 터전 행복을 가꾸던 이 화원을 떠날 것인가?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시시각각 죽어 가는 남편 옆에서 "남편이 내게 베풀었던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비록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던 나였지만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물위에 떠 있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그 때 '기사회생'이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우황청심환'이 생각났다. 병원에서는 금했지만 기왕 죽는 몸이니 한 번 써보자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한 방울씩 흘려 넣은 청심환이 기적이라는 빛으로 내게 다가왔다. 밤새 호흡이 좋아져 가고 있는 것을 느끼며 남편의 숨소리조차 아끼며 들었다. 의사의 절망적인 선고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계속하여 청심환을 쓰면서 겸하여 침을 맞게 되었다. 보름을 계속한 결과, 확장된 동공이 수축되고 눈이 맑아지면서 손의 움직임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 속에 남편의 병세는 점점 호전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좋아지고 있는 동안에 남편의 또 다른 곳은 죽어가고 있었다. 경험없는 우리들에게 욕창이라는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워낙 거구인지라(178cm, 당시 90kg)급격히 썩어 들어가는 엉덩이와 등 발뒤꿈치 뒷머리 등의 상처를 감당할 수 없어 한의원에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으나 욕창이 너무 커서 욕창 때문에 죽을 수 있으므로 받지 않겠다고 했을 때의 절망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병원에서 보낸 하룻밤은 또 다시 경험하는 죽음의 나락이었다.
이튿날, 부산대학병원으로 갔다. 이제 침을 맞지 못하게 되자 상태는 다시 예전의 식물인간 상태로 돌아갔고 혈압강하와 욕창치료에만 주력하는 힘든 생활이 시작됐다.
의사 선생님들이 욕창부위를 메스로 도려낼 때에는 내 가슴도 칼로 도려내는 듯 고통으로 미어졌다. 그러나 자신의 뼈가 드러나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세상모르고 잠자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울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쌀 한 가마니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웬만한 것은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올리던 모습, 딸아이를 번쩍 안고 얼굴에 입맞추며 기뻐하던 남편의 모습이 병상 위에 누워 있는 모습과 교차되어 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결혼생활 2년 9개월 18일
이제는 영원히 간직해야 할 꿈결같은 시간들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짧았지만 행복했던 그 기억들을 되새기며 영원한 행복을 가꾸기 위해 침대에 나무 인형처럼 누운 남편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나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하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시시때때로 몰려와 두려움으로 절망하고 있었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얼마 전까지의 단란했던 결혼생활의 아름다웠던 추억만을 생각게 하시고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감당케 하심으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었다.
종합병원인지라 감염문제로 어린이의 입실이 허용되지 않음으로 불가피하게 딸아이는 멀리 고모 댁으로 보내야만 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낯을 가리는 편인 딸아이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꼈겠지만 엄마 아빠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목이 쉬도록 울어댔다. 애끓는 정을 끊고 돌아서는 내 가슴도 아픔과 눈물로 미어지는 듯 했다.
이제 둘이서 만의 외롭고 힘든 투쟁이 시작됐다. 말도 못하고 의사표시도 전혀 못하는 사람을 두고 길고 외롭고 괴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계속 혼수상태에 있는 남편을 지켜보면서 고통 없는 상태보다는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어 보라고 말했던 그 간절했던 바램은 고통이야말로 생명이 되살아날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1개월쯤 지나자, 말은 못하지만 정신은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고통도 되살아나 많이 고달팠지만 울고 웃는 것으로 감정표시를 하고 고갯짓으로 가부를 말하기도 하였다. 힘은 없었지만 어렵게 내 손을 잡아주기도 하여 괴로움 속에서도 사랑을 느끼며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뇌출혈로 인한 합병증인지 며칠씩 계속 딸꾹질을 하기도 하고 기침이 너무 심해 내과 이비인후과 선생님들이 다녀가시고 검사를 했으나 원인조차 규명치 못한 일도 있었고 밤낮으로 며칠씩 땀을 뻘뻘 흘리면서 휘파람을 불어 온 병동을 무서움에 떨게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신이 내린 것 같으니 굿을 하라 하기도 하고 절이나 교회로 나가라는 권고를 받기도 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 버린 나에게 더욱 괴로웠던 것은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이 휘파람소리를 견딜 수 없어 병실을 떠나갔을 때의 소외감이었다.
또한 며칠씩 잠을 자지 않고 울어서 온 병동의 명물(?)이 되어버렸고 나 또한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어떻게 좀 고쳐달라고 약과 주사를 애걸하며 쫓아 다녀 의사와 간호사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무수한 기현상의 과정들이 성대를 튀우기 위해서였는지 드디어 발병 후 2개월 하루만인 11월 27일 자정 무렵, 서로간의 대화는 할 수 없었지만 남편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에 반짝이는 그의 큰 눈을 보며 나 혼자만의 응답 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애끓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고 내 자신을 추스리기 위해서 "나는 자기를 무척 사랑한다"고 했더니 "나도"라고 했다. 나는 귀를 의심하고 다시 물었다. "나도 사랑한다"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분명한 남편의 말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와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되어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깨워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때만은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있는 것 같았고 정말이지 감사한 날이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나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더 이상의 차도가 없을 거라면서 수술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미루던 의사선생님들이 드디어 수술을 권하기에 이르고 12월 5일로 수술날짜가 정해졌다.
8시간의 수술을 받는 동안에는 온 몸의 피를 말리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수술이 잘 되었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남편의 의식이 회복되는 과정을 지켜 본 나는 일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떨어질 줄 모르는 혈압과 고열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한 계속 구토와 헛소리를 자꾸 해서 다시 예전처럼 혼수상태가 오지 않을까 두려움으로 가슴을 졸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뇌출혈 당시 뇌세포가 많이 상해 의식장애와 다리의 장애는 불가피하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절망했지만 최소한 생명은 건졌고 또한 팔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날마다 좋아져 가는 팔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걸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욕창치료였다. 욕창이 완치되어야 휠체어라도 탈 수 있을 터였다.
12월 23일 성형외과로 옮겨 본격적인 욕창치료에 매달렸다. 워낙 욕창부위가 크고 깊어(23cm*13*뼈가 보임) 열심히 셀라인 용액으로 씻을 수밖에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권고로 하루5-6회씩 베타딘을 탄 셀라인 용액으로 씻어 내었다. 남편의 거구에 비해 대조적으로 내 몸은 아주 작은 편인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이 나 혼자 하루종일 옆으로 뉘여 치료하고 침대시트를 교환하는 반복적인 생활 속에서 나의 허리에도 차츰 무리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다급함과 긴장 때문에 나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느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병원에서의 첫 X-mas이브를 맞게 되었다. 3인용 병실에 우리 두 사람뿐인지라 썰렁한 병실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서글프게 했다. 창 너머 보이는 불빛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내 마음은 슬픔으로 넘쳐흘렀다. 크게 소리내어 울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에 창 밖을 내다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으려니 딸아이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려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잠든 남편의 손을 잡고 우리 이다음에 몇 배나 행복한 시간을 가지고 여태껏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받으며 살아가자고 다짐하며 모처럼 실컷 울었다.
이제 남편이 말을 하게 되어서 조금은 덜 답답하지만 조금만 불쾌해도 무섭게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고 마음에도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자꾸만 식탐을 하는 것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무척 슬픈 생각이 들었다. '불쌍히 여기고 참아야지 '예전의 남편을 생각하며 자신을 타이르다가도 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황을 비관하며 오열을 터뜨리기도 수없이 했다.
더군다나 남편은 팔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소변을 위한 비닐호스를 계속 뽑아버려 나의 일과는 하루종일 시트 갈고 상처 소독하는 일로 채워지고 있었다. 소변 줄을 뽑아 쥐고 오줌으로 시트와 이불을 흥건하게 적셔 놓고 커다란 눈을 굴리면서 멀뚱하게 보고 있을 때 원망보다는 눈물이 먼저 나왔다. 시트를 교환하려고 몸을 돌려 눕히다보니 가슴과 허벅지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반짝이는 눈망울 외에는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었다. 완전치 못한 몸과 맑지 않은 정신상태가 한없이 우울함에 빠지게 했다.
고통은 나날이 나를 무섭게 짓누르고 있었다. 내 몸도 정신도 이제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해 혈압이 떨어지고 빈혈이 극심해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뇌수술 후 처음으로 간질 발작을 하던 날에는 얼마나 놀랐는지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시동생이 갑자기 혈압이 높아져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아 왔으니 그 때의 놀라움이란 참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시동생은 긴장성 두통과 일시적 혈압상승이라고 해서 안심을 할 수 있었다.
1월 23일 드디어 욕창 수술을 성공리에 마쳤다. 한 달 동안의 밤낮없는 환부세척이 수술을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거의 한 달 동안을 엎드려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도 욕창만 완치되면 휠체어를 타고 바깥구경을 할 수 있다는 작은 소망으로 견디어냈다.
2월 23일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전원했다. 이제 병세도 많이 좋아졌고 조금은 여유가 생겨 집에 잠깐 다니러 갔다. 오랜만에 우리들의 보금자리로 돌아 왔지만 깜깜한 우리 집을 보는 순간 절망감이 엄습했다. 현관에 들어서서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남편의 신발을 보는 순간에 어찌 그리 비감한 생각이 들었는지...... 방에 걸려 있는 옷가지와 물건들을 보니 지난날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서 한없이 울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가까운 병원으로 온 후, 고모댁에 맡겨 두었던 딸아이를 데려왔다. 몇 달만의 상봉으로 엄마, 아빠의 얼굴을 다 잊어버려 고모 품으로 파고드는 딸아이를 남편과 나는 울면서 품에 안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던가! 정으로 느끼는 부모의 사랑이 전해지는지 딸아이는 우리와 금방 친해져서 이제는 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그러한 딸아이의 모습은 우리에게 강한 혈육의 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봄이면 개나리꽃이 아름다운 구포 강둑엔 하루종일 상춘객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 아기도 이제 막 아장아장 걸으며 늦은 말을 배우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하루 종일 탁한 병원에 있는 것이 안쓰러워서 하루는 강둑에 나갔다. 그러나 강둑에 산책 나온 한 가정의 따뜻하고 화목한 모습을 본 후 왠지 세상이 두려워지고 자신이 없어져 내 자신을 자꾸만 안으로 걸어 잠그게 되었고 우울함은 나날이 더해 갔다.
그 병원에는 마비환자가 우리 외에는 없었으므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려 모두들 혀를 차며 안쓰러운 듯 바라보곤 했었다. 그러던 중 창원병원에는 마비환자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전원을 신청했다.
창원병원은 공기가 맑을 뿐만 아니라 병원도 넓고 커서 우선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스러움과 자유로움이 있었다. 또한 병원 옆의 넓은 공원은 산책코스로 이용되어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적셔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비슷한 형편에 있는 환자가 많아 서로를 보면서 많은 위로를 얻을 수 있어서 오히려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과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세월은 많이 흘러갔고 팔의 신경은 거의 다 회복되어 남편은 마음대로 휠체어를 타며 혼자 수저를 들고 식사도 하고 손이 떨려서 하지 못하던 글씨연습도 하며 나날이 더 좋아지는 것을 보며 무척 기뻤다.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이제 많이 좋아진 남편의 모습을 보며 비록 다리의 장애는 있을지라도 정신이 많이 맑아져서 대화에 불편함은 없으나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때 밀려오는 서글픔을 억제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여기면서 이제 지난 일들을 얘기하며 서로 위로하고 기도하며 아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랑으로 채워가고 있다.
몇 년 전, 남편의 간호로 말미암아 내 허리에 무리가 가서 디스크와 척추분리증이라는 병명으로 골융합수술(척추에 뼈를 이식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일 년 동안 꼼짝 못하고 누운 나를 위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거의 기는 상태로 청소까지...
남편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으로 건강을 회복해 우리는 다시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전의 삶에 대한 아쉬움과 현재의 삶에 대해 웬만한 불평은 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나 온 그 세월보다 어려운 일은 아직 만나지 못했으므로.
***** 이 글은 전국 산재환자 수기 공모에서 1990년에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당시의 100만원이라는 상금도 퇴원 후 이사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지만요. 그것보다는 이 수기가 다음에 어떤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를 하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전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
첫댓글 아~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알 수 도없는그 외로움과 아픔의 시간 너무나 잘 견뎌내줘서 감사해요""
집사님을 처음 뵈었을때 그 미소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났어요...말할 수없는 고통을 통과한 사람이란 것이 믿기지않을만큼.. 아름다웠어요
이제 주 안에서 성숙해진 그 귀한 모습으로
지금 아픔 가운데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 주님! 기쁨으로 이 가정을 받아주소서
천국의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하소서!~~♥♥♥
저희들의 고백이 작은 간증이 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남편을 통해 구원을 허락하신 주님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정말 연약한가 봅니다.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의지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집사님의 위로 정말 큰 힘이 됩니다.
오늘도 승리하세요.
정말,,,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시면 인간의 힘으론 생각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눈을 감고,
집사님의 등뒤에서 그 놀라우신 사랑으로
집사님을 안고 계신 예수님을 봅니다.
주님!! 세상 끝날끼지 귀하신 두 분 집사님을 지키시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으로 꼭 채워주세요 아멘~~
어제는 비가 무척이나 내렸었는데
오늘은 햇살이 너무 좋습니다.
지난 날의 어두움이 다 물러가고
새로운 날을 맞이한 저희들의 삶처럼...
롱핀담당님,
감사합니다.
내가 힘들 때 나를 안고 가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요.
늘 그런 맘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실 롱핀담당님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