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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내러티브
-입다서약(11:29-40)의 정당성의 문제[1]-
성기문
입다의 딸에 대한 제의적/비제의적 해석에 대한 비교표[2]
해석학의
방법론 |
제의적
해석(cultic interpretation) |
비제의적
해석(non-cultic interpretation) |
해석학의
근거 |
입다의
서원과 입다내러티브 |
신약
히브리서11:32-34과 전통적인 성경해석방법론과 성경인물에 대한 이해 |
해석학의
전개 |
성령받은
자라고 잘못과 죄악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가 매순간 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았다고 볼 수 없다. 성령을
받아 직분을 받은 자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일평생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입다는
정상적인 출신의 사람도 아니었고 그의 행동이 항상 바른 것이 아니었다. 입다의
경우에도 그의 전인생이 혹은 각각의 삶의 한국면들이 믿음의 행위요 하나님보시기에 선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입다가
하나님께 승리를 구한데는 문제가 없다하더라도 자기 자식이라도 번제물로 바치겠다는 서원은 정당하다고 볼 수 없으며, 그러한 서원이 정당한 것이었고 하나님이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이 성별, 분리, 헌신,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성전에서의 사역자가 되었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으나, 그가
사용한 용어나 문맥은 그러한 가능성을 제거해준다. 마찬가지로 한 여성이 그러한 의미(처녀)로 헌신했던 적은 없다. 율법에
따르면, 적법한 서원이라도 취소할 수 있는데, 자신의
딸이 집에서 나왔을 때나 입다의 딸이 그 맹세가 파기될 수 없는 것을 여기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율법에 무지하였거나 가나안의 신관에 오염되어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딸이
슬퍼한 이유는 지금까지 처녀로 살다가 죽게됨에 기인한 것이며, 성소에서 헌신하게되었다는 것이 슬퍼할
일이었을까가 의심스럽다 번제로
드려져서 죽었다는 말은 없지만, 결국 서원이 실행되었다는 말은 암시적으로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념과 절기가 반드시 하나님보시기에 선한 것일 수 없으며, 처녀로 헌신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경고나 슬픔의 표시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
입다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었다 입다는
사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평범한 인물 이상이었다 성경은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은
전쟁전에 승리로 이끌어주시길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제사라는
말이 항상 실제적/문자적 제사(번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성소에서 처녀로 평생동안 전적인 헌신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입다가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하자 순수히 받아들인 딸의 고백은 신앙적이다. 딸이
친구들과 슬퍼했던 것은 그녀가 평생 자식없이 처녀로 살 것에 관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번제로 드렸다는 명시적인 말이 없다. 여자들이
그녀를 기린 것은 그녀의 행동이 긍정적인 것이고 모범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해석학의
결론 |
입다의
어리석은 서원의 참혹한 결과를 통하여 입다의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입다의 전생애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
입다의
서원과 딸의 행동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거룩한 영적 제사와 헌신의 예로서 삼을만하다. |
입다는 사사기에서 여덟 번째 사사이다(10:6-12:7).
야웨의 영이 임하여 그는 암몬족의 위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11:29).
전쟁에 임하기에 앞서서 입다는 땅을 차지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야웨이며 야웨 자신이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판단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암몬 족속과의 전쟁이 입다 이야기의 절정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서언과 서언의 성취가 이 이야기의 절정을 이룬다.
우리는 여기서 입다의 원래의도가 무엇이었는가와 입다의 딸이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다른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만,
입다의 서원문제도 당연히 입다 내러티브와 사사기전체의 문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우선 입다 내러티브의 특징적 구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입다 이야기는
5개의 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김의원
1997:50):
에피소드 |
대화구절 |
대화의 주체들 |
(1)
10:6-16 |
10-16절 |
이스라엘과 야웨 |
(2)
10:17-11:11 |
11:5-11절 |
장로들과 야웨 |
(3)
11:12-28 |
12-28절 |
입다와 암몬왕 |
(4)
11:29-38 |
34-38절 |
입다와 그의 딸 |
(5)
12:1-7 |
1-4a절 |
입다와 이스라엘 지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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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입다 에피소드는
‘협상전문가’인 입다는 이스라엘의 머리(
)가 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그가
(암몬족과 야웨와 에브라임지파와)
행한 모든 협상에서 실패하여 그가 얻고자 했던 모든 것들을 결국 얻지 못하게된다는 점을 아이러니하게 보여준다(김의원
1997:51). 즉 전체적으로 볼 때,
(다른 대부분의 사사들의 경우나 백성들의 불순종에서 볼 때)
입다 이야기는 그에 의해서 파생되는 문제들이 어처구니없고 불합리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원의 실행에 관련된 본문 자체가 완벽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지 못함은 본문 자체가 지니는 결함이나 쉽게 단정내리지 못함에 따르는 말꼬리흐림이라거나 다른 영적인 해석을 지향한다기보다는,
고의적인 애매성[3]을 통해서 보여주는 아이러니인 것이기 때문이다(김의원
1997:64).
(1) 어떻게 입다의 딸이 되었는가의 문제이전에,
입다의 성급한 서원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적으로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은,
사사라는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입다가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완벽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길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 경우는 사울이나 다빗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삶의 일부,
혹은 많은 부분들은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위 성령을 받은 자라도 불완전하며 비윤리적,
비신앙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보겠다.[4]
이러한 구약인물들의 문제점들은 신약에서의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으로 이해하는 관점과 충돌된다고 볼 수는 없다.
신약성경은 그들의 완벽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입다의 경우는 이방사람들처럼 자식을 바치는 끔찍한 서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럴 정도로 입다는 비신앙적인 요소에 몰입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이방종교적인 영향을 고려한다면,
그의 서약은 단순히 성급함과 비이성적인 성격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문제는 입다의 태도와 본심에 대한 문제와 아울러서 실제로 입다의 딸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볼 차례다.
다양한 견해들은 제의적 해석(예,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요세푸스,
미드라쉬,
탈굼,
오리겐,
크리소스톰,
히에로니무스[Jerome],
J. 벨하우젠,
K. 부데,
H. 에발트,
C. F. 버니,
G. A. 쿡,
Y. 카우프만,
G. F. 무어,
F. 뇌처[Noetscher],
J. D. 마틴[1975],
R. G. 볼링[1975],
J. A. 소긴[1981]
등)과 비제의적 해석(12세기이후부터,
D. 킴히,
카일과 델리취,
E. 쾨니히,
A. 쾰러 등)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a) 비제의적 해석: 이 해석은 입다의 딸이 문자적으로 번제된 것이 아니고 평생 성소(전)에 봉사하는 비문자적 헌신으로서의 번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글리슨 아처[5]는 입다의 희생제사의 서원은 문자적으로 여기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입다 자신이 아무리 성급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족(혹은 종이더라도)의 일원을 문자 그대로 제사드리겠다고 서원할 수 있었겠는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리한, 비윤리적인 서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게 했다는 것도 문자적인 해석을 할 수 없게 한다. 마찬가지로 아처는 입다의 딸이 죽게될 것을 서러워해서 슬퍼한 것이 아니라, 평생 처녀로 있다가 죽게될 것을 서러워해서 울었다는 점도 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들은 그녀가 성소에서 종신토록 헌신하게 하겠다는 서원으로 이해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처는 이러한 입다의 서원에서 기독교인들의 전적인 헌신의 교훈을 발견하는 듯하다.
(b) 혹자(카일& 델리취)는, W. C. 카이저(Kaiser) 2세[6]가 인용하듯이, 이접접속사(disjuctive)적 용법으로 해석하여 ‘야웨께로 돌리거나,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로 이해하기도 하나, 문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c) 제의적 해석[7]:
이 해석은 입다의 딸이 실제로 번제의
희생물로 죽었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W. C. 카이저(Kaiser)[8]는 실제로 입다가 자기 딸을 희생제사시켰다고 본다. 전쟁전날에 행한 입다의
서원은 문맥상(즉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라는 표현의 관용구[9])
동물에 대한 희생제사로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동물의 제사였다면,
당연히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해주심에 대한 제사를 드렸을 것임으로,
그의 서원은 무의미한 것이었을 뿐이다.
성전에서 평생토록 헌신하였다고 해석하는데 대한 반대로,
입다가 자기 딸을 서원에서 해소키 위해서는 금전적 대체(金錢的 代替)를 할 수 있다는 레 27:1-8과 대치된다고 본다. 물론 그가 (전쟁전에
인신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점 자체가 문제가 되겠지만)
서원자체의 모순성을 깨닫게 된 후에서도 입다는 서원 자체도 취소할 수 있다는 율법조항을 몰랐다거나 이방신들처럼
한번 행한 모든 서원은 무조건 행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점은 입다[10]나 입다 딸의 말[11]을 통해서 더 명확해진다.
혹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제임즈 조단(James
Jordan)은 일종의 자원적 서원(voluntary vow)이라기보다는 헤렘적
차원에서 이해하는데,
그러나 본문은 신적인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입다 자신의 자원적(自願的)인 측면이 강하다고 보겠다. 또한 헤렘의 경우라면, 단순히 희생물을 죽이는데 그치는 것이지만,
희생제사나 번제(燔祭)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39절에서 어째서 ‘그녀가 처녀였다’는 말이 언급되고 있는가?
히브리어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처녀로 살아야할 것을 말해준다기보다는,
대과거,
즉 그녀는 당시까지 결코 남자를 알지 못했다는 것(즉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 점은 사건의 비극적 요소와 탄식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12]
월터 카이저 2세의 주장처럼,
하워드(1993:117)도 이러한 잘못된 서원에 대한 이해로 말미암는 입다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죄를 강조하기 위한 것처럼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입다의 탄식과 후회는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인정(認定)과 변명의 말일 수 있다.
또한
11:40은 이 사건에 대한 성경적 보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기념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행해졌다는 것도 아니다.
설령 이것이 전국적인 기념행사였다고 할 지라도,
신적인 명령에 의한 행사라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사가 어떤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일(작태!)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게하려는 경고적인
의도에서의 행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11:40;
cf. 김지찬 1999:205).
©
1999-2000 by Keemun Sung. All rights reserved.
[1]) 비평적 입장에서의 입다 이야기의 이해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Herbert C. Brichto, Toward a Grammar of
Biblical Poetics: Tales of the Prophet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209-213; T. C. Römer (1998); W.
Richter, 'Die berlieferungen um
Jephtah. Ri 10,17-12,6', Bib 47 (1966), 485-556 (491).여성신학적 관점에서의 입다 이야기의 이해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P. Trible, 'The Daughter of Jephthah: An
Inhuman Sacrifice', Texts of Terror: Literary-Feminist Readings of
Biblical Narrative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pp.
93-115; M. Bal, Death and Dissymetry: The Politics of Coherence in the Book
of Judge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pp. 41-68; J.
Cheryl Exum, 'On Judges 11', A Feminist Companion to Judges (ed. A.
Brenner; The Feminist Companion to the Bible 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3), pp. 131-45; L. R. Klein, The Triumph of Irony in the Book of
Judges (JSOTSS 68; Bible and Literature Series 1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9), pp. 83-99; idem, 'A Spectrum of Female Characters', A
Feminist Companion to Judges, pp. 116-30; P. L. Day, 'From the Child is
Born the Woman: The Story of Jephthah's Daughter', Gender and Difference in
Ancient Israel (ed. P. L. Day; Minneapolis: Fortress, 1989), pp. 58-74; B.
Gerstein, 'A Ritual Processes: A Look at Judges 11.40', Anti-Covenant:
Counter Readings Women's Lives in the Hebrew Bible (Bible and Literature
Series 22; Sheffield: Almond, 1989), pp. 175-93.
[2] 본 비교표는 1999년
가을학기 성결대학교 대학원학생들이 낸 과제물들 중에서 제기된 문제점들과 필자의 연구결과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요약한 것이다.
[3]) '이같이 생략법을 통해 저자는 이 구절에 고의적인 애매함을 남겨놓음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입다가 딸을 번제로 드렸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을 애매하게 처리함으로써 독자들이 그녀의 운명이 아닌 다른 면, 곧 입다의 성급한 서원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이 기사의 초점은 입다의 딸이 아니고 입다의 성급한 서원이다'(김의원 1997:64).
[4]) 필자가 역사서의 해석방법론으로 사용하는 인간리더십의 한계점의 반복적인 부각(그에 따른 신적 리더십, 혹은 영적 리더십의 모델의 강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Gleason
Archer, Jr. 구약난제, 220ff.
[6]) Hard
Sayings, 103.
[7]) 비평주의적 입장에서, 입다의 무지에 따른 인간제사의 서원과 허용은 바로 율법기원의 후대성을 의미한다는 견해(예, Burney 320; cf. Soggin 19:218)가 있으나 그것은 본문의 의도를 오해한 결과이다.
[8]) Hard
Sayings, 104; 김지찬(1999:205), 성주진(1997:134-35) 교수들도 이 견해를 따른다.
[9]) Keil &
Delitzsch, Joshua, Judges, Ruth, 385; Howard (1993:116-7)는 동물일 경우에는 여성형으로 나와야지 남성형으로 나와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나와 만나는 이라는 표현도 인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입다가 자신의 딸이 춤을 추며 나왔을 때, 근심하였다는 표현은 동물을 기대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그가 종이 나오기를 기대했다고 볼 수 도 있기 때문에, 확정적인 결론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김의원 (1997:56ff.)를 보라.
[10]) 그의 탄식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필자는 여기서 그의 탄식이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공표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기적인 자였음도 표명하는 것이라고 보겠다.
[11])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입다 딸의 용감한 행위와 반응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녀가 참된 신앙인이었다면, 아버지의 (그릇된) 인신제사의 헌신을 아무런 반대없이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와 만약 그녀가 성전에서 처녀로 평생 봉사하는 자가 되었다고 하면, 어째서 자신의 처녀됨을 인하여 친구들과 함께 일정기간 통곡하였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에, 그녀도 불신앙과 아이러니한 삶의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인다.
[12])
Howard(1993:117)는 Kaiser의 견해에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