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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1.글로벌논어 학이편 LY0101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재휘애비 추천 0 조회 38 14.07.29 08: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學而第一>


LY010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LY0102 有子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LY0103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LY010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LY0105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LY0106 子曰, “弟子, 入則孝, 出則悌,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LY0107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LY0108 子曰, “君子不重, 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LY0109 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LY0110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LY0111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LY0112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LY0113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LY01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LY01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LY01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

 

공자가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친한 벗(同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도올 논어 참조]

 

The Master said,

"Is it not pleasant to learn with a constant perseverance and application?"

"Is it not delightful to have friends coming from distant quarters?"

"Is he not a man of complete virtue, who feels not discomposure

though men may take no note of him?"

 

-.子: 남자의 존칭으로 先生의 뜻, 여기서는 孔子를 지칭함. The Master

-.學 : 效也, 곧 본받는다는 뜻으로 선왕의 도를 본받음. 詩·書·禮·樂을 배움.

-.時 : 때에 맞추어, 때때로, 수시로.

-.習 : 習자는 羽와 白(白은 自, 自는 원래 鼻의 뜻)이 합한 글자,

  새끼 새가 어미새를 본받아 여러번 날면 숨결이 입과 코로 나오므로,

  새끼 새가 나는 법을 익힌다는 뜻이다.그러므로 무조건 복습하는 뜻이 아니고,

  새가 자주 날아 스스로 나는 법을 배워 익히듯 복습하여 익히는 것을 말한다.

-.不亦 : 또한 ∼ 하지 아니한가?

-.說(열) : 기뻐할 열(悅)과 같음.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

-.有朋 : 有는 無, 非등과 함께 문법상 앞에 둠. 朋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동지(同志).

-.自 : ∼로부터.

-.遠方 : 먼 곳.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와 함께 학문을 즐김.

-.人 : 남, 다른 사람.

-.君子 :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 知性人. complete virtue

-.? : 성내다, 화내다. 원망하다. discomposure

  學問은 一身의 榮達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누군가 알아주지않아도 세상을 원망하지않으니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 修學의 경지에 이른 君子인 것이다

-.constant perseverance and application: 끊임없이 노력과 적용.

-.delightful : 정말 기분 좋은

 

"子曰, 學而時習之,不亦說乎" 유명하고도 유명한 논어의 첫 구절이다. 식자들은 모두 외우고 있는 문구이고, 여기서 說이 ‘열’로 읽고 ‘기쁘다’는 뜻을 가진다는 것도 대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의문스러웠다. 도대체 첫 문장부터 논리적이지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읽고 또 읽고 여러 학자들의 풀이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랜 의문이 풀렸다. 

 .
논어의 첫 구절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을까?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하고서는 왜 바로 다음에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고 했을까? 기쁘고 즐겁다고 하고서는 왜 슬프다든지 행복하다든지 하지 않고 뜬금없는 군자 타령인가 말이다. 
 .
그렇다. 군자(君子)라는 말이 이 장(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다. 군자 됨의 조건이나 군자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보면 공자가 자기의 생활을 한 마디로 압축하여 정리하고 군자로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
그러니 이게 원래 변명이고 자기 미화(美化)라 논리적일 수가 없는 이야기다. "언제 한번 권력을 잡을지 기약도 없고 또 가난하여 먹고살기에도 바쁘지만 틈틈이 공부를 하고, 주류 여당, 혹은 집권 다수파에 밀려 소수이긴 하지만 나름 훗날을 도모하며 의논하는 동지들이 있으니,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 안하는 나는 군자다." 이런 이야기다. 
 .
실패한 정치가인 공자가 자존(自尊)의 선언을 하기 위해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나는 계속 공부하고, 동지들과 연락을 끊지 않고 언젠가는 우리 파의 세력이 커져서 나의 주장과 사상이 세상을 바꿀 것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 사람들의 무시나 비아냥을 참고 견딜 수 있다." 
 .
이렇게 보면 앞의 두 문장은 내가 참고 견딜 수 있는 이유다. 내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과 내가 군자라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말하기 위해 필요한 말이다. 기쁘고 즐겁다는 건 그리 중요한 말이 아니다. "나는 군자(君子)다"라는 말이 중요하다. 군자이기 때문에 당대 세인들의 평가에 초연할 수 있는 것이며 가난하고 외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
공자 자신의 외롭고 궁색한 생활을 미화(美化)하여 의미를 부여한 이 말씀은 곧 제자들에게 “나를 본받아라”라고 하는 지시, 생활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군자(君子)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人不知’라는 말은, 단순히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관직에 등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곧 실직 상태에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 점잖게 새기면 이렇게 될 듯하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틈틈이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간혹 멀리서 동지(同志)들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관직을 얻지 못하여)도 서운해 하지(좌절, 분노하지) 않으니 역시 군자가 아니냐?” 
 .
이 말씀에는 당대 및 후대의 제자들에게 내린 참으로 중요한 두 개의 생활 지침이 들어 있다. 아마 그래서 논어 편집자들이 첫 편(篇), 첫 장(章)에 배치하였을 것이다.

 


   

 

유교에서는 인(仁)을 가장 중시하는데, 『논어(論語)』는 학(學)으로 시작하고 있다. 바로 다음 장에서 유자(有子)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존중하는 것이 곧 인의 시작이다”라며 인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이 들 수 있다. 내 생각에는 공자가 사학(私學)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학을 맨앞에 둔 것이 아닐까 한다. 


<학이편>은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논어』 특유의 문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장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다. 공자는 이 문장에서 배움의 세 가지 측면을 이야기한다.

.

첫째 ‘학이시습지’가 강조하는 것은 습(習)이다. 여기서 습은 연습을 의미한다. 배운 것은 실천으로 옮겨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공자는 지식보다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행승어언(行勝於言), 즉 말보다 행동이 우선이라는 가르침은 『논어』 전반에 걸쳐 확실히 드러난다. “젊은이는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해야 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믿음직스럽게 해야 한다. 널리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 이렇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 入則孝, 出則弟, 謹而言, 汎愛衆, 而親人. 行有餘力, 則以學文).”(學而篇 1.6)이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바꾸어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힘을 다해서 부모를 섬기고, 몸을 다 바쳐 임금을 섬기며, 벗들과 사귐에 말이 미더우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고 해도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부르리라(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末學, 語必謂之學矣).”(學而篇 1.7)와 같은 구절이 강조하는 것들도 모두 실천이다. 행동이 인과 의에 부합하면 그것이 곧 배움이요, 부합하지 않으면 그것은 배워도 배우지 않은 것과 같다.

.
두 번째는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다. 여기서 말하는 벗(朋)은 누구일까? 주자(朱子)는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에서 벗을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같은 생각과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벗들은 어째서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을까? 정자(程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의 수양이 널리 퍼져 유명해지면 자연스레 따르는 자가 생겨나고, 멀리서도 그 명성을 듣고 찾아와 학문을 구하며 수양을 쌓으려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배움의 두 번째 가르침이다. 남다른 학문과 수양을 쌓아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배우고 교류하고 토론한다면 큰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핵심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소통하며 교류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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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이다. 이는 학문의 소양과 기개에 대한 말이다. 학문이 출중하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지만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이라는 말처럼 정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내 학식을 남들이 몰라준다고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덕이 부족한 것이다. 공자는 불온(不?)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군자라고 했다. 『역경(易經)』 주해에서는 불온에 이른 사람을 잠룡(潛龍)이라 했다.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번민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번민하지 않는(遁世無悶, 不見是而無悶) 사람이야말로 용의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 숨어 있는 자(龍德而隱者也)라는 것이다. 잠룡은 즐거운 것은 행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행하지 않으며, 확실히 제거할 수 없는(樂則行之, 憂則違之, 確乎其不可拔) 존재다. 이는 결국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천에 옮기고,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하루 한장 논어 경영 중에서 ]

 

「논어(論語)」는 전체 20장으로 되어있다. 첫 장「학이(學而)」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장은「요왈(堯曰)로 끝난다. 이러한 구성은 첫 장의 첫 편이 제목의 이름이 되는 데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제1장「학이(學而)」란 제목은 첫 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학이(學而)」라는 첫 장의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논어의 첫 편인 '學而篇'은 논어의 서편(序篇)으로 학문의 중요성과 공자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위에 적은 글은「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논어」에서 '자왈(子曰)'이란 표현은 예외 없이 모두 "공자님께서 말씀 하신다"는 뜻이다. 이때 '자(子)'는 제자들이 '선생님'을 높여서 부른 말이다. 제자들이 아닌 타인들, 즉 외부 사람들이 말할 때는 '공자왈(孔子曰)'과 같이 보다 객관화된 표현을 쓴다. 따라서 '자(子)'를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master[스승, 大家]'나 'teacher[先生, 敎授者]'와 같은 맥락(脈絡)의 의미로 통용(通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에서 '관(冠)'이라 할 수 있는 이 첫마디 어귀는 얼핏 보면 무애(无涯) 양주동 (梁柱東)박사의 말대로 너무 평범해서 진부(陳腐)하게 들릴 수도 있다. "배워서 예습과 복습을 잘 하니 기쁘다"는 표현이 '위대한 말'이라고 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은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성서의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세례 요한의 말이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의 표현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하고 일상적인 표현인가? 하고 반문을 한다.

 

 

여기서 혹자는 '시습지(時習之)'를 "때때로(occasionally) 익힌다"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때에 맞추어(timely) 익힌다"로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불역열호(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 '열(說)'은 다른 책(正平本)에서는 '열(悅)'로 되어 있다고 한다. '열(說)'과 '열(悅)'은 의미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으로 본다.

 

 

'불역낙호(不亦樂乎)'의 '낙(樂)'과 첫 구문(句文)의 '열(說)'은 어떻게 다른가? '說'은 '실존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고 '樂'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즐거움'으로 본다. 또 '有朋自遠方來'에서 '붕(朋)'은 단순히 우리말의 '친구(friend)'가 아니라, '붕당(朋黨)'이요, '동문(同門)'이요, '동지(同志)'로 보는 견해가 옳을 것 같다. 공자가 학문을 추구하는 분위기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학(學)'을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人不知而不?'에서 '인(人)'은 '타인(他人)'이라는 뜻이다. 옛말에서 '(타인)'을 나타내는 ''은 '자기'를 나타내는 '己'와 대비(對比)되는 말이었다. '부지(不知)'는 단순히 "알아주지 않는다"라기 보다는 '사람이 등용(登用)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된 상태에서 소인(素人=비전문가, 아마추어, 풋나기)으로 남아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온(?)'이란 "노여워하다. 성내다"의 뜻으로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해당하는 말이니 우리말의 '한(恨)'에 해당하는 말로 볼 수도 있다.

 

 

'정치적 현실(現實)'과 '군자'라고 하는 '도덕적 이상(理想)'과의 갈등 사이에서 궁극적으로 공자는 '군자'라는 '도덕적 이상'을 선택한 것으로 본다. 이 말속에서 공자는 '분노(忿怒)'와 '한(恨)'이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으나 바로 자신이 '군자'라는 자부감(自負感), 즉 '소인(素人)으로 부터 탈출의 기쁨'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을 할 수가 있다.  [남종선생님 논어강의중에서]

 

 

 

 

http://ch.yes24.com/Gallery/MovieViewPop/6784

동양고전 논어 특강 :  신정근교수

 

http://news.donga.com/Series/70070000000757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의 한자이야기

 

http://eurasiad.blog.me/50034401505

유목민 마을

 

http://www.youtube.com/watch?v=7qaKd0kMHAs

영어로 읽어주는 논어

 

http://www.hanjadoc.com/confucius/confucius/haki1_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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