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상)>(새물결, 1995)/ (구별)
1982, <강의에 대한 강의>(동문선, 1999)/ (강의)
1994,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 2000, 2쇄)/ (TV)
1997, <과학의 사회적 적용>(창비, 2002)/ (과학)
1998, Acts of Resistance: against the tyranny of the market (New York: The New Press, 1998)/ (AR)
1998, Masculine Domination (Oxford: Polity Press, 2001)/ (MD)
1. 방법론: 겹의 메타
부르디외에 의하면, “문화게임(jeu de la culture)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구별 35). 사실 체제의 자폐성(自斃性)에 대한 이러한 담론은 마르크스로부터 아도르노를 거쳐 보드리야르에게까지 이르는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에게 공통되며,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부르디외가 파악한 그 문화게임(의 본성)은 단지 객관화될 수 있을 뿐인데, 이 객관화의 “유일한 기회는 이러한 객관화를 달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도록 강요되는 절차를 가능하면 완벽하게 객관화하는 방법뿐”(구별 35)이다. 말하자면, ‘중층 메타화’의 전략인 셈인데, 이것 역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이 문장은, 비판적 지식인의 현실참여 시도가 얼마나 섬세해질 수 있는가, 혹은 얼마나 중층적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사회학자인 그의 작업이 흔히 철학적 아우라를 누리는 것도 이 비판적 섬세함과 여러 모로 관련되리라고 판단된다. 물론, 여기에서, 철학적 아우라를 마치 혜성의 꼬리처럼 대동하고 다니는 섬세함이란 ‘메타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다. 인용문에서 구사된 메타의식은 ‘겹’이다. 즉 논제가 된 문화게임을 단순히 메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게임을 메타화(객관화)하기 위한 조건을 거론하면서, 그 메타화에 필요한 절차들을 다시 객관화(메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겹의 메타화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사회학자는 흔치 않다.
대체로 과학자들은 메타의식의 불비(不備)와 그로 인한 오명에 시달리는 편이지만,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충분한 과학이면서도 동시에 충분한 메타학문인 것이 매력적이다. 빠트릭 샹빠뉴(Patrick Champagne)가, 부르디외의 작업을 소개하면서, “범주의 사회학을 구성하는 것이 당신의 진정한 목표”(과학 12)라고 평가한 것도 부르디외 사회학의 이같은 특성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르디외의 연구 그룹은 스스로 밝힌 것처럼“항상 연구대상뿐 아니라 문제의식, 범주화체계, 코드화 도구 등의 일상적인 연구도구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과학 100)하게 될 수 밖에 없을 터다. 레비 스트로스의 표현처럼 철학이 척도와 범주의 학문이라면, 이렇게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그 근본에서 철학에 근접한다. 이처럼, 대상에서 도구로, 메시지에서 매체로, 내용에서 형식으로 관심의 층위를 이동시키는 태도, 즉, 앞서 말한대로 메타화의 지향 속에는 매우 분명한 전략적 동기가 작동하고 있다. 잘라 말해서, 그것은 부당하게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틀과 구조를 적발해서 그 자의성/작위성(作僞性)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 게임으로부터 벗어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게임이 작동하는 원리와 절차를 메타적으로 객관화시킴으로써 비판적 시각을 확산시키고, 새로운 게임을 디자인하거나 최소한 게임의 성격과 원리를 개선해나갈 수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부르디외는 사적 물음으로부터 사회적 의제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구성되는 ‘생성’---마치 ‘존재’에서 ‘생성’으로 논의의 층위를 옮기면서 ‘존재’의 진리들을 다시 ‘생성’의 용광로 속으로 소급시켜 해체해버리는 니체처럼---의 과정 그 자체를 다시 문제시하는 것이다. 가령, 그는 학연(學緣)의 정치와 그 구조적 역학 속에서 교조적인 문제의식들이 생성되어 “적절함과는 거리가 먼데도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과학 100)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사회적 의제의 내용 속에 함몰해 있는 텍스트주의에서 벗어나, 그 내용이 생성된 형식과 구조, 배경과 지형을 메타적으로 헤아리는 태도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기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회학은 “다른 학문이 이미 해결한 척하는 문제들에 더욱 가시적이고 비판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극적으로 부딪혀야”(과학 102) 하는 것이다.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진 언설이긴 하지만, “어떤 종류의 제약도 없이 자신들의 연고를 맺고 끊는 자율적 개인이라는 이상적 그림은 악성 유토피아의 사례”1)라는 지적이 쉽게 연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2. “애비는 테레비였다”
이를테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에게 자율적으로 문제를 던지고 자율적으로 답한다는 미몽(迷夢)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주체와 의식의 근대적 개념에 얽힌 이 자율성의 신화를 내파한 것은 물론 20세기 인문학의 중요한 성과이기도 하다.) 이 논의에서 방송매체의 생성조건들은 거듭 호출당한다. “텔레비전은 매우 자율적이지 못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TV 61)이며, 따라서 이 미몽의 허상을 보여주는 극적인 장소는 다름아닌 방송 스튜디오라는 현장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마치 맥루한의 고전적 명제를 연상시키는 어투로) 스튜디오는 그 “구성 내용의 변화가 메시지의 의미변화를 가져오는”(TV 58) 곳이지만, 동시에 “지각되는 것이 지각되지 않는 것을 감추는 곳”(TV 57)이다. 그러므로, 던져지는 메시지(지각되는 것)만을 보고 들을 뿐 그 의미변화의 생성구조와 과정(지각되지 않는 것)에는 대체로 쉽게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달리 말해서, 구성된 지각의 결과에만 현혹되거나 주눅들기 쉽지, 그 “구성의 사회적 조건들을 보지 못”(TV 57)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앞서 말한대로, “대상에서 도구로, 메시지에서 매체로, 내용에서 형식으로 관심의 층위를 이동시키는” 비판적 메타시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부당하게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틀과 구조”의 화평한 노예들로 전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프로그램은 형평성을 과시하고, 사회자는 심판처럼 행동”(TV 58)하는 사이비 보편주의의 무대를 배경으로, 절차와 생성을 객관화하는 비판적 메타의식을 발동시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뉴스 앵커, 토론 진행자, 스포츠 해설가들이 작은 양심의 지도자들”이 되고 “전형적인 프티 부르주아의 도덕의 대변인”(TV 79)으로 행세하는 와중에서, 그 도덕과 양심의 이면구조를 헤집고 비판적으로 적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텔레비전이 공중(公衆)의 정신구조에 완전히 꼭 맞추어져 있”(TV 79)고, 이 정신구조를 지배하고 향도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네트워크가 강고한 이상, 메타의식을 딛고 올라가 비판적 조망의 입지를 얻는다는 것은 지난지사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저에게 매우 호의를 보이는 기자들 앞에서도 질문을 문제삼는 것으로 자주 저의 대답을 시작해야만 하였”(TV 60)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종종 내가 인문학과 철학의 존재방식은 ‘질문이라는 그리움’의 형식을 띤다고 했듯이, “질문을 문제삼는 것으로 대답을 시작”하는 태도는, 역시 앞서 지적한대로, 부르디외의 사회학에 붙어 다니는 철학적 아우라, 혹은 그 메타비평적 측면을 잘 설명해 줄 것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철학이야말로 답변보다는 오히려 물음 그 자체, 그리고 그 물음의 재서술, 재구성에 정력을 바치는 유일한 학문일 것이며, 이것은 철학이 중층적으로 메타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도르노(T.W. Adorno)의 말처럼, “진정한 철학적 해석은 질문 뒤에 존재하고 있는 불변의 의미를 밝혀내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질문 자체를 한 순간 장렬하게 작열시켜 환히 드러나게 한 다음 재로 화하게 만드는 것”2)에 가까울 것이다. ‘배우고-묻는다’(學-問)는 이치를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
우리의 인식과 실천을 지배하는 형식적 도구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방송매체와 더불어 보다 구체적으로는 기자의 ‘지각범주’가 매우 중요한 논제가 된다. 왜냐하면, 기자들에게 특유한 이 지각범주가 스테레오타입/매너리즘에 빠짐으로써, 시청자들은 자의적으로 선택된 토픽이나 의제에 매몰될 뿐, 그 주변이나 이면의 생성배경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결국 인식과 실천의 열정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범주화, 유형화되거나 지배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자들은, “직업, 세계관, 교육, 기질에 영향을 미치는 내재적 성향과 직업적 논리에 의하여 그들 고유의 지각범주 때문에, 삶이라는 특별한 현실 속에서 완전히 특별한 면만을 선택”(TV 30)한다. 이로써, “정작 보여주어야 할 것은 보여 주지 않거나, 또는 그것을 무의미하게 하는 방식으로 보여”(TV 30)준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특별한 안경’을 쓰고, “선정적인 것과 구경거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기준에 근거한 “선별의 작업”(TV 31)을 하며, 마침내 “이러한 분류를 강요하면서 집단을 만들”(TV 36)어 가는 것이다. 조르주 비뇨의 말처럼, 분류하기는 대조와 대립을 통해서 얻는 ‘안전’의 장치인 것.3) 그러므로, 정보화와 신매체의 시대에, 특히 ‘분류투쟁’, 혹은 ‘유형화투쟁’의 중요성은 자명해진다. 자의적이며 특수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은밀하고 포괄적으로 분류당하고 유형화당하는 것이야말로 매스 미디어 시대의 상투적 상식이 생성되는 가장 일반적 방식인 것이다. 재론할 것도 없이, 분류투쟁과 유형화투쟁을 통해서 자율적이며 성숙한 개인으로 거듭 서고 걷고 연대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이며, 이 과제는 상술한 것처럼 비판적 메타의식의 활성화를 통해서 그 실마리가 잡힐 수 있으리라고 본다.
“텔레비전에 의해 설명되고 지시받는 세계”(TV 35)에서, 텔레비전의 ‘실제 효과’라는 강신술의 힘은 “사상이나 표상, 그리고 집단을 존속케 할 수 있”(TV 34)는데, 이 힘은 우선 기자들의 지각범주가 보편적인 것인 듯 매우 자연스럽게, 그러나 은밀하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주의 사회학’으로 별칭되듯이, 우리의 인식과 실천을 임의로 갈래짓고 지배하는 범주화(categorization)의 구조와 유형화(paradigmatization)의 생성 역학을 적발,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부르디외 사회학의 특장이 아닐 수 없다. 이 비판적 분석의 예봉은 특히 광범위한 상징폭력의 효과랄 수 있는 남성지배구조를 해체하는 데에서 빛을 발한다. 부르디외가 한층 세련된 분석력을 발휘해서, ‘영원’이니 ‘보편’ 혹은 ‘자연’의 이름으로 자신을 영속화하려는 성적 분리-지배구조와 그 범주화의 임의성과 역사성을 적발하는 대목에 잠시 주목해보자; 이 대목이야말로 비판적 메타의식이 매우 적절하게 동원된 곳일 뿐 아니라,‘분류투쟁’, 혹은 ‘유형화투쟁’의 압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 남근주의의 구조: 분리지배하고, 자연화된
부르디외의 설명에 의하면, “남성(지배)질서의 강점은 (자기)정당화가 필요없다는 (오만한) 사실에 있다”(MD 9). 무엇보다도, “남성중심적 시각은 스스로를 중성적인 것으로 내세우기”(MD 9) 때문이다. 자기정당화의 노력조차 필요없는 것으로 여기는 이 중성성의 신화는, 남성지배의 구조가 생물학적---그러므로, ‘자연적’---차이에 근거하기 때문이라는 강변에서 생성된다. (그러나, 니체의 말처럼, “지고의 도덕적 가치평가가 비도덕적 가치 평가의 귀결”4)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납득한다면, 자연성 역시 “실천적 목적을 위한 단순화이거나 기관의 조잡함에 기초한 착각”5)임이 드러날 것이다.)
나아가, 이 중성성/자연성의 신화는, “여성들이, 쉽게 의식할 수 없는 인식과 지각의 틀의 형식 속에서, (남성)지배적 시각을 내면화”하면서 강화되고, 마침내 “현존의 사회질서를 정상적이며, 심지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끔 한다”(MD 95)는 것이다. 고쳐 말하자면,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의 시각으로부터 구성된 범주들을 지배관계에 적용함으로써, 마치 그 범주들이 자연스러운 것인양 보이게 한다”(MD 35). 나아가, 그 범주들이 “사물의 질서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심지어 필연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에 이르게 한다”(MD 8).
이로써 결국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왜소한 자기정체성에 매순간 자연적 토대의 외양을 제공해야 하게끔 저주받고”(MD 30)있다. 주변에서 흔히 듣게 되는 사회적 약자들과 피해자들의 자기비하적 공세나 넋두리들은 이러한 자폐적, 가학적 순환구조 속에서 끝없이 재생산된다. 밀레트의 탁월한 책에서 분석되었듯이, “소수자 집단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여성에게도 있는데, 그것은 집단적 자기혐오와 자기거부, 자신과 자기 동료들에 대한 경멸”6)이다. 마찬가지로, 부르디외는,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아비투스의 항구성이야말로 노동의 성적 분리구조를 상대적으로 영속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MD 95)이라고 지적한다. 바르트(Roland Barthes)의 말로 고쳐보자면, 기호론적으로, 낱말이나 사물은 자의적, 우연적으로 구성된 이력을 숨기고 마치 영원하고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7) 혹은, 다시, 베버(Max Weber)를 인용한 부르디외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배그룹은 자신들의 특권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을 정당화할 ‘사회신(정)학’(sociodicy)을 필요로 하고 있다(AR 43).
남성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작동시키는 여러 분할과 지배의 범주들을 해체하는 방식은, 요약해서 결론짓자면, “다시 역사를 재가동시키는”(MD viii) 데 있다. 그러므로 “몸 속에 인각된 (남성지배의) 사회구조”(MD 40)를 해체하거나 혹은 최소한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적 차별구조의 상대적 영속화와 탈역사화에 책임을 져야할 역사적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하는 것”(MD vii)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혹은, 부르디외 특유의 메타적 취향을 살린 문장으로 재인용한다면, “탈역사화의 역사적 노동의 역사를 재구성해야”(MD 82)한다. 다시 쉽게 고쳐 말하자면, “남성지배의 객관적, 주관적 구조의 끊임없는 (재)생성의 역사”(MD 82)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정당화가 필요없다는 (오만한) 남성지배의 사실”이 근거한 보편성과 영원성, 그리고 자연성의 독사(doxa)가 얼마나 작위적, 우연적, 이데올로기적인 것인지를 밝혀낼 수가 있다. 여기에서 부르디외는 인류학자의 시각을 원용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에 의하면, “남녀 사이에 (문화적으로) 오인된 차이를 정당화하는 분리의 원칙(노모스)은 자의적, 우연적이며, 동시에 사회논리적으로 필요한 장치”(MD 2)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자의적, 우연적, 사회구성적인 것이 보편적, 필연적, 영원한 것으로 둔갑해서 이데올로기의 지배장치로 군림할 수 있게 되는 배경에는, 그같은 분리지배의 논리가 일련의 유사한 이항대립의 논리들로 구성된 체계와 굳게 맞물려 움직이는 동력이 있다. 앞서, 텔레비전에 의해서 구성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텔레비전이 분류하고 걸러서 가공한 이미지나 메시지가 ‘실제효과’를 갖는다고 했듯이, 남녀차별적 분리지배의 논리가 이와 유사한 수많은 이항대립적 논리들 속에 서로 섞이고 맞물려서 재생산되고 유통된다면, 그 자의적인 왜곡을 적발하고 비판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남녀의 차별적 분리지배 논리는, “위/아래, 앞/ 뒤, 오른쪽/왼쪽, 바른/굽은, 마른/젖은, 맛있는/맛없는, 밝은/어두운, 밖(공적인)/안(사적인) 등으로 구성된 상동의 이항대립 체계 속에 삽입됨으로써 객관적, 주관적 필연성을 얻게 되는 것”(MD 7)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이 부르디외의 유명한 장(champ) 개념의 논리와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서는 상론하지 않겠다.
4. 위제(僞題)의 해체
부르디외의 분석에 의하면, 이 남녀차별적 분리지배 구조의 영속화, 자연화, 그리고 보편화는 “가족과 교회, 국가, 그리고 교육체제와 같은 상호연관된 제도들의 노동 생산물”(MD viii)이다. 돌려 말하자면, “(이 차별적 분리구조의) 영속화의 유지에 영속적으로 기여하는 인자들이 다름 아닌 교회와 국가와 교육체제들”(MD 83)인 것이다. 그는 특히 “가족이야말로 남성지배와 남성중심적 시각의 재생산과정에서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떠맡고 있다”(MD 85)고 지적하면서, 대안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노력이 어떻게, 어떤 지점에서 기동해야 할 것인지, 은근히 시사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는 접전(接戰)의 지점이 일정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지근지처로부터 변화의 물결이 생겨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부르디외는 <남성지배> 속의 ‘변화의 요인들’(MD 88-96)이라는 제목의 장(章)에서, 조그만 희망의 씨앗을 보여준다. 그 씨앗은, (한국의 경우와는 분별해야 할) 교육체제 속에서 일고있는 변화를 가리킨다: “변화의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성차를 재생산하는 데 있어서 교육체제의 기능이 결정적으로 변화한 것과 연관된 사실들이다”(MD 89).
그러나, 다른 한편, “보통 교육기관이라고 불리는 곳은 일상화된 지식을 코드화하여 전달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과학 93)는다면서,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체로 “교수는 창조자의 담론을 일상화하고 평이하게 만드”(과학 93-94)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가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에서, “사회학자는 경계, 한계, 그리고 신성을 말하는 경계짓기(regere fine)와 ‘신성화하기’의 권력이 함축된 기능, 즉 벤베니스트가 말하는 고대 왕의 기능을 떠맡거나 찬탈하고 있는 것”(강의 14)이라고 감연히 외친 것 속에서는, 이러한 현실진단과 비판의 결기를 엿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기분으로, “기존 질서에 깊이 관련된 사람들이 사회학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강의 52)고 일갈하는 것이다. 물론 나로서는 기존질서에 깊이 관련된 사람들이 오히려 대중매체를 업고 자신이 애호하는 사회학을 열심히 설파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목도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창조자와 교수(학자) 사이의 지식이동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은, “그 과정에서 특히 가장 근본적인 부분, 즉 창조자에게 제기된 형식의 문제 자체를 제거해 버린”(과학 94)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진리를 창조의 무능’8)으로 여기는 니체의 생각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점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부르디외 사회학에 특징적인 비판적 메타의식---“항상 연구대상뿐 아니라 문제의식, 범주화체계, 코드화 도구 등의 일상적인 연구도구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과학 100)---때문이다. 이 비판적 메타의식이 활성화되지 못하면, 이데올로기주의(ideologism)의 정치성에 휘둘려서, 문제의 생성배경이나 그 맥락, 그리고 전체 지형 속의 위치를 놓친 채 그 문제의 메시지에만 골몰하거나 휩쓸리는 덫에 빠진다. 이로써, “가짜 답변을 하도록 강요(당)하며, 이를 통해 사실 문제 자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잊게”(과학 110)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디외는 (자신이 애호하는 비트겐쉬타인적 문투를 좇아) “학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많은 경우 가짜 문제나 잘못 제기된 문제를 해체하는 데 있”(과학 104)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회)학자는 타 학문들이 해결한 척하는 문제들에 더욱 철저하게 부딪혀야 하는 것이다(과학 102). 더불어, “학자들의 책임 중 하나는 제기되지 못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학 108)이기도 하다.
이 가짜 문제를 조작, 유포시키는 가장 강력한 진원지 중의 하나가 방송매체다. 우선 그것은 적절한 사회적 의제가 선택되기 위해서 반드시 제출되어야 할 정보들을 희석시키고 감춘다. “텔레비전은 다양한 일상사들을 강조하면서, 그리고 텅 비고 아무 것도 아닌 것들로 귀중한 시간을 때우면서 시민이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하여 가져야 할 적절한 정보들을 멀리하게”(TV 29) 만든다. 아울러, “텔레비전은 그것이 생산해낸 문제의식을 전체적으로 강요”(과학 111)하고, 이로써 “냉소적이지조차 못한 바보스런 문제의식들”(과학 111)이 성숙한 시민들에게 긴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대체하게 한다. 포스터의 지적처럼, “개인이 텔레비전(광고)을 볼 때 주요한 사회적 관계가 재생산되는 것”9)이므로, 현대 시민사회에서 요청되는 모든 종류의 관계혁신 운동은 반드시 텔레비전을 포함한 매체에 대한 저항운동을 동반해야 한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이 이같은 가짜 문제들을 전제한 채 인터뷰 따위를 구성한다면, 학자들은 텔레비전에 출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과학 104).
5. 비판적 메타화와 분류투쟁
부르디외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분류는 특히 분쟁이나 위기 상황에서 강조되는 고정관념에 의해 쉽게 강화”(과학 65)된다고 말한다. 가령, 혁명의 대의가 혁명의 ‘운동’ 그 자체에 의해서 오히려 보수화된 것들.
혹은, 시간지체 의식을 포함한 아비투스, 그리고 욕망/열정의 분배방식이 매우 다른 두 세대간의 갈등을 생각해보자. 어느 29살의 대졸 전문직 미혼 여성에게, 그 어머니인 56살의 중졸 전업주부는 ‘더 늦기 전에’ 결혼할 것을 종용한다. 어머니는 시사(示唆), 권면, 충고, 채근, 그리고 협박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언어/비언어적, 의식/무의식적 방식의 압력을 행사할 것이다. 압력의 양식은 다양하겠지만, 결국 그 압력의 자기정당화 절차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분류(의 체계)’에 자각/비자각적으로 소급된다. 혼인을 독촉하게 하는 시간지체 의식 역시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여러 분류체계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9세와 30세 사이의 경계를 두고, 그 실속없는 환상적 균열을 두고 어떤 식의 특화된 감정이 급박하게 일렁거린다면, 필시 그것은 이 분류의 체화과정이 빚은 효과일 터다.
이 효과는 일종의 ‘위기 상황’을 조성한다. 어머니는, 30세가 되기 전에 혼인을 해야 한다고 다그치면서 그 위기 상황을 인정(re-cognition), 강화하며, 딸은, 30세가 되더라도 혼인하지 않겠다고 항의하면서도 비자발적으로 그 위기 상황을 학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별다른 인식(cognition)은 없다. 따라서, 정도와 동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머니와 딸은 모두 이 위기 상황에 무관심하지 않거나 그 상황을 대체할 다른 생활문법을 개발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그 상황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모녀 사이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해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정신분열적’ 현실 속에서, 딸이, 그 어머니가 몰고 다니는 그 위기 상황에 완벽히 무관심함으로써 그 상황의 현실을 무력화하거나 해체하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하다.
인용한 부르디외의 틀을 원용하자면, 어머니는 혼인과 관련된 고정관념을 반복해서 주입시킴으로써, 자신이 위기 상황으로 인식한 딸의 시간지체 의식을 적발, 비판하고, 이로 인해 초래된 딸과의 분쟁 상황에 대처한다. 그리고 그 고정관념이나 이에 반응하는 행태가 이미 “사회적으로 구성된 분류(체계)”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그 분류(체계)를 습관적으로 강화하게 된다.
사실, 이 분류(체계)와 고정관념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객관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동어반복적 순환관계에 놓여 있다. 권력강자(어머니)는 권력약자(딸)를 이 동어반복적 순환관계 속에 붙박아 둔 채, 유헝화된 자신의 신념과 욕망이 작동, 회전하는 장치로 사용하게 된다. 어떤 식이든 이 순환관계를 인정하거나, 자의이든 타의이든 그 속에 놓여있게 되는 경우, 딸은 결국 그 분류의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짐작컨대, 부르디외에 따르면, 이 딸의 선택은 ‘분류 투쟁’/‘유형화 투쟁’이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메타투쟁이다. 로티(R. Rorty)의 말처럼, 상대의 의제와 틀, 그리고 이치와 어휘를 고스란히 인정한 채 기존의 문법 속에서 맞대거리하는 싸움으로서는 승산이 없다. (물론, 모녀라는 특수한 이중구속적 관계 속의 분쟁의 경우에는, 그것들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싸움의 양상이 크게 바뀌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이 딸의 투쟁이 얼마나 섬세하고 중층적으로, 혹은 ‘혁명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점을 잘 보여준다. 바르트(R. Barthes)의 지론처럼, ‘형식의 실험은 사회참여의 한 형태’이며, 형식을 용인한 채 내용을 혁신할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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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질서나 몸의 기질, 버릇과 행태의 패턴 속으로 내려앉아 있는 분리와 지배의 억압 구조를 적발, 비판하기 위한 모든 싸움은 메타비판적 분류투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투쟁의 소박한 시작은 고정관념을 그 고정관념의 외부에서 메타비판적으로 조망해보는 눈을 얻는 것이며, 이 고정관념을 유지/강화시키는 여러 위기상황에 현혹되거나 주눅들지 않는 일이다.
부르디외가 제시하고 실천한 공부길의 한 갈래는 비판적 메타의 겹눈을 얻는 길이다. 메타화는 곧 공소한 관념론으로 회전하기 쉽고, 사회비판은 메타적 자기반성을 쉽게 생략하는 현실 속에서, 부르디외의 정치하고 집요한 메타비판적 시각은 인문사회과학도들에게 소중한 공부길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메타가 곧 비판이 되고, 비판이 곧 메타가 되는 경지야말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멋있게 겹친 표식.
첫댓글 요즘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읽고 있던 중인데 도움이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