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은 우리 고유의 민속 운동이다. 청샅바와 홍샅바로 나눠 다양한 기술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씨름은 기술 씨름의 묘미와 화려함에 한때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씨름이 프로씨름단의 잇단 해체와 유망주 발굴과 저변확대에 실패하면서 수많은 스타급 선수를 배출하며 한국씨름의 한 축을 맡았던 도내씨름도 좀처럼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보에서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과거 씨름의 양대 축을 형성했던 마산, 진주 등 각 씨름계 인사들을 통해 씨름에 얽힌 숨은 이야기나 희로애락을 인터뷰형식으로 알아본다. 아울러 씨름계의 현실을 진단하고 도내 씨름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알아보고자 한다./편집자주

최홍만, 김영현, 이태현…
요즘 10대 들에게 이들은 이종격투기 선수다. 그러나 이들이 한때 국내 씨름계의 최정상의 자리에 서 있었던 씨름선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1980년대만 해도 야구, 축구와 함께 국내 3대 인기스포츠로 당당히 자리 잡았던 씨름의 위상이 오늘날 급격히 추락했다.
숱한 스타급 씨름선수들의 격투기로의 잇단 전향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씨름계는 이를 붙잡지도 못할 정도로 존폐 기로에 처했다.
일본의 씨름인 스모가 일본의 문화아이콘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몽골, 터키, 스위스 등 명칭은 달라도 당당히 자국 내 씨름의 전통을 가꿔나가는 이들 나라에 비교해볼 때 국내 씨름계의 몰락은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씨름의 급격한 몰락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민족스포츠 씨름=지난 1883년 4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경남대 학생인 이만기가 ‘모래판의 여우, 기술씨름의 달인’ 최욱진을 3-2로 물리치고 초대 천하장사에 오르자 당시 씨름계는 새로운 스타 출현에 흥분했다.
최욱진, 이만기, 강호동, 유명 스타급 선수를 잇따라 배출하며 씨름은 국민적인 사랑을 받아 1980년 들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씨름장마다 밀려든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방송사마다 앞 다퉈 씨름 중계를 편성했을 정도였다.
특히 천하장사를 석권하다시피 한 이만기선수는 요즘 각광받고 있는 얼짱 프로선수 못지 않은 국민적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 같은 씨름 열풍에 기업들도 앞 다퉈 팀 창단에 나섰다. 1980년대만 해도 9개나 되는 프로팀이 창단되면서 씨름은 국민적인 인기스포츠로 자리 잡은 것이다.
◇기술씨름 전성기=씨름의 흥행몰이에는 기술씨름의 영향이 커다. 작은 체구의 선수가 화려한 기술로 덩치 큰 선수를 보기 좋게 넘어뜨릴 때 관중들은 환호했다.
‘모래판의 여우’라 불리던 최욱진은 뒤집기의 달인답게 기술씨름으로 이름을 날렸다. 어떤 상대를 만나도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어 뒤집기로 넘기는 기술은 가히 예술이었다.
이어 만가지 기술을 가졌다는 이만기, 이승삼, 강호동까지 기술씨름은 그 전성기를 맞았다. 기술도 다양해 앞무릎치기, 오금 당기기 등의 손기술과 안다리 걸기, 호미걸이 등의 발기술, 들배지기 등의 힘을 이용한 다양한 기술은 씨름의 묘미를 느끼게 했다.
이준희-홍현욱, 최욱진-이만기, 이준희-이봉걸, 강호동-이만기로 이어지는 라이벌 구도도 씨름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이 같은 흥행요소가 있었기에 80년대 장충체육관은 연일 관중들로 가득 찼고 방송매체는 씨름 경기를 중계에 매달렸다.
◇씨름의 추락=아이러니하게도 씨름의 퇴조는 프로씨름단의 출범과 관계가 깊다.
강호동이 이만기를 꺾고 새로운 천하장사에 등극한 지 4년 만에 은퇴를 하게 되자 씨름의 인기도 점차 하향추세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천하장사를 원했던 각 팀들은 보다 확실한 승리를 원했고 그로인해 씨름판은 기술씨름보다는 박광덕, 백승일, 최홍만, 이태현, 김영현 등의 거구의 선수들로 채워졌다.
바로 이점이 문제였다.
이들 선수들은 기술 보다는 힘을 이용한 씨름을 구사하다 보니 기술씨름도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화려한 기술을 자랑하던 기술씨름 선수들도 신장의 차이를 쉽사리 극복할 수가 없었다.
2m가 훌쩍 넘는 최홍만, 김영현은 어느새 천하장사를 독식했고 모래판위에는 날쌘 선수보다는 일본의 스모선수 같은 육중한 몸매를 과시하는 선수로 넘쳐났다.
문제는 이와 함께 씨름의 재미가 반감됐다는 점이다. 체구가 큰사람이 작은 사람을 이기는 아주 원시적이고도 단순한 진리에 매력이 떨어졌다.
원래 씨름은 다양한 기술로 상대를 제압해 나가는 운동이다. 그러나 100㎏을 가볍게 넘는 육중한 선수들은 샅바를 잡은 채 오로지 힘을 이용한 밀어치기와 상대의 공격을 되받아치는 단순한 공격으로 지루한 경기를 반복했다.
결국 관중들도 점차 등을 돌렸고 흥행가치가 떨어지자 기업들도 하나 둘 씨름단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IMF 위기가 찾아오자 팀 해단은 가속화됐고 이어진 프로씨름을 주관하는 한국씨름연맹과 아마추어 씨름인 대한씨름협회의 내분 갈등으로 국내 씨름단은 현대삼호중공업 코끼리 씨름단만 그 명맥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오갈 데 없어진 선수들은 결국 당시 갓 국내에 소개된 이종격투기로 하나둘 스카우트 되면서 국내 씨름의 자리를 이종격투기가 비집고 들어오게 된 것이다.
◇경남 씨름의 침체=씨름계의 침체는 숱한 스타급 선수를 배출하며 국내 씨름계를 이끌어온 경남씨름도 직격탄을 맞았다.
진주와 마산으로 대변하는 도내 양대 씨름계는 잇단 프로씨름단의 해체와 학교 씨름의 쇠퇴로 좀체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주씨름계는 이수영, 전재성, 차경만, 최욱진, 이기수, 김칠규, 김영현 등을 배출했고, 마산씨름계는 권영식, 김성률, 이만기, 강호동의 슈퍼스타를 키워냈다.
일제시대부터 강변 백사장에서 시작한 백사장 씨름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기술씨름의 달인도 많다. 전재성 진주씨름협회장은 “남강 모래 백사장이 있는 진주는 특히 뒤집기 기술이 유명해 예부터 씨름대회가 열리면 전라도, 충청도 등지에서 씨름기술을 배우러 일부러 찾아올 정도였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사실상 국내 씨름은 경남씨름이 이끌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침체에 빠진 씨름이 살아나기 위해 많은 노력과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아직까지 도내에는 많은 씨름부가 잇단 전국대회에 출전해 경남씨름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진주남중, 경남정보고, 마산용마고, 경남대, 인제대 등의 명문 씨름단이 여전히 활동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