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너이새끼화이팅
오나라에는 촉과 위나라보다 이상하게 무와 문을 동시에 견비한
무장들이 많이 나오죠.
오나라에의 무과 문을 동시에 갖춘 대표적인 인물이 "주유"와 "육손"이라고 합니다.
관우가 지키는 형주를 육손의 지모로 대부분 격파했다는 것만 봐도
육손의 지위와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주유가 단명하였기에 어찌보면
오나라를 구해줄 몇 안되는 장수였던 육손에 대해
알아볼까요~
육손(陸遜, 183 ~ 245)
삼국 시대 오(吳)나라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 본명은 의(儀)고, 자는 백언(伯言)이다. 소패왕 손책(孫策)의 사위다. 처음에 손권(孫權)의 막부에서 일해 편장군(偏將軍)과 우부독(右部督)에 올랐다. 어린 나이로 뛰어난 지략을 지녀 여몽(呂蒙)과 함께 공안(公安)을 함락하고 관우(關羽)를 사로잡아 죽였다. 뒷날 유비(劉備)가 복수를 위해 군사를 동원했을 때도 노장(老將)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침착하게 작전을 짜 촉의 40여 진지를 불살라 승리를 이끌었는데, 모두 그의 지모(智謀)에서 나왔다.
손권 황무(黃武) 초에 대도독(大都督)이 되어 병사를 이끌고 유비에 대항했다. 성을 지키면서 전투를 피해 촉나라 군대가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화공으로 대파했다. 형주목(荊州牧)에 올랐고, 승상(丞相)에 임명되었다. 태자 손화(孫和)와 노왕 패가 서로 다투자 여러 차례 글을 올려 태자를 변호한 일로 손권의 책망을 받은 뒤 울분을 품고 죽었다. 소설 『삼국지』에 보면 유비를 추격할 때 어복포에 이르렀다가 제갈량(諸葛亮)이 남긴, 돌로 쌓은 팔진도(八陣圖)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을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黃承彦)이 구해 주어서 살아났다는 대목이 나온다. 시호는 소후(昭侯)다
생애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인데, 그의 집안은 대대로 강동 지역을 다스려온 호족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종조부인 여강 태수 육강(陸康)에게 양육되었다. 그러나 육강이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원술과 대적하게 되자 육강은 일족을 육손에게 맡기고 오나라로 피신시킨다. 오나라에서 육손은 관직으로 진출하여 현의 관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등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데 진력하였다.[2]
또 오나라는 당시 이민족의 숱한 습격으로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는데, 육손은 주민들 가운데 지원병을 모집해 쳐들어오는 이민족을 하나하나 격파하고, 투항하는 자는 자기 군세에 가담시켰다. 육손의 그러한 활동에 주목하던 손권은 그에게 형 손책의 딸을 시집보내어 친분 관계를 맺고 종종 정치적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였다. 육손의 ‘이민족을 하나둘씩 평정하여 그 가운데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강력한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은 손권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 실행을 육손에게 맡겼다. 그래서 각지의 이민족은 육손에 의해 점차 토벌되어 정예병으로 흡수되었다.
오나라와 촉한 간에 형주를 둘러싼 대립이 일어나고 있던 도중 전선 사령관이었던 여몽이 병에 걸려 귀환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육손은 여몽이 전선을 이탈하면 조만간 그를 경계해 북쪽으로의 진격을 망설였던 관우가 필시 방심하여 올 것이라 여기고, 여몽을 자기 진영으로 불러들여 관우가 방심한 틈을 노려 형주를 빼앗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여몽은 오나라로 돌아와 손권에게 그 점을 진언하고, 자기 대신 형주 수비를 맡을 사람으로 육손을 추천하였다.
여몽의 후임이 된 육손은 관우에게 매우 겸손한 내용의 서신을 보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안심하고 위나라를 침공한 관우는 여몽의 계략에 허를 찔러 패배하고 사로잡혀 처형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약 7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오나라를 침공하였다.(이릉방어전) 이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전군의 지휘권을 맡겨 적의 침공을 막게 하였다. 양군은 이릉에서 대치하였는데, 육손은 전군에게 수비를 단단히 하고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린다. 그 때문에 육손을 향해 겁쟁이라며 불평하는 병사들이 많자 육손은 손권이 친히 내린 보검을 뽑아들고 “지금은 한 치의 땅이라도 취할 수 있다면 어떤 욕됨이라도 참아야 할 것이오! 그대들은 각처의 요지를 지키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시오! 만약 함부로 움직인다면 군령을 어긴 죄로 처형할 것이오.” 하고 충고하여 그들을 설득하였다. 마침내 오랜 대치상태로 촉한군이 진을 들에서 숲으로 바꾸자 마자 육손은 즉시 화공을 가하여 격파하였다.
유비가 병으로 죽자 오나라와 촉한은 촉한의 사신인 등지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위나라에 대항하게 된다. 손권은 군사 면에서 육손은 오나라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되어 위나라가 종종 오나라를 침공해오지만 그 때마다 육손의 전략으로 가까스로 저지시켰다. 그 후 오나라 신료들의 맹활약 덕분에, 마침내 손권은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
244년 육손은 고옹의 뒤를 이어 승상에 임명되었다. 손화와 손패의 후계자 분쟁에서는 이미 태자인 손화를 지지하였고, 손패파의 핵심 인물 전기를 그 아버지 위장군 전종이 옹호하자 이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 전씨 일족과 사이가 벌어졌다. 육손은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태자를 폐하지 않기를 여러 차례 말했으며, 또 직접 수도 건업으로 가서 말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전종 부자는 육손의 외가며 태자를 지지하는 고담, 고승, 요신 등을 참소하여 유배보냈고, 또 육손과 편지를 주고받은 오찬은 그로 인해 하옥되어 주살당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손권은 육손을 질책하였다. 육손은 이듬해 63살의 나이로 화병으로 분사했다.
육손이 죽은 뒤에도, 손권은 양축이 상소한 육손에 대한 20가지 조문을 들어 육항을 금고했으나, 육항이 모두 조리있게 대답하자 그제서야 손권은 육손에 대한 의심을 풀었고, 태원 원년(251년)에 손권은 육항에게 참언으로 육손 부자를 공격한 것을 사과했다. 경제 시대에 소후(昭侯)란 시호를 받았다.
등장
육손은 손권이 장군이 되었을 때부터 벼슬살이를 했다. 그러나 육손은 그 당시 주유, 노숙 등 쟁쟁한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중용되어 보이진 않는다. 육손은 주로 도적무리를 잡으며 레벨업을 했는데 회계군의 반림, 파양군의 우돌, 단양군의 비잔 등이 있다. 비잔은 조조에게 몰래 부탁을 받고 산월을 선동하여 호응한 것인데 육손이 적은 병사를 이끌고 매복으로 순식간에 그들을 격파하고 수만명의 인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육손의 공적이 크게 인정을 못 받은 건지 그 후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두각을 나타내다.(219)
그리고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형주 습격.
이 때 육손의 나이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며 그 나이 때 주유가 죽은 걸 보면 그렇게 늙은 것은 아니나 또한 그 나이 동안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에는 약간 의아하긴하다. 주유 이하 도독들의 그늘에 가린 것인지...
여몽전을 보면 여몽이 질병으로 하여금 돌아온 것은 여몽이 육손을 만나기 전이다. 즉, 형주 뒤치기는 여몽이 생각해냈으며 육손은 질병으로 돌아온 여몽을 만나 조언을 한다. 즉 여몽과 육손은 함께 모의하지 않았으나 그 의견이 같았던 것이다.
육손이 이러한 행동을 했기 때문인지, 원래 여몽이 육손을 눈여겨봤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몽은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육손을 천거한다. 육손은 교만계를 써서 관우가 형주를 비우도록 한 뒤, 이이와 사정을 이끌고 스스로 촉의 장수들과 교전하여 여러 성을 빼앗고 회유책을 써서 포로로 잡거나 회유한 이가 수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중임을 맡다. (222)
육손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릉대전. 여기서 육손은 죽은 여몽의 자리를 맡아 대도독이 된다.
기록에는 한당이 육손에 반발하였다는 내용이 없으나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한당은 손견 때부터 오를 위해 애쓴 3대 공신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그 관록이 결코 녹록하지 않은데 그의 입장에서는 애송이에 불과한 육손(비록 나이는 30후반~40대이지만)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이 아니꼬울 수가 있었을 것이다. 정보는 주유와 함께 좌우도독이 되는걸 불쾌해했는데 한당은 그의 휘하에 서게 되었으니 오죽하랴. 손책 시절의 노장(아마 한당이 포함될듯)과 황실의 친척들은 육손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육손은 전투에서 머리를 상당히 굴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치른 전투는 머리를 굴리지 않은 전투가 없다. 유비가 매복하여 오군을 도발하자 모두가 나가 싸우려는데 육손은 의심하여 가지 않고, 유비는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산골짜기에서 나갔다. 백전노장 유비의 계책을 육손은 간파해낸 것이다. 서로간의 심리전이 오간 뒤, 육손은 날을 정해 하루만에 촉군을 크게 무찌른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죽은 장수는 장남, 풍습, 호왕 사마가 등이 있고 그의 배, 병기, 수군, 보병은 한번에 손실되었으며 죽은 자가 수만명이 되었다고 한다. 중신 황권은 길이 막혀 위에 투항을 하고 말았으니 유비는 살아생전 가장 큰 패배를 육손에게 맛보게 되며, 매우 부끄럽고 분하여 "내가 육손에게 좌절과 모욕을 당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닌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비의 발언은 예전에 이릉전투가 유비가 마지막으로 불사르기 위해 치른 전투는 아니었다 라는 걸로 보인다. 즉 유비는 이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사족이고, 육손은 천하의 효웅 유비를 무찌름으로써 이후 촉은 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삭혀둘 수 밖에 없게 되고, 둘은 다시 동맹을 맺는다. 이 때 서성, 반장, 송겸 등은 유비를 공격하여 사로잡기를 청했으나 육손은 조비가 공격할 것을 예측하여 더 이상의 추격은 하지 않고 실제로 조비는 침공을 하게 된다.
위의 대군을 격파하다(228)
촉의 대군을 물리치고 위의 세갈래 군을 막은 후 삼국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문다. 손권은 여러번의 실패로 인해 새로운 계책을 짜게 되고, 이는 주방의 거짓 투항이었다. 주방은 일곱 통의 편지를 보내 조휴를 속이게 되고, 조휴는 보기 10만을 이끌고 환현으로 직접 들어왔다. 대오 전선에서 사마의라고도 할수있는 만총은 이를 간파하였지만 미처 이르기도 전에 조휴는 군을 이끌고 들어갔다. 조휴는 곧 속은 걸 알았지만 자신의 병력이 10만에 이름에 의지하여 전투를 개시했지만 육손은 주환, 전종과 과감하게 부딪혀 적을 대파하게 된다. 그 때 주환은 손권에게 적의 퇴로를 막아 조휴의 10만을 전멸시킨뒤, 단숨에 수춘-허창-낙양을 공략하자는 건의를 했고, 손권은 육손에게 상의했지만 육손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거절한다. 육손이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위 진영 측에서는 가규, 장제, 만총 등이 실제로 협석이 끊길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가규와 주령 등은 협석으로 나아갔다. 오서에 따르면 육손이 주환의 계책을 물리쳤지만 위서에는 오군이 협석을 점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아, 나중에라도 육손은 협석을 끊어 조휴군을 몰살시키려고 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가규전에는 가규가 협석이 끊길까봐 군을 두배의 속도로 진군하여 협석을 구원했으며 이로 인해 조휴의 군은 구조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육손은 역시 안전주의자로 한번의 승리로 만족했지 이에 대해 무리하게 욕심을 내다간 그 승리마저 잃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싶다.
그 후의 이야기
두번의 큰 승리 이후로 육손은 이렇다할 전공을 세우지 못한다.이 후 육손이 위를 두번 공격하는데 모두 조기에 계책을 들키는 바람에 물러난다. 여강으로 향하는 것처럼 하여 후미와의 사이가 텅 비게 하기 위한 유인을 실시했지만 만총은 이를 간파했고, 육손은 자신의 계책이 들킴을 깨닫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236년 육손과 제갈근은 양양을 공격한다. 이 때 손권은 또다시 합비쪽을 공략한 것같은데 오주전에는 이 때의 전쟁 기록이 없다. 그러나 육손전에 의하면 '주상이 돌아갔고'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손권이 공략하다가 퇴각했다 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육손은 손권과의 연계를 위해 손권에게 사자를 보냈지만 사자는 잡히고 만다. 제갈근은 이를 알고 매우 두려워하며 "주상은 이미 돌아왔고, 적군은 우리의 실정을 알게 되었으니 응당 급히 떠나야만 합니다" 라고 하지만 육손은 침착하게 군을 이끌고 퇴각하였으며 적들은 감히 추격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냥을 간다는 소문을 내고서는 은밀히 군을 출동시켜 강하군의 신시,안육,석양을 공격하여 얻고, 이웃 지역의 강하공조 조탁, 유비군의 대장 배생과 이인의 매이 등이 모두 수하를 거느리고 육손에게 귀의했다. 또한 강하태수 녹식이 항상 오나라 변방 지역을 소란스럽게 하니, 계책을 써서 그를 면직시켰다. 237년에는 반란군들을 평정하여 정예병사 8천여명을 얻는다. 이 이후로 육손은 승상으로 임명되어 군을 이끄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조정의 일을 맡다가 손권에게 여러차례 질타를 받고 분사하고 만다.
장수로써의 육손에 대한 평가
육손은 매사에 매우 신중하고 계획적인 인물로써 즉흥적인 전투를 행한 적이 한번도 없다. 전쟁에 임함에 있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계책을 짰으며,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이릉에서 유비를 막을 수 있었으며, 그 후 곧바로 조위의 침공을 예측하여 대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생각으로 인해 공격에서는 소심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 공격에는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육손이 있음에도 손권은 육손을 데려가지 않고 스스로 합비를 공격한 적이 매우 많으며 이로 인해 실패를 거듭했다. 하지만 육손을 데려 갔다고 하더라도 손권의 북벌은 쉽지 않을 것이다. 육손의 냉정하고 신중한 성격으로는 승리를 확신해야지만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고, 그 당시 만총, 사마의 등이 건재했던 대오전선 방면에는 그러한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틈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형주 침공이나 조휴 격파 등 승리를 확신할 때는 과감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러한 틈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육손. 아마 수비에는 이토록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없었을 것이나 공격에서는 오히려 주유같은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장수가 오나라에는 더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
*읽어볼 거리*
[주유에 비견된 인물 "육손"]
육손 - 오나라에 대한 < 정사 >와 < 연의 >의 기록을 읽는 사람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자가 백언인 육손은 본래 손권의 사위로서 등장하며 이릉전 이전, 감택에 의해 천거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을 아는 것이 드물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유망한 인물들의 평가가 오르내리는 당대의 사회적 풍조상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우리가 잘 아는 조조나 손권, 제갈량 등이 모두 이러한 사회적 풍조로 당대인의 유명한 평가가 하나씩 있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보면, 육손은 매우 특이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며, 역으로 보면 그 스스로 얼마나 자신의 재주를 감추며 살아왔는지 짐작케 한다. 이처럼 그 스스로 드러나지를 바라지 않았지만 낭중지추라, 결국 그의 비상한 재주는 세상에서 빛을 발한다.
그래서 오나라 후반기 대지략가이며 충신인 육손,
그의 이름은 오나라의 영웅 반열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1. 이릉전으로 주위의 비판을 극복하다 - < 연의 >도 감추지 못한 재주
육손의 데뷔무데는 단연 이릉전투이다. 초전에 나간 손환을 비롯, 오군 수뇌부가 유비의 거센 공격을 막지 못하자 오나라 전체는 크게 긴장하며 당황하게 된다. 이러한 대대적인 공략은 관우의 사망 이후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지만, 촉군의 공세와 그 전과는 초반 가히 눈부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파죽지세로 이릉 근방까지 접근하자 누군가 여몽 사후 어지러워진 전황을 풀고 오를 구원할 인물이 필요했다. 육손은 이러한 중차대한 사명을 띄고 이릉전투에서 대도독이라는 직함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이 전투가 육손의 이름과 명망을 알리는 중요한 전기였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육손에게 있어서 이 전투의 승패는 향후 그의 입지를 결정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독자들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가 실질적으로 < 연의 >에 등장한 것은 이보다 훨씬 전인 형주 공략전 - 여기서 그는 관우를 기만하는 술책으로 촉의 형주지배를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이릉전이 그의 데뷔무대인가?
나의 이러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독자 중 이런 의문을 표하는 분들이 간과하는 것은 '그가 왜 형주 공략전에 참여할 수 있었는가'에 관한 것이다. 내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그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는 감택의 천거 부분 - 여몽을 경계한 관우를 교란하기 위해 육손이 대타로 투입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형주전은 육손의 표면적 등장일 뿐, 그의 재능을 인정받은 곳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더군다나 육손을 알아보았던 여몽이 전쟁 사후 갑자기 급사함으로써 오나라 군부의 신망을 얻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을 지체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릉전을 그의 실질적 데뷔로 본다. 만일 이 전투에서 그가 승리를 얻지 못했다면 오나라의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 연의 >의 기록만 봐도 그렇거니와, 오나라 군부가 그를 신망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손권의 사위'라는 약점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이릉전에서 화공으로 700여리에 연한 촉군의 영채를 불사름으로써 오나라 전체가 그의 재주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어복포 석진의 배경을 깔아 일부러 제갈량보다 한 수 아래처럼 묘사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유비와의 심리전에서 승리했다는 점은 그의 재주가 비상했음을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오나라의 기둥이었으나 후계 구도에 말려 죽다 - < 정사 >의 뒷얘기
그 후 육손은 < 연의 >에서 이따금 등장한다. 그는 주로 양주, 형주를 중심으로 위군과 맞서는 내용이 주된 흐름으로 나오지만 대체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 점은 오나라 측의 기록을 중시하지 않는 나관중의 시선 때문이다. 그렇지만 육손의 후반부 지위는 < 정사 >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내가 생각컨대, 육손의 지위는 거의 전반부의 주유와 대등하며 그 비중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사실상 육손이 없는 후반부는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의 지위는 매우 공고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오국 최고의 지위인 승상에 오름으로써 신료 중 대표격이자 원로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점에서도 육손은 오나라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 정사 >를 읽어보면 육손이 사망한 이유로 '분사'라는 소개를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그가 통분하여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장남의 사망 이후 분란의 원인이 된 후계 구도 때문이다. 당시 손화와 손패에게 똑같이 후계자와 비슷한 예우를 해줌으로써 말썽의 소지를 불러 일으켰던 손권은 이로 인해 신료들과도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육손과의 갈등도 이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당시 적장자 계승의 원칙이 뚜렷했던 중국 문화의 특성상, 손패에게 후계자인 손화와 같은 정도의 예우를 해주었다는 점은 분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일 - 이에 육손을 비롯한 신료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손권이 굳이 이를 꺾지 않다가 후일 두 아들까지 희생시킨 점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쨓든 이 와중에서 승상의 직위를 박탈당한 육손은 결국 분사하고 만다. 그리고 육손의 사망과 함께 오나라도 급격히 기울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신료들과의 불화로 내부 갈등을 조장했고 왕실의 후계 구도를 어지럽힌 때문이다. 결국 육손의 아들인 육항이 분전했으나, 오나라는 결국 손호의 대에 이르러 서진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만다. 더군다나 당시 육손의 손자인 육기는 훗날 서진으로 옮겨 벼슬을 했으나 주위의 모함으로 독살되는 등, 육손의 후예들에 대한 불운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육손의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후손들의 불운을 부르는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육손 - 그는 오나라의 걸출한 영웅으로서 주유와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고 봐도 무관하다.
그럼에도 그의 사망과 함께 오나라가 흔들렸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물론 육손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당시 육손을 정점으로 하는 오나라 조정의 건전한 신료들이 대거 힘을 잃음으로써 비극이 점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오나라 내부의 단결력과 건전성이 상실됨으로써 결국 오나라는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육손의 사망은,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오나라의 사실상 종말을 고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육손과 제갈각의 잇따른 사망은 오의 멸망을 상징하는 중대한 기로였다는 것이다.
-------------------------------------------------------------------------------------------------------------------
[육손열전 요약]
육손은 자가 백언(伯言)이고 오군 오현 사람이다. 그의 본명은 육의(陸議)이며, 대대로 강동의 호족이었다. 육손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당조부이며 여강태수였던 육강(陸强)을 따라 임지에서 생활했다.
원술은 육강과 틈이 있었으므로 장차 육강을 공격하려고 했다. 육강은 육손과 친척들을 오현으로 돌려보냈다. 육손은 육강의 아들 육적(陸適)에 비해 몇 살 위였으므로 육강을 대신해 집안을 관리했다.
손권이 장군으로 임명되었을 때, 육손은 21세였다. 그는 처음에는 손권의 막부에 임명되었으며, 동서조령사를 역임하고 지방으로 나와 해창현(解創縣) 둔전교위로 임명되고, 아울러 현의 정무를 관리했다. 그 현이 해를 이어서 큰 한재가 닥치자, 육손은 관청의 곡식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을 권유하고 감독하였다. 백성들은 매우 많은 혜택을 입게 되었다. 그 당시 오군. 회계군. 단양군에는 숲속에 숨어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육손은 손권에게 지금 해야 할 일을 진술하고 이런 사람들을 소집시킬 것을 요청했다.
회계군에 있는 산적의 우두머리 반림(般臨)은 오랫동안 이 지역의 독으로 있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록 체포되지 않았다. 육손은 새로 수집한 수하의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험준한 곳까지 깊숙이 들어가 토벌하자,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했다. 육손 수하의 병사는 이미 2천여 명이 되었다.
파양군 도적 우두머리 우돌(優突)이 난리를 일으키자, 육손은 또 그곳으로 가서 토벌했다. 그는 정위교위(定爲校慰)로 임명되었고, 군대를 이포(理浦)에 주둔시켰다.
손권은 형 손책의 딸을 육손의 배필로 짝지어 주고, 이 시대의 정치문제에 관해, 여러차례 의견을 구하였다. 육손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영웅들이 각지에서 패권을 쥐고 대치하고 있고, 시랑이 같은 자들은 엿보며 관망하고 있습니다. 적을 무찌르고 혼란을 평정시키려고 한다면 많은 사람이 없고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산월의 도적은 오랜 원수인데, 험한 지형에 의지하고 깊은 산 속에 있습니다. 내부의 환란이 평정되지 않고 먼 곳을 도모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대오를 확충시켜 그중에서 정예를 선발해야만 합니다."
손권은 그의 책략을 받아들이고, 그를 장하우부독(場下優不讀)으로 임명했다. 마침 단양군에 있는 도적 우두머리 비잔(費殘)이 조조의 인수를 받고 산월을 선동해 몰래 호응했다. 비잔의 무리는 많았지만 그곳으로 간 육손의 병사는 적었다. 그래서 육손은 군기를 늘리고 군고(軍考)와 호각을 배치시켜 놓고 밤에 산골짜기에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갔다. 비잔의 무리는 순식간에 격파되어 흩어졌다. 육손은 동방의 세 군에서 부대를 편성하고, 강인한 사람은 병사로 삼고, 약한 사람은 민호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하여 결국에는 수만 명을 얻게 되었고,오랜 세월 지속된 환란은 전부 소탕되었으며, 군대가 지나간 곳은 깨끗해졌다. 육손은 돌아와 무호(無鎬)에 주둔했다.
회계태수 순우식(淳牛識)이 손권에게 표를 올려, 육손이 임의대로 백성들을 취하여 관할지역을 소란스럽게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육손은 이후에 도성으로 가서 손권과 말할 때, 순우식은 훌륭한 관리라며 칭찬했다. 그러자 손권이 말했다.
"순우식은 그대를 고발했는데, 그대는 순우식을 추천했다. 무슨 까닭인가?"
육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우식의 뜻은 백성들을 기르려고 했기 때문에 저를 고발한 것입니다. 만일 제가 다시 순우식을 비방한다면 성덕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풍은 조장할 수 없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이것은 진실로 훌륭한 행위다. 다만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여몽이 질병을 칭하여 건업으로 왔을 때, 육손은 가서 방문하고 이렇게 말했다.
"관우와는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멀리 내려왔습니까? 이후에 걱정할 만한것이 없겠습니까?"
여몽이 말했다.
"진실로 당신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만, 나의 질병이 심합니다."
육손이 말했다.
"관우는 자신의 용기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능멸합니다. 처음으로 큰공을 세워 마음은 교만해지고 의지는 안일해졌으며 오직 북진에만 힘쓰고 우리에게는 경계의 마음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질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한다면, 틀림없이 더욱 방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나가면, 그를 붙잡아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려와 지존을 만나는 것은 마땅히 좋은 계략입니다."
여몽이 말했다.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게다가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여몽이 도착하자, 손권이 물었다.
"누가 그대를 대신할 수 있소?"
여몽은 이렇게 대답했다.
"육손은 사려깊고, 재기는 중임을 담당할 만합니다. 그가 미래의 일을 살피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는 대임을 맡길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 먼 곳까지 이름이 나 있지 않고 관우가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므로 또 그를 뛰어넘을 자는 없습니다. 만일 그를 임용한다면, 외부에는 참된 의도를 숨기고 안으로는 유리한 형세를 관찰하도록 한 연후에 관우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
손권은 곧 육손을 불러 편장군 우부독으로 임명하고 여몽을 대신하도록 했다.
육손은 육구(育口)에 이르러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 나는 당신이 적군의 동태를 관찰하고 나서 일정한 법칙에 따라 군대를 지휘해 가볍게 일어나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았는데, 당신의공적은 위대하오! 적국이 패배한 것은 동맹국에는 이로운 일이므로 당신의 승리 소식을 듣고 손뼉을 쳤고, 중원을 석권하는 대업을 이루어 함께 조정을 보좌하고 기강을 유지시키기를 희망했었소. 최근 재능없는 이 사람이 임명을 받아 서쪽으로 오게 되었소. 나는 당신의 풍채를앙모하여, 좋은 대우와 가르침을 받기를 바라고 있소.
또 이렇게 말했다.
-우금 등이 당신의 포로가 되자,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그대를 존경하고 찬탄하였으며, 장군의 공훈은 세상에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비록 옛날 진문공(晉文公)이 성복(城復)의 싸움에 참가시킨 군대나 회음후(灰陰侯 ; 漢信)가 조(造)나라를 공격한 계략일지라도 그대를 넘을 수는 없을 것이오. 서황(徐晃) 등이 적은 수의기병을 진지에 주둔시켜 당신의 동향을 엿보고 있다고 들었소. 조조는 교활한 적이오.그는 실패한 분노 때문에 어려움을 생각지 않고 아마 은밀히 병사를 늘려 그 뜻을 이루려고 할 것이오. 비록 그의 군대는 강하지 않을지라도 용맹하고 강인한 장수는 여전히 있소.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항상 적을 경시하는 생각이 생겼소. 고인의 용병술에 의지하여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는 더욱 경계고, 장군이 다방면으로 방침을만들어 완전하게 승리하기를 희망하오. 나는 서생으로 재능이 소원하고 학문이 얕으며행동은 더딘데, 감당하지 못할 직무를 맡게 되었소. 나는 위엄과 덕행이 있는 당신과 이웃이 되어 기쁘고, 나의 마음을 전부 기울이고 싶소. 비록 당신의 계책에 부합되지 못할지 라도 여전히 그리워할 것이오. 만일 당신의 관심을 얻게 된다면 이런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오.
관우는 육손의 편지를 살펴보고 그가 겸손하게 몸을 낮춰 스스로 의탁하려는 뜻이 있고, 매우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다시 경계하는 바가 없게 되었다. 육손은 이런 상황을 손권에게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관우를 잡을 수 있는 요령을 진술했다. 손권은 은밀히 서쪽으로 군사를 파견하고, 육손과 여몽을 선봉 부대가 되도록 하여 공안과 남군을 신속하게 점령하도록 했다. 육손은 곧장 진군했다. 그는 의도태수를 겸임하고 무변장군(貿邊將軍)으로 임명되고 화정후(貨鄭侯)로 봉해졌다.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煩宇)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각 성의 관리나 이민족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투항했다. 육손은 금. 은. 동.의 관인을 청하여 방금 귀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해는 건안 24년(219) 11월이다.
육손은 장군 이이(以利)와 사정(事精) 등을 파견해 병사 3천 명을 인솔하여 촉나라 장수 첨안(尖案)과 진봉(眞鳳)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이는 수군을 지휘하고, 사정은 보병을 이끌고 가서 험한 요새를 끊어 즉시 첨안 등을 무찌르고 진봉을 사로잡았다. 또 방릉(防凌)태수 등보(燈保)와 남향(南響)태수 곽목(廓穆)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자귀현의 호족인 문포(文浦)와 등개(燈改) 등은 이족의 병사 수천 명을 규합해 서쪽의 촉과는 머리와 꼬리가 되었다. 육손은 또 사정을 지휘하여 문포와 등개를 토벌하여 무찔렀다. 문포와 등개가 달아나자, 촉나라에서는 이들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육손은 사람을 보내 이들을 회유했는데, 문포는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투항했다. 육손이 앞뒤로 하여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거나 회유하여 투항을 받은 자는 수만 명이 되었다. 손권은 육손을 우호군. 진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승진시켜 누후(樓侯)로 봉했다.
당시 형주의 사인(士人)들이 막 오나라로 귀의했는데, 관직에 오른 자도 있고 안배를 받지 못한 자도 있었다. 그래서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한고조가 천명을 받았을 때는, 남다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임용하였고, 광무제(光武帝)가 중흥했을 때는 매우 걸출한 사람들이 이르렀습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도덕과 교화를 흥성하게 할 수 있다면, 친근하게 하거나 소원하게 할 필요가없습니다. 지금 형주는 방금 평정되었고 인물들은 현달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지성으로 원하는 것은, 이들에게 공양하고 발탁하는 은혜를 보편적으로 주어 스스로 나아갈 기회를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연후에 천하 사람들은 목을 길게 빼고 우리들의 커다란 교화로 돌아오려고 할 것입니다.
손권은 그의 건의를 공손하게 받아들였다.
황무 원년(222),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서쪽 변방지역으로 향해 왔다.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부절을 주어 주연(周然). 반장(般場). 송겸(送謙). 한당(寒黨). 서성(瑞城). 선우단(船優斷). 손환 등 에게 5만 명을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 유비는 무협과 건평에서부터 이릉경계까지 이어 둔영 수십 개를 세우고 금, 은, 비단, 작위, 상으로 각 소수 민족들을 회유했다. 그리고 장군 풍습(馮習)을 대독으로 임명하고, 장남(場藍)을 선봉으로 삼았다. 보광(報廣). 조융(朝隆). 요순(料巡). 부융(釜隆) 등은 각각 별독(瞥督)으로 임명하고, 우선 오반(梧般)을 보내 수천 명을 인솔하여 평지에 군영을 세워 도전하도록 했다. 오나라 장수들이 공격하려고 하자 육손이 말했다.
"이런 행동에는 반드시 음흉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잠시 살펴보도록하자."
유비는 그의 계획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곧 바로 8천 명의 복병을 데리고 산골짜기에서 나갔다. 육손이 말했다.
"여러분들이 오반을 공격하자는 요청을 듣지 않은 까닭은 반드시 거짓이 있다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릉은 요충지이며 나라의 최전선에 있는 관문인데, 비록 쉽게 얻긴 했지만 역시 또 쉽게 잃게 됩니다. 그곳을 잃게 되면 한 군의 토지를 손실할 뿐만 아니라 형주를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곳을 다투어 틀림없이 성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비는 통상적인 이치를 어기고 자신의 집을 지키지 않고 과감히 보냈습니다. 신은 비록 재능은 없지만, 폐하의 위엄과 명성에 기대어 순리를 따라서 거역하는 자를 토벌하고 짧은 시간에 파괴했습니다. 유비가 앞뒤로 군사를 사용한 것을 살펴보면, 실패는 많았고 성공은 적었으므로, 이로부터 걱정할 가치가 없다고 추단했던 것입니다. 신은 처음에는 그가 바다와 육지로 함께 진출할 것을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오히려배를 버리고 도보로 곳곳에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부서를 살펴보았지만, 다른 변화는 반드시 있을 수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베개를 높이 베고 이일에 괘념치 않기를 드려 원합니다.
육손 수하의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유비를 공격한다면 응당 그가 처음 병사를 내었을 때 했어야만 했습니다. 현재는 그로 하여금 오나라로 5,6백 리를 들어오도록 하여 서로 대치한 지 7,8개월이나 되었으며, 많은 요충지는 모두 그가 굳게 지키고있으므로 그를 공격하면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육손이 말했다.
"유비는 교활한 적이며, 매우 많은 일을 겪었고, 그의 군대가 처음 집결했을 때, 그의 생각은 조밀하고 전일하였으므로 침범할 수 없었다. 현재는 매우 오랫동안 출병하여 우리의 편의를 차지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피곤하고 사기는 떨어졌으며, 또 새로운 계책은 없다. 앞과 뒤에서 협공 하여 적을 잡을 때는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나서 육손은 먼저 유비의 한 진영을 공격했지만, 불리했다.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헛되이 병력을 소모시킬 뿐입니다."
육손이 말했다.
"나는 이미 유비 진영을 격파시길 방법을 알고 있다."
곧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화공(火攻)으로 격파시키도록 명령했다. 순식간에 형세가 이루어지자,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동시에 함꼐 공격해 장남, 풍습 및 호왕(鎬王) 사마(師麻) 등의 머리를 베었으며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시켰다. 유비의 장수 두로(豆勞)와 유녕(油寗) 등은 달아날 길이 없자 투항을 요청했다. 유비는 마안산(麻案山)에 올라 주위에 군대를 포진시켰다. 육손이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이곳으로 육박해오자 유비의 진영은 붕괴되고 와해되었으며, 죽은 자는 수만명이 되었다.
유비는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역참의 관리가 직접 남아있는 물건을 지고 군악기나 개(槪)를 길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 적병의 추격을 끊었다. 유비는 겨우 백제성(白題城)으로 들어갔다. 그의 배. 병기. 수군. 보병의 물자는 한 번에 거의 손실됐고, 병사들의 시신은 장강을 떠다녔다. 유비는 매우 부끄럽고 분하여 다음과 같이말했다.
"내가 육손에게 좌절과 모욕을 당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닌가?"
처음에 손환은 단독으로 이도에서 유비의 선봉대를 토벌하려다가 유비에게 포위되었다. 그래서 육손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육손은 이렇게 말했다.
"안된다."
장수들이 말했다.
"손안동(孫安動 ; 손환)은 손권의 동족인데, 그가 포위당한 것을 알고 어찌 구하지않습니까?"
육손이 말했다.
"안동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고 성은 견고하며 식량은 충분하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 나의 계책이 실시되는 것을 기다리면 안동을 구하지 않아도, 안동의 포위는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육손의 계책이 실시되자, 유비는 과연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손환은 이후에 육손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나는 사실 구원받지 못한 것을 원망했었습니다. 대국이 결정된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당신의 조처에는 방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비를 대항할 때, 장군들 가운데 어떤 이는 손책 시대의 노장이고,어떤 이는 황실의 친척이었으므로 각각 긍지를 갖고 서로 듣고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육손이 칼을 잡고말했다.
"유비는 천하에 이름이 알여졌으며 조조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 그가 우리의 경내에 있는데, 이것은 강대한 적수인 것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국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서로 화목해야 하며 함께 이 적을 무찔러서 위에서 받은 은혜를 보답해야만 하는데, 서로 순종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해야만 되는 일이 아니다.나는 비록 서생이지만, 주상의 명령을 받았다. 국가에서 여러분들을 굽혀 나의 명령을 받도록 한 까닭은 나에게 칭찬할 만한 약간의 장점이 있어 치욕을 참아내고 중임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 맡은 일을 해야지, 또 어찌 말을 하겠는가! 군령(軍嶺)은 영원한 것이니, 범할 수 없다."
유비를 격파시킨 계책은 대부분 육손에게서 나왔다. 장수들은 그를 존경하여 복종했다. 손권은 이러한 상황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애초에 장수들이 지휘와 약속에 복종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소?"
육손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두터운 은혜를 입어 임무는 저의 재능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 장수들 가운데 어떤 이는 주군께서 신임하는 사람이고, 어떤 이는 유능한 장수였으며, 어이는 공신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가가 대사를 이루는데 함께 할 사람들입니다. 신은 비록 재능이 낮지만, 인상여(認相如)와 구순(具淳)이 겸허하게 자신을 낮춘 뜻을 사사로이 흠모하여 국가의 대사를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손권은 크게 웃고, 그의 행동이 옳았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육손을 보국장군으로 봉하고, 형주목을 겸임하도록 하였으며, 즉시 강릉후(强綾侯)로 바꿔 봉했다.
또 유비가 백제성에 머물러 있자, 서성. 반장. 송겸 등은 각각 다투어 표를 올려서 유비를 반드시 붙잡을 수 있다며 다시 공격하기를 원했다. 손권은 이에 대해 육손에게 물었다. 육손은 주연과 낙통, 조비가 대군을 집결하여 겉으로는 우리 나라를 도와 유비를 토벌하려 하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이 있으므로 결정이 되면 즉시 군대를 돌릴 것이라고 보았다. 오래지 않아, 위나락 군대는 과연 출동했고, 오나라는 삼면에 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유비가 질병으로 사망하자, 아들 유선이 자리를 세습했다. 제갈양이 정권을 잡았으며,손권과 결맹을 맺었다. 그 당시 정사의 마땅한 바에 근거하여 손권은 육손을 통해 제갈양에게 설명하도록 하고, 아울러 손권의 인새를 새겨 육손의 관소에 두었다. 손권은 유선이나 제갈양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언제나 육손에게 보도록 하여 어기(魚機)의 경중(景衆)이나 시비의 타당성에 있어서 합당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곧바로 고치도록 한 연후에 봉인하여 보냈다.
황무 7년(228), 손권은 파양태수 주방(周房)에게 위의 대사마 조휴를 속이도록 했다. 조휴는 과연 병사들을 들어 환현으로 진입했다. 그래서 손권은 육손을 불러 황월(荒鉞)을 주고 대도독으로 임명해 조휴를 맞아 공격하도록 했다. 조휴는 사태를 알아차렸지만, 그에게 속은 일이 부끄러웠고 자신의 병마가 정예이고 많음에 의지하여 육손과 교전하기로 했다. 육손 자신은 중앙의 군대를 지휘하고, 주환과 전종에게 왼쪽과 오른 쪽 날개가 되도록 하여 세 갈래 길로 함께 나아가 조휴의 복병과 과감하게 부딪혀 달아나는 조휴의 병사들을 추격하여 곧장 협석까지 갔다. 여기서 죽이거나 포획한 자는 만여 명이며, 소. 말. 노새. 나귀가 끄는 수레 1만 대를 얻었고, 조휴 군대의 물자나 기계를 거의 빼앗았다. 조휴는 돌아간 후, 등에 종기가 나 죽었다.
육손은 각 군대를 정돈하여 무창을 지났는데, 손권이 주위의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자신의 우산 덮개로 육손을 가리고 궁궐 문을 드나들도록했다. 육손에게 하사한 것은 모두 자신이 사용하는 상등의 진귀한 물품이었다. 그 당시에는 육손과 견줄 만한 자가 없었다. 이후에 육손은 서릉으로 돌아왔다.
황룡 원년(229), 육손은 상대장군. 우도호로 임명되었다. 이 해, 손권은 동쪽의 건업을 순시하고 태자, 황자 및 상서 등 구경을 머물도록 했는데, 육손을 불러 태자를 보좌하도록 하고, 동시에 형주나 예장 등 세 군의 일을 관장하며 군사나 국사를 관리 감독하도록 했다. 당시 건창후(健窓侯) 손려(孫廬)가 전당 앞에 투압란(妬鴨欄)을 만들어 매우 정교하게 설치했다. 육손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마땅히 경전을 두루 살펴보고 스스로 새로움을 더하도록 힘써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이런 놀이를 하십니까?"
손려는 즉시 그것을 부수고 철거했다.
야성교위(也城校慰) 손송(孫松)은 공자들 가운데 손권이 가장 친애하는 자인데, 병사들을 놀리며 훈련시키지 않았다. 육손은 이 일에 대해서 그의 수하 관리들의 머리를 깎는 형벌에 처했다. 또 남양(南陽)의 사경(射慶)이 유이의 형벌을 우선하고 예절을 뒤에 한다는 견해를 칭찬하자, 육손은 사경을 질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절이 형벌보다 앞선 지 매우 오래되었다. 유이가 번잡한 궤변으로 이전 성인들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대는 현재 태자를 모시고 있으니, 마땅이 인의(仁義)를 존중하여 덕음(德飮)을 선양해야지 유이와 같은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육손은 비록 몸은 궁궐 밖에 있었을지라도 마음만은 국사에 있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그 당시의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저는 법이 너무 엄하고 상세하여 아래에서 법을 어기는 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근래 이래로 장수나 관리들이 죄를 지은 것은, 비록 그들이 신중하지 못한 점에 있어서는 추궁을 받을 만하지만,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나아가 취할 것을 도모해야 하고 작은 과실은 은혜를 베풀어 용서해 아래의 정서를 안정되게 해야만 됩니다. 그리고 현재 세상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훌륭한 재능이 우선해야 하므로, 사악하거나 음란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면 다시 선발하여 재능을 펼쳐 폐하께 보답하도록 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성스런 왕이 허물을 잊고 공로는 기억하여 왕업을 이룬 것입니다. 옛날 한고조는 진평(陳評)의 과실을 버리고 그의 기묘한 재략을 사용하여 결국에는 한왕조를 세우는 공훈이 있었고, 그의 공로는 천 년 간 전해졌습니다. 엄격한 법과 가혹한 형벌은 제왕이 대업을 융성하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징벌만 있고 용서가 없다면, 이것은 먼 곳의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커다란 계획이 아닙니다."
손권은 한쪽의 부대를 파견하여 이주(理州)와 주애(株涯)를 취하려고 하면서 모두 육손에게 자문을 구했다.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사해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응당 백성들의 힘을 동원하여 현재의 긴급한 임무를 처리해야만 합니다. 현재 병사를 일으킨지 수년이 지나 인원이 감소했으며, 폐하께서는 이것을 우려하고 침식을 잊으시고 장차 먼 곳으로 가서 이주를 취하여 대사를 이루려고 하십니다. 신이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이것은 유리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 리를 가서 땅을 탈취하여도 풍파는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고, 백성들은 수토(水土)가 바뀌어 반드시 질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병들을 달리게 하여 볼모지를 건너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다가 더욱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주애는 매우 험준한 곳이며, 그곳의 백성들은 금수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을 얻는다고 해도 대사를 이룰 수 없고, 그곳의 병사가 없어도 자신의 군대가 감소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강동에 있는 병사들은 자연 대사를 도모하기에 충분한데, 단지 병력을 축적한 연후에 움직여야만 합니다. 옛날 환왕(桓王 ; 손책)이 오나라의 기업을 세웠을 때, 병사는 5백 명이 안되었지만 대업을 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천명을 받아 강남지역을 개척하고 평정했습니다. 신이 듣기로는 혼란한 세상을 다스리 고 반역자를 토벌할 때는 반드시 군대의 위력에 의지해야만 되는데, 농업이나 양잠에 종사하여 의복과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백성들의 근본적인 사업이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마땅히 병사나 백성들을 양육하고 조세를 적게 거둬들여 백성들이 매우 화목해지고 도의로써 용감함을 권한다면, 황하와 위수 유역은 평정시킬 수 있고 전국은 통일될 것입니다.
손권은 이주를 정벌하러 갔지만,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보충하지는 못했다.
공손연이 맹약을 위반하자, 손권은 가서 정벌하려고 했다.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같이 말했다.
-공손연은 험난한 곳에 의지하고 견고한 수비에 기대어 우리의 특사를 구휴한 채 명마를 바치지 않고 있으므로 사실 원수가 되어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만이는 중원을 소란스럽게 하며 성왕의 교화를 받지 못하고, 새처럼 황폐한 변방에 숨어 있으면서 우리 군대에 대항하여 폐하로 하여금 진노하게 하여 작은 배를 타고 대해를 건너는 위험을 생각지 않고 예측하지 못하는 험난함을 결심하도록 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지금 천하는 구름처럼 혼란하고, 군웅들은 호랑이처럼 다투며, 영웅호걸들은 뛰어오르려고 하며 크게 소리지르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신무(信務)의 자태로써 하늘의 안배를 받아 오림(烏林 ; 적벽)에서 조조를 무찌르고, 서릉에서 유비를패배시켰으며, 형주에서 관우를 붙잡았는데, 이 세 명의 적은 당대의 영웅호걸이었지만 모두 그 예봉을 부러뜨렸습니다. 폐하께서 성스러운 교화로 어루만지자, 만 리 안의 백성들은 바람이 풀을 움직이는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원을 평정시키고 통일 대도(大度)를 실현 시킬 때인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여우레 같은 분노를 발산시키는 것은 처마 밑으로 가까이 와서 앉지 못하도록 한 경계를위배하고, 만승 군주의 지위를 가벼이 한 것입니다. 이 점이 신을 의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신이 듣기로는, 만 리를 가려는 뜻이 있는 자는 중도에 발을 멈출 수 없고, 천하를 통일시키려고 하는 자는 작은 일을 생각하여 큰 일을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강대한 적은 우리 경내에 있고, 변방 지역에 있는 자들은 우리 조정으로 아직 귀의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 배를 타고 원정한다면 반드시 적에게 엿볼 기회를 제공하게 될것이며, 걱정이 근심에 이르며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통일 대업을 완성할 수 있다면, 공손연은 토벌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종할 것입니다. 현재 멀리 요동의 백성과 명마는 아까워하면서, 어찌하여 유독 강동의 안정된 기업을 버리는 것 은 아까워하지 않습니까? 청컨데 병사들을 쉬게 하여 강력한 적군을 위압하고, 일찍 중원 지역을 평정하여 후세까지 빛나도록 하십시오."
손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가화 5년(236), 손권은 북쪽을 정벌하려고 육손과 제갈양에게 양양(養陽)을 공격하도록 했다. 육손은 신임하는 한편(漢賢)을 파견하여 표문(標文)을 갖고 손권에게로 가서전쟁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그런데 한편은 돌아오는 길에 면중(綿中)에서 적을 만나 체포되었다. 제갈근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웠으므로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상은 이미 돌아왔고, 적군은 한편을 붙잡아 우리의 실정을 전부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강물이 말랐으니 응당 급히 떠나야만 합니다.
육손은 이 편지에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사람들을 재촉하여 순무와 콩을 심도록 하였으며 장수들과 평상시처럼 바둑을 두고 활쏘기 놀이를 했다. 제갈근이 말했다.
"백언(伯言)은 지략이 많으니, 반드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직접 와서 육손을 만났다. 육손은 이렇게 말했다.
"적군이 주상께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또 걱정할 것이 없으며 우리에게 힘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은 이미 요충지를 지키고 있고, 우리 병사들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마땅히 스스로 진정시켜 병사들을 안정시키고 다양하게 변하는 계책을 편후에 물러나야 합니다. 지금 곧바로 후퇴함을 나타낸다면, 적군은 당연히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가까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실패하는 형세입니다."
그리고 은밀히 제갈근과 계획을 세워, 제갈근은 배를 이끌고 나오고, 육손은 천천히 대오를 정돈하면서 세력을 과장되게 나타내고 배를 따라 걸었으므로 적군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대군이 백위(白委)에 도착하자, 육손은 사냥하러 간다고 말하고서 은밀히 장군 주준과 장량 등을 파견해 강하군의 신시(新時). 안육(安毓). 석양(石洋)을 공격하도록 했다. 석양의 시장이 한창 시끄러울 때, 주준 등이 엄습해왔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물건을 버리고 성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성문이 닫혀 있자, 적군은 직접 자기 백성들을 죽인 연후에 성문을 열었다. 오나라 군대가 머리를 베거나 생포한 자는 모두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생포된 자들은 모두 구호를 받았으며, 사병들로 하여금 침범하거나 속이지 못하도록 했다. 가족들을 데리고 투항해온 자들에게는 사람을 시켜 다방면으로 돌보도록 했다. 만일 처자식을 잃었다면, 즉시 옷과 식량을 공급하여두텁게 위로하여 돌려보냈는데, 간혹 감동하고 앙모하여 서로 손을 잡고 되돌아오는 자도 있었다. 이웃 지역의 백성들도 귀의했는데, 강하공조(江夏功曺) 조탁(曺卓), 익양의 유비군 대장 배생(裵甥)과 이인(以人)의 우두머리 매이(昧理)등은 모두 수하의 무리들을 인솔하여 육손에게 와서 귀의했다. 육손은 재물과 비단을 기울여 이들을 돌아보고 보살폈다.
또 위나라 강하태수 녹식(祿識)은 병마를 관리하는 권한을 쥐고 항상 오나라의 변방지역을 소란스럽게 하면서, 위나라 노장 문빙(文聘)의 아들 문휴(文休)와 오랜 기간 화합하지 못했다. 육손은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되자, 즉시 녹석에게 거짓으로 회신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간절하고 측은한 편지를 받아보고 당신과 문휴가 오랫동안 불화로 틈이 벌어져 있으며 쌍방이 존재할 수 없는 형세이기 때문에 귀의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비밀리에 당신에게서 온편지를 조정에 바치고 표를 올려 인마를 모아 영접하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몰래 신속하게 준비를 끝내고 다시 귀의할 시간을 알려 주십시오.
육손은 편지를 변방지역에 놓도록 했다. 녹식의 병사가 편지를 주워 녹식에게 보여주었다. 녹식은 두려웠으므로 직접 처자식을 호송하여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녹식의 관리와 병사들은 그에게 귀의하지 않았으므로 면직되었다.
가화 6년(237), 중랑장 주지(周持)가 파양에서 병사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 손권은 이 일을 육손에게 물었다. 육손은, 이 군의 백성들은 쉽게 동요하고 안정시키기 어려우므로, 소집에 응하도록 할 수 없다면 아마도 도적으로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지는 병사를 모집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 군의 오거(吳擧) 등은 과연도적이 되어 주지를 살해하고 여러 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예장군과 여릉군의 옛 날부터 있던 사악한 백성들은 함께 오거에게 호응하여 도적이 되었다. 육손은 이 소식을 들은 즉시 토벌에 나서 격파시켰다. 오거 등은 서로 이어서 항복했다. 육손은 정예병사 8천여 명을 얻었고, 세 군을 평정시켰다.
당시 중서전교(中書典較)로 있던 여일(呂逸)이 요직을 훔쳐 차지하고 권력을 남용하여위세와 복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육손은 태상 반준(搬峻)과 함께 마음속으로 걱정하고이에 관한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이후에 손권이 여일을 주살하자 깊이 자책했다. 이에 관한 말은 <손권전>에 있다.
그때 사연(師延)과 사굉(師宏) 등이 각각 마땅히 해야 할 일에 관해 진술하여 유익한 사업을 일으켜 바꿔 보려고 했다. 손권은 이 일을 육손에게 심의하도록 했다. 육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강성함은 백성들의 힘에서 나오고, 재력도 백성들에게서 나옵니다. 백성이 풍족한데 국가가 빈약하거나, 백성은 빈약한데 국가가 강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얻으면 잘 다스리게 되고, 백성을 잃으면 혼란스럽게 됩니다. 만일 백성들이 이로움을 받고 있지 못한데도 힘을 다하여 국가에 보답하도록 한다면, 이것 역시 곤란합니다. 때문에 <시경>에서 `정치의 혜택이 백성들에게 마땅하고 사람들에게 마땅하면 하늘에서 녹을 받을 것이다` 라고 찬탄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을 안녕되게 하고 구제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몇년 사이에 국가의 재력은 조금씩 넉넉해질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다시 생각 하십시오."
적오 7년(244), 육손은 고옹을 대신하여 승상으로 임명됐다. 임명하는 조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덕행을 닦지 않은 몸으로 천명에 순응하여 제위에 올랐지만, 왕도(王道)로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여 간사한 자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짐은 아침 저녁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잠자리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오직 그대는 천부적인 자질과 총명함이 있어 미덕을 빛냈으며, 상장(上將)으로 임명되어 국가를 보좌하고 재난을 제거했다. 세상을 뒤덮을 정도의 공로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크나큰 총애를 받아야만 되고, 문무(文武)의 재능을 갖고 있는 자는 반드시 국가의 중임을 맡아야 된다. 옛날 이윤(伊尹)은 탕(帑)을 융성하게 했고, 여상(呂相)은 주(周)왕조를 보좌하였는데, 현재 조정 안팎의 임무는 사실상 그대가 겸하고 있다. 오늘 그대를 승상으로 임명하여 사지절. 수태상(輸兌相)인 부상(府相)으로 하여금 인수를 수여하도록 한다. 그대는 미덕을 드날려 아름다운 공업을 세우고 공손히 왕의 명령을 집행하여 천하를 어루만지고 평정시키라. 아! 삼공의 직책을 총괄하여 신하들을 훈도하니 공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노력하기를 바란다! 형주목, 우도호, 무창의 일을 겸임하던 것은 옛날과 같이 하라.
이보다 앞서, 태자와 노왕의 두 궁궐이 병립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대부분 자제를 보대 임무를 받도록 했다. 전종이 이 일을 육손에게 보고하자, 육손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제들에게 만일 재능이 있다면 임용되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을 것 이므로, 마땅히 사적인 청탁으로 관리로 임명되어 영리를 구하짐 말아야만 된다. 만일 이 일을 훌륭하게 실행하지 못한다면 결국 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궁궐의 세력이 대적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이쪽을 지지하는 파와 다른쪽을 지지하는 파가 대립관계가 있게 된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옛사람들이 매우 기피했던 것이다."
전종의 아들 전(全氣)는 과연 노왕에게 아부하고 경솔하게 교제관계를 맺었다. 육손이전종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김일제(金日製)를 본받지 않고 아기(雅記 ; 전지)를 비호 하였으니 당신의가정에 재앙이 이를 것입니다.
전종은 육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다시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태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의론이 있게 되자,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가 같이 말했다.
-태자는 정통이므로 마땅히 반석같은 견고함이 있어야 하고, 노왕은 번신(煩臣;왕실의 내부를 지키는 신하)이므로 총애와 대우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두 사람이 피차 각각의 위치에 있어야만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안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며 저의 의견을 진술합니다.
그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도성으로 가서 적자와 서자의 구분에 대해 직접 논의하여득실을 바로잡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손권은 그의 의견을 듣고도 따르지 않았다. 육손의 외숙인 고담. 고승. 요신이 모두 태자에게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육손은 무고하게 쫓겨나게 되었다. 태자태부 오찬은 육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왕래했다는 사실 때문에 옥에 갇혀 사망했다. 손권은 궁궐 안의 사자를 자주 파견하여 육손을 질책했다. 육손은 분노하고 통탄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고, 집에는 남은 재산이라고는 없었다.
당초 기염이 진영의 부서를 세우자는 여론을 조성했을 때, 육손은 이것을 경계하는 간언을 하면서 틀림없이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육손은 또 제갈각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보다 높은 관직에 있는 자에게 반드시 받들어 함께 승진하고, 나보다 낮은 관직에 있는 자는 도와줍니다. 지금 당신을 보니, 기세는 윗사람을 능멸하고 있고, 마음은아랫사람을 멸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덕행의 기초를 안정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광릉 사람 양축(讓縮)이 젊었을 때 명성을 얻었지만, 육손은 그가 마침내는 패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양축의 형 양목(讓鶩)에게 그와는 별도로 가문을 세우도록 권유했다. 그의 선견지명은 이와 같았다.
육손의 맏아들 육연(陸延)이 요절했으므로 차남 육항(陸沆)이 작위를 계승했다. 손휴가 제위에 있을 때 육손을 추증하여 시호를 소후(昭侯)라고 했다.
출처-파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