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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7강 -3(2009.11.02)
14-28 전통과 계보가 있어야 한다 道流(도류)야 山僧佛法(산승불법)은 的的相承(적적상승)하야 從麻谷和尚(종마곡화상)과 丹霞和尚(단하화상)과 道一和尚(도일화상)과 廬山拽石頭和尚(여산여석공화상)하야 一路行遍天下(일로행변천하)하나 無人信得(무인신득)하고 盡皆起謗(진개기방)이로다 如道一和尚用處(여도일화상용처)는 純一無雜(순일무잡)이라 學人三百五百(학인삼백오백)이 盡皆不見他意(진개불견타의)요 如廬山和尚(여여산화상)은 自在眞正(자재진정)하니 順逆用處(순역용처)를 學人不測涯際(학인불측애제)하고 悉皆忙然(실개망연)이요 如丹霞和尚(여단하화상)은 翫珠隱顯(완주은현)하야 學人來者(학인래자)가 皆悉被罵(개실피매)요 如麻谷用處(여마곡용처)는 苦如黄蘗(고여황벽)하야 皆近不得(개근부득)이요 如石鞏用處(여석공용처)는 向箭頭上覓人(향전두상멱인)하니 來者皆懼(내자개구)로다 그 다음 14- 28 전통과 계보가 있어야 한다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이런 제목은 전부 제가 단 건데,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지마는 스님들도 여기와서 이렇게 인연이 돼서 공부하고 또 다른 어떤 인연이 되면은 딴 데서 공부하고 과거 강원에서 사미 때는 사미 강사 스님 또 四集(사집)은 사집대로 四敎(사교)는 사교대로 大敎(대교)는 대교대로 또 이런 저런 몇 몇 스승을 거치면서 공부하고 그 외에 또 학교에 가면, 학교가면 많은 교수들한테 공부하고 뭐 그런 예들이 있듯이 여기 임제스님께서도 여기 저기 지금 꼭 가서 그렇게 밑에서 살았는지는 몰라도 최소한도 그 스님들의 사상과 예를 들어서 법문이나 어록 같은 것은 정말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듯이 그렇게 한 것처럼 그렇게 돼 있어요. 이게 중요한 것이죠. 전통적으로 강사나 학인을 일컬을 때 南行講師(남행강사) 또는 通方 學人(통방학인) 그런 표현을 쓰는데 南行이란 말은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면서 53 선지식을 친견하면서 자기 공부를 완성시켜 가듯이 그래서 많은 선지식을 평생을 통해서 모시고 공부한 그런 강사를 ‘남행강사’ 그런 표현을 하고 학인도 여기 저기, 通方,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지방, 우리나라로 치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 뭐 저기 옛날 같으면 뭐 북한, 다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어떤 그 스승들을 만나고 그 지역의 전통과 그 사찰의 가풍과 이런 것들을 다 본받고 배우면서 공부하는 학인을 ‘통방학인’ 그래요. 보통 일 년씩, 이 년씩, 삼 년씩 그렇게 이십 년, 삼십 년을 돌아다니면서 학인생활 한 그런 학인이 옛날에도 많이 있었어요. 그런 이들이 무섭다는 거죠. 왜냐면 견문이 워낙 넓으니까. 그래 그런 이들을 알아 줬어요. 남행강사, 통방학인 그런 말이 있는데 좋은 전통이죠. 여기도 보면은 道流(도류)야 山僧(산승)의 佛法(불법)은, 임제스님 자신의 불법은 的的相承(적적상승)했다 그랬어요. 확실한 어떤 전통을 계승을 했다 이런 말이죠. 從麻谷和尚(종마곡화상)과, 마곡화상 그리고 丹霞和尚(단하화상) 그 다음 道一和尚(도일화상), 이건 마조 도일선사, 廬山和尚(여산화상) 그리고 石頭和尚(석공화상), 이런 이들로부터서 一路行遍天下(일로행변천하)하니, 한 길로 천하를 두루두루 행해서 돌아 다녔으나. 無人信得(무인신득)하고, 사람을 믿는 이가 없고 , 그런 말이에요. 盡皆起謗(진개기방), 모두들 다 비방만 일으켰다. 그러니까 이런 스님들에게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했지마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비방만 했었다 그런 이야기죠. 예컨대 道一和尚(도일화상) 마조 도일화상의 작용하는 곳(用處)은 법문 서는 곳은 純一無雜(순일무잡)했더라, 이런 표현을 하는 거죠. 學人(학인)이 三百 또는 五百 명이 盡皆不見他意(진개불견타의)라, 모두 다 그 스님 밑에 있었지마는 그분의 뜻을 보지를 못한다, 이것 봐요. 삼백 명 오백 명이 그 도일화상한테 있었지마는 사실 마조 도일스님 밑에 깨달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나왔거든요. 90몇 명인가, 기록된 사람만 하더라도 그렇게 나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제 워낙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반해서 숫자가 적으니까 삼백, 오백 명이 그 사람의 뜻을 마조 도일의 뜻을 알지를 못한다 이거죠. 또 廬山和尚(여산화상)은 自在眞正(자재진정), 한 마디로 그분의 법을 자재하고 진정하다, 참되고 바르다, 또 자유자재롭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順逆用處(순역용처)를, 순하고 또는 거슬리고 하는 그런 법의 작용하는 곳을 또 學人(학인)이 不測涯際(불측애제)라, 애제를 측량하지 못한다, 애제라고 하는 것은 그 가장자리, 그 변두리를 측량하지 못하고 悉皆忙然(실개망연)이요, 다 다 망연, 아득하더라, 그런 표현이고. 如丹霞和尚(여단하화상), 예컨대 丹霞和尚(단하화상)은 翫珠隱顯(완주은현)하야, 구슬을 가지고 노는데 ‘隱顯(은현)’하는 것은 간혹 숨기기도 하고 또는 나타내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자유자재롭다 그런 말입니다. 구슬을 가지고 노는데 구슬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一心 자리고 또 무위진인 자리고 그런 표현이죠. 해서 學人(학인)이 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皆悉被罵(개실피매)여, 바로 모두 다 꾸지람을 입게 된다 이 말이지. 그리고 麻谷用處(마곡용처는), 마곡화상이 작용하는 곳은 苦如黄蘗(고여황벽)이라, 황벽이란 말이 소태라는 뜻이죠, 우리 소태라는 나무. 쓰기가 그 스님의 용처는 쓰기가 황벽과 같다. 皆近不得(개근부득)이다, 가까이 할래야 가까이 할 수가 없어 마곡스님은. 이런 것은 우리가 제대로 연구를 할려면은 단하스님은 단하 어록이라든지 마곡스님은 마곡 어록이라든지 또 마조도일 같으면 도일스님은 그분의 어록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우리가 섭렵을 하면서 그분의 가풍, 법 쓰는 법, 이런 것들을 우리가 음미하면은 짐작할 수가 있겠죠. 마곡스님 같은 경우는 그렇게 너무 이제 사람을 대하는데 맛으로 치면은 소태처럼 쓰게 한다, 도저히 가까이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유명한 石鞏用處(석공용처)는, 석공스님의 법을 쓰는 곳에는 向箭頭上覓人(향전두상멱인), 화살 앞에서 사람을 찾는다 이 말이여. 그러니까 누가 오든지 간에 바로 활에다가 화살을 매겨가지고 바로 사람을 쏠려고 하는 거에요. 본래 사냥꾼 출신이니까. 그러니까 세속의 습관 그대로 선지식이 돼서도 그 방법으로 법을 썼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來者皆懼(내자개구)로다, 오는 사람이 다 놀라죠. 활에다 화살을 매겨가지고 바로 사람을 쏠려고 하니까 누가 안 놀라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가풍이 다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임제스님도 물론 황벽스님에게 오기 전에 어록도 많이 보았을 것이고 경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화엄경을 많이 공부하신 걸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당시 조사스님들의 가풍이라든지 법을 쓰는 거, 그 왜 놓치겠습니까. 다 그렇게 참 섭렵을 하고 알아보고 그러니까 정말 당대에 내노라 하는 태산 준령과 같은 그런 선지식이 된 거죠. 이런 기회에 저도 친견했던 스님들을 몇 분 소개를 하면은 어릴 때 난 여기 범어사에 동산스님 계실 때 선방 생활은 못했어도 용맹정진할 때 학인들이 와서 당학을 봤어요. 일주일간 용맹정진하면 학인들이 으레 와서.. 그럴 때 일상생활 하는데는 동산스님 모시고 산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선방에 가서 선지식을 모시고 살게 된 것은 효봉스님부터에요. 동학사에 그때 효봉스님 살아계실 때 효봉스님 밑에서 金堂에서 한 철 지내고 또 경봉스님 밑엔 한 두 철 쯤 지내고 그 다음에 이제 춘성스님, 망월사에 계셨던, 요즘 책도 나오고 춘성스님 소개하는데 내 이름을 들먹거려가며 소개했드만, 춘성스님. 그 다음에 전강스님, 인천 용화사에서 선지식으로서 아주 훌륭했던 스님이죠. 전강스님은 인천서도 한 철 살았고 용주사에도 중앙선원 열어서도 또 한 철 살고 그랬습니다. 춘성스님도 모시고 살았고. 또 향곡스님이라고 원래 관음사에 그때 참 이십 대 초반인가 할 땐데 두어 철 살았죠. 그 다음에 이제 법룡스님, 한 3년 됐나요, 열반하신지. 저기 동화사 비로전에 계셨던 법룡스님. 그 후에 구산스님 뭐 성철스님 이런 스님들을 이제 모시고 살았고. 그 다음에 강원 계통으로서는 운허스님 모시고 살고 물론 탄허스님 모시고 살고 또 관응스님도 용주사에서부터 모시고 살고 그 다음에 관응스님은 대원정사에서 그 전에 탄허스님이 화엄산림을 이제 잘 했어요, 스님들 모아놓고. 그러니까 늘 라이벌 의식이 좀 있었어요, 탄허스님, 관응스님이. 관응스님도 유식을 가지고 서울 대원정사에서 공개적으로 스님들 모아놓고 그 때도 한 한 달 가까이 그렇게 거기가서 숙식을 제공 받아가면서 그렇게 했었습니다, 관응스님이. 그리고 그 후에 또 관응스님이 바로 내친 김에 동화사에서 또 유치를 해 가지고 동화사에서 또 유식을 가지고 강의를 하고. 그리고 또 그 다음에 또 바로 직지사에서, 스님 유식만 가지고 할 게 아니라 선문 가지고 합시다 해서 (선문) 염송가지고 직지사에서 여름에 한달 간 했어요.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때도 이제… 그때는 그런 큰스님들이 강의를 펴면은 곳곳에서 스님들이 많이 모이고 으레 거기서 다 숙식 제공 그저 20일이나 한 달 씩 그렇게 하고 그랬었어요. 그래 관응스님한테 이제 그렇게 공부하고 그 다음에 운허 스님은 해인사에서부터 그 다음에 역경원에서 또 운허스님 모시고 하고 탄허스님은 역경원에서부터 그 다음에 따로 또 개인적으로 가서 하고 심지어 총무원장 내놓은 지관스님, 학인때 지관스님, 역경원에서 월운스님, 그리고 각성스님, 각성스님은 그런 스님들 중에서 조금 연세가 젊지마는 그래도 일찌기 공부를… 아주 천재라 각성스님은. 한문에 문리가 아주 뛰어나고 소위 유불선 삼교에 탄허스님 못지 않게 그렇게 책을 많이 섭렵하셨어요. 워낙에 머리가 좋아가지고. 지금도 학인들 가르치실 기회가 되면 가르치시고 한데 그 각성스님 밑에서도 수차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했는데 당신 공부한 것을 그래도 총정리해서 책으로나 뭐 강의로나 이렇게 내 놓은 것이 그래도 성철스님하고 탄허스님이라. 당신 공부를. 성철스님은 백일 법문을 통해서 그리고 탄허스님은 화엄산림, 그 뒤에 또 사교 사집산림, 그리고 또 강의나 책 같은 게 이제 나왔는데. 제일 내가 사실… 저는 탄허스님 제자로 돼 있지마는 제일 선지식 중에서 기억에 남는 두 사람은 범룡스님하고 춘성스님이라. 정말 중 다운 사람 한 사람 딱 꼽으라면은 춘성스님을 꼽을 수 있어요. 그 스님 팔십 객에 내가 망월사에서 입성 지내면서 망월사 선방에서 한 철 지냈는데. 당신 방이 개인방이 없고 또 당신 이불이나 요가 없어. 이게 큰 방이라면은 당신 저 御間(어간)에서 공부하시다가 삼경 딱 치면은 어정어정 걸어가지고 여기 탁자 밑에 와서 목침 하나 딱 꺼내고 당신 앉았던 방석, 배에 딱 걸치고 누우면 끝이야. 팔십 객이 그렇게 사셨어요. 야 참 대단한 정신력이라. 그리곤 한 시간 쯤 누워서 살짝 눈 붙히고는 한 시간도 채 안 돼, 그 다음에 밖에 나와가지고 법당에서나 마당에서 계속 돌아요. 그때는 마침 여름이어서, 내가 이제 나도 한참 공부한다고 할 때라서 노장 一擧一動(일거일동)을 다 살폈거든요. 그래 주무시다가 한 시간 가까이 되니까 일어나 가지고는 법당에 올라가는 거라. 법당에 올라가서 법당에서 계속 도는 거야, 세 시에 일어나면 두 시까지 돌아. 두 시에 딱 내려와가지고 눕는 거야. 그래 세 시까지 딱 주무시는 거라. 그렇게 일어나니까 일반 대중들은 몰라. 이 스님이 정진을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 한 철 계속 그렇게 하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참 첫손가락을 이제 춘성스님을 꼽죠. 그 다음 범룡스님은 아시는 분들도 계시고 모르는 분도 계실 거야, 아마. 범룡스님은 참 노장님들이 우리들 젊은 사람이 보면은 암만 큰스님이라 해도 다 빈틈이 있잖아요. 빈틈이 있고 뭐 사사로운 데가 있고 그런데 범룡스님은 빈틈이 없어. 참 노인인데도 우리 젊은 사람이 보기에 하나도 빈틈없이 사는 거야. 정신이 아주 꼬장꼬장해 가지고. 그러면서 이 스님 법문이 아주 제일 감명깊은 법문이 아까 화두 이야기도 했는데, 당신은 하루에 화두 한 번 들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래요. 스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화두를 나는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든다네 그래요. 하루에 깨어나서 세시에 일어나서 화두 한 번 딱 챙기면은 잠잘 때 까지 왜 그 화두가 계속 지속이 안 되느냐 이거요. 안타까워 죽겠다 이거야. 그래 화두를 하루에 한 번만 들고 더 이상 들지 않아도 되었으면 하는게 자기 소원이다 그런 말을 해.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스님만 하신 이야기야 그 얘기.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하루에 밥 한 번만 먹었으면 좋겠다. 뭐 일종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종식 하는 사람이 茶啖(차담)은 또 많이 먹잖아요 차는 많이 마셔. 아이스크림이나 국수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자시고 그런 일종식 하는 그런 스님들도 있는데 정말 이 스님은 양심적으로 하루에 식사 한 번만 딱 하고 차고 차담이고 뭐 일체 음식 안 먹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 이야기를 아주 젊은 사람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또 한 가지는 하루에 잠 한 번만 잤으면 좋겠다. 하루에 잠 한 번 자지 몇 번 잡니까? 자네는 몰라도 나는 좌선한다고 앉아있으면 끊임없이 존다네, 그래. 그거 다 자는 걸로 계산하는 거야. 깜빡 깜빡 조는 것도 잠으로 계산해서 하루에 한번 딱 눈 붙히고 잠 깨면 그 이상 다시는 잠이 안 왔으면 얼마나 좋겠나 이런 표현을 했어요. 아 대단한 이야기에요 이건. 정말 골똘하게 정진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없는 거죠. 참 아주 빈틈없이 정말 연세가 높으신 분인데도 내가 화엄사 구천암에 모시고 살았고 또 그 뒤에도 저기 ,,, 요즘은 뭐 그 절이 굉장히 잘 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아주 탐을 내지마는 태안사, 동리산 태안사 거기에 둘이만, 그 큰 절에 둘이만 살았어요. 한방에서 그것도 한방에서. 그렇게 모시고 살고 그랬는데 참 범룡스님이 수행자 답고 빈틈없고 그런 스님이죠. 모두 뭐 세월이 흘러서 다 그렇게 갔습니다. 그런 스님들도 지금 생각하면 참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고나면 그렇게 아주 텅 빈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되더라고요. 여기도 이제 죽 스님들을 마침 소개를 해서 전통과 계보가 있어야 한다 하는 그런 제목으로서 당신이 아마 간접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접했던 그런 스님들을 아마 소개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는 이런 이야기도 필요하겠다 싶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14-29 옷 입은 것에 속지 말라 I 如山僧今日用處(여산승금일용처)는 眞正成壞(진정성괴)하며 翫弄神變(완롱신변)하야 入一切境(입일체경)호대 隨處無事(수처무사)하야 境不能換(경불능환)이니라 但有來求者(단유래구자)하면 我即便出看渠(아즉변출간거)하나 渠不識我(거불식아)일새 我便著數般衣(아변착수반의)하면 學人生解(학인생해)하야 一向入我言句(일향입아언구)하나니 苦哉(고재)라 瞎禿子無眼人(할독자무안인)이 把我著底衣(파아착저의)하야 認青黄赤白(인청황적백)이로다 我脱却(아탈각)하고 入清淨境中(입청정경중)하면 學人一見(학인일견)하고 便生忻欲(변생흔욕)라가 我又脱却(아우탈각)하면 學人失心(학인실심)하야 忙然狂走(망연광주)하야 言我無衣(언아무의)로다 我即向渠道(아즉향거도)호되 儞識我著衣底人否(이식아착의저인부)아하면 忽爾回頭(홀이회두)하야 認我了也(인아요야)로다 옷 입은 것에 속지 말라. 如山僧今日用處(여산승금일용처)는, 산승의 금일 작용하는 今日用處(금일용처), 금일 작용하는 곳은. 眞正成壞(진정성괴)하야, 참되고 바르게 성괴한다 이거여. 成은 살리고 壞는 죽이고. 긍정과 부정이 정말 끊임없이 반복이 된다. 그렇죠. 한 생각 일어나면 한 생각 사라지고. 일어나면 사라지고 일어나면 사라지고 이게 이제 모든 사람의 마음 씀이고 마음 작용이죠. 翫弄神變(완롱신변)하야, 완롱이라고 하는 것은 완상하고, 가지고 놀고 신통변화를 일으킨다. 우리 마음이 사실은 우리 한 마음을 우리는 가지고 노는 그런 차원까지는 안됩니다. 헌데 그래도 우리는 그 마음 가지고 이러고 저러고 해요. 뭐 억지로 갔다 붙힌다면 우리도 완롱신변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통변화가 뭐냐. 運水及搬柴(운수급반시)라 그러잖아요. 물 긷고 밥하고 수도꼭지 틀고 하는 거니까 조금 건방진 생각을 하면 진정성괴, 뭐 산승금일용처만 아니라 이 산승은 여러분 모두,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 모두에 작용하는 것은 진정성괴하고 완롱신변하는 거요. 그리고 入一切境(입일체경), 일체의 경계에 들어가는 거야. 그렇죠. 경계마다 만나는 곳마다 거기에 우리 마음이 개재되지 않은 것이 없잖아요. 다 사량분별하고 견문각지하잖아요. 隨處無事(수처무사)라, 그런데 그 들어가는 경계마다 가긴 가돼 그곳을 따라서 아무 일이 없어. 우린 일이 많아. 보는 족족 옳다 그르다 하고 뭐 얼굴 찌푸리고 아니면 반대로 즐거워하고.. 그런데 이분은 無事하다 하는 것입니다. 事를, 일을 겪되 겪는 것이 없는 그런 경지다. 수처무사. 그래서 境不能換(경불능환)이니라, 경계가 나를 빼앗아 가지 못한다. 바꾸지 못한다. 경계가 나를 빼앗아 가지 못한다. 이게 우리가 차이가 있다면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죠. 우리도 일체 경계까지 들어가는 건 좋은데 수처무사가 안되고 경계가 나를 빼앗아 가지, 이분처럼 경계가 그를 능히 바꿔가지는 못한다. 但有來求者(단유래구자)하면, 다만 어떤 이가 와서 구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은 我即便出看渠(아즉변출간거)하나니, 나는 곧 그를 간파한다, 곧 나와서 그를 간파한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는데 그 사람은 그는 나를 알지를 못할새, (渠不識我(거불식아)) 我便著數般衣(아변착수반의)하면, 내가 곧 여러 가지 옷을 입어. 이런 옷 입었다 저런 옷 입었다. 그러니까 법을 보이는데 이런 수를 썼다 저런 수를 썼다, 그러면 그걸 따라서 學人(학인)이 알음알이를 내(生解(생해)). 學人生解(학인생해)해서, 入我言句(일향입아언구)하나니 , 一向(일향)에, 한결같이 내가 내놓은 言句(언구)를 쫓아온다 이거지. 나의 언구에 들어오나니. 苦哉(고재)로다, 참 고재고재라. 안됐다. 학인들은 뭐 예를 들어서 자기의 살림살이가 없으면은 결국은 선지식 말 쫓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임제스님 법문은 일관되게 수처작주야, 어떤 상황이라도. 부처가 나타나서 뭐라고 설법을 하더라도 거기에 자기를 빼앗기지 않는 거. 그리고 자기는 자기로 있는 것이 최상이다 라고 하는 그런 주의죠. 瞎禿子無眼人(할독자무안인)이니, 눈 멀고 머리깎은 눈 없는 사람이 把我著底衣(파아착저의)하야, 내가 입고 있는 그 옷을 떠억 붙들고는 青黄赤白(청황적백)이라고 誤認(오인)한다. 내가 이런 말 하면은 자비를 이야기하면, 예를 들어서, 또는 인욕을 이야기하면 인욕에, 무슨 뭐 내가 말하는 족족 그걸 끌려서 집착한다 이거지 끄달려서. 그리고 我脱却(아탈각)하고, 내가 그것을 이제 벗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경계, 清淨境中(청정경중)에 들어가면은, 텅 빈 곳,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경계에 들어갈 것 같으면은. 學人一見(학인일견)하고, 학인이 그러한 사실을 보고는 便生忻欲(변생흔욕) 아주 반가워한다 하는 것입니다. 곧 반가워하는 마음을 내다가. 我又脱却(아우탈각)하면, 내가 그런 옷 마저 벗어버릴 것 같으면은, 學人失心(학인실심)하야, 학인이 어찌할 바를 몰라. 임제스님의 속임수에 그만 넘어가는 거야. 신사들이 장난치는데 그만 넘어가. 그래서 忙然狂走(망연광주)하며, 망연히 어찌할 바를 몰라서 바쁘게 미쳐서 도망을 간다. 예를 들어서 뭐 사람들이 강아지 놀리듯이 예를 들어서 선지식이 학인 공부를 위해서도 그렇고 떠보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죠. 言(언), 말하기를 나에게 아무 것도 의지할 게 없다, 옷이 없다, 나에게는 옷이 없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이여. 저 선지식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표현과 마찬가지여. 옷이 없다라고 하는 말은 저 선지식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죠. 我即向渠道(아즉향거도)호되, 내가 그렇다면 곧 그 사람을 향해서 말하기를 儞識我著衣底人否(이식아착의저인부)아, 그대는 내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인식하는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아는가. 忽爾回頭(홀이회두)하야, 홀연히 그 사람이 그가 머리를 돌려서 認我了也(인아요야)라, 그럴 거 같으면 나를 또 착각한다, 오인한다, 오인해 버린다. 그러니까 옷을 안 입으면은 뭐 그 선지식이 아무 것도 없는 양으로 치고 뭐 아주 고급스런 불교 용어를 내 놓으면은 그러면 거기에 또 매달리고 집착하고 대개 그런 수준이다 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대개 이제 그런 수준이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툭 터진 어떤 안목, 이것은 이제 참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라는 그런 내용이죠. 14-30 옷 입은 것을 속지 말라 2 大徳(대덕)아 爾莫認衣(이막인의)하라 衣不能動(의불능동)이요 人能著衣(인능착의)하나니 有箇清淨衣(유개청정의)하며 有箇無生衣(유개무생의)와 菩提衣(보리의)와 涅槃衣(열반의)하며 有祖衣有佛衣(유조의유불의)니라 大徳(대덕)아 但有聲名文句(단유성명문구)하야 皆悉是衣變(개실시의변)이라 從臍輪氣海中鼓激(종제륜기해중고격)하야 牙齒敲磕(아치고개)하야 成其句義(성기구의)니 明知是幻化(명지시환화)니라 大徳(대덕)아 外發聲語業(외발성어업)하며 内表心所法(내표심소법)하고 以思有念(이사유념)은 皆悉是衣(개실시의)니 儞秖麼認他着底衣爲寔解(이지마인타착저의위실해)하면 縱經塵劫(종경진겁)하야도 秖是衣通(지시의통)이라 三界循還(삼계순환)하야 輪回生死(윤회생사)하나니 不如無事(불여무사)니라 相逢不相識(상봉불상식)하고 共語不知名(공어부지명)이로다 그 다음에 옷 입은 것을 속지 말라 하고 또 두 번째도 그런 뜻이에요. 옷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은 선지식이 내놓은 어떤 그 가르침의 한 모습, 그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의 사상도 될 수가 있고. 그런데 이제 툭 터진 선지식에는 사상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어요. 옷이 없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옷 입은 것에 속지 말라 라고 하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大徳(대덕)아 爾莫認衣(이막인의), 그대는 옷을 오인하지 말라 그랬어요. 옷으로 변장한 것에 속지 말라는 거지. 지금 겉으로 내가 표현한 그 말에 끄달리지 마라. 衣不能動(의불능동)이요, 옷은 능히 동하지 아니하며. 人能著衣(인능착의) 사람이 능히 옷을 입나니, 옷은 그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옷을 입는 거지. 有箇清淨衣(유개청정의)하며, 어떤 이에게는 청정한 옷이 있고. 텅 빈 옷이에요, 사실.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또 有箇無生衣(유개무생의), 菩提衣(보리의), 涅槃衣(열반의) 또 조사라고 하는 뜻, 부처라고 하는 옷, 조사라고 하는 옷, 부처라고 하는 옷, 이런 것들이 다 있을 수 있다 이거여.(有祖衣有佛衣(유조의유불의)). 불교의 아주 그 가장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명자들이니까. 大徳(대덕)아 그런 거 但有聲名文句(단유성명문구)야, 청정의니 무생의니 보리니 열반이니 조사니 부처니, 아주 말이야 좋지. 다 성명문구야, 소리요 이름이요 문구일 뿐이다. 皆悉是衣變(개실시의변)이다, 다 다 이것은 모두가 다 옷으로 변장한 것이다. 옷으로, 옷으로 변장한 거야. ‘열반’ 하면 열반에 푹 빠져 버리고 열반옷을 입었으니까, 열반 말하는 사람은 열반옷을 입은 택이 되니까 그래서 옷 衣 자를 쓰는 거죠. ‘보리’ 하면, 보리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그만 그 보리에 이끌려서 보리가 뭐 이런 뜻이다 저런 뜻이다 라고 헤아리게 되니까. 옷으로 변장한 것이다. 從臍輪氣海中鼓激(종제륜기해중고격)하야, 예를 들어서 부처, 조사, 열반, 보리, 이런 소리할 때 어떻게 돼요? 배꼽에서부터 배꼽 기해, 기해혈 거기서 그게 움직여가지고 말이 나오는 거지. 공기가 나오고 호흡이 나오고 그러면서 그 다음에 또 牙齒敲磕(아치고객)이라, 이빨이 예를 들어 턱과 아랫니가 이렇게 흔들려가면서 소리를 내잖아요.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이 배에서부터 무슨 호흡이 나오고 이빨이 흔들리면서 해서 나오는 그 소리 뿐이다 이거여, 그 소리일 뿐이다. 하~ 이 비정한 소리입니다, 이거. 부처 아니라 우부처 이야기를 해도 내가 부처라고 할 때 이 뱃속에서부터 기해혈에서부터 이게 뭔가 움직여가지고 그래서 이제 턱이 움직이고 혀가 움직이고 해서 나오는 그 소리, 아 그건 개도 하고 소도 해. 그 소리다 이거여. 멍멍이라고 하든지 부처라고 하든지 그건 뭐 똑같이 배가 움직이고 치아가 움직이고 아래턱 위턱이 움직이고 이렇게 해서 나오는 소리지, 거기 뭐가 있냐 이거야. 成其句義(성기구의)니, 그래 가지고 그 구절의 뜻을 이루나니. 明知是幻化(명지시환화)라, 하 참, 분명히 알겠도다 이것은 전부 환영이요 거짓 꼭두각시 그리고 변화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어~ 참 이런 법문은요, 이건 정말 천하의 어떤 누구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청정이다 무생이다 무생법인이다 보리다 열반이다 무슨 부처다 조사다 보살이다 하는 거기에 너무 콱 찌들려가지고 거기에 너무 찌들리다가 병이 돼 가지고 그만 거기에 중독이 돼 있으니까 그것을 우리가 확 때를 벗겨주는 거기에 대한 때를 확 벗겨주는 그런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게. 대단하잖아요. 아무리 부처 아니라 무슨 능가수화(?) 노래를 해도 배꼽에서 나와 가지고 이빨이 흔들려서 나오는 소리에 불과하지 그거 뭐냐 이거야. 공적한 거 아니냐, 텅 빈 거 아니냐, 실제 존재하는 거 아니지 않느냐 이거야. 실재하는 건 아니다 이거야. 그냥 말이지, 네 말일 뿐이지. 소리일 뿐이고. 그런 말입니다. 明知是幻化(명지시환화)니라. 분명히 환화라고 하는 사실을 알겠다. 아 정말 참 무서운 소리죠. 이런 독약은요 정말 이건 잘 먹으면 참 명약이고 잘못 먹으면 독약이고 그렇습니다. 독약이 정말 명약이라니까. 이건 이제 여기 있는 스님들이야 다 충분히 이해하실 만한 경지니까 충분히 알아들으실 겁니다. 臍輪氣中鼓激(제륜기중고격)해서, 배꼽에서 배꼽의 그 기해혈 거기에서 그게 움직여가지고, 말 한 마디 할려면 거기서부터 뱃속에서부터 움직여야 말이 나오잖아요. 그런 일이지 그게 뭐냐 이거여. 大徳(대덕)아 外發聲語業(외발성어업)하며, 밖으로는 聲語業(성어업), 소리나 말하는 그 업을 발하고. 内表心所法(내표심소법), 안으로는 심소법을 표하고. 심소섭. 그러니까 소리, 소리 이전에는 마음에 마음과 심왕, 심소, 교리적으로 하면 그래요. 어떤 심리적인 것을 표하고. 以思有念(이사유념)은, 생각으로서 생각을 두는 것은. 皆悉是衣(개실시의)라, 생각에서 또 생각을 만들어낸 것은 그건 전부 옷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옷은 몸이 아니고 그냥 겉으로 치장하는 거, 걸치는 거, 걸쳐서 치장하는 것이다. 우리 사념이라고 하는 것, 생각이라고 하는 것 이건 다 그런 거다. 그러니까 어떤 고급스러운 말을 하더라도 말이라고 하는 그 실체, 또 어떤 그 좋은 생각을 하더라도 마음에서 지어내는 그 생각, 그건 전부 옷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뭐 言語道斷(언어도단)하고 心行處滅(심행처멸), 그런 표현을 하잖아요.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심행의 처가 멸했다. 심행이 소멸했다, 이거 그대로네. 儞秖麼認他着底衣爲寔解(이지마인타착저의위실해)하면, 그대들이 저 입고 있는 옷을 오인해 가지고서 저렇듯 입고 있는 옷을 오인해서 실다운 것이라는 이해를 삼을 거 같으면. 저게 진짜야 라고, 옷을 가지고 진짜라고 생각한다면은 縱經塵劫(종경진겁)토록, 정말 무수한 세월이 비록 지난다 하더라도 秖是衣通(지시의통)이라, 그것은 옷을 통하는 것이다. 사람은 모르고 옷만 안다 이거여. 옷만 바꿔 입으면 사람 모르듯이 그런 처참한 꼴이 된다는 거지. 지시의통이다, 옷 통하는 거다. 三界(삼계)는 循還(순환)하야 輪回生死(윤회생사)하나니, 생사윤회하나니, 不如無事(불여무사)니라, 무사한 것만 같지 못하니라. 相逢(상봉)에 不相識(불상식)하고, 서로 만나도 서로 알지를 못하고 共語(공어)에 不知名(부지명)이로다, 같이 말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전혀 모르는 정말 그 무위진인의 세계는 전혀 모르고 겉으로 그저 생각하고 사량분별하고 사고하고 말로 그저 하고 그거보다 더 못한 건 말로 표현하고 하는 거. 그거 가지고 기껏 우리가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걸 이제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임제록은 어록 중의 자고로 왕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임제록의 법문을 소상하게 이렇게 살펴서 자기의 어떤 견해로 확립만 되면은 정말 어떤 큰 법문에도 흔들리지 않죠.
첫댓글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고맙습니다.
以思有念(이사유념)은 皆悉是衣(개실시의)니라.ㅡ 생각에서 또 생각을 만들어낸 것은 그건 전부 옷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옷으로 변장하는 것에 속지 말라. 禪慧朱보살님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三界循還(삼계순환)하야 輪回生死(윤회생사)하나니 不如無事(불여무사)니라...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무위진인의 세계는 전혀 모르고 겉으로 그저 생각하고 사량 분별하고 사고하고 말로 하고 그것 가지고 우리가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禪慧珠 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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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옷을 안 입으면은 뭐 그 선지식이 아무 것도 없는 양으로 치고 뭐 아주 고급스런 불교 용어를 내 놓으면은 그러면 거기에 또 매달리고 집착하고 대개 그런 수준이다 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대개 이제 그런 수준이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툭 터진 어떤 안목, 이것은 이제 참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入一切境호대 隨處無事하야 境不能換이라. 우리도 일체 경계까지 들어가는 건 좋은데 수처무사가 안되고 경계가 나를 빼앗아 가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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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臍輪氣海中鼓激 牙齒敲磕 成其句義 明知是幻化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儞 識我著衣 底人否 ...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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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衣 ... _()_
고맙습니다_()__()__()_
감사합니다()
廬山拽石頭和尚(廬山與石鞏和尚 무비스님 편찬 임제록)
儞秖麼認他着底衣爲寔解(이지마인타착저의위실(식-오자)해)하면
牙齒敲磕(아치고객(개?)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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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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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