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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동쪽 끝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대륙과의 직접적 소통이 불리했다. 한편 신라만의 독특한 고유성과 독창성을 맘껏 펼치는 이점이기도 했다. 고구려에는 태학과 경당이 있었고, 백제에도 고구려와 유사한 교육기관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신문왕 시기 국학이 설립됐다. 당시 교육기관의 역할을 화랑도가 수행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화랑도는 국가 인재양성의 목표로 모든 수련과정이 매우 엄중했다. 화랑도 수련의 목적은 후진 인재양성을 위한 전문교육과 방위목적, 인격도야 등 총체적 지향의 교육이었다. 그 첫 번째가 지혜롭고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 양성이었고, 두 번째는 지략이 철저한 장군과 기백이 넘치는 군사를 기르며 것이며, 세 번째는 신의를 지닌 도덕적 인간육성이었다.
■원광법사의 부도 앞에서
경주의 서북쪽 안강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안강(安康)은 '평안하고 또 평안하다'는 뜻의 지명이다. 진한시대를 거쳐 신라초기까지는 '음즙벌국'로 불리다가 파사왕 시대에 '비화현', 경덕왕 때 현재의 '안강'으로 불렸으니 그 역사가 장구한 곳이다. 안강은 긴 역사만큼 귀한 유적지를 품고 있다.
안강읍 육통리에는 신라의 왕릉 중 가장 아름다운 능이 있다. 누가 그린 듯 일정한 키를 세운 솔숲에 전설처럼 쓸쓸한 흥덕왕(42대)이 누워 계신다. 흥덕왕은 너무나 사랑한 왕비 장화부인이 일찍이 세상을 뜨자 긴긴 외로움을 견디며 홀로 생을 마감했다. 새 왕비를 맞으라는 신하들에게 지고한 진흥왕이 이른 말은 역사에 남았다. "짝 잃은 새도 그리움에 큰 슬픔을 느낄 진데, 어찌 내가 무정스럽게 새 부인을 맞겠는가?" 빼어난 미인들과 주지육림의 유혹을 물리쳐 불완전한 사랑을 완성한 흥덕왕. 궁궐의 아리따운 여성 누구도 흥덕왕의 일편단심을 깨트리지 못했다. 연인이나 젊은 부부들이 꼭 한번 들려서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해도 좋으리라. 흥덕왕의 숭고한 사랑처럼 호젓한 곳, 고요히 시간을 되새김하는 소나무 숲은 너무나 아름다워 돌아와서도 긴긴 여운을 남긴다.
이 외에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과 독락당, 옥산서원, 동강서원 등 신라에 이어 조선조의 대표적인 선비문화를 간직한 마을이다.
안강읍을 지나 영천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니 두류마을 팻말이 보였다. 마을보다 산업단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현재의 우리들에게 없어서 안 될 산업은 문명의 소산으로 도외시 할 수 없다. 속도를 낮추어 하곡저수지를 찾아 둑 아랫길을 따라가자 두류 마을이 나타났다. 길은 과히 친절하지 않지만 아득한 원광법사의 흔적을 더듬기에 오히려 어울렸다.
드높은 이상을 안은 원광법사께서 이 골짜기에 드실 적에 산은 지금보다 몇 배 울울창창해서 대낮에도 서늘한 정기를 내뿜었으리라. '수족은 따뜻이 머리는 차게'라는 말처럼 산림의 서늘한 기운에 정신 또한 맑았으리라.
이곳 삼기산은 원광법사께서 수도하신 곳이다. 주변의 모든 산세가 완만해 원광법사의 성품 또한 강파르지 않고 무난했으리라 짐작된다. 화랑에게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주신 신라 고승의 품위는 지금 어느 산자락에서 고요히 천년을 깨우고 계시는지.
원광법사는 신라 진평왕 때의 명승이다. 신라를 통 털어 도덕과 학식이 가장 높은 분으로 그 명성이 나라 밖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법사께서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 났다. 기량이 넓고 유학과 노자학은 물론 제자백가와 역사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부터 문명이 삼한에 떨쳤고 학식은 중국의 학자도 따를 자가 드물었다.
13세에 승려가 된 원광법사는 25세에 진나라에 유학해 더 넓은 학문에 매진했다. 이후 불경 연구에 특히 열성적이었으며 성실론과 반야경을 통달했다. 강론의 이론이 명확했고, 수사의 기술이 아름다워 보는 이마다 그 명성이 자자했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날은 언제나 설렌다. 멀고 먼 시간의 한 자락을 움켜쥐고 잠시 허공의 문에 노크를 하는 기분이다. 때론 투명한 타임캡슐을 가르고 그 속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적시듯.
원광법사에 얽힌 이야기는 유독 신비롭다. 법사께서 진나라에 유학 중일 때 일어난 일이다. 수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게 되었을 때였다. 수나라의 군대가 진나라의 수도를 점령했다. 당시 원광법사는 수나라의 병사에게 붙잡혀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나라의 장수가 길을 지나다 사찰의 목탑이 불타는 것을 보았다. 급히 불을 끄려고 뛰어가 보면 불길은 사라졌다. 되돌아오다 돌아보면 다시 탑이 불타고, 또 다시 달려가면 불길이 사라지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무엇에 홀린 듯 황망한 장수는 정신을 가다듬어 '불'과 '사라짐'을 되새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알고 보니 그 탑 아래에 결박된 원광법사의 죽임이 임박한 입장이었다. 장수는 탑이 불타는 기이함의 원인을 알고 법사의 결박을 푼 뒤 정중히 사과 했다.
원광법사는 신라에 돌아와서도 왕의 깊어진 병환을 불력(佛力)으로 고치는 등 기적을 일으켰다. 불도(佛道)를 통해서 불가해한 현실을 환치(還置)시키는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나라가 위급할 때는 스스로 희생의 길을 찾았다.
■ 원광법사는 정치와 외교의 석학
진평왕 11년(AD589년)에는 원광법사는 수나라에 가서 섭정론(攝政論)을 연구했다. 오나라에서는 열반경을 열정적으로 강의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진평왕 22년(AD)에 왕의 간절한 부탁으로 본국으로 돌아와 불교의 원리를 널리 펴서, 왕과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의 강병(强兵)들은 쉴 새 없이 국경을 위협해 불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진평왕은 이런 징후들을 크게 우려해 수나라를 움직여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원교근공의 계책을 세웠다. 이 때 수나라 황제에게 고구려 징벌에 뛰어난 인물의 출병을 부탁하는 '걸사(傑士)표'를 원광법사가 썼다. 수나라 황제는 법사의 글에 큰 감명을 얻어 출중한 군사를 뽑아 고구려에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 최고의 용맹한 장군 을지문덕과 대접전을 벌인 수나라 군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의 국력소모도 대단 했고, 그 사이 신라는 군사력을 키워 이후 닥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런 여타의 일들로 국방의 외교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가 원광법사다.
원광법사는 죽는 날까지 화랑도의 진정성과 실천력을 정립시켜 전수했다. 화랑에게 불굴의 굳은 신념과 목숨과 맞먹는 충효로 신라를 온전히 보존하도록 가르쳤다. 법사의 공은 불교국가 신라의 귀감으로 지금도 우리들의 발길을 이끈다.
안강읍 삼기산 금곡사 터에 있는 원광법사의 부도. 고승(高僧)의 위엄이 천년 세풍을 이긴 의연함을 올려보며 나의 가슴이 차올랐다. 세속오계의 진정한 깨달음은 서서 깨어있는 부도처럼 또 천년을, 또 다시 천년을 견고하리라.
이렇게 나의 발걸음은 소중한 역사의 한 자락을 밟았다. 늘 그랬듯 감동이 밀려왔다. 시대를 거스른 투명한 교감의 끈은 우주의 나이를 잊고, 신라인과 신라후손의 핏줄기에 살아 움직인다. 부도 앞에서 한참 동안 끈질긴 유전의 친근감이 밀려왔다.
세속오계는 두고두고 신라의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수양의 지침이 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광법사가 맨 처음 세속오계를 전수한 화랑은 귀산과 추항이었다. 더 높은 이상을 찾아 헤매던 귀산과 추항은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스승을 찾아 이곳 삼기산의 금곡사에 왔다. 마침 수나라에서 돌아온 원광법사는 신라의 미래에 관해 각 분야의 입안을 다듬고 계셨다. 두 젊은이는 원광법사에게 화랑으로 지켜야할 사람됨과 신라의 부흥과 안녕을 위한 지침을 주시기를 간청했다. 원광법사는 세속오계의 깊은 뜻을 일일이 풀어서 설명하며 올곧은 정신의 근본을 가르쳤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세속오계는 그 요약본이다.
첫째, 임금을 섬김에 충성하라. 둘째,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하라. 셋째, 벗을 사귐에는 믿음으로 대하라. 넷째, 싸움터에서는 물러서지 말라. 다섯째, 살생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원광법사는 신하로서의 도리와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근본을 간곡히 일렀다. 속속들이 감명을 받은 귀산과 추항은 삶이 다하는 날까지 오계를 실천하며 한 치의 어긋남이 없기를 법사에게 맹세했다.
류상현·김희동 기자
경북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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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년 0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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