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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북 지방 스크랩 울진 불영사(佛影寺)-불상의 그림자가 비치는 천년고찰
普願 추천 0 조회 294 16.06.23 18: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상의 그림자가 비치는 천년고찰 불영사(佛影寺)

 

사진의 왼쪽 위 도로가 울진에서 영주로 가는 도로이다

 

불영사 전경

 

불영사(佛影寺)가 위치한 천축산은,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다하여 천축산()이라 하며. 사찰 서편에 산능성이에 부처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그 그림자가 항상 연못에 비치므로 '부처의 그림자가 비치는 절'이라는 뜻에서 불영사()라 부른다.

 

 

 

대웅전 서쪽 천축산 산위 숲속에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와 불공드리는 중생바위 세개가 있어

천축산 산마루에 햇빛이 비치면 그 그림자가 절앞 불영지(佛影池)에 비친다.

 

 

불영사는 경북 울진군 서면 하원리에 있는 고즈넉한 산사로  경주 불국사의 말사이며 천축산의 한쪽 자락을 광천이 서로 휘돌아 감아 태극형세를 이룬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651년(신라 진덕영 5년)에 의상대사가 경주로부터 해안을 따라 단하동에 들어가서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의 천축산과 같은 지세가 있어 찾아갔더니, 맑은 연못에서 다섯 부처님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용이 살고 있어 가랑잎에 불 화(火)자를 써서 연못에 던지니 물이 끓어올라 용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므로 그 연못을 메워 동쪽에 청련전 3칸, 무영탑 1좌를 세우고 천축산 불영사라 하였다고 한다.

 

676년 의상이 다시 불영사를 향하여 가다가 선사촌에 이르렀는데,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오셨구나' 하면서 마을에서는 부처님이 돌아오신 '불귀사'라고도 불렀다고 하며, 의상대사는 이 절에서 원효대사와 함께 9년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불영사는 조선 태조 6년(1397년)에 나한전만 남긴 채 화재로 모두 타버린 것을 소운()스님이 중건하였는데, 그 후 다시 소실되어 1500년(연산군 6) 양성법사()가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모두 소실되었으나 응진전(殿)만은 피해를 면했다고 한다. 그 후 1609년(광해군 1) 진성법사()가 재건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의 손으로 중수가 거듭되고 있으며  현재는 비구니(比丘尼)승들만의 수행도량이다

 

 

법영루 뒤쪽의 노란 은행나무가 수령 600년된 은행나무이다

 

 

법영루(法影樓)와 불영지(佛影池)

 

불영사는 이름난 사찰이  거의 없는 동해안 중부지역의 태백산맥 줄기에 위치하고 있고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으며 순수한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불영계곡 내에 위치하고 있는 고요한 산사이다

 

수행자의 삶이 바로 선 뒤에야 가르침 또한 본래 가진 가치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라며 소문 내고 알리는 것보다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자들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 흔한 인티넷 홈페이지마져 만들지 않는다는 주지 일운스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스스로 알고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로 인하여 점차 세속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경내에는 3개의 국가지정 보물이 있다.

 

불영사 일주문

 

 일주문에서 경내로 들어가는 길

 

 지난 태풍 매미때 유실되어 새로 건립된 불영교 

 

다리 난간에서 바라보는 풍경

 

 동물형태를 한 나무등걸

 

 '붉은 노을이 걸린 지상의 낙원'이라는 뜻의 단하동천(丹霞洞天)

 '洞天'은 도가(道家)사상에서 유래된 말로  '하늘 위의 동네'라는 의미를 뜻한다

 

미륵존불

 

 

양성당  혜능선사의 승탑과 승탑비

 

 

불영교를 지나 경내 입구의 오른쪽 숲 속에는 혜능선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양성당선사의 법명(法諱)은 혜능이고 세속의 성은 남씨이다. 혜는선사의 고조, 증조, 조 등 5대를 연이어 과거에 급제한 명문 집안이며, 모친은 행주전씨로 명망 가문이다.

열두 살에 응철장로(應哲長老)를 쫓아 출가하여 계를 받고 8년간 정진하여 모든 불경을 통달한 뒤 천조대사에 나아가 묻고 또 호구당에게서 수행하여 크게 깨달아 막히는 데가 없었다. 성품은 침착 인후하고 보시하기를 기꺼이 하였으며, 계율을 엄히 지켰고 평생을 명산 고찰을 찾아 주류하기 좋아하여 두류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태백산, 소백산 등 그의 발자취가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1696년 12월 17일에 75세로 입적 후 다비를 하자 사리가 나와 승탑을 건랍하였으며 승탑의 비문은 조선 후기 학자 최석정(崔錫鼎)이 지었다.

 


혜능대사의 승탑(부도)

 

승탑은  지대석, 기단석, 탑신의 3석으로 구성되었으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종형 부도로서, 전체 높이 176.5㎝이고, 탑신의 폭은 83㎝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평면 방형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기단석을 각각 별도의 돌로 놓고 그 위에 일석으로 만든 종형의 신석과 보주형 상륜을 올렸다.

기단석의 옆면에는 8판의 중복련(重伏蓮)을 양각으로 장식하였으며, 상부에 원형의 탑신 받침을 호형으로 각출하여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탑신석은 평면 원형으로서 하단이 약간 좁은데, 복부로 올라가면서 넓어졌다가 상부에 이르면 다시 하단과 같이 좁아진다. 측면에는 장식이 없고 하부에는 6판의 앙련(仰蓮)을, 상부에는 14판의 복련을 장식하였으나 매우 형식적이며, 그 윗면에는 호형 1단의 원형 받침이 있다.

상륜부의 아랫쪽에는 1단의 원대(圓帶)를 조각하였고, 그 정면에 연봉형의 보주를 조각하?는데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탑신석과 보주는 동일석으로 조성되었다.

 

 

비문

 


특이한 비좌의 문양

 

승탑의 바로 옆에 있는 탑비는 비신의 앞면, 뒷면에 명문이 음각되었으며, 글씨는 해서체이다. 글자의 크기는 앞면의 경우 2.5×2.5㎝로 거의 모두가 비슷하나, 뒷면의 경우에는 3.5×3.5㎝의 크기도 있다.

부도비에 이끼가 심하게 끼어 명문을 제대로 판독할 수 없었으나, 최석정의 문집인 『명곡집(明谷集)』에 '양성당 선사혜능 부도비명(養性堂禪師惠能浮屠碑銘)'이  실려 있어 혜능대사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불영사사적비(佛影寺事蹟碑) 

 

부도전을 지나 불영지의 반대편 오른쪽 길 옆에 있다

 

불영사 사적비

 

1933년에 건립된 불영사 사적비’에는 조선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에 얽힌 인연이 기록되어 있다

숙종대왕이 총애하는 궁희(장희빈)의 시기로 왕비에서 폐출된 인현왕비가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꿈에 한 스님(불영사 양성법사)이 현몽하여 고하기를 "저는 불영사에서 왔으며 내일 좋은 상서로운 것이 있겠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과연 이튿날 장희빈이 꾸민 사건이 발각되어 장희빈은 죄를 받고 왕비는 환궁하게 되는 까닭에 인현왕후는 불영사에 사방 10리 정도의 산을 하사하고 네 곳에 표지를 하여 불은에 사례하였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조선 19대 왕인 숙종(肅宗, 1661~1720)의 계비로써 숙종 7(1681)에 왕비가 되었으나 장희빈의 농간으로 인해 폐위되었다가 복위되었으나, 17018월에 원인모를 질병으로 죽게 된다

 

 

대웅전-보물  제1201호

 

 

 

 

 

대웅전은 절에서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중심 법당을 가리키며 지금 있는 건물은 안에 있는 탱화의 기록으로 영조 11년(1735)에 세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씩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각 공포의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건물에 색을 칠한 단청 부분을 들 수 있는데 바깥쪽은 다시 칠하여 원래 모습을 잃었지만 안쪽은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천장부분을 비롯한 벽, 건물을 지탱하는 굵직한 재료들에 그림을 그린 기법들은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건축양식과 기법연구, 격조 높은 불교그림과 단청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조선 후기 건축물이다.

 

특히 대웅보전 내부에는 거북 모양의 금구 2점과 기둥과 도리 사이의 용두4점을 나무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며, 각종 비천상 수십점을 비롯하여 260여년 전, 여섯분의 스님이 그린 후불탱화가 있다,

 

 

대웅전 삼존불

 

 

가운데 석가모니불이 있고 바라보아서 오른쪽에 문수보살, 왼쪽에 보현보살의 좌상이 있다

 

 

대웅전의 삼존불은 경내의 600년된 은행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이다

불영사의 은행나무는 600년 세월동안  불영사를 지켜 온 나무이다. 1996년 태풍 때 은행나무의 일부분이 부러졌으나 옆 건물은 기왓장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는데  이는 부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불영사 주지 심전 일운(心田 一耘)스님은 바람에 넘어간 은행나무 줄기로 3년간 정성을 들여 삼존불상을 만들었고,  2002년 5월 7일 삼존불 점안식을 거행하여 지금까지 봉안해오고 있다

 

현재도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의 높이는 25m, 가슴높이 둘레는 3.5m, 나무갓 너비는 27m이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천정의 단청문양

 

  

천정부분의 금단청

 

대웅전 내의 천정에는 일반 사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금단청이 있다

금단청은 단청 중의 최고 수준의 단청이다. 금문이나 그림(별화)등으로 메워서 다채롭고 화려하게 꾸민 최고 등급의 장엄 양식이다. 궁궐건물도 모로단청에 그쳤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부처님의 집을 가장 화려하게 꾸미려는 심성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불영사영산회상도 (佛影寺靈山會上圖) -보물  제1272호

 

 대웅전은 내부 보수중이라서 비닐막을 쳐 놓았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대개 불상의 뒷벽에 위치한다. 
불영사 대웅보전에 소장된 영산회상도는 조선 영조 9년(1733)에 제작된 것으로. 삼베에 채색되어 있으며, 전체 크기는 가로 214㎝X세로 224㎝이다

격조있는 양식, 양호한 보존상태 등으로 18세기 초 조선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시대의 불화는 여래상을 위에 두고 그 아래에 보살상과 권속들을 표현한 2단 구도가 일반적이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심 여래상을 보살상과 권속들이 둘러싸는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영산회상도의 석가여래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우견편단의 옷을 걸쳤으며,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앉아 있다. 석가여래 주변으로 10대 보살, 사천왕상, 상단의 10대 제자 등이 배열되어 있다. 주로 영산회상도에서는 8대보살이 그려지는데, 이 그림에서는 10대보살을 표현한 점과 석가불 아래의 그 보살이 유난히 큰 점이 특징이다.

석가의 옷이 붉은색이고 석가 뒤의 광배가 이중으로 붉은 테를 두른 점등은 조선 후기의 불화양식보다 약간 앞선 양식적 특징이다. 채색의 사용법이 유창하고 아름다우며 묘사법이 정밀하여 그림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신중탱화

 

신중탱화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신중탱화는 삼베(麻) 바탕에 채색한 것으로 전체 크기는 세로 230.5cm, 가로 236.2cm이며, 화면크기는 세로 214.5cm, 가로 223.1cm이다.

팔곡병풍을 배경으로 상단에는 제석과 범천을,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축으로 좌우에 무장의천룡팔부중(天龍八部衆)을 묘사하였다. 정밀한 형태 묘사, 조화로운 색채의 구성, 힘 있는 필선, 화사한 문양과 장식 등에서 완성도가 높은 19세기 불화 가운데 수작이다.

 

화면 하단의 화가(畵記)를 통해, 1860년(철종 11)에  의운(意雲),  자우(慈友) 등 5인의 화원(畵員)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운, 자우스님은 사불산 대승사를 중심으로 경상도와 강원도까지 활동한 금어(金魚)로서 최고의 지위인 도총섭의 직함까지 갖춘 화승이었다.

 

 

 

대웅전 내에 있는 반야용선

선수(뱃머리)와 선미(배의 꼬리)만 용머리를 하고 있는 일반 사찰의 반야용선과는 모양이 다르다.

위의 엣사진에는 반야용선에 악착동자가 매달려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대웅전 기단의 거북머리

 

 

 

대웅전 기단의 돌거북머리

 

대웅전 기단의 가운데 계단 우에는 돌 거북 한 쌍이 놓여 있다. 머리와 앞발, 부분의 앞쪽만 노출되어 마치 대웅보전을 둘이서 짊어지고 버티고 있는 듯 한다.

사찰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化山)이어서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비보책으로 만든것이라고 한다.

화기를 막기 위해 만든 돌거북의 머리에 까맣게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어 아이러니하다

 

다른 이야기로는 대웅전이 자리한 지형이 바다를 닮아 거북이를 받쳐주어 물에 가라앉는 것을 막기 위한 비보책이라는 설이 있고 대웅전이 반야용선임을 나타내기 위헤 거북이를 조각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돌거북은 머리와 몸체 앞부분만 조금 나와 있고 몸통은 기단석 아래에 묻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몸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몸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대웅전 안에서 그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머리가 없고 몸체만 있는 거북(대들보 위)

 

데웅전의 대들보 위에는 머리가 없는 거북이 만들어져 있다. 대들보에는 세 개의 발톱을 가진 용의 그림이 있고, 용의 발 아랫 부분에 거북의 몸체가 양쪽에 한 마리씩 두 마리가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머리는 밖에 있으니 안에는 몸체만 있는 것이다. 조상들의 해학적인 재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불영사 삼층석탑-시도유형문화재 135호

 

 

 

불영사  내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현 높이는 3.21m로, 일명 ‘무영탑’이라 불린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부

 

아래·위층 기단의 각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새겼다.

하층 기단 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는데, 하층 기단 저석과 함께 붙여 만들었다. 각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 1주를 모각하였다. 하층 기단 갑석은 4매의 석재로 조립되었는데, 서북쪽 모서리가 파손되었으며, 서남쪽의 1매는 깨어져 분리되어 있다. 상층의 경사는 심한 편이고 각호각형 3단의 상층 기단 받침이 조출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다. 하부에는 부연이 없고, 상층 기단 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다. 각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 1주를 모각하였다

 

상층 기단 갑석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남쪽과 서쪽 갑석 끝이 파손되었다. 윗면의 경사는 약하고 각호각형 3단의 초층 탑신 받침이 조출되어 있으며, 하부에는 부연이 없다. 탑신부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별도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각층 탑신석의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옥개석 받침도 각층 모두 각형 4단이다

 

 

 

 

 탑신부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올렸으며, 몸돌의 각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옥개받침을 두었고, 각층 옥개석 지붕에는 각각 호형 2단의 탑신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 경사는 약간 급하며, 처마 밑은 수평이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경쾌하고 날렵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탑의 상륜부

 

상륜부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받침)이 없고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의 장식), 보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 보주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륜부의 구조상 순서가 바뀌어 놓여 있다.

노반-복발-양화-보륜-보개-보주의 순사대로 놓여야 한다

상륜부를 이루는 부재의 석질이 탑신부와 기단부의 석질과 다르다.

 

 


부연이 없고 아담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의 조각수법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삼층석탑은 원래 황화실 옆 동쪽에 무너져 있었다가 1977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으나, 불영사 수장고를 지으면서 원래 탑이 있었던 지역에서 탑의 기초 유구가 확인되지 않아 원래의 위치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울진 지역에서 현존하는 고려시대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되어 이 지역의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979년 1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응진전-보물  제730호

 

 

 

 

 

 

응진전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가섭과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1984년 수리 공사 때 발견한 기록으로 임진왜란 전·후에 여러번 고쳐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원래는 영산전이었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4짝 여닫이문을, 양쪽 칸에는 작은 창을 달아 놓았다.

 

석가모니불이 한가운데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제자 가섭(迦葉)·아난(阿難)이 있으며, 다시 그 좌우로 16나한상이 있다. 끝부분에는 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하며, 후불탱화(後佛幀畵)로 영산회상도나 16나한도를 봉안한다. 나한들은 생활하는 모습의 자유자재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응진전 공포의 용머리장식 

 
건물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기 위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에 남아 있는 단청은 안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조선 중기의 문양을 살펴볼 수 있다.

 

응진전(보물제730호)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그 원이 이루어진다는 영험 있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법영루라는 누각에에는 범종과 법고가 매달려 있다

옛부터 전해오던 불영사의 종은 일제시 전쟁으로 인하여 공출 당하고 없었는데  지금의 종은  '상정조웅'이라는  일본인이 사죄하는 뜻에서 만들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의상전(義湘殿)

 

 

의상대사 소상

 

고승의 진영

 

의상전(義湘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이다.

안에는 의상 대사의 상과 진영을 비롯하여 여러 고승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의상 대사상은 응진전 후불탱 화기를 보면 1906년 ‘조사전(祖師殿)에 의상 조사상을 개분(改粉) 입채(入彩)하여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조성년대를 알 수 있다.

의상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영정을 보존하고 있다. 의상조사의 영정과 더불어 원효대사, 종봉대선사, 청허대선사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으며 당호가 없는 진영 등 모두 다섯 폭이 봉안되어 있다.

 

 

 

그러나 의상전은 인형왕후의 복을 비는 인현황후 원당인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의상전을 수리하던 중 의상전 서쪽 종도리 바닥 사각홈에서 한지에 묵서로 쓰인 상량문 1기가 발견되었다. 상량문의 속지에 인현왕후 원당 상량문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 상량문 발견으로 그동안 불영사와 관련된 인현왕후의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상량문(上樑文)이란 목조건축물을 창건하거나 중수할 때 짓거나 고친 건물의 내력, 고치게 된 까닭, 공역한 날짜와 시간 등을 적어 둔 기록물이다. 따라서 상량문은 당시의 생활상, 건물의 조성동기, 창건이나 중수, 중창연대 등을 규명하는데 귀중한 건축사적 자료가 된다.

 

 

극락전

 

 

 

 

극락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안에는 금동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불이다

극락전이란 편액의 글씨는 이조판서를 지낸 해사 김성근(1835∼1918년)이 78세가 돠던 1912년에 쓴 글이다

  

명부전

 

 

 

 

명부전은 최근에 지은 건물로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씩인 건물이다

지장보살좌상이 있고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규왕이 협시불로 서 있다.

그리고 시왕상 10위, 시왕탱 6폭, 판관, 녹사, 사자, 장군상 2위가 있다

 

 

산신각

 

황화실

 

종무소

설법전

 

  

한편 2002년에는 불영사에서 조선시대 왕과 왕후의 제삿날을 기록한 국기(國忌)현판이 발견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국기 현판

 

현판의 형태는 크기가 31×119인 세장방형이다. 검은 색 바탕에 해서체 글씨를 세로로 음각하고 그 안에 흰색을 칠했다.

국기현판에는 조선 태조(太祖康獻大王, 13921398 재위)부터 효종(孝宗, 16491659 재위)에 이르기까지의 왕과 왕비의 기일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 국기, 왼쪽 끝부분에 조선 18대 왕인 현종(顯宗, 1659~1674 재위)대왕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기일을 기록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미뤄볼 때 현종 또는 숙종(肅宗, 16741720 재위) 재위 기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기일에는 전국적으로 노래와 춤이 금지되었고, 지방 관료들은 일체 공무를 보지 않았다. 또한 죄인들에게는 형벌을 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푸줏간에서 도살 행위도 일체 금지되었다. 이날 궁중에서는 국기제(國忌祭)가 거행되었고, 왕의 능침을 참배하는 의식이 실시되었다. 국기제는 예조(禮曹)의 계제사(稽制司)에서 맡아 수행하였다고 한다

 

불영사에는 이외에도 조선왕실과 관련된 '불패발원문서'가 있다.

'불패발원문서'1678(숙종 4)에 제작되었다.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 3위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영사 법당의 불단에 놓이는 불패 중에 왕·왕비·세자 삼전(三殿)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삼전패를 봉안한 것을 알 수 있다.

 

 

불영사의 문화재

 

불연-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7호

 

 

 

 

 

불영사 칠성각에 보관되어 있는 불연(가마)으로, 시련의식을 행할 때에 사용하는 불교용구로서  1670년에 제작되었으며 2채가 있다.

재질은 나무이며 크기는 가로 총 길이 312㎝에 높이 127.5㎝이다

 

시련으식이란 가마를 문 밖까지 메고 나가 신앙의 대상인 불·보살이나 재를 받을 대상인 영가 등을 가마에 모시고 여러 가지 위의를 갖추어 법회 장소까지 행렬을 지어 오는 불교 의식이다. .
이러한 불교 의식에 사용된 의식구는 불교적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구상성을 지니는 불교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불연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불교 의식과 함께 그 제작이 보편화되었다.

이 가마는 매년 석가탄신일 때 아기 부처를 모시고 경내를 도는 시련의식 때에도 사용하고 있다.


불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8호

 

불패

 

불영사 대웅전 안에는 은행나무로 만든 2점의 불패가 있다. 불패는 부처님이나 스님을 모시는 위패(位牌)로 주로 경서, ·보살의 명호, 승려의 법명이나 발원 내용 등을 적어 놓은 패를 말한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불패는 제작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불영사 불패는 1678(숙종 4)이라는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어 불패의 양식 편년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유물이다.

특히, 이 불패 발원문의 내용을 통해 불영사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영산회상도 우측에 위치한 불패는 전체높이 43, 패신폭 24.5의 크기이다. 좌측의 불패는 좌대가 결실되었으며,패신의 상부에는 구름사이로 봉황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며, 중부 좌우에는 3개의 꽃과 잎들이 조식되어 있다

앞면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액()을 만들어 우순풍조 국태민안이라는 원문(願文)이 한글로 묵서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한자로 雨順風調 國泰民安이라고 적어 두었다.

 

불패 패신 뒷면에는 선을 그어 만든 가로 22.3, 세로 47.7의 직사각형 내에 발원문이 묵서되어 있다.


 

불영지에 얽힌 불영사 창건설화

 

이 불영지(佛影池)에 얽힌 의상대사의 창건 설화도 재미있다.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 당나라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의상대사가 화엄법회를 열고 한참 교화에 힘쓸 때였다. 어느 날 노인과 8명의 동자가 의상대사를 찾아와 자기들은 동해를 수호하는 호법신장인데 이제 인연이 다하여 이곳을 떠나면서 우리가 살아온 곳에 부처님을 모시는 도량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동안 인연 닿는 스님을 못 만나다 이제야 만나게 되니, 그곳에 도량을 세워 줄 것을 의상대사께 간청하였다.

 

며칠 후 의상대사는 노인의 부탁대로 동해안의 불사 인연지를 찾아 나섰다.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는데 울진포 앞바다에 이르자 당나라에서 부터 의상대사를 사모하여 용이 되어 쫓아와 부석사를 세운 주인공 선묘룡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스님을 반갑게 맞아 불사 인연지까지 길을 안내하였다. 그러다 문득 천축산 입구에 이르자 "손수 인연지를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선묘룡은 사라져 버렸다.

 

의상대사는 8일간 혼자 천축산(天竺山)을 돌아보며 절터를 찾던 의상대사는 피로에 지쳐 어느 연못가에 쉬다가 연못을 바라보니 연못 위에 부처님의 형상이 비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화엄경을 독송하니 지난번 그를 찾아왔던 호법신장이라 칭한 노인과 동자 8명이 연못 속에서 올라와 의상대사의 설법을 듣고, "이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천축산에 계실 당시의 형상과 똑같으며 연못에 비친 부처님 영상은 천축산서 설법하시던 부처님 모습입니다. 주위 환경은 영산회상이 응화된 것이지요." 라는 말을 남기고 용으로 변해 사라졌다.

 

의상대사는 용들이 살던 연못을 메워 법당을 짓고 부처님 영상이 나타난 곳이라 하여 불영사라 이름 짓고, 부처님 영상이 나타난 곳에는 무영탑을 조성했다는 설화가 불영사에 전한다.

지금도 연못 수면에는부처님 형상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비친다.

 

 

 

 

혜능대사 비문의 내용

 

비신에 적혀있는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성당대사의 법명(法諱)은 혜능이고, 자는 자는 중열(仲悅)이며 세속의 성은 남씨로, 그 선대가 고려 때부터 선사(仙?)에 우거하여 후예들이 이를 관향으로 삼았다. 대사로부터 고조, 증조, 조 등 5대를 연이어 과거에 급제한 명문 집안이며, 모친은 행주전씨로 명망 가문이다. 모친이 꿈에 하늘의 신선을 보고 대사를 잉태했는데, 태어난 뒤에 이름을 몽선(夢仙)이라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대사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곧아 말을 함부로 아니하였고 형제간에 화목하게 처신하며 항상 출세의 뜻을 가지고 있어 부모가 기이하게 여겼다.

열두 살에 응철장로(應哲長老)를 쫓아 출가하여 계를 받고 8년간 정진하여 모든 불경을 통달한 뒤 천조대사에 나아가 묻고 또 호구당에게서 수행하여 크게 깨달아 막히는 데가 없었다. 성품은 침착 인후하고 보시하기를 기꺼이 하였으며, 계율을 엄히 지켰고 평생을 명산 고찰을 찾아 주류하기 좋아하여 두류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태백산, 소백산 등 그의 발자취가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는 스승을 찾아 도를 강론하여 초연한 넓고 큰 뜻을 가지고자 함이리라.

어느 날 홀연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탄식하기를 ‘도를 구하는 데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 사람이 근본을 돌이키지 않는 것은 어찌 일찍 떠난 고향에 돌아감을 잊는 것과 다를 바 리오.’ 하며 마침내 불영사로 돌아와 머물며 수도하는 집에 현판을 달아 양성당(養性堂)이라 했다. 또 그곳에서 시를 읊었는데, 모두다 염불삼매 중에서 자연히 흘러나온 것 같았으니 그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강론을 마치고 염불에 날이 저물면
밝은 달 솔바람 타고 사립문을 닫아 거네.
고요하게 살면서 고요하게 흥취를 자득하니
온 경내 고요하여 꿈결인 듯 아늑하네

 

이 시를 읽으면 마치 내가 부처와 연꽃 사이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병자 12월 17일에 앉은 채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75세요, 법랍 64세이다. 다비하는 날 서기(瑞氣) 한 줄기 중천에 뻗쳐 수일 만에야 사라지고 드디어 금빛 나는 사리 3과가 나왔기에 부도를 절 동쪽 수십 보 지점에 세우고 그의 수제자 천옥(天玉)대사가 장차 비석을 세워 양성대사의 행적(行蹟)을 기록코자 홍우해(洪于海)를 통하여 나[최석정]에게 비문을 청하니 우해와 대사는 마치 주나라 문왕과 태전(太顚)과 같은 관계이므로 대사에 대한 사실 모두 기억하고 있어 나에게 상세히 말하므로 내가 듣고 가상하여 비문을 쓰고 명(銘)하노라.

부처님의 오묘한 뜻은 성(性)을 바로 보는 것이 가장 요점인데
대사는 능히 일찍 깨우쳐 깊은 이치 꿰뚫어 보고
참 가르침 더욱 터득하여 삼승(三乘)의 도를 극명히 밝히셨네.
아! 우리 대사여, 후세에 족히 징표가 되리.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최석정 지음

 

<원문>

"養性堂禪師惠能浮屠碑銘 養性堂大師法諱惠能, 字仲悅, 俗姓南, 其先自麗代寓居仙?, 後裔仍籍焉. 自師高曾祖, 連五代登虎榜, 母田氏籍幸州, 亦望族也. 母夢天仙而娠, 及誕名夢仙, 盖以此也. 師幼而質直, 不妄言語, 與昆季處, 嬉?同樂, 而常有出世之意, 父母異之, 年十二, 遂從應哲長老, 受戒八閱歲, 淹通內外典, 就天照大師而質之, 又禮?於虎丘堂, 證悟無?, 性仁厚?毅, 喜檀施嚴戒律, 平生喜遊名山, 憩頭流入金剛, 若五臺雉岳大小太白, 足跡殆遍焉. 盖欲尋師講道, 而超然有汗漫寥廓之意矣. 一日忽見征?而歎曰, 求道無方, 人不反本, 何異於弱喪忘歸, 遂歸故棲, 住天竺, ?養精神, 顔其堂曰養性, 其所爲歌詩, 皆從念佛三昧中流出, 一絶云,

講罷蓮經日已昏, 松風蘿月掩紫門,
幽居自得幽居趣, 一境淸閒夢不煩.

讀之, ?然坐我於曼陀優鉢羅間也. 丙子十二月十七日, ?坐寂然而化, 壽七十五, 臘六十四, 茶毗之日, 瑞氣?空, 數日乃滅, 遂得金光舍利三粒, 建浮屠于寺東數十步許, 其首弟天玉將立石紀其蹟, 因洪于海萬宗, 求銘於余, 于海之於大師, 若文公之於太顚, 備?事實, 爲余言甚詳, 余聞而嘉之, 遂爲之銘曰,

釋有妙旨, 觀性最要, 師能蚤悟, ?破幽?,
剩得眞詮, 克闡三乘, 於我大師, 在後足徵.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崔錫鼎撰”.

 

 

 

불패의 뒷면에 적힌 내용(발원문)

 

글씨는 해서체로 행서 장법이다. 글자의 크기는 전반부는 거의 비슷한 형상이나 후반부는 작아진 형상이다.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운제산 오어사 철현, 영취산 통도사 영현, 탁진 등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해도(海道)를 따라 송악으로 향하던 중에 먼저 강원도 울진 땅 천축산 불영사를 방문하였는데, 경관이 매우 뛰어나고 자취가 성스러워 마음이 혼연히 기쁨에 여름 한 철을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손에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마음에는 깊은 믿음이 있었으며, 주지인 혜능대사 또한 믿음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서로 믿고 화합하면서 사찰의 부족한 점을 같이 한스러워하였습니다.

생각컨대 불패와 전패가 실로 △△이 정성스럽게 공경하는 것이라, 같이 발원하여 사우(寺宇)가 만세토록 보전되어 전할 수 있기를 빌고자 곧 불패 삼위와 전패 삼위를 조성하여 세상의 뛰어난 보배로 뭇중생들이 감동하여 찬탄하는 바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으로써 사덕(四德)[철현, 영현, 탁진, 혜능이 같이 발원하노니 금강불후의 영약과 같이 종래토록 대각의 지표를 이루게 하시고, 원하옵건대 이것으로써 일체에 공덕을 보급하여 우리들과 뭇중생들이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사내질 신학, 성규, 탁원, 초연, 혜언, 희옥, 지순, 초운, 홍윤, 학종, 사철, 청□, 경오, 도은, 해임, 인잠, 탁변, 사준, △△, 도안, 초□, 쌍일, 극윤, 삼보, 계흠. 화원 철현, 영현, 탁진, 청식태희채어인권화주 원인.

 

 

 

 

사랑바위

 

불영사에서 서면 소재지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도로의 왼쪽에 사랑바위가 있다

남여 두 사람이 꼬옥 안고 있는 모양의 이 바위에는 오누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서려있다

 

 

 

 

 

 

옛날 부모님이 호환을 당하여 고아가 된 오누이가 약초 캐는 일로 연명하고 있었다.

어느 날 꿈속에 신령님이 나타나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께서 병이나 이 곳 불영사 계곡에서 자생하는 삼지구엽초를 구하고자 하나 산양들이 뜯어먹어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아주 높은 절벽 위에만 있으니 구해 온다면 큰 상을 내리겠노라!”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사흘 동안 정성껏 기도를 하고, 계곡의 높은 절벽에 올라 이레 만에 천신만고 끝에 벼랑에 늘어진 삼지구엽초를 발견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팔을 뻗다가 오빠가 실수로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누이는 사흘 밤낮을 통곡하다가 마침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 그 뒤 계곡에서 울리는 누이동생의 애절한 통곡 소리가 하늘에 닿아 신령님이 두 남녀를 바위로 변하게 하여 평생 떨어지지 않게 포옹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통곡 소리가 들리던 산을 통고산 또는 통곡산이라 이름 붙였고, 사랑하는 오누이가 떨어져 죽을 때 흘린 피가 묻은 소나무는 껍질과

 

속까지 붉은 울진소나무(황장목·적송·금강송)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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