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체트킨(1857~1933)
2024년 3월 9일 한겨레 신문, [나는 역사다]
클라라 체트킨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에서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을 했다. 다음은 체트킨의 연설과 기고에서 따온 생생한 문장들이다.
“이전 시대에는 남편의 임금과 아내의 가내 생산 활동만으로 가계를 충분히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동자 혼자 생계를 꾸리기도 빠듯하다. 결혼한 남성 노동자는 아내의 임금에 기댈 수밖에 없다.” “값싼 여성 노동은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그래서 남성도 어쩔 수 없이 낮은 임금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본은 “여성 노동자에게 가능한 낮은 임금을 지급하고, 여성 노동과의 경쟁을 통해 남성 노동자의 임금 역시 낮추려고 한다.” “여성 노동력이 남성 노동력보다 싸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남성 동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여성 조직 노동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여성의 임금은 더 빨리 더 많이 오를 것이며” 남성도 여성도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이렇게 하려면 “남성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를 젊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쾌활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구애할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남성)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를 동지이자 동등한 전우로 여기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클라라 체트킨은 1910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1911년부터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열렸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체트킨은 여성의 힘으로 전쟁을 막자고 제안한다. “나라마다 우리는 어리석고 이기적인 조국 반역자로 비난받고 박해받을 것이다. 상관없다! 우리는 전쟁보다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조국에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들이 총을 들고 싸울 때 생명의 보존을 위해 투쟁하고 남성들이 침묵할 때 소리 높여 이상을 외치는 것이 여성의 임무다.”
지금 와 돌아보면 좋은 말이지만 그때 체트킨의 호소는 전쟁을 막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 클라라 체트킨은 독일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소련에 망명해 거기서 숨졌다.(김태권 만화가)
-김태권 만화가, 한겨레 신문 칼럼, 나는 역사다. 2024년 3월 9일-
클라라 체트킨(독일어: Clara Zetkin, 1857년 7월 5일 ~ 1933년 6월 20일)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여권운동가이다. 1911년 최초의 국제 여성의 날을 조직했다. 1917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원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옹호하는 당론에 반발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탈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독립사민당내 극좌파이자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에 가담했다.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공산당을 조직했고, 1920년 ~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권력을 잡고 1933년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독일 공산당은 활동이 금지되었고, 체트킨은 소련으로 망명해 거기서 죽었다. 위키백과 복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