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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8:1-10
찬송가 465장 ‘주 믿는 나 남 위해’
구약성경에는 위기에 처한 사람의 기도가 종종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기도에는 공통으로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나를 기억하옵소서”라는 문구입니다. 오갈데 없고, 도와줄 이가 없고, 해결할 방법이 없는 시련 앞에서 이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가 그랬고, 사사기 16장에서 블레셋에 잡혀 두 눈이 뽑힌 삼손이 그랬고, 또 느헤미야 1장에서 유다의 성벽 재건을 위해 기도하던 느헤미야의 기도에도 같은 문구가 반복됩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이처럼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이를 이사야 49장 14절과 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49:14-15)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잊지 못하듯이, 하나님은 한 번 자녀로 삼은 이상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반드시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끝까지 기억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모르드개의 복권(1-2)
(1-2) 그 날 아하수에로 왕이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니라 에스더가 모르드개는 자기에게 어떻게 관계됨을 왕께 아뢰었으므로 모르드개가 왕 앞에 나오니 왕이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준지라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하만의 집을 관리하게 하니라
처음에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을 믿었고 그에게 막대한 권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힘과 재산을 축적해 갔고, 그러면서 점점 그 속에 차 있는 탐욕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일에 왕은 속았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하만 자신이 쌓은 교만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게 하셨고, 지난 7장에서 그는 모르드개를 처형하고자 세운 나무에 자신이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후 에스더는 자기를 아버지처럼 돌봐 준 모르드개를 왕에게 소개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 왕도 생각난 것이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일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일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왕은 모르드개를 자기 앞에 나오게 하고 전에 하만에게 주었던 반지, 곧 나라에 조서를 내리고 통치에 관여하는 인장반지를 모르드개에게 주었습니다.
이전까지 모르드개는 왕의 기억에 잊혀진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한 일을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했던 일을 끝까지 기억하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모르드개의 중심을 아셨고, 그래서 끝까지 그와 동행하시며, 모르드개가 상상하지도 못한 은총을 내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간혹 우리 주위에 의인이라 불려도 될만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이 싫어 피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 곳곳에서, 또 교회 이곳저곳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일을 행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분들이 사람들의 관심에 밀려 잊혀지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꾸는 양화진 묘원도 은둔의 나리인 조선을 전 세계에 밝히고, 자기들은 조용히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잊혀진 사람들의 무덤이지 않습니까? 그 무덤들, 곧 그 사람들을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시며 후대의 우리들을 통해 다시 세상에 나타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며 외쳤던 바울처럼 우리의 섬김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주겠지’하며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는 깨끗이 잊혀지더라도, 하늘에서 영원토록 기억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천국에서 해같이 빛날 상급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기도의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의 삶이 이 땅에서 잠깐 반짝거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므로 천국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헌신이기를 축복합니다.
유다의 복권을 간구한 에스더(3-6)
왕이 모르드개에게 인장반지를 하사하자, 에스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만이 꾸민 유다인 몰살에 대한 조서마저 철회해달라고 왕에게 요청합니다.
(3-4) 에스더가 다시 왕 앞에서 말씀하며 왕의 발 아래 엎드려 아각 사람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 한 악한 꾀를 제거하기를 울며 구하니 왕이 에스더를 향하여 금 규를 내미는지라
에스더는 왕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간절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울면서 유다인을 몰살시키려던 하만의 조서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미 하만은 죽었고, 또 왕이 모르드개에게 인장반지까지 주었으므로 일이 쉽게 해결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에스더의 요청대로 왕이 조서를 철회하고 뜻을 돌이키면, 왕의 권위가 심각하게 실추된다는 사실입니다. 왕의 조서는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내려지면, 그것이 설령 오판이었다고 해도 끝까지 진행하는 것이 고대 페르시아 왕국의 전통입니다. 그래야 왕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왕은 조서를 철회하겠다고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에스더의 요청에 긍휼을 베푼다는 의미로서 들고 있던 왕의 지팡이를 내보였습니다. 이 행동은 복잡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으론 지금 울면서 ‘유다인을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에스더의 요청에 응하려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왕이 자기가 내린 조서를 자기가 직접 철회하기는 힘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복잡해지자 에스더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4절 후반에 “에스더가 일어나 왕 앞에 서서”라는 구문은 ‘일어난다’는 의미의 단어가 두 번 겹쳐 있는데, 이는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라는 의미와 함께, ‘왕에게 최대한 예를 갖추어 섰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요구에 쉽게 응해주지 않는다고 왕 앞에서 추태를 보이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여인답게 그녀는 왕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여, 할 수 있는 한 예를 다하였습니다.
(5) 이르되 왕이 만일 즐거워하시며 내가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 또 왕이 이 일을 좋게 여기시며 나를 좋게 보실진대 조서를 내리사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 왕의 각 지방에 있는 유다인을 진멸하려고 꾀하고 쓴 조서를 철회하소서
5절은 궁중의 예법을 갖춘 채 발언하는 에스더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왕이 만일 즐거워하시며”와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와 “이 일을 좋게 여기시며”, 그리고 “나를 좋게 보실진대”와 같은 말들은 에스더가 왕의 위신을 세우고 그를 난처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담긴 문장입니다. 그렇다고 에스더가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6) 내가 어찌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 하니
자신의 다급하고 간절한 마음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의 위신을 깎는다든지, 왕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무례함은 범하지 않으려는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왕의 마음을 더 감동시켰을지 모릅니다. 위급하다고 에스더가 자기의 말만 하지 않고, 난처할 수 있는 왕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종종 실수하는 면모가 이런 것입니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집요한 고집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상황과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기억하십니다. 그런데 당장에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님께 떼를 쓰듯 막무가내로 기도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선포기도’라며 하나님께 명령하듯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 앞에 섰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그의 뜻과 다스림 안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지, 내가 그를 다스리겠다고 나선다는 것은 무례한 일이고 천박한 일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무례하게 자기의 요구만 고집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지혜로운 말과 태도가 무엇일지를 항상 고민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새 조서를 통한 유다의 복권(7-10)
재차 정중하게 요청하는 왕후 앞에서 이제 아하수에로 왕도 더는 대답을 미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줄 수 있는 대답으로 응하였습니다.
(7-8)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하만이 유다인을 살해하려 하므로 나무에 매달렸고 내가 그 집을 에스더에게 주었으니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하니라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의 공손함에 굉장한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읽은 7절에는 한글 성경에 생략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힌네’라는 단어로, 우리말로는 감탄사 ‘보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감탄사이기에 생략해도 무방하지만, 왕의 감정을 읽기 위해서는 그 말을 넣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아하수에로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감동했고, 어떻게든 그들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왕후여 보십시오! 제가 다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뉘앙스입니다.
그래서 유다인을 살리기 위해 왕이 알려준 방법은 페르시아 전 지역에 조서를 내릴 수 있는 하만의 반지를 모르드개에게 주었으니, 모르드개를 통해 유다인을 멸하지 말라는 새로운 조서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왕의 말이 조삼모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난처함을 감수해 준 상황입니다. 조서를 철회한다면, 노골적으로 자기의 무력함을 보이는 행위가 되어 다른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조서를 내려서 유다인을 살린다면, 내려진 조서대로 시행한다는 측면에서 왕의 위신을 최대한 깎지 않고 유다인을 살리는 방법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더서 전체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지만, 기록상 문학적 구성을 띄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지금 아하수에로왕과 에스더 그리고 모르드개의 만남은 마치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만나주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의 위신이 하락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방법을 강구하여 주는 모습은,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에게는 영원한 죽음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자신이 직접 십자가라는 낮은 자리를 자청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암시가 에스더서 전체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아도, 우리가 이 책을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근거입니다.
이제 유다인들을 구할 방법을 얻은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그 즉시 왕이 알려준 대로 새로운 조서를 만들고 이를 전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9-10) 그 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백이십칠 지방 유다인과 대신과 지방관과 관원에게 전할새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와 유다인의 문자와 언어로 쓰되 아하수에로 왕의 명의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치고 그 조서를 역졸들에게 부쳐 전하게 하니 그들은 왕궁에서 길러서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는 자들이라
9절은 새로운 조서가 반포된 시점을 알려주는데, 그때가 3월 23일이라고 합니다. 굳이 정확한 시기를 언급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전에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라는 조서를 내린 때가 에스더 3장 12절에 기록하기를 같은 해 1월 13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다인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시기가 1월 13일부터 3월 23일까지로, 그 기간이 정확히 70일입니다. 마치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다에게 70년이 지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던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였을 때, 유다가 다시 자유를 얻게 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고된 생활이 연속되다 보니 약속의 말씀이 기억날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잊어가고 있을 때, 약속을 여전히 기억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생각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친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은 자기의 손바닥에 새기셨고, 어미가 젖먹이를 잊지 못하듯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지난 잘못은 하나도 남김없이 잊어버리시면서도, 우리의 간구와 기도, 우리의 섬김과 선행은 한 치 오차도 없이 기억하십니다. 이것이 복음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관심과 사랑을 받는 사람인지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때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속상하고, 내 공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 같아서 서럽고, 그게 힘들어서 울고 싶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나를 기억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나를 끝까지 떠올리시는 분이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전히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고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이 여전히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당신의 그 충성이, 당신의 그 순종과 희생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며, 오늘도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길을 넉넉히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우리도 기억해 주시고 내 모든 상황에 가장 선한 응답을 날마다 내려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때로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밉기도 하고, 그래서 서럽기도 한 우리들이었습니다. 삶에 늘 고난만 이어지는 것 같아 살 소망을 잃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시며,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오늘도 맡겨주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고자 합니다. 주님을 위한다면서 영광스러운 자리만 고집했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이제는 이름도, 빛도 없는 곳일지라도 그곳에서 여전히 주님께서 기억하고 계심을 바라보며, 해같이 빛날 삶에 도전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아하수에로 왕이 모르드개에게 하사한 것은 무엇이며 이는 원래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2. 모르드개를 기억하여 복권시켜 준 왕에게 에스더가 다시 울며 간구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3. 에스더의 청에 왕이 쉽게 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그런 왕에게 에스더는 어떤 태도로 나아갔습니까?
4.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얻은 유다인을 살릴 방법은 무엇이며, 이를 문학적으로 해석할 때 독자가 떠올리게 되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작성: 황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