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男子 4/4부
작가: 이은집
(3부 이음)
밤 사이에 좀더 헬쓱해지긴 했지만 그러나 결코 흠잡을 데 없는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낯익은듯 하면서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그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미안하군.』
어쩌면 이런 소리를 중얼거린 것도 같았다.
4부.
자연을 상실한 도시는 나로 하여금 가을의 피난민,
예컨대 파아란 하늘이나 제비 등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벌써 겨울을 시위하고 있었다.
이 분주하게 출근을 서두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상은 어느새 모직물과 혼방사로 바뀌어졌고,
근대화를 앞당기는 허울좋은 빌딩들의 뒷쪽에는 연통들이 장마속의 독버섯처럼 쑥쑥 자라 있었으니까….
나는 입좌석 겸용(원래는 좌석) 버스를 타고 시내를 향하여 들어왔다.
허지만 말했듯이 나는 지금 출근이 아니라 퇴근을 위해서였기 때문에,
따라서 지각이 상사나 동료에게 아무리 치명적인 불명예가 된다고 해도 남들처럼 전전긍긍 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나는 얼마전의 인구주택조사 결과 밝혀진,
二五 · 四퍼센트란 무주택 가구중에 한몫 끼어 있었으므로
가끔 신호등이나 차량들의 폭주에 막혀서 몇분씩 정차 되는 것에 오히려 흐뭇한 기분이 되곤 했다.
그것은 고아원에서 양자로 들어갔던 주인집이 별 뚜렷함 원인도 캐어내지 못한 채 깨끗이 망해버린 때문이겠는데,
왜냐면 그렇지 않고 내가 하다못해 분신자살을 해서야
겨우 그 한심한 노동조건의 일각이 드러난 모 시장의 재단사만 됐다 해도,
나 역시 지금 저 사람들처럼 이 기막힌 교통지옥에 대해 당국을 욕했을 터이니까….
허나 이런 사실들을 미쳐 깨닫기도 전에 나에게는 늘상 찾아오던
어떤 증세가 어김없이 부정외래품장수처럼 보따리를 풀고 은밀히 시작을 했다.
매스컴들은 이 도시의 살인적인 공해 때문이라지만,
나는 헛구역질이 나면서 속이 메스꺼워지고
온 몸의 힘이란 힘은 구멍뚫린 풍선처럼 모조리 새어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임신한 여자에게나 있을 수 있는 증상이었다.
나는 심지어 나의 몸의 어느 한 구석에 야릇한 통증까지 느꼈다.
그리고 불개미떼처럼 나를 온통 뜯어먹고자 음모하는
어떤 생명체가 맹렬한 속도로 세포 분열을 일으키는 착각에 빠졌다.
분명히 나의 어디에서 무엇인가 자라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비록 꼬집어 내가 말 할 수 없다 해도 이 증상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일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 잉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점점 깊은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다.
『아니! 이분이 왜 이럴까?』
옆의 승객 아가씨가 매살스럽게 나를 밀어뜨리며 뾰죽하게 쏘아왔다.
『아─!』
그제야 나는 가까스로 몸을 바로 했다.
깜빡 졸았을까? 아니면 쓰러졌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이윽고 나는 아가씨에게 정식으로 치하를 했다.
왜냐면 이 아가씨의 그 한마디는 나의 꺼지는 의식의 엔진에 한 깡통의 휘발유 역할을 해 주었으니까….
『네?』
아가씨는 이 잘 생긴 사내가 아침 출근길부터 식은 땀조차 흘리며
왜 이런 이가 맞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할까 기가 찬 모양이었다.
나는 면구스러워졌다.
해서 얼른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아까 생각하다가 놓쳐버린 그 의문의 꼬리를 찾아 성좌를 해맸다.
그 여름날의 돌연한 흉사 이후 나는 한 무리의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개나리가 유난히 노랗던 상당히 커다란 집에서 한 때를 살았는데,
항상 검은 옷에 베일로 머리를 감추던 여자선생님은 나에게 꽤 숱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허지만 나는 그녀가 아니래도 사실은 결코 쉽사리 슬퍼하거나 비뚤어지는 성미가 못되었다.
나는 나혼자뿐이기 때문에 더욱 꼿꼿이 자랐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양자로 들어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인집이 나에게 베푸는 혜택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으니까….
그러한 나의 생활신조는 군에 입대하기 전에,
다시 말하여 주인집이 뜻하지 않게 망한 순간까지 일관하고 있었다.
삼십여명의 일당이 전혀 상상을 초월하여 이 도시의 가장 급소까지 쳐들어 온 덕택에
꼭 삼십사개월로 복무가 연장되었을 때까지도 나에게 이러한 증세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었으니까….
아니다.
신고 첫날 박하사와의 일이 있은 후 또 다시 유 길수 병장한테도 끌려갔을 때 나는 꼭 한번 있었다.
그날은 취사반뒤 야간근무를 서고 들어와서였다.
『교대했나?』
일직하사 완장을 두른 유병장이 물어왔다.
『네!』
나는 무슨 트집이나 잡지 않을까 싶어 조금 겁이 났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너 매트레스랑 모포 석장만 중대본부로 내다주지 않을래?』
『지금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응!』
『네!』
나는 얼른 A급 매트레스 한개와 역시 A급 모포 석장을 둘러메고 유병장의 뒤를 따랐다.
『일직사관이 저쪽 중대장실에 있으니까 조용히 펴도록 해!』
유병장이 희미한 붉은 전등불 갓을 올리며 속삭여왔다.
나는 잠잠히 매트레스를 깔고 모포를 폈다.
『쫄병생활, 괴롭지?』
오늘 따라 유병장은 자꾸 다정하게 건네왔다.
『아녜요.』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졸리지 않으면 잠깐 얘기나 하다 가지.』
모포위에 벌렁 누우며 유병장의 손이 나를 잡아 끌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곁에 걸터앉았다.
어림풋한 붉은 전등 불빛에 비친 유병장의 얼굴은 뜻밖에도 퍽이나 고독해 보였다.
『난 좀 괴퍅한 성질이어서…. 애들을 못살게 해야 직성이 풀린단다.』
그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뺏다를 쳤다 하면 유병장이 주동이었다.
워낙 고참이기도 했지만 성질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허지만 나는 한번도 안때렸다.
식수(食水)가 떨어졌으니 떠오라든가 특근하는 누구를 데려오라는둥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나를 직접 때리지는 안했다.
『성이병은 참, 애인 있나?』
이윽고 그는 엉뚱한 질문을 던지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런 것 없어요.』
사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의외로 연애를 한 적이 없었다.
『거짓말! 너같은 미남한테….』
하다가 유병장은 나의 손을 슬쩍 잡아쥐며
『에, 그럼 경험도 한번 없나?』
그리고는 더욱 나의 얼굴을 주시하는 것이었다.
『글쎄요.』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꼭 한번 적선지대에 간 일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나 당황했기 때문에 무어가 무언지 잘 몰랐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그는 다구쳤다.
『없는거나 마찬가지예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그는 안심이라는듯 후우 숨을 내뿜으며 말했다.
『그래?…에, 그렇담 내 오늘 밤에 그 방법을 가르쳐 줄까?』
『어떻게요?』
나는 박하사가 퍼뜩 떠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유병장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야릇한 흥분이 서서히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이리 와봐!』
유병장은 전등불을 아예 끄고 나서 억세게 나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난 네가 좋았어!』
뜨거운 입김이 나의 귓밥에 맴돌았다.
유병장은 과연 박하사와는 달리 아주 능숙했다.
『넌 나의 애인이야! 마누라야! 훗훗!』
이윽고 유병장은 키들키들 웃으며 손길을 아래로 쑥 뻗어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가마니 지푸라기가 섞인 콩나물국에 보리투성이의 조식을 먹고서,
논산훈련소를 떠나 온 이래 처음으로 토악질을 했다.
지금의 이 증세와 아주 비슷하게 헛구역질이 나면서 속이 메슥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보면 나의 이 여자가 임신한 것과 같은 증세가 시작된 것은 그때로부터 셈쳐야겠다.
그렇다면 제대한지가 여덟달쯤 됐으니까 적어도 삼년이 훨씬 넘었다.
헌데 아직도 출생을 지연하고 있는 나의 이 증세뒤에 숨은 생명은 무엇일까?
햇빛과 물과 영양을 억세게 흡수하여 기어히 바르게 자라보려던 입대 이전의,
거듭 말하거니와 주인집이 망하여 헤러지는 것이
그들에게 내가 마지막 갚을 수 있는 은혜에의 보답이었을 때까지의 그 의지
<희망 또는 포부라 불러도 좋을>를 주택단지의 조성을 다구치는 불도자처럼 깡그리 밀어제치고 들어선 그것은…?
그러나 나는 끝내 나를 이토록 무력하게 마비시키는,
허지만 결국은 나의 속 어느 곳에 숨어 있을 그 새로운 생명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제대를 하고 목적지도 없이, 그러나 철새가 단지 옛날에 한번 살았던 인연으로 다시 찾듯이
이 도시에 들어왔던 나는 다행히 전우들이 모아준 약간의 송별금이 있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별 구애없이 지낼 수 있었는데,
허나 열흘이 안가서 나는 집잃은 똥개처럼 거리를 헤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다가 벌써 몇 번째나 파헤쳤다 깔았다 하는 당국의 계획성 없는 도로 포장공사로 나는 겨우 밥 걱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날은 추석이란 명절이 내일로 박두했었고, 해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목욕탕엘 갔었다.
그때 역시 목욕을 하러 왔던 오늘의 단장이 나를 점찍고 뒤를 따랐던 것이다.
『북에서 온 사람은 아니니까 안심하시고 나 좀 봅시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검은 안경만 끼었다면 저 포스터에 나와있는 간첩과 영낙없을 터였다.
나의 새로운 취직은 그렇게 해서 뜻밖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비록 누구에게 자랑할 성질의 직업은 아니래도,
그것은 나에게 과분한 대우였고 겸하여 신난다 할 수 있을 거였다.
나는 저 박하사와 유병장에게서 벗어나 이제야 처음으로 나의 역활을 행사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런데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렁으로 자꾸만 빠져 들어가고 있을까?
『四가 내리서!』
나는 어느새 단장과 만나기로 되어 있는 이곳까지 왔다.
그는 도심의 상가아파트 맨 꼭대기에서 별천지를 꾸며놓고 살고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퇴근을 하면 여기에 와서 그로부터 간밤의 전투에 대한 수당을 지불받았다.
그리고 아무 여관에나 들어가 오후 六시까지 늘어지게 자면 되었다.
이제 동양 굴지를 자랑한다는 거대한 상가아파트는 방금 눈을 비비고 일어나 후우 하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