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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5:12-14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받는 복 2019. 8. 11.
“암치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는 책을 저술하였던 고신대 의학박사인 이병욱교수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암대체 의학박사이며 대장암 수술만 1500회 이상을 집도하였던 대장암 전문의이며, 교회 장로님입니다.
하루는 온몸에 보기에도 살벌한 문신이 새겨져 있는 환자가 수술실에 들어왔습니다. 수술을 보조하던 인턴이 이교수님에게 말합니다. “교수님, 오늘 수술은 특별히 신경을 좀 더 기울여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수술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VIP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인턴이 설명하기를 전국구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대형 조직폭력배의 부두목이랍니다. 이 조폭이 수술 전에 인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술해서 칼을 대야 하는 부위에 용문신이 새겨져 있는데, 행여 칼을 대어 개복 수술을 하다가 용의 머리라도 잘라지면 절대 안 된다. 그러니 담당 교수님에게 특별히 말을 잘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웃기는 상황이지요. 자신의 배에 그려져 있는 용 머리가 칼로 잘리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은 웃고 넘기기에는 살벌한 내용입니다. 행여나 용머리가 잘리면 후환이 뒤따른다는 말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병욱교수는 웃고 넘겼지만, 사실 그리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수술을 진행하는 담당 의사를 협박할 정도면, 나중에 병원에 와서 얼마든지 깽판을 치면서 난장판을 벌일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는 기도하며 수술의 결과를 하나님에게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수술이 잘 끝나고 환자가 회복실에 있는 동안, 이교수님은 혹시나 싶어서 회복실로 가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환자의 수술 부위를 보고, 그리고 잠시 환자가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라는 짧은 기도를 끝내는데, 마취가 풀려서 정신이 돌아온 조폭 환자가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조폭이 병원에 머무는 동안 이교수님과 대화를 자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이 조폭은 과거 몇 차례 감옥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교도소 선교를 담당하시는 분들에게 복음에 대하여 접한 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이 조폭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였다는 간증이 있었습니다.
신앙은 지식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인격까지 성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장소와 환경을 불문하고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신앙의 질병가운데 무서운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병 든 사람의 특징은 무관심과 무감각입니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어떤 자극이 와도 감각이 없다면 그것은 큰 병이 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믿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성도에게 어떤 은혜가 주어지는지 살펴보기를 소망합니다.
1. 택할 길을 가르쳐 줍니다.
12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본문의 초두에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조건을 걸고 있습니다.
어떤 자인가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경외(敬畏)”라는 단어의 뜻은 “공경하고 두려워 한다”는 뜻입니다. 경외에 사용된 히브리어(야라) 역시 ‘두려워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두렵게 하고 공포에 빠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공경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멋대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성경 말씀을 잘 아는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성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택할 길을 가르쳐 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여러 가지 은혜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택할 길을 가르쳐 주신다”고 말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 헛갈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선택과 판단을 하기 위하여 여기 저기 기웃거립니다.
우리들은 수많은 선택 가운데 살아갑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작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매우 신중하게 판단해야 되는 큰 선택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은 그 한 번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인생 전체가 그 영향력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륜지대사라고 말하는 결혼이 바로 이런 중차대한 선택 중에 하나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에는 스프링벅(springbok)이라는 산양(山羊)이 있습니다. 스프링처럼 뛴다고 스프링 벅이라 부릅니다. 이 양들은 20-30마리씩 무리를 지어 풀을 뜯어먹습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 수천마리가 함께 이동합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풀을 뜯어먹으면서 이동을 하지만, 점점 속도가 빨라져 나중에는 질주를 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앞에 있는 양들이 풀을 다 뜯어먹기 때문에 뒤의 양들은 자신이 먹을 풀이 모자라서 앞의 양들을 밀치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풀을 뜯어먹기 위해 달리지만 나중에는 앞지르기 위해서 달립니다. 그러다가 도대체 왜 달리는지 이유도 모른체 전체 무리가 앞만 보고 달리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함께 앞만 보고 뛰어가는 것 때문에 가끔가다가 참변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앞에 절벽이 나타났을 경우입니다. 맨 앞에 있는 무리가 절벽 앞에서 멈추려 해도 멈추지 못합니다. 그것은 뒤 따라 오는 양들에게 밀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그 다음 양도, 그 다음도 모두 함께 떨어져 죽고 맙니다. 떼를 지어 달리다 떼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달려가야 하는 방향을 올바르게 선택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더 좋은 풀을 먹기 위해 달려야 하고,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리는 스프링 벅의 모습을 두고 현대인의 모습과 똑같다고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앞만 보고 달리며 다들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앞만 보고 달려 갑니다. 조금이라도 좌우를 살피면 시간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전혀 좌우를 돌아 보지 않습니다.
오로지 앞 만 보고 달립니다. 목적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한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지 않으신다면, 나의 선택과 나의 판단은 종종 잘못되고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곤경에 빠지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앞 만 보고 무작정으로 달리는 스프링 벅이 아닙니다. 내가 노심초사하면서 고민과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그 선택이 항상 나에게 가자 완벽한 선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에 성도는 하나님의 결정을 존중하고 믿으면서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에 경외심을 가지고 따라가는 성도입니다.
지난 주간 화요일 밤에 태풍이 부산에 상륙하였습니다. 큰 피해가 없이 지나갔지만, 태풍이 오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만반에 준비를 합니다. 태풍의 비도 무섭지만 강한 바람은 더 무섭습니다. 강풍에 대비하기 위하여 창문을 어떻게 조치하는 것이 좋을까요?
예전에는 젖은 신문지를 유리창에다가 바르면 강풍에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지에 물을 뿌려서 젖게 만들어서 유리창에 붙여 보았습니다. 이것 붙이기가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생각보다 잘 붙지 않고 물기가 마르면 곧 떨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에는 포장용 왕테이프를 가져다가 유리창에 크게 X자로 바르면 유리창이 강하게 견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포장용 테이프를 사다가 유리창에 X자로 크게 붙였습니다. X자로 한번 만하기 불안하니 가로세로 좌우로 마구 부쳤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효과가 없답니다. 태풍이 끝나고 유리창에 흉측하게 테이프 자국만 잔뜩 남아서 흉물이 되었습니다.
태풍을 대비하는 가장 정확하고 올바른 선택은 무엇일까요? 젖은 신문지도 아니고 테이프로 X자 모양으로 바르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유리창 자체가 흔들리지 않도록 유리창 자체를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강풍에 유리창 자체가 흔들리다 보니 유리창이 깨어지게 됩비니다. 그래서 유리창틀에 단단히 고정만 시키면 파손율을 현저히 낮출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리창은 유리창틀에 단단히 고정만 되면 바람도 견디게 됩니다. 하지만 유리창틀에 단단히 고정되지 못하고 덜렁거리는 유리창은 결국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하나님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에게 단단히 고정이 있으니 강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단단히 고정되어져 있으므로 모진 바람과 비를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단단히 고정되어져 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성도에게 택할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사야 48:17절 “하나님께서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마땅히 행하고 나아가야 되는 길을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여호와의 친밀하심을 맛보게 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첫 번째로 보여 주시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택할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두 번째로 보여 주시는 은혜가 14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14절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4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무엇인가요?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집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여호와께서 친밀하심을 나타내시고, 또한 언약을 경외하는 자에게 보여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두 문장으로 구분되지만 내용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보여 주시는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과 행동입니다. 어떤 것이 친밀하심인가요? 친밀함은 가깝게 여기는 마음과 행동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던가요?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굉장히 내 곁에 가까이 친밀하게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이 존재하심과 인도하심을 내 피부로 느껴지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가 내가 여호와 곁에 서 있고, 여호와께서 친밀하심을 드러내는 때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가 도무지 하나님에게 도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친밀함을 나타내신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친밀함과 사랑을 드러내는 능동태 문장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나타내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조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나에게 보여 주시는 모습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받아 누리고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을 느끼게 되는 말씀이 13절에서 또 등장합니다. 13절 함께 보십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함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경외하는 성도의 자손들은 이 땅에 살 때에 물질로 궁핍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여성도님이 목사를 찾아와서 신앙상담을 하다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화를 잘 내는 것이 흠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화를 오래 품지 않고, 또 뒤 돌아서면 그런 모든 것을 다 쉽게 잊어 버립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님께서 내는 화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성도님께서 성내는 것으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에 남겨진 상처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과 평안은 정비례하고, 신앙과 두려움은 반비례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성숙된 신앙을 가질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비중이 높아지고 두려움은 더 멀리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시기 바랍니다. 불신앙, 우상, 인간적인 혈기와 죄악까지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개개인마다 성격과 내용은 다르지만, “대부분 한 두가지의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 초조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치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만이 이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과 은혜를 느끼고 체험한 사람은 제 아무리 힘든 삶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다고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이 내 삶의 모든 부분에 그 영향력을 미치며 극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14절 말씀은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두 주전 주일 새벽 기도 때에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가 정말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복음 송을 함께 부르면서 은혜를 나누면서 말씀을 마무리할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