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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무안 22코스
영해마을-도원마을-김대중대교-학례마을-항장마을-이기촌-원성내마을-농장마을-내화마을-비석거리
20221026
1.무안 운남반도의 아름다운 풍경들
지난해 10월 26일 새벽의 어둠 속에서, 서해랑길 22코스를 탐방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다되도록 미루었다가 검은 토끼의 해를 맞이하여 이제사 그 탐방 체험을 기록한다. 여기저기 방랑하다 보니 세월을 타고 흘러갈 뿐 자신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다. 국토순례라는 명목으로 산행과 트레킹을 즐기면서 탐방 지역의 탐구에 소홀한 까닭이다. 늦었지만 내 삶의 한 흔적으로 기록한다.
2022년 10월 26일 새벽 4시 45분 무안군 동암리 영해마을에 도착했다. 새벽의 어둠을 쫓아내며 마을의 가로등이 밝게 빛나고 있다. 2주 전인 10월 12일 이곳에서 서해랑길 21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했었다. 이번에는 22코스를 순방향으로 탐방한다. 어둠의 새벽 시간에 연거푸 두 번 영해마을에 온다. 영해마을 전체를 살필 수 없다. 이곳에 오기 전 22코스를 탐방하면서 영해공원을 들러 가보자고 마음먹었지만 도착하는 순간, 그 생각은 언감생심, 일행을 따라 급하게 내달릴 수밖에 없다. 영해마을을 통과하여 양배추들이 헤드랜턴 불빛을 받아 환하게 웃음짓는 밭길로 나갔다.
서해랑길 22코스는 무안군 운남반도 남쪽을 돌아 서북쪽으로 올라가는 탐방경로이다. 탐방거리 11.9km, 소요시간 4시간이라고 안내도에 적혀 있다. 이 탐방 코스의 절반을 새벽의 어둠 속에서 헤맸다. 어둠 속 탐방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무의미한 탐방을 보람있게 하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이 있다. 도원마을, 김대중대교, 압해도, 대박산, 어둠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난 풍경이었다. 이 풍경들이 어둠 속 몽매한 탐방객의 위치를 잡아주며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운남반도 남쪽 해안에서 운남반도 동북쪽 무안군 청계면 쪽에서 아침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걷어내는 붉은 노을빛은 어둠을 걸어온 드넓은 간척농지를 밝혀 준다. 저곳을 걸어왔구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걸어온 곳이 바로 저 간척농지였어. 학례들, 학례마을, 대박산, 항장마을, 대박산, 간척농지에 펼쳐진 풍경들이 반짝반짝 존재의 빛을 밝힌다. 운남반도의 매력에 푹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맞은편 압해도의 금산이 뾰족하게 솟아있고 길게 이어진 압해도 남쪽의 가륭항이 가르릉거린다.
이번 탐방에서 다경포진성을 알게 된 것이 소중하다. 무안군 운남반도가 지리적 요충지임을 증명하는 다경포진성은 계당산 자락의 원성내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계당산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성내리 남촌마을과 땅끝은 운남반도 서쪽 끝에 위치하여 운남반도의 지리적 아름다움과 위치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그곳은 서남쪽으로 압해도와 마주하고, 서북쪽으로 고이도, 선도, 지도, 무안군 해제반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그곳에 서보라. 풍경의 아름다움 속에 역사지리적 감각이 생겨난다. 고려의 왕건이 이 지역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이 지역을 장악한 것이 막강한 후백제 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와 조선에서 완도의 청해진과 더불어 무안의 다경포진울 중요하게 여긴 이유도 알게 된다.
이번 탐방에서 탐방객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풍경은 양파 모종을 내는 풍경이었다. 운남반도 서쪽 무안군 내리 월악마을과 성내리 농장마을을 잇는 두 개의 방조제에 의하여 월악마을 앞과 농장마을 앞에 드넓은 간척농지가 조성되었다. 그 풍경 속에 양파 모종을 심는는 여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동쪽으로 대박산이 자리하고 남쪽에 안산이 자리하여 분지를 형성한 곳에 드넓은 농장들이 펼쳐져 있다. 농장마을을 바라보는 안산 자락 언덕밭에서 여인들이 양파 모종을 내고 있다. 아침 7시가 되기도 전이다. 마을의 아낙들이 모두 모인 것 같다. 여인들이 앉아 양파 모종을 내면서 뒤로 이동한다. 일사분란하게 양파 모종 내는 모습을 생애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감동적이었지만 가슴 한 편에 아픔의 강물이 흐른다. 이른 아침 밭에서 여인들이 노동을 하고 있는데 탐방객은 그 현장을 생애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고 감동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뜨거운 것이 목울대를 치받았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1.93km
전체 탐방 시간 : 2시간 49분
영해마을 입구의 영해마을 표석이 세워진 옆에 영해마을 버스정류소가 있다. 서해랑길 21코스 방향이다.
서해랑길 무안 21·22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22코스는 영해마을을 통과하여 진행한다.
쉼터정자 기둥에 서해랑길 22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오른쪽에 영해마을 노인회관이 있다. 영해마을은 예전에 섬이었다고 한다.
"영해(永海)마을은 하동 정씨 집성촌으로 감태미(하전좌리), 자막골, 영해촌으로 이루어졌다. 이후에 김씨 서씨들이 들어와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영해마을은 행정구역상 동암4리에 속하며 운남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4㎞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영원히 바다에 있는 섬마을’이란 의미로 '영해(永海)'라 했다고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자세히 모르고 있으며 다른 기록도 없어 확실치 않다. 마을의 입향조인 하동정씨 족보에는 永湖라고 나오는데 간척을 하기 전 물이 들면 마을 안쪽에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이것을 보고 永湖라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원래 영해마을은 하루에 두 차례씩 썰물일 때 육지와 연결되는 섬이었다. 물이 들 때는 마을이 섬으로 변하여 '영해도'라고도 하였다. 육지와 연결된 것은 서울 사는 이창손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과 대박마을을 연결하는 사업을 했으나 완성을 시키지 못하고 1970년대에 구일산업에서 완성시켜 육지가 되었다. 청계만을 마주하고 있는 마을 앞에는 세 개의 섬이 보인다. 하나는 청계면 구로리 앞의 대섬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 바로 앞의 젖섬 또는 젓둑이라 부르는 유도(乳島), 또 하나는 섬이 길다 하여 띠섬이라 부르는 茅島가 있으며, 모두 무인도다. 이 섬들 사이에 썰물이면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가 있다. 강중내바위 또는 주네바위라 부르는 이 바위는 간척되기 전에는 이 마을 주민들에게 육지로 갈 수 있는 알림이 역할을 했다. 즉 이 바위가 썰물로 모습이 보이면 육지로 연결된 노두가 보이기 때문에 운남에 가려고 하는 주민은 집을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 무안문화원
영해마을 골목길 영해촌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나간다.
영해마을 골목길을 빠져나와 양배추밭을 거쳐 걸어오다가 영해마을을 뒤돌아보았다.
양배추밭에 세장산비가 세워져 있다.
해안으로 나와 어둠 속에서 불빛 환한 곳을 바라보았다. 압해도로 이어지는 김대중대교일 것이라 어림한다.
폐가인가? 공장 건물인가? 아니면 축사인가? 몇 개의 건물동을 지나 해안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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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불빛 비치는 곳은 압해도, 오른쪽 불빛 비치는 곳은 김대중대교일 것이라 추정한다.
이 방조제에 의해 영해마을(영해도)은 섬이었다가 육지로 이어졌다.
방조제에서 오른쪽으로 나가 영해로로 나간다.
운남면 동암리에서 성내리로 들어와 영해로를 따라 직진한다. 성내리 지명 유래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 놓는다.
"성내리(城內里)는 운남면 소재지에서 남으로 3㎞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동으로는 넓은 습지가 자리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어 대부분이 간척지이다. 남쪽은 신안군의 효지도와 압해도가 마주하고 있으며 대박산을 중심으로 하여 남촌, 항장, 대박, 도원, 학례, 원성내, 농장 등 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무안군 망운면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다경진성이 있었다 하여 성안 또는 성내라 하였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이기촌, 남촌, 항장리와 현화면의 도원촌, 대박산등, 학례동을 합하여 다시 무안군 망운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83년 망운과 운남으로 분면되면서 성내리는 운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원성내에는 다경진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박산 주변에는 4개의 곶이 있다. 동남곶이, 뿔당곶이, 우앙곶이, 밥풀곶이 등이다." - 무안문화원
성내농장 건물이 길게 이어져 있다.
운남면 성내리 1605 지역으로, 시작지점에서 1.9km, 도원선착장 2.2k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영해로를 따라 직진한다.
영해로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농로를 따라 도원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직진하면 대박마을로 이어진다.
"대박마을은 성내3리에 속하는 마을로 운남면의 주산인 대박산 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은 1960년대 조리섬, 영해촌과의 간척으로 형성된 농지가 펼쳐져 있고 옆에 바디나리 산이 있으며 도원촌으로 넘어가는 바위산이 있다. 지금은 곳곳이 개간 되어 농지로 활용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대박산 숲이 마을 뒤를 받치고 있었으며 아름드리 소나무가 마을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말대로 마을의 지형이 바가지 모습을 하고 있어 와우형의 지세를 하고 있다. 바디나리는 영해촌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산이며 성내리의 1번지가 시작되는 곳으로 옹달샘이 있다.
운남과 망운의 주산인 大朴山은 성내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혜운사가 자리하고 있다. 혜운사는 이 시대의 큰 스님인 청화스님이 토굴을 파고 용맹정진했던 자리에 들어선 사찰이다. 혜운사 입구의 일주문에는 旲朴山慧雲寺라 써 있다. 이러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사찰을 찾아 스님에게 왜 大朴山이 아닌 旲朴山으로 썼냐고 묻자 그 스님은 ‘이 사찰을 세우신 큰 스님(청화스님-입적하셨음)의 가르침대로만 표기했다’고 한다. 대박산은 망운과 운남면에서는 제일 높은 산(84.5M)이다. 주민들은 태박산이라고도 부른다. 또한한 대박산이란 지명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대박산은 산경표에 ‘크고 밝은 뫼’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나주 다시에 있는 대박산은 ‘봉우리가 바가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 대박산의 의미는 아는 주민들이 없었다." - 무안문화원
어둠 속에서 노란 들꽃 핀 산길을 간다. 아마도 바지나리산 자락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원들녘의 콩밭을 거치고 마늘밭을 돌아가면 앞쪽에 불빛 비친 마을이 보인다. 도원마을이라 가늠한다.
성내리 도원마을로 들어왔음을 도로명을 통하여 확인한다.
불빛 환하게 비치는 도원마을을 통과하는 줄 알았는데, 서해랑길은 도원마을 외곽으로 빠져나간다.
"도원(桃源)마을은 성내4리에 속하는 마을로 이름처럼 살기 좋은 마을이다. 대박산의 맥을 이은 바위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예전에는 마을 주위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길에서 보면 마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은밀하며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바닷길에서 마을을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았다고 한다. 해서 마을 이름도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상향’, ‘별천지’를 비유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줄여서 ‘도원(桃源)’이라 한 것이다.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농경지는 두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첫 번째 간척은 조선시대에 이루어졌으나 두 번째 간척은 1960년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 무안문화원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와 신안군 압해읍 복룡리를 잇는 연륙교 김대중대교가 가까이 보인다. 김대중대교 아래에 도원선착장이 있는데 서해랑길은 도원선착장을 비켜서 공항로 김대중대교 아래를 통과한다.
성내리 331-12 지역으로, 시점 3.8km, 종점 8.1km, 도원선착장 0.3km 지점이다.
멀구슬나무 푸른 열매가 싱싱하게 맺혀 주렁주렁 달려 있다.
김대중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압해도로 이어지는 김대중대교를 뒤돌아보았다.
이 들판을 성내리 망넘들이라 이르는 듯. 수로 옆 농로를 따라 이어간다.
이 들판을 악무지들이라 이르는 듯. 시점 4.8km, 종점 7.1km 지점이다. 대박산 혜운사는 3.0km 거리에 있다.
뒤돌아서서 걸어온 남서쪽길을 가늠한다. 김대중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망넘들을 거쳐 바로 앞 악무지들 양파밭을 지나왔다.
시점 5.7km, 종점 6.2km 지점으로 혜운사는 2.1km 거리에 있다.
걸어갈 북동쪽을 바라보면 학례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불빛 반짝이는 곳은 성내5리 학례마을일 것이라 추정한다.
"학례(學禮)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압해도 방면으로 4㎞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학례동이라고도 부르며 학문을 좋아하고 예를 지키는 것이 어느 마을 못지않다.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행정구역명으로는 운남면 성내5리 학례 마을이다. 오래 전 항장마을과 한 마을이었다가 인구증가로 분리되었다. 앞구지, 산너머, 감난골, 대삽고지, 꽁바탕의 마을로 이뤄진 대단히 넓은 지역이다. 마을이 대박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간척공사와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농업용수의 부족과 농지 부족으로 마을 사람들이 생계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마을의 主山인 大朴山은 이곳의 주민들에게는 태백산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또한 대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 혜운사는 입구의 일주문에 [旲白山 慧雲寺]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사찰을 찾아 스님에게 왜 大朴山(대박산)이 아닌 旲白山(대백산)으로 썼냐고 묻자 그 스님은 ‘이 사찰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큰 스님(청화스님-입적하셨음)의 가르침대로만 표기했다’고 한다. 대박산은 망운과 운남면에서는 제일 높은 산(84.5m)이다." - 무안문화원
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학례마을과 항장마을 앞은 드넓은 간척지가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은 성내5리 학례마을이고, 왼쪽은 성내2리 항장마을일 것이라 추정한다.
"성내리는 서해안 무역 항로의 지킴이 다경포진성(多慶浦鎭城)이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경포진성은 기록으로 세종 때 설치하였다고 하나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훨씬 이전에 진(鎭)이 설치되어 서해 항로의 지킴이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역사적인 여러 기록으로 봤을 때 성내리 앞의 서해바다는 서해안 무역항로의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이후 고려가 건국될 때는 통일 고려의 후방기지로서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을 치기 위한 수군뿐 아니라 의병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항장마을은 성내2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목장마을이라 했다. 이 마을을 포함한 운남면과 망운면 일대는 조선시대 거대한 목장이 있었다. 망운에는 종육품의 감목관을 두어 목장을 관리할 정도로 많은 말[馬]과 목장지가 있었다. 이중 항장마을은 지리적 위치로 봤을 때 다경포진성 밖 마을로 말을 기르기에 좋은 곳이었다. 해서 오래 전부터 목장마을로 불려져 왔으며 1900년대 들어서 주민들이 ‘牧場마을’이란 마을 이름이 갖는 의미가 좋지 않다 해서 牧을 項(목 항)으로 고쳐서 訓만 빌려서 ‘항장(項場)’이라 부르고 있다. 실지로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으로 다경진 성외 마을로 나왔다. 그리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 비로소 망운면 항장리로 나온다." - 무안문화원
방조제 아래를 따라가며 운남반도 서쪽 끝 계당산과 그 아래 불빛 반짝이는 성내리 남촌마을을 조망하였다.
항장마을 앞 드넓은 간척농지에 축사가 있다. 축사를 오른쪽으로 살피며 진행한다.
오른쪽 끝 김대중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대박산 앞쪽 간척농지 농로를 따라왔다. 동북쪽 무안군 청계면 쪽 하늘이 붉게 탄다.
왼쪽 뒤에 불빛 반짝이는 김대중대교, 바다 건너 압해도가 길게 누워 있고, 오른쪽 뾰족한 산은 금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운남반도 서쪽 계당산이 왼쪽 서쪽 바다로 빠져들고 있다. 불빛 빛나는 오른쪽은 성내리 남촌마을이고 맨 왼쪽이 운남반도 서쪽 끝 땅이다.
불빛 반짝이는 김대중대교는 위치 확인의 기준이 되어 준다. 오른쪽 산봉은 압해도의 금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이정목 뒤에 길게 이어진 방조제에 의해 드넓은 간척농지가 조성되었다. 간척농지 농로를 따라와서 '땅앞로'로 나왔다. 방조제 뒤 바다 건너편은 신안군 압해도이며 뾰족한 산은 금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시점 7km, 종점 4.9km 지점이다.
땅앞로에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대박산 아래 항장마을과 불빛 비치는 곳의 성내교회 앞 간척농지를 걸어왔다.
땅앞로는 성내리 이기촌마을 입구와 남촌마을을 거쳐 운남반도 서쪽 끝 땅까지 이어지는 도로名이다.
운남반도 동쪽 너머의 무안군 청계면 방향에서 해가 솟아오르며 붉은 기운을 내뿜고 있다.
바다 건너 신안군 압해도가 오른쪽 가륭항에서 왼쪽으로 길게 누워 있다. 왼쪽에 뾰족하게 솟은 산은 금산인 듯.
땅앞로를 따라가다가 운남반도 서쪽 땅끝을 바라보았다. 땅끝 맞은편 흰 여객선이 보이는 곳은 압해가륭항여객선터미널일 것이며 맨 오른쪽 계당산 자락에 남촌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성내1리 남촌(南村)마을은 운남의 가장 끝자락인 남쪽에 있었다.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길이 있고 마을 뒤에는 계당산이 있으며 앞에는 돌고지라 부르는 둔덕이 있다. 마을 앞으로는 옛날 영산강을 포함한 서남해안의 무역항로요, 현재는 목포로 가는 뱃길이 된 바다가 있었다. 남촌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6㎞쯤 떨어진 다경포진성과 같은 방향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 구역명으로는 운남면 성내1리 남촌마을이다.
운남 제일의 산, 대박산의 맥을 이어받은 마을 뒷산은 鷄堂山, 桂堂山, 開堂山으로도 불려지는데 주민들마다 다르게 알고 있어 뭐라고 꼬집어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뒷산의 모습이 닭의 형국이다’고 했기 때문에 鷄堂山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주민들은 ‘저당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 앞 바다에서 ‘준치 파시가 형성될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 현재는 그러한 좋은 시절은 사라지고 요즈음엔 새우가 조금 잡힐 뿐이다’고 한다.
남촌마을은 양남계라는 둔덕을 사이로 남촌과 땅끝으로 이뤄졌다. 마을 앞에 나있는 길을 따라 양남계를 넘어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길 끝이 나온다. 주민들이 땅끝 선창이라 부르는데, 선창 앞 100여m 거리에 짱뚜리라는 조그만 섬이 있다. 선창과 짱뚜리 섬 사이에는 물에서 드러난 널찍한 바위가 있는데 돌섬이라 부른다. 돌섬의 바위에 상석과 비석이 놓여 있다. 짱뚜리 섬에 무덤을 쓴 전주 이씨 집안에서 놓은건데 섬으로 건너가기가 어려워 건너지 않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바닷물이 밀려오더라도 물이 상석을 넘은 적은 없다고 한다.
땅끝 선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에 있는 신안 지역 섬 쪽의 것과 더불어 5개의 감시 초소가 배치될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특히 1970년대 신안의 섬에 무장공비가 출현하여 비상이 걸린 적이 있었다. 또한 흑산도나 자은, 압해 등 신안 사람들이이 육지로 나올 때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서남해안 포구 중에는 꽤 중요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 무안문화원
서해랑길은 이기촌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간다. 앞의 계당산에 다경포진성이 있었다고 한다.
"다경포진성(務安多慶浦鎭城)은 전라남도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원성 안에 있다. 남쪽으로 신안군 압해도가 서로 마주 보이고, 서북쪽으로 해제면 임수리 뒷산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다경포진성은 1895년 설진된 수군만호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중종 10년에 시축(始築)하여 둘레 980척, 높이 12척의 석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경포진성은 원래 영광군의 월경지로서 나주목(羅州牧)에 속하였으며 소속 목장이 있어 지금의 항목(項牧)이라는 곳에서 말을 길렀다고 한다. 한편 성종 12년(1481)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함평현(咸平縣) 관방조(關防條)의 기록에 의하면 다경포진성은 임치진(臨淄鎭) 관할이었으며 후에 진도진관에 소속되어 강량이 최후의 수군만호로 근무하였다. 다경포진성은 하부는 90×60m 크기의 방형돌로 축성하고 상부는 작은 석재를 이용해 축성한 타원형의 성지로서 대부분 훼철되고 남동측의 150m 구간에 5m 높이로 대체로 양호하게 남아있다. 성의 구조로 보아 해안쪽은 석성, 산쪽은 토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변에서 와편, 석재들이 발견된다."
-문화재청
명품의 오랜 연륜의 팽나무가 이기촌마을 입구를 지키고, 이기촌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이기촌길을 따라 성내6리 이기촌마을을 통과하여 뒤쪽 언덕을 넘어 원성내마을로 내려간다.
"이기촌(耳基村,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耳機村으로 표기되었다)마을은 원래 남촌마을과 한 마을이었다. 오른쪽으로 계당산, 왼쪽으로 망매산 사이에 조리형의 지형을 지니고 있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서는 ‘마을이 위치하는 주변 형세가 사람의 귀(耳)와 같이 생겼다 하여 귀미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입향조가 심었으리라 짐작되는 수형이 잘 잡힌 당산나무 팽나무가 있다. 이 당산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낼 때는 주변 마을 주민 모두가 모였다고 한다. 마을 앞 간척농지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모두 4번의 둑막이를 통해서 마련한 농지라고 한다. 남촌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모퉁이를 도래장(돌아간다 해서)이라 한다. 또한 ‘망매’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해하기 어렵지만 망한 마을이 있었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 무안문화원
마을 앞에 간척농지가 있고 바다 건너 맞은편은 신안군 압해도, 오른쪽은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남촌마을로 이어진다.
이기촌마을 언덕을 넘어 내려왔다. 운남반도 서쪽 풍경이 한눈에 조망된다. 중앙은 무안군 운남반도 내리 신월항, 맨 오른쪽은 내리 월악마을일 것이다. 왼쪽은 신안군의 고이도, 그 뒤쪽이 선도, 맨 뒤쪽은 지도의 선황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내리 뒤쪽은 탄도만으로 탄도섬이 있을 것이다.
마을 뒤 계당산 다경포진성 안에 마을이 있어 원성내(原城內)마을이라 불린다고 한다. 원성내 마을 입구에 당산목인 홰나무(괴목)가 마을의 안위를 지키고 있다. 서해랑길은 원성내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원성내(原城內)는 이기촌마을과 함게 성내(城內)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운남면 소재지에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성내 마을은 16세대 25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만호(萬戶)가 거주하는 성안 마을이었다. 이기촌 마을도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거주했으나 현재는 15세대 정도 거주하고 있다. 해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다경진 성내 마을로 불려졌으며 1912년의 지방행정명칭일람에서부터 현재의 성내 마을로 불려졌다.
이 마을 이름이 성내리 원성내인 것은 다경포진성(多慶浦鎭城)의 안에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진(鎭)은 중국과의 교역과 한양으로 곡물 수송을 할 때 거쳐가는 영산강-목포진-다경포진-임치진을 잇는 관방유적으로서 서해 항로의 지킴이 역할을 했다. 현재는 무안군에 속해 있지만 이 성이 설치될 당시에는 영광군에 속해 있었으며 정확한 설치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이 쌓여진 연대는 중종 10년(1515년)이며 1895년에 폐진(廢鎭)되었다. 그 규모는 둘레 980척, 높이 12척의 돌로 쌓은 성으로 중선 4척, 별선 4척, 병사479명이 배치되어 진성의 규모에 비해 많은 군사들이 있었다. 부속시설로는 동문과 서문이 있었으며, 건물로는 객사, 동헌, 내아, 사령청, 장교청 등이 있었다.
현재의 다경포진성(多慶浦鎭城) 모습에서 옛날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경포진성(多慶浦鎭城)의 모습은 타원형으로 전체 길이는 320미터의 작은 성에 해당된다. 전체적인 지형은 해발 65미터의 계당산 봉우리 북사면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형이다. 특히 해안에 면한 북동벽은 높이 10미터 정도의 낭떠러지로 부분부분을 돌로 쌓은 흔적은 있으나 대체로 자연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으며 성벽의 축조형식은 밖은 돌로 안은 흙으로 채웠다. 또한 동쪽 성벽의 50여m를 제외한 다른 성벽은 윤곽선만 확인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1950년대까지는 城다운 城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점차 주변에서 간척사업이 이뤄지고 집들이 들어서면서 성벽의 돌들이 사라졌다. 특히 이기촌마을에 돌쟁이(石手)가 들어오면서 커다란 돌들이 전부 잘려져 팔려나가거나 이동되었다." - 무안문화원
전남 영광 군수 홍대중의 영세불망비가 언덕 오르는 길가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예전에 영광군에 속하였다.
오른쪽은 무안군 운남반도 내리 지역이고, 건너편은 왼쪽부터 위쪽으로 신안군의 고이도, 선도, 지도라고 가늠한다.
멍애골 언덕에서 대박산이 가깝다. 새벽에 대박산 남쪽으로 돌아 지금 이곳으로 왔다. 이른 아침부터 여인들이 안산 자락 언덕밭에 양파 모종을 내고 있다.
모든 농사가 어렵겠지만 특히 양파 농사는 더 어렵다고 한다. 마을 여인들이 총동원된 듯.
이곳은 바다였으나 간척되었다. 예전에 멍애골 아래 동명포구(동명개)가 있어서 간척된 뒤 '동명개들'이라 부르는 듯. 간척농지에 태양광발전시설이 드넓게 자리하고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뒤 농장마을 나즈막한 언덕으로 이어진다.
중앙 건너는 운남면 내리 월악마을인 듯. 멍애골 뒤 성내5방조제에 의해 오른쪽에 간척지 동명개들이 조성되었고, 그 왼쪽 뒤 새원둑(내리 월악 - 성내리 농장)방조제에 의해 광활한 내리 월악마을 앞 간척농지가 조성되었다.
"내리(奈里)는 운남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2㎞ 정도 떨어져 있다. 지형적으로 탄도만을 뒤로 하고 있으며 신안군 고이도와 선도 등 섬들과 내륙을 잇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다. 里의 형국이 말밥굽 형으로 원래는 바다였으나 달애기농장의 간척사업으로 인해 농지가 형성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본래 영광군 망운면의 지역으로 벚꽃이 많아 벚골 또는 내동이라 하였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월악리, 신월리, 원동리를 합하여 내리라 해서 무안군 망운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내리는 내동, 원동, 월악, 신월, 신흥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 무안문화원
이른 아침부터 아낙네들이 안산 자락 언덕의 밭에 양파 모종을 내고 있다.
양파 모종 심는 속도 차이가 느껴진다. 양파 재배는 손길이 많이 가고, 양배추 재배는 손길이 덜 간다고 한다.
중앙 뒤 멍애골 언덕에서 내려와 간척농지 '동명개들'을 돌아 내려왔다. 간척되기 전 멍애골 아래는 '동명개(浦)'였던 듯하다.
농장마을 앞 드넓은 간척농지에 태양광발전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농장마을 경로당으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농장마을 앞 간척농지 '농장들'을 돌아서 건너편 농장마을 경로당을 거쳐 중앙 뒤 농장마을 언덕으로 이어진다.
길 끝에서 왼쪽으로는 해안 방조제, 오른쪽은 농장마을 가는 길이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운남면 성내리 787-49 지역, 시점 8.9km, 종점 3.0km 지점. 농장들을 왼쪽으로 돌아 맞은편 농장마을 경로당으로 이어간다.
왼쪽에 안산, 앞에 간척지 '농장들'과 오른쪽에 농장마을 경로당이 보인다.중앙 끝에 방조제가 있다.
운남면 성내7리 농장마을은 간척으로 농장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농장마을 왼쪽 농장길을 따라 낮은 언덕으로 오른다.
"농장은 성내7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마을의 형성이 간척으로 인해 농장이 들어서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 마을 이름은 언안(원안)이었다. 이후 새언안으로 그리고 일본인이 농장을 관리하면서 송영농장으로 바뀌어졌으며 현재는 농장마을로 불려지고 있다. 한때 일부 주민들이 농장이란 지명을 바꾸기 위해서 새언안으로 개명을 하려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1909년이다. 당시 이곳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수통산과 우항(牛項) 끝을 잇는 간척사업이 시도되고 있어서 전국에서 일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마을은 왼쪽에 대박산, 오른쪽에 간척지 둑을 두고 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표지석이 있으며 농장길 옆으로 길다랗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원래는 원성내 마을과 같은 행정구역이었으나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분리된 것이다.
마을 앞 뻘바탕의 간척은 처음 조선인이 막았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자꾸 터져서 완성하지 못하고 일본인 송영묘태랑(松永卯太郞)에게 넘겼다. 일본인이 인수를 하여 관리하면서 마을 이름도 송영농장이 되었다. 송영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농장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목포에는 커다란 정미소를 갖고 있기도 했다. 송영은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철로를 설치하고 바위들을 가져다 부었다. 하지만 자꾸 터지자 고민에 잠겼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이러한 송영의 고민을 듣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둑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송영은 제물로 삼을 사람을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을 앞으로 중이 지나가고 있었다. 중 옆에는 시동인 듯한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송영은 중을 불렀다. 중에게 돈은 달라는 대로 줄테니 시동을 나에게 팔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은 얼마를 주면 넘기겠다고 했다. 당시 중이 부른 금액은 거액이었으나 송영은 둑을 막는게 급해 원하는 대로 다 주었다. 중은 그 돈을 받고 데리고 다닌 시동을 내주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고 나서 마을 뒤 바위에 앉아 돈을 세다가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주민들은 중이 앉아서 돈을 세었던 바위를 중바위라 불렀으나 현재는 지명만 남아있고 흔적은 없다. 한편 송영은 시동을 재물 삼아 둑을 완성하였다." - 무안문화원
왼쪽은 운남면 내리 월악마을, 오른쪽은 운남면 연리 일대. 서해랑길은 오른쪽 뒤 연리 내화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맨 왼쪽 뒤의 산은 신안군 지도읍 선황산, 그 오른쪽 뒤에 보이는 산은 무안군 해제면 창매리 중매산(매령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운남면 연리 지역에 태양광발전시설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전봇대 뒤 연리 내화마을로 이어갈 것이다.
서해랑길은 태양광발전시설 오른쪽으로 돌아나가 중앙 뒤 운남면 연리 내화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농장길은 운남면 내리 해안으로 나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이어가며 운남면 성내리에서 연리(蓮里)로 넘어간다.
앞쪽 위에 보이는 도로는 국도77호선 공항로일 것며, 왼쪽으로 무안국제공항 방향, 오른쪽으로 김대중대교와 압해도로 이어진다. 새벽에 김대중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운남반도 남쪽 끝을 돌아서 지금 서쪽으로 나와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쉼터정자 뒤 태양광발전시설 방향으로 진행한다.
중앙 구릉 뒤에 농장마을회관이 있을 것이며, 중앙 구릉 왼쪽 안부로 넘어와 태양광발전시설 왼쪽으로 이어왔다.
언덕 위에 묘지가 있고 푸른 잎이 싱싱한 무밭을 왼쪽으로 살피며 길을 간다.
새벽의 어둠 속에 왼쪽의 대박산을 남쪽으로 돌아 지금 북쪽에 있다. 오른쪽 태양광발전시설 옆길을 걸어 이곳으로 왔다.
앞의 선성유통센터를 거쳐 운남면 연리 내화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신성유통센터 앞을 거쳐왔다. 멀구슬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으며 맨 뒤에 대박산이 보인다. 운남면 연리 내화마을은 '앞데미, 가운데데미, 뒷데미, 아랫물, 점등'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내화마을 중에서도 앞데미에 속하는 지역일까?
저 지역이 내화마을 앞데미가 맞을까? 신성유통센터를 거쳐 멀구슬나무가 있는 앞데미(?)를 거쳐 운해로로 나왔다.
앞에 소나무 13그루가 자라는 내화마을 입구가 보인다.
"내화(奈花)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성내리 방향으로 1㎞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809번 지방도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앞데미, 가운데데미, 뒷데미, 아랫물, 점등으로 이뤄졌으며 행정구역명으로는 운남면 연리(蓮里) 5리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에서는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 지형이 나비가 꽃을 보고 내려앉은 모습과 같다 하여 내화(奈花)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나비형국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진주 강씨 소유의 터에 시원하게 뻗은 13그루의 소나무가 반겨준다. 마을 입구에 팽나무가 아닌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들 중 제일 오래된 소나무로 추정되는 나무의 밑둥을 재보니 4ⅿ가 약간 못되나 수령은 300년이 넘어 보인다. 얼마 전까지 주민들은 이 소나무에 제상을 마련하고 당산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런 소나무가 흔치 않기 때문에 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내화마을 입구에 내화 버스정류소가 있다.
연리(蓮里) 5리 내화촌마을은 많은 고인돌이 있는 나비 형국의 마을이라고 한다. 표석 뒤쪽에 내화복지회관이 보인다.
우리 내화(奈花)마을의 위치를 외지인에게 널리 알리고 동내에서 태어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친척 모두에게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고향마을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기 위하여 동네 주민의 기금으로 마을 표지석을 세웁니다. 2007년 8월
밭흙을 정리한 뒤 양파 모종을 내기 위해 구멍 뚫린 비닐을 깔고 있다. 양파 재배는 일손이 많이 간다고 한다.
운남면 연리(蓮里) 운해로를 따라 연동(蓮洞)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운해로 왼쪽으로 연리(蓮里)4리 연동(蓮洞)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연동(蓮洞)은 연꽃마을이다. 연꽃이 많이 재배되거나 있어서가 아닌, 지형이 연꽃을 닮은 곳이어서 그렇게 부른다. 마을을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내리와 성내리 팔학동 등으로 나있는 길의 모습이 마치 연꽃잎이 퍼져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풍수적인 지형도 연화부수(蓮花浮水-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모습)의 형국이다. 연꽃의 봉오리 부분에 운남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마을길이 8개가 나 있는데 마치 연꽃잎 사이사이의 흔적처럼 보인다. 연동(蓮洞)은 연리(蓮里) 4리에 속하며 운남면 소재지에서 한쪽 부분을 이루고 있다." - 무안문화원
운남초등학교 자리는 연꽃 봉오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운남초등학교 뒤쪽에 연리(蓮里)4리 연동(蓮洞)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운해로를 따라 운남면 연리(蓮里) 1리 운남동으로 이어간다. 운남면 연리(蓮里) 지역 유래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 놓는다.
"운남동, 저동, 자작, 양곡, 연동, 내화, 비석동, 상동 등 8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연리(蓮里)는 본래 영광군 망운면과 무안현 현화면에 속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화촌, 양곡동, 저동을 합하여 연리(蓮里)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망운면과 분리되어 운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지형이 연꽃 같다 하여 연리(蓮里) 또는 연동(蓮洞)이라 했으며 운남면 소재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809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 무안문화원
왼쪽 중앙철물점 앞 전봇대 옆 전선 연결 기둥에 서해랑길 23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이 지역은 운남동이라 불리지만 더 구별하면 도로 왼쪽은 운남동마을, 맞은편은 비석동마을이라고 한다. 현재의 운남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기 전까지는 ‘비석거리’로 불려졌으며, 지금도 일부에서는 비석거리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운남면은 우리 군의 중서부 끝에 위치한 면으로서 본래는 망운면이었다. 1971년에 망운면의 서남부지역이 독립하여 운남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3년에 면으로 승격되면서, 운남면이라 칭하였다. 망운반도에 위치하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수산물 양식의 적지이며, 面 전체가 높은 산이나 깊은 계곡이 없는 평지로 되어 있어서 농업에도 알맞은 지역이다.
운남동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 위치한 마을로 면에서 가장 큰 번화가이며 행정구역명은 운남면 연리(蓮里) 1리에 속한다. 원래 이 마을은 연동의 마을에 속해 비석거리로 불렸으나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1971년 운남 출장소가 설치되면서 분동(分洞)이 되어 운남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운남동이란 마을의 지명 유래는 운남 지역 소재지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를 살려 정한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1974년 7월 1일 연동(蓮洞)에서 분동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전체적인 지형이 연꽃과 같아 행정단위가 연동(蓮洞)이라 하다가 연리(蓮里)로 바뀌었다. 이후 이 마을도 면사무소 등 각 기관들이 들어오면서 상가들이 자리 잡게 되고 주민이 늘어나자 2005년도에 운남동, 비석동, 상동 등 3개 마을로 분리하게 된다. 면소재지를 지나는 809번 지방도로를 기준으로 복지회관에서 초등학교까지의 북쪽은 운남동이고 맞은편의 남쪽은 비석동이며 복지회관을 넘어서 면사무소 쪽은 길과 관계없이 상동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 무안문화원
중앙철물점 앞 전선 연결 기둥에 서해랑길 23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이 지역을 운남동이라 이른다.
오른쪽 중앙철물점 앞 전봇대 옆 낮은 전선 연결 기둥에 서해랑길 23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왼쪽 운해로를 따라왔으며, 삼거리슈퍼마켓 오른쪽 신월로를 따라가면 연동(蓮洞)마을에 이른다.
운해로 삼거리식육점 옆 삼거리 버스정류소 뒤 주차장에 서해랑길 무안 22·23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삼거리식육점 옆에 비석거리식당이 있다. 이곳이 비석거리임을 알려주는데, 왜 비석거리라 했을까? 이곳에는 소작인들의 슬픈 염원이 어려 있다고 한다. 비석거리의 유래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다 놓는다.
"운남동 마을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픈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와 한국인 마름 사이에서 신음하는 이 지역 민중들의 염원이 담긴 비석이 그것이다. 이 비석은 현재 운남농약사가 있는 자리에 두 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운남면 내리 월악마을 입구에 있는 이현장씨 창고 아래에 묻혀있다. 비석 중 하나는 ‘서인섭주사공적비’이고 또 하나는 ‘영세불망비’이다. 일제강점기 운남면 일대의 커다란 농지를 갖고 있던 일본인 지주 밑에 지배인의 역할을 했던 한국인 마름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신안군 압해면 매화리의 서인섭이었다. 서인섭은 이 지역의 소작인들에게 가혹할 정도의 높은 소작료를 징수했는데 걷는 방법도 일본인 지주보다 더 독하게 걷는다고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해서 높은 소작료를 피하기 위해 소작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은 결과 서인섭의 덕을 찬양하는 송덕비를 세운다면 소작료를 깎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송덕비를 세우기로 하였다. 설마 송덕비까지 세워줬는데 모질게 하겠느냐는 소박한 염원이 깃든 것이다. 그러나 소작인 중에 서인섭이 무엇을 잘 했다고 송덕비를 세우느냐는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오자 그렇다면 공적비로 이름을 바꿔서 세우기로 했다(이때 주동자가 이진택, 기자일, 김채연, 김옥태 등 4인이며 천삼문도 참여했다).
소작인들이 비석을 세우고 낙성식을 한다고 하자 당시 의분에 찬 운남 청년 회원인 최금옥, 박채진, 기행도, 천옥봉, 김장봉, 김이봉, 박연규 등 7명은 낙성식에 참여하고자 운남으로 오는 서인섭을 가로막고 식장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다. 싸움이 격렬해서 목포헌병대에서 순사들이 달려와서야 멈출 수가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낙성식은 열리지 못하고 청년회원 7명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2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들 청년회원 중 박채진(자-현앙, 호-국사. 1903-1952)의 공적을 찬양하는 ‘국사박채진선생공적비’가 팔학에서 면소재지로 들어오는 입구에 서 있다. 비문은 청화스님이 작성했다. 또한 팔학마을의 천옥봉은 양곡마을에서 간이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두 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길을 비석거리라 했으며 현재의 운남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기 전까지는 ‘비석거리’로 불려졌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비석거리라 부르고 있다. 문제의 비석은 월악마을 입구에 있는 이현장씨 창고 아래에 묻었다고 양곡 마을의 이의철씨가 증언했다." - 무안문화원
서해랑길 무안 22·23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거리 11.9km, 소요 시간 4시간, 난도 쉬움. 영해공원, 도원선착장, 혜운사, 망매산이 적혀 있지만 한 군데도 들르지 못하였다. 실제 탐방 거리는 11.93km, 2시간 58분이 걸렸다.
어둠 속 풍경을 살피지 못하고 달려온 길을 밝음 속에서 확인하고 싶다. 아름다운 그 길의 참모습을 감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