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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황병학 黃炳學 | |
이명 | 황영문(黃英文) |
출생 | 1876년 1월 11일 |
전라도 광양현 진상면 비촌리 (현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비촌마을)[1] | |
사망 | 1931년 4월 23일 |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 비평리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서훈 |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황병학은 1876년 1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진상면 비촌리(현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비촌마을)에서 황재모(黃在模)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창원 황씨 족보에 따르면, 그는 골상이 굵직하고 눈에 광채가 있었으며, 장성할 때 뜻과 기상이 뛰어났고, 역사를 논할 때 절개를 세우고 의리에 죽은 자를 숭상했다고 한다. 1906년 군수로 파견된 서상붕(徐相鵬)이 고을 선비를 위협해서 머리를 깎으라고 하자, 그는 이에 분개하여 저항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907년 고종이 폐위되고 정미 7조약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당하자, 황병학은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당숙 황순모(黃珣模)와 함께 포수 1백여 명을 모아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액이 머리에까지 박두했으니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는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고 하니 모두 이에 호응했다.
1908년 음력 7월 26일, 황병학과 황순모는 백운산 묵백에 200명 정도의 의병을 모았다. 이들은 전남 동부 및 경남 서부 일대에서 모여든 농민들이었다. 황병학은 의병장에 추대되었고 황순모는 선봉장이 되었다. 황순모는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광양읍은 물론 인근의 구례와 하동, 순천, 여수 등을 다니며 유지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원당의 최진사, 골약면 중골의 정행원, 지접의 김서임, 장잣골의 유문행 등이 쌀과 현금, 무기 등을 모아 황순모에게 건넸다.
군자금을 확보한 황병학과 황순모는 백운산과 지리사에서 활동하는 산포수들을 불러 모아 의병에 참여시키기도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야철로[2]를 만들어 총기를 생산했으며, 백운산 묵백 계곡의 임방골에서 군사훈련을 수행했다. 그러던 중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에 일본 어부들이 몰고 온 선박 수십척이 집결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황병학은 이들을 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일본인 어부들은 조선의 바다를 장악하고 조선 어민들의 어장 어업권을 박탈하고 막대한 수익을 챙기고 있었기에 조선인 어부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황병학은 이들을 쳐서 몰아낸다면 어부들의 호응을 얻어 군세를 늘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황병학 의병부대의 기습 공격으로 망덕항 일본어민과 일본인들이 큰 피해를 보자, 일본군은 광양에 헌병분견소를 설치하고 토벌에 나섰다. 황병학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왼쪽 다리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지만, 전의를 잃지 않고 광양 옥곡원의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부상이 악화되면서 더이상의 지휘가 힘들어지자, 그는 의병부대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눠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한 후 자신은 백운산 용신암에 은신하며 다리를 치료받았다.
그 후 일본군은 황벽학과 황순모의 고향마을인 진상면 비평리 마을을 습격해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마을 사람들을 짓밟았다. 또한 황병학과 황순모의 가족들을 수시로 찾아와 위협하면서 귀순을 종용했다. 특히 황순모에게 귀순하지 않을 경우 황순모의 늙은 부모를 잔인하게 죽이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황순모는 귀순을 결심하고 비평리로 내려왔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광양헌병대로 끌려가 가혹하게 고문당했다. 황순모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다른 의병들의 소재를 발설하는 걸 거부하다가 1908년 10월 11일에 36세의 나이로 총살되었다.[3]
한편, 황병학은 황순모와는 달리 귀순을 거부하고 끝까지 버텼다. 친척들이 자수할 것을 권하자, 그는 "세상에 어찌 황복 귀순하는 의병대장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했다. 그는 순천, 여수 등지를 전전하며 재기를 기도했지만 일본군이 병력을 증강해 철통같이 경계하자 결국 1909년 말에 의병들을 해산시킨 뒤 신분을 숨긴 채 각지를 전전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때까지 신분을 숨긴 채 은거하던 황병학은 만주로 건너가 의병 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심하고 최춘명(崔春鳴) 외 2명으로부터 350원의 여비를 제공받아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만주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영고탑, 용정촌, 압록강 연변 및 흥개호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여러 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렀다.
그러던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라는 밀명을 받은 그는 전라도에 잠입하여 고흥에서 기산도와 함께 '임시정부 국민대회 특파위원'의 자격으로 전라도의 우국지사들을 만나 군자금을 모금했다. 그 뒤 함께 평안도까지 올라갔다가 기산도가 체포되었지만, 그는 무사히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에게 군자금을 전달했다.
1923년 봄, 황병학은 다시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들어 조선에 잠입하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그의 움직임을 간파한 일본 경찰에 의해 신의주에서 체포되었고, 평양 형무소에서 4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모진 취조와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31년 4월 23일에 사망했다. 향년 56세. 그의 유해는 진상면 비촌리에 매장되었다가 1977년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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