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7대 善德女王陵
사적 제182호
1 .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산 79-2
국립경주박물관 앞에서 울산방면으로 난 7번국도를 따라 2km 가면 길 왼쪽에 사천왕사터가 나온다. 사천왕사터의 우측 길을 따라 동해남부선의 철길밑을 지나 왼쪽으로 난 낭산길로 약 3분 정도 오르면 선덕여왕릉이 나온다.
2 . 경주 낭산(狼山)
낭산은 사적 제163호로 소재지는 경주시 구황동. 배반동. 보문동으로 경주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산허리는 잘록하며 높이는 108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옛부터 서라벌의 진으로 불리며 신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신라 실성왕 12년(413)에는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다. 나라에서는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로는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이 살았으며, 문창후 최치원이 공부하던 독서당도 있다.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 능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호국 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 사천왕사터가 있다. 동북쪽에는 황복사터와 삼층석탑이 있으며, 서쪽 중턱에는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고, 그 주변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등이 남아있다.
3 . 도리천 善德女王 陵
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 27대 임금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며 이름은 덕만(德曼)으로써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으니 그 해가 바로 당 태종 6년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는 한편,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년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민심수습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으며,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애썼다
4 . 선덕여왕 이야기
선덕여왕은 나라를 다스린 재위 16년 동안에 앞 일을 예지한 세가지로 유명하다.
*모란꽃*
그 첫째는 당 태종이 홍색.자색.백색, 이 삼색의 모란꽃을 그린 그림과 그 씨앗 석되를 보내왔을때 모란꽃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 예언했던 고사다. 그 씨앗을 궁전 뜰에 심어보았더니 과연 꽃이 피어서 지기까지 향기라곤 없었다.
*여근곡*
두번째는 추운 겨울날 영묘사의 옥문지에 개구리 떼가 모여들어 시끄럽게 울어댄 이야기다. 여왕은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울어 댄다는 얘기를 듣자 각간 알천과 필탄에게 군사 2천을 주어 서쪽 교외에 여근곡이란 곳에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무찌르도록 명령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서 각각 천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달려가서 물으니 과연 여근곡이란 골이 있고 그 곳에 백제장군 우소가 이끄는 군사가 숨어있슴을 발견하여 섬멸하고 후속부대 1천3백여 명 마저 무찔렀다는 고사다.
*도리천*
셋째는 여왕이 정정할때 신하들 앞에서 죽는 날을 예언하면서 도리천안에 장사지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그 곳이 어디인지 왕에게 물으니 낭산의 남쪽 비탈이라고 했다. 예언했던 날이 되어 왕이 죽자 낭산의 남쪽 비탈에 장사지냈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 문무대왕은 선덕여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를 창건했다. 불경에서 사천왕천은 수미산의 중턱에 있고 그 위에 바로 도리천이 있다고 한 말을 상기하고서 그제야 선덕여왕의 거룩함을 알았기 때문이란다.
선덕여왕이 생존해 있을때 신하들이 모란꽃과 개구리에 관한 예언을 두고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수 있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왕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꽃을 그린 그림에 나비가 함께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향기가 없기 때문인데, 이는 당나라의 임금이 내가 여자로서 짝이 없이 독신으로 지내는 걸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는 눈이 불거져 나와 성난 형상으로 병사의 상징이며 옥문이란 곧 여근인데 그 빛깔은 희다면 서쪽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의 병사가 서쪽의 여근곡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이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라 그들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태극풍수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