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모당-표옹 송영구와 주지번의 인연을 찾아서
(2022년 11월 19일)
瓦也 정유순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1979년 12월 27일)된 망모당이 있다. 망모당(望慕堂)은 조선 선조 때의 문인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가 1607년(선조 40)에 아버지를 여의고 지었다. 원래 송영구가 은거하던 집 후원 구릉에 이 누당을 짓고 이곳에서 멀리 동쪽 우산(紆山)에 있는 누대선영(累代先塋)을 ‘바라보며 사모’한다는 마음으로 <망모당>이란 이름을 지었고, 편액은 중국 사신 주지번의 친필이다. 주지번과 송영구는 사제지간이었다고 전해진다.
<표옹 송영구 영정>
<망모당>
송영구(1556~1620) 익산에서 태어났다. 1584년(선조 17)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와 사과(司果)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을 지냈다. 이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을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표옹 송영구 강생유지비>
송영구는 1599년 관직에 복귀하여 충청도도사와 지평을 거쳐 1600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사간원사관(司諫院司諫)·청풍군수(淸風郡守) 등을 역임하였고, 필선(弼善)으로 재임 중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1613년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4년에는 오위도총부부총관과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1615년 이이첨(李爾瞻)이 권력을 장악하고 폐모론(廢母論)을 일으키자 이에 반대하다 파직 당하였다.
<망모당 대문>
송영구는 1593년 서장관(書壯官) 직분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송영구가 북경에 있는 동안 숙소 아궁이에서 불을 때던 한 청년을 마주한다. 청년은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도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을 계속 읊조렸다. 송영구는 청년을 불러 사정을 듣고는 조선의 과거시험 답안 작성법을 사사한 후 청년에게 몇 권의 책과 돈까지 주며 격려하였다. 그 청년은 2년 뒤인 1595년에 명나라의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한 주지번이다.
<망모당상량문육위시>
이후 주지번(朱之蕃)은 송영구를 스승으로 섬기고, 조선의 사신단으로 오기를 수시로 청하여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오자마자 송영구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조정에서는 처음에는 송영구가 죽었다고 했으나 주지번은 믿지 않았고, 말 1필과 수행원 1명만 대동하고 전라도지역을 방문해 전주객사에 묵으며 ‘豊沛之館(풍패지관)’이란 현판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풍패(豊沛)는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고향이다. 따라서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 전주(全州)라는 것을 풍패(豊沛)라는 말로 빗대어 표현하였다.
<풍패지관-네이버캡쳐>
그러나 주지번이 익산으로 향했을 당시 송영구는 평양 대동역참(大同驛站)의 찰방(察訪)이라는 종6품의 문관으로 좌천된 상태여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현판 望慕堂(망모당)을 써주었고, 송영구의 묘 자리를 정해주고 돌아갔다. 이후 1613년 송영구가 두 번째 사행을 갔을 때 주지번을 만나 당시의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을 이야기하고 함께 감회를 나누었다고 한다.
<망모당 편액>
망모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모두 아홉 칸으로 정사각형 건물이며 팔작지붕이다. 전면에 있는 4개의 주초석(柱礎石)은 높이가 1m 정도이고, 후면의 주초는 얕게 지반을 다져서 계단식으로 건립하였다. 기둥 위에 첨차(檐遮)를 놓아 지붕이나 처마의 하중을 직접 받는 굴도리 밑의 장여(長欐)를 받친 것과 난간동자 위에 가로로 대는 나무(난간두겹대)의 받침기둥을 닭 벼슬 비슷하게 계자각(鷄子脚)으로 다듬은 것 등이 건물의 특색이다.
<망모당>
송영구는 1623년(인조 1)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1809년(순조 9)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648년(인조 26) 전주의 선비들이 전주부 남쪽 봉양동에 사우를 세워 송영구를 제사지내다가 뒤에 전주부 서쪽으로 옮기고 이름을 ‘서산사(西山祠)’라고 불렀다.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에는 송영구의 제각(祭閣)인 우산정사(紆山精舍)가 있으며, 우산정사 앞 방죽은 표옹이 들여온 백련(白蓮) 시배지이다.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의 청풍문화재단지에는 송영구 수덕비(宋英耈 粹德碑)가 있다.
<우산정사-완주신문캡쳐>
참고로 주지번(?~1624))은 명나라 산동(山東) 사평(茌平)에서 태어나 1595년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 우춘방우유덕(右春坊右諭德), 우춘방우서자(右春坊右庶子), 소첨사(少詹士), 예부(禮部) 우시랑(右侍郞), 이부(吏部) 우시랑(右侍郎) 등을 거쳐 사후에 예부(禮部) 상서(尙書)로 추증되었다. 주지번은 당시 명(明)에서 학사의 문장 세 사람을 꼽을 때, 초굉(焦竑)·황휘(黃輝) 등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다.
<망모당중수기>
만력제(萬曆帝)는 1605년 11월에 황태자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한림원수찬 주지번을 정사(正使)로, 예과좌급사(禮科左給事) 양유년(梁有年)을 부사(副使)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주지번 등은 1606년 4월 11일에 한양에 도착하여 황제의 조서(詔書)와 칙유(勅諭)를 전달하였다. 주지번은 당시까지 조선에 온 사신들과 달리 뇌물 등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청렴하였다고 한다.
<망모당 상량문>
주지번은 조선에 다녀온 후, <봉사조선고(奉使朝鮮稿)>를 저술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의 사행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주지번은 조선에 머물며 성균관 사예(司藝) 이지완, 성균관 직강(直講) 허균(許筠) 등과 시와 글씨를 주고받으며 문화교류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때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편액을 썼다. 이 외에도 주지번이 쓴 전주객사의 풍패지관과 강릉 경포대의 제일강산(第一江山)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성균관명륜당>
<경포대 제일강산>
주지번은 역대 중국 명가들의 시문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원문을 필사하여 첩 형식으로 꾸민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을 선조와 원접사(遠接使)유근(柳根)에게 주었다. 이것은 조선 화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허균의 소개로 시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을 읽고 감탄하여 중국의 문단에 소개하여 허난설헌(許蘭雪軒)을 유명 시인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처럼 주지번은 한중 문화교류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인물이었다.
<허난설헌>
https://blog.naver.com/waya555/222935751517
첫댓글 고맙습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