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스물두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22-2 홍범도 - 대한독립군 사령관
출생 - 사망
1868.8.27. ~ 1943.10.25.
천도( 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야,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上)으로 임시정부가 유하야 군국대사를 주하며, 하(下)로 민중이 단결하야 만세를 제창할 새 어시호(於是乎) 아(我)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독립군이 출동되었도다(…)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
- 대한독립군 대장으로서 선생이 공포한 유고문(諭告文) 중에서 (1919. 12)
권업회와 노동회 조직, 투쟁역량 배양
선생을 비롯한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하여 이종호, 이상설, 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써 권업회가 1911년 5월 연해주에서 창립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선생은 처음에는 권업회의 부회장, 나중에는 사찰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심혈을 쏟았다. 선생은 권업회에 관여하면서도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하였다. 이 회의 회장으로서 선생 또한 1913년부터 약 3년 동안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자금으로 선생은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
대한독립군을 편성, 봉오동전투에서 대승거두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 해 8월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서게 되었다. 선생은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 그리고 지휘부는 사령관에 선생,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생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국내 진공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경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결행하였고, 그 전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및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음에도 대대적인 기습을 받게 된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동진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당하고 말았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번에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선생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 그리고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신민단이 일본군 침입자들을 맞아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선생이 이끈 독립군 통합부대가 승전하게 된 요인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 구사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독립정신이었다.
<독립신문>(1920. 12. 25)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고, 독립군측은 4명의 전사자에 2명의 중상자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독립군의 빈번한 국내 진공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작성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측에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 자신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제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독립군의 항전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인 청산리대첩은 이 같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훈춘사건’이 있기 이전에 독립군측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이미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에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할 경우 본영은 물론이고 간도지역의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10월 20일 선생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 대한신민단, 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백두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道溝)와 3도구에 집결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이러한 동태를 첩보원의 보고에 의해 파악한 일제는 침략군의 일부를 2, 3도구 방면으로 진입시켜 독립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따라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이곳에서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자유시 참변 후 한인 권익보호운동
이후 선생은 700여 명의 독립군 통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간도토벌대와 격전을 치르면서 1921년 1월 하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을 거쳐 자유시로 들어갔다. 이 시기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와 간도 독립군은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부대의 전격을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국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 산하의 대한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 하에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지도하는 고려혁명군 간의 군권대립이 그것이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상해 임정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중심 인물은 이용, 채영, 박일리아 등이었다. 군정의회에는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유동열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처음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여 부총재로 선임되기도 하였으나, 6월 초 예하 부대원 440여 명을 대동하고 군정의회측에 가담함으로써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6월 28일 군정의회 지도부는 완강한 대치상태에 있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장갑차 등 중화기까지 동원한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이 주둔한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채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쌍방간의 대충돌이 발생하였다. 자유시사변으로 불린 이 같은 한인 무장세력 간의 분쟁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독립군의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되었다.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이로 인해 선생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 후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홍범도 [洪範圖] - 대한독립군 사령관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