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풍수는 주산(主山) 안산(案山)이 있고,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갖추어져야 한다.
서울의 풍수에서 주산은 북악산(北岳山)이요, 안산은 남산(南山) 이다. ‘안산용(案山龍)’이라 하여 안산의 풍수용(風水龍)이 뻗어내린 명당에다 집을 짓고 살면, 그 발복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알았다.
그렇다면, 서울의 안산인 남산의 안산용이 어디로 뻗어내려 명당을 이루었을까. 남산밑 필동에서 마르내(乾川)를 따라 안산용이 뻗어, 그 냇가에 대추알처럼 명당을 이루었다는게 풍수가들의 통설이다.
지금 남산 제1호터널에서 시작되는 마르내는 필동을 가로질러 성모병원앞 로터리→명보극장앞→애오개(仁峴洞:인현동)1가를 꿰뚫고 흐른다.
지금은 마르내가 말끔히 콘크리트로 밀폐(복개)되어 그 위로 길이 나있다. 마르내는 물이 많지않아 항상 바닥이 말라 있었기에 마른내란 이름이 붙은 것이라 하나, 어원적으로 보건데, 남산에서 산줄기 하나가 불쑥 나온데서 비롯된 이름.
이를테면 ‘불쑥나온 골’이 「붓골→필동(筆洞)」또는 「북골→고동(鼓洞)」으로, ‘불쑥나온고개’가 「북고개→북달재→현고현(縣鼓峴)」으로, ‘불쑥나온 고개 마루의 내’가 「마루내→마르내→건천(乾川)」으로의 한자로 뜻빌림(意譯)이 됐다. 불쑥나온 작은고개가 「애오개→아현(阿峴)」, 「배오개→이현(梨峴)→인현(仁峴)」으로 한자화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 마르내와 배오개(仁峴)의 기슭따라 단종 때, 영의정이던 정인지(鄭麟趾)가 살았고, 세조가 「나의 제갈량」이라면서 곁에 가까이 두고 놓질않았던 양성지(梁誠之), 세조때 청빈한 대학자 김수온(金守溫), 선조때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그리고 홍길동전으로 이름이 더 잘 알려진 반체제의 풍운아 허균(許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하늘이 내리신 정승」이라 우르렀던 유성룡(柳成龍) 등이 이 마르내 냇가에서 살았으니 안산용이 마르내로 흘렀다하여 누구라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 누구보다 민족적 영웅 충무공 이순신(李舜臣)도 바로 인현(仁峴) 기슭, 마르내 냇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마르내 용(龍)의 옥(玉)이 아닐 수 없다. 인현동 1가40번지가 1545년 4월 28일, 장군이 태어난 자리다.
공이 무과(武科)에 급제했을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었다. 공의 사람됨을 듣고 또 같은 종씨로 친척이 됨을 알고서 사람을 시켜 한번 만나기를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은 사양하며 말했다. “일가간에는 서로 만나볼수 있지만, 그가 지금 이조판서로 있는 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공은 어릴적부터 잘못의 책임은 앞서서 스스로가 지고 공을 남에게 돌리어 전혀 생색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옥포해전에서 대거 내습한 왜적은 충무공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다 잡고, 원군사령관(援軍司令官)인 명나라 진도독(陳都督)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병은 아예 싸우지도 못했다.
충무공과 진도독의 일화다. 진도독이 공을 세우지 못한데 대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음을 간파한 충무공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이 명나라의 대장이 되어 바다도적을 토벌하고 있으니, 진중에서 이기는 것은 곧 장군이 이기는 것이외다. 내가 적군의 머리를 벤 것을 장군의 공으로 돌리겠습니다. 장군이 온지 얼마 안되는데 북경조정에 큰 공을 보고하오면 되레 좋지 않겠소이까.”
이에 진도독이 크게 기뻐하며 충무공의 손을 잡고 “내 중국에 있을 때부터 공이 명성을 많이 들었소만, 이렇게 어진(仁) 인품인줄 몰랐오”하였다.
정승 유성룡이 파란많았던 충무공의 벼슬길을 끝까지 뒷받침하고 두둔했던 것도 인현기슭 마르내 바닥에서 어린시절 뛰놀며 어진(仁) 정을 서로 나눴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