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시조집, 『형산강』, 처용, 2003.
□ 1942년 경주시 안강읍에서 태어나 안강초등, 경주중,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월간문학 시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2019년 4월 21일 별세.
형산강
태초의 말씀으로 풀어놓은 하얀 젖줄
높고 낮은 산과 들을 혈육처럼 다 보듬어
그 사랑 억겁의 세월 굽이굽이 흐르다.
일찍이 서라벌에 씨뿌린 여섯 마을
마침내 왕국으로 일궈 눈부신 그 영화를
한 떨기 모란꽃처럼 가꾸어도 보았고….
드넓은 안강들이 초연 속에 묻혔던 날
어머니, 어머닐 부르며 숨이 지던 어린 병사
그 선혈 가슴으로 받아 흐느껴도 보았느니….
눈물이 아니란다 뉘우침이 아니란다
이 아침 저 영일만 큰 해는 다시 뜨고
점점이 강둑을 수놓아 피어나는 풀꽃들!
<조동화 해설에서> 이 작품 역시 이용우 시인의 등단 작품 두 편 가운데 하나로 그의 시조에의 역량을 유감 없이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이미 주지하는 바대로 형산강은 신라 이전 태고적부터 이 지역의 젖줄이었다. 그런데다 그는 그 형산 강변 한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으며, 6‧25라는 동족상잔의 아픔을 아울러 겪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그였기에 이 작품은 그의 손끝에서 하나의 필연(必然)으로 피어난 것임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눈여겨보다야 할 것은 그 투철한 역사의식이다. 첫째 수에서 창세의 개벽과 더불어 이 고장을 적시기 시작한 형산강을 말하고, 둘째, 셋째 수에서 육부촌이 바탕이 되어 일어났던 신라왕국의 모란처럼 눈부셨을 옛 영화와 수많은 젊은이들이 장렬히 산화한 전쟁을 선명히 대비시킨 뒤, 마지막 넷째 수에서 시인과 시인의 이웃과 그 후손들이 강둑을 수놓은 풀꽃들처럼 세세년년 살아갈 터전임을 확인하며 마무리를 짓고 있다.
물론 형산강은 우리나라에서도 작은 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작다고 하여 누가 섣불리 그 존재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아니, 이 고장의 임자들에겐 이 강이야말로 장강(長江)보다도 황하(黃河)보다도 한결 소중한 스스로의 어머니요 젖줄일 터이다. 그리고 시인의 작품 <형산강> 또한 지나간 영화와 치욕, 미래의 희망과 비전이 어우러진 문화유산으로 유규한 강물과 함께 길이 그 명맥을 이어갈 것이 자명하다 하겠다.
가을 문턱에서
이글이글 피운 숯불 정수리에 사뭇 얹어
한 짐 진 노새처럼 여름이 숨가쁘더니
입추의 여울을 건너자 달려오는 건들마.
날마다 그 산 그 물 초록도 무거웠는데
조금씩 엷은 물감을 덧입히는 가을의 손
빨아 넌 흰 모시두루막 구름빛도 좋아라.
잘 닦인 놋쟁반 하나 동산 위에 떠오르면
뒤얽힌 명주실타래 올올이 푸는 벌레
그 실끝 흘러가는 곳 나도 밤새 따라간다.
<조동화 해설에서> 이것은 이용우 시인이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된 두 편 가운데 하나인 <가을 문턱에서>라는 작품 전문이다. 시조에 관한한 만학(晩學)인 그이지만 외형률을 한 치 어그러짐 없이 구사하면서도 맺고 푸는 보법(步法)이 예사롭지 않을 뿐 아니라, 보다시피 감각적인 이미지 또한 일품이다. 특이 이 작품이 3수로 된 연시조이면서도 단 한마디 추상어(抽象語)도 배제 한 채 이미지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구상어(具象語)만으로 시상을 열고 펼치고 마무리한 점은 놀랍다. 이 외에도 이 작품의 장점은 더 있다. 직유(直喩)와 은유(隱喩)와 의인(擬人)을 두루 망라한 수사(修辭)가 그것이다. 이 정도의 능숙한 솜씨는 바로 우리 시조에 관한 그의 절차탁마(切磋琢磨)가 누구보다도 치열했음을 방증(傍證)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봄 뜰에서
희부연 겨울 하늘 샛바람에 씻겨가고
새벽녘 안개 속에 나뭇가지 생기 돌면
창 너머 나의 작은 뜰
눈을 뜨는 노란 꿈.
된바람 긴 긴 밤에 땅속 깊이 여민 속살
언 손발 비벼대며 한 줄기 빛을 바라
비좁은 틈을 비집고
여린 목을 뽑는다.
따스한 봄 햇살의 밝고도 도타운 손
첫 걸음마 어린 새싹 밀어주고 끌어줄 때
노래여, 천지를 깨우는
연두빛의 환희여.
<조동화 해설에서> 이것은 이용우 시인의 시편들 중에서 힘들이지 않고 한 편 골라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의 섬세함으로 보거나 우리말을 다루는 자유자재한 솜씨로 보거나 간에 이 작품을 읽는 순간 절로 성공한 작품이라는 믿음이 가슴속에 자리잡는다. 참으로 치밀하고 정교한 언어의 교직(交織)이라 하겠다. 봄이 온 시인의 뜰에 고물고물 돋아나는 새싹들이 말 그대로 눈에 선하고, 엄마 같은 봄 햇살의 손에 이끌린 생명들의 재롱도 눈물 겹도록 아름답다. 그의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웬만큼은 물이 올랐다는 증거다.
인연(因緣)
내 미처 받은 삶이 강인 줄 몰랐더니
할아버님, 아버님, 나와 또 나의 아들
애달픈 이 물결 속에 누가 나를 흘렸는고.
철없이 날아다니던 벌새 같던 나의 소년
웬일로 천지간에 꽃핀 것만 눈에 들어
서러움 하나 모르고 산과 들을 누볐었지.
애벌레 허물 벗듯 조금씩 눈뜨는 이치
하늘 한쪽 무너지며 아버님 가시던 날
비로소 꽃 지는 일이 있는 줄도 알았느니.
한 굽이 돌고 보면 수심(愁心)도 다 꽃인데
아내여, 우리가 닿을 하구(河口)는 어디인가
이 밤도 베개를 맞대 곤한 잠을 청한다.
<조동화 해설에서>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태어나면서부터 속속들이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자라면서 아주 조금씩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눈뜨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에 대한 의미를 어느 정도 정립하게 된다. 이 작품을 보면 이용우 시인도 이순(耳順)의 연륜을 쌓고서야 마침내 자신이 강물의 일부인 것을 깨닫고 “애달픈 이 강물 속에 누가 나를 흘렸는고.”라고 반문한다. (중략) 그래서 이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우리는 보다 차원 높은 달관을 보게 된다.
“한 굽이 돌고 보면 수심도 다 꽃인데”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적어도 이 정도 경지의 달관에 이르고서야 인생이 궁극적으로 닿게 될 하구(河口)/ 종말)을 담담한 마음으로 바라솔 수도 있을 것이며, 속절없이 저물어 가는 늘그막에 의기소침해 하지 않고 아내와 베개를 나란히 하여 넉넉한 잠도 청하게 되는 것이리라. 사람이 인생의 황혼녘에 이르러서 추하게 늙어가지 않으려면 우선 집착(執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젊어서 많든 적은 모아놓은 것들을 하나씩 버린다는 것은 그래서 또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마음의 산
삶이 구차해도 산 하나씩 품고 살자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산만큼 풋풋한 젊음이 세상 다시 없느니.
등성이 골짜기마다 나무들 우거지고
둥지 틀고 굴을 파서 깃들이는 새와 짐승
철따라 기슭을 수놓는 숲꽃들도 새롭느니.
저녁놀 잦아들고 땅거미 짙어오면
밤새 비 오듯이 쏟아지는 별빛 달빛
내 깊은 생각의 골짜기 새 이끼도 돋느니.
망양정에서
아득히 활등인 양 휘어진 수평선에
파아란 하늘 한 장 내려와 쉬고 있다
통통배 지날 적마다
몸을 다시 추스르며.
흰 갈기 펄럭이는 큰고래 등을 타고
거칠 것 없는 초원 마음껏 달려가면
생각의 방패연 하나
하늘 높이 떠오른다.
서산마루 비낀 햇살 바다를 쓸고 간 뒤
까만 비로도 같은 적막을 내려놓고
누구뇨, 은하 강가에
풀꽃 등을 거는 이.
고향집
저녁 해 비낀 햇살
처마 끝에 다 사위면
새둥지 같은 정이
동산 위 달로 뜨고
고향집
초가지붕 위
흰 박꽃이 웃는다.
고향 하늘
하늘도 고향 하늘은
가슴속에 안겨들고
별도 고향별은
생각 위에 반짝이더니
돌아온 나를 반기며
손을 잡는 고향 바람.
커가면서 잃어버린
그 하늘 그 별자리
이 밤도 지붕 위에
수를 놓아 총총한데
가슴엔 지난 흔적들
방울방울 매달린다.
가을 강
날마다 강물 빛이 하늘을 닮아간다
떨리는 속울음을 수심 깊이 씻어내면
바람은 갈대밭에 들어 하얀 손을 흔든다.
지난 여름 흙탕물에 남김없이 비운 가슴
강둑이 코스모스들 새 단장 하고 와서
청아한 풍금소리 같은 가을빛을 부린다.
잘 익은 열매들 모두 바구나에 담겨 가고
기러기 먼 울음이 빈 하늘을 흔들 때
조금씩 말을 줄이며 깊어 가는 가을강.
황혼에 서서
마른번개 건장마에
식을 줄 모르는 더위
저녁답 서녘 구름에
뉘엿뉘엿 해가 걸리면
두견새
피울음보다
더 선연한 노을이 진다.
누구는 저 노을을
선혈 같다 하였지만
다시 보면 이 우주의
환한 꽃밭 아니던가
이슬에
목을 축이며
풀잎들이 일어선다.
가을 Ⅰ
억새꽃 동으로 쓸려
묻어나는 가을의 정
둘러선 산과 들이
일제히 몸을 사르면
그 불길
훨훨 타올라
구워내는 청자하늘.
하루하루 저물수록
풀들은 말라가도
찬 서리 칼바람에
별빛으로 뜨는 가을꽃
그 곁에
쑥부쟁이로
나도 문득 피고 싶다.
추억
흰 구름 바람결에 실어보낸 지난난들
그 정담 가슴속에 별빛처럼 초롱해도
한바탕 꿈이었던가
가고 오지 않는다.
갯바위
곤장, 태장으로
새까맣게 멍든 가슴
끝내 바스라져
모래알이 될지언정
묵묵히
버텨야 한다
하늘 문 열릴 때까지.
자서(自序)에서
첫 시조집을 펴낸다.
남들은 평생을 다 기울여 가꾸는 시밭을 나는 지천명(知天命)에야 그 아름다움에 끌려 첫 삽질을 하고, 그 박토에 씨앗을 뿌려 가꾸기 시작하여 어언 10년을 보냈다.
<작품 해설>
낙엽송 지대의 균제미(均齊美)와 섬세한 서정의 힘
조동화(詩人)
노파심에서 한 가지 더 밝히고 싶은 것은 ‘낙엽송지대의 균제미’라는 어구에 관한 것이다. 이 말을 단순히 받아들이면 외형률을 가진 시조의 가지런한 아름다움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틀린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시인은 이 말에 좀더 새겨들어야 할 구석이 존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균제미’라는 말이 다른 장르와 대별되는 시조만의 장점일 수도 있지만, 뒤집에 생각해 보면 시조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시인에게는 최대의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조가 지닌 외형률의 제약을 반드시 극복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조사나 어미를 마구 생략하여 시어를 부동자세에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말을 순리대로 운용하여 자연스러움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