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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무르익은 봄 날
어느새 봄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래선지 매화나무에는 매실이 제법 열매다운 모습을 보여주고도 있었다. 그러자 기로는,
'강낭콩만 한 매실이 아마 매화꽃 핀만큼이나 많이 열려있나 보다. 근데, 저 많은 매실을 다 어떻게 한다지?' 하고, 미리부터 행복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 그나저나... 그렇게, 꽃이 피면 열매가 맺히는 법인데......'
a, 무르익은 봄날
b, 손님맞이
c, 난데없는 손님
d, 이런 시골에 미국인이?
a, 무르익은 봄날
'아, 옥수수를 내가 너무나 촘촘히 심었는지, 지난 번 키큰 아저씨가 너무나 뵈다는 말을 했었는데......' 하면서 기로는,
비가 갠 땅이 무를 것 같아 삽을 들고 뒷밭에 올라갔다.
간격이 좁은 옥수수를 삽으로 통째로 떠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 일을 하는데, 반장이 왔다.
그는, 수돗물세 얘기를 하다가 기로가 물어보는 채소의 거름을 어떻게 주는지부터, 그 시기는 언제가 좋은지 등 농사짓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기로가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토마토 거름과 지줏대를 꼽아주는 법도 알려주었다.
반장은, 토마토는 비료를 주지 말라면서, 비료를 주면 잘 자라다가 죽는다고도 했다.
그러자 기로가,
"어떻든, 나에겐 거름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하고 묻자,
"그러면 아궁이의 재를 부어주면 돼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기로는 산장집 할머니가 밭에 나와 있는 걸 보고는 그 쪽으로 가서 인사를 했는데,
"산에 가서 취나물이나 뜯어다 먹지, 그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는 반장에게,
"취나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좀 가르쳐 주겠어요?" 하자,
"그러믄, 얘기 나온 김에... 지금 산에 가볼까요?" 하기에,
"좋지요!" 하고는,
반장과 함께,
그렇지만 호수 건너 산에 가야 한다기에, 바로 배를 타기로 했다. 격도 데리고.
바람이 불어 물결이 제법 셌다.
그렇지만 배를 둔덕에 묶어놓고는 산나물을 뜯게 되었는데,
숲으로 다니며 더덕을 캐고(그런데 거의 모든 더덕이 잘았다.), 취도 뜯고, 급기야는 드릅까지도 꺾게 되었다.
그 와중에 고사리도 보여 몇 줄기를 꺾었는데,
기로는 그렇게 오전을 산속에서 나물을 채취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아, 이 곳에 내려오면서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있으리라고 기대는 했었지만, 오늘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다 보니... 간식이나 마실 것 등을 준비하고 가지 못해서 아쉬움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 하기도 했다.
돌아올 때는 반장이 노를 저었다.
그의 능숙한 솜씨로 노를 젓는 모습을 보면서 기로는,
'허기야 나는, 이제 겨우 한 달여 초보인데... 이 사람이 나와 같겠어?' 하면서 호수를 건너와,
반장 집 앞에 그를 내려주고는 격과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반장이 내릴 때 내려도 되었던 격은 배가 떠나려하자 얼른 배에 오르더니만, 금새 낑낑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가 기슭에 배를 대니 내렸다.
기로의 생각은, 격을 호숫가로 보내고 자신은 배로 '夢想?'으로 가려고 했던 것인데,
격이 배를 쫓아오다가 찔레 덩굴 속으로 잘못 들어가, 나오질 못하고 그 안에서 첨벙대는 것이었다.
한 쪽은 물이고 그 위는 찔레 가시 덩굴이어서, 마치 수렁에 빠진 것처럼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기로가 배를 그 쪽으로 대려고 거의 도착하는데, 개는 겨우 덤불에서 몸을 빼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배에 폴짝 뛰어 올랐다.
그런데 바람이 세니, 물결에 힘이 붙어... 배가 잘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夢想?'에 돌아와 기로는 마당 한 켠과 뒤 언덕에, 산에서 캐온 더덕을 심고, 산나리 꽃도 심었다.
그리고 점심은 산에서 캐온 취나물에 씀바귀에 돌미나리에 하얀 민들레 이파리와 머위로 쌈을 싸 먹었다.
완전 자연식이었다.
입 안에 상큼한 향기가 베어나는 것 같자 기로는,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이렇게 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아름다운 봄 풍경
비가 옵니다.
너른 호수 표면은 잠잠한 듯 때로는 움직이는 듯, 바람 없이 내리는 비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아른대는 꿈 속 같기도 합니다.
그 호수 위를 미끄러져 들어가고 싶은 충동도 입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하얀 백로가 호숫가에 하얀 점을 만들고 있더니, 사뿐히 올라 호수 위를 유유히 날아갑니다.
그 움직이는 하얀 색이 너무 도드라져, 이 세상의 하얀 주인공 같아 보였습니다
산 벚꽃이 한 이삼 일 부풀어 올라 산이 온통 아롱대더니, 그만 센 바람에 섞여 비가 며칠 오는 사이에 거의 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산은 이제 연두색에서 조금은 푸른 빛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갑니다.
비가 제법 많이 내려서 밭에 가 보니, 열흘 쯤 전에 심었던 옥수수와 완두콩이 싹을 돋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씨앗은 심어 놓았더니 때를 맞춰 돋아나오드라구요.
그런 현상이 신기하기도 아름답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엔... 까만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는 나도 끼어 있습니다.
마치, 전체적인 풍경 속의 한 사물(요소)처럼......
아,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봄 풍경'일 것입니다.
문득, 나도 그 풍경에 걸 맞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저절로 콧노래라도 부르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면, 사실 내가 그러고 있기도 합니다.
나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호수에서 하모니카도 자주 불고 있지 않습니까?
서울에서도 하모니카를 불긴 했지만, 여기서처럼 이렇게 자주 불지는 않았거든요?
근데,
그렇게 행복한 것 같기는 한데...
내 마음은 꼭 그렇지가 않네요.
그러면서 그 풍경 속에 있으려니, 빈 껍데기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 . 23
*
오늘 뒷집 영감님이 돌아가셨다. 오랜 지병이었지만, 그 동안 많이 사셨다는 마을 분들의 얘기다.
아무튼 한 주민의 죽음으로, 마을 분위기가 어수선하기만 하다.
나도 이 마을에 와서 이런 사건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아침이 시원찮아서 점심도 되기 전에 속이 쓰리도록 허기가 져왔다.
밥이야 지난 번 산장에서 쌀을 가져와서 얼마든지 해 먹을 수가 있지만, 반찬이 다 떨어져 간다. 형도 안 오고, 내가 스스로 시장에 간 일도 없다 보니......
그 동안 언덕에 나가 돌미나리와 뒤 언덕의 머위 그리고 민들레 잎 등을 따다가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서 반찬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초고추장이 떨어지고 나니( 오늘은 어차피 쌈장에 쌈으로 먹었다. ) 다른 반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나에겐 대체 반찬이 바닥나고 있는 것이다.
다 떨어져라. 그래도 살아 견디는지 한 번 두고 보리라......
날은 개었는데, 그래도 활짝 갠 것이 아니라 음침하기까지 하다.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뒷집 여자의 고함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사실 나는 뒷집 여자의 일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살고 있다. 친구 상범이 상종하지 말라고 해서이기도 하다.) 곧 이서 울음소리가 나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구나...'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배가 고파서 점심은 조금 일찍 서둘러 해 먹기로 하고 앞 언덕에 나가 돌미나리 한 주먹에 옆집 할머니 뒤안에서 머위 잎 몇 개, 그리고 민들레 이파리 조금... 그리고 산장 집에 가서 상추를 조금 뜯어다가 먹을 생각으로 (마침 산장아저씨기 언덕에 제초제를 뿌리고 있어서, 상추 좀 뜯어간다는 허락을 받으러) 갔는데,
거기서 뒷집 영감님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 점심을 해먹고 있는데, 밖에서 뒷집 여자가 뭐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 같았다.
이상해서 나가 보니,
"사람이 죽었는디, 빨래 안 걷고 뭐 허는 거여?" 하면서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예?" 하고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빨리, 빨래 안 걷어라('걷으세요' 라는 뜻)! 지금 뭐 허는 것여?" 하고 계속 악을 쓰는데,
그제야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던 나는, 그 이유도 모른 채... 일단 주섬주섬 빨래를 걷어서 '夢想?'에 돌아왔다.
아침에 빨래를 해서 널었던 빨래가 다 마르기도 전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빨래를 걷는 것인가?' 여전히 확신을 가질 수 없었음에도, 나는 그 여자의 '명령'(?)에 따라주긴 했는데,
아무튼 그런 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나다.
웬 놈의 비가 이리 내리는지......
"이런 비는 농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 어제 키큰 아저씨는 말했었다.
비가 많이 와서 호수의 물이 많이 불어있다.
그저께 배를 타고 뭍에 올려 대 놓은 것이 오늘은 물위에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힘들여 평평하게 골라 놓은 마당도 많은 비에 여기저기가 꺼져 들어서 굴곡이 심한 상태로 변해있다.
다시 비가 온다.
4 월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 제주도나 남해안지방엔 비가 제법 많이 오고 폭풍주의보까지 내려졌다고 한다.
이래저래 비구나......
안개 자욱한 음침한 비가 내리는 밤이다.
뒷집은 초상을 치루느라 전주의 한 병원으로 들 몰려가는 바람에 지금은 불 하나 없는 어둠에 쌓여 적막마저 흐른다.
평소엔 시끄럽게 짖어대던 그 집의 개들도 뭘 아는지, 어째 아무 소리가 없다.
짙은 안개에 가로등만 희미할 뿐, 이 부근은 마치 죽음의 분위기에 쌓인 듯 음울한 기운이 가득하다. 거기에 비마저 추질추질 내리고 있으니......
그런 분위기 속에 내가 뎅그러니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무서움이라도 느낄 법하지만, 나는 전혀 그런 기색도 없이 무덤덤하다.
무서움마저 내 마음에 파고 들어올 여유가 없는 것인가?
4 . 24
# 봄이 가는 것인가?
비가 내립니다.
상당히 많은 비가 내려 요 앞 호수의 수위가 더 높아져 있습니다.
그렇게 호수에 물이 가득하니 보기엔 좋습니다만......
비가 내리니 역시 산은 더욱 푸르러져 갑니다.
한 번 비가 올 때마다 산의 색깔이 조금씩 그 짙기를 더해 가는 것입니다.
여태까진 여기저기서 피어나 아롱대던 꽃들이 이제 꽃잎을 떨구고 녹색의 이파리를 내 놓으니, 세상은 점점 더 녹색으로 채워져만 가고 있는 것이지요.
산으로만 보면, 그렇게 여름이 온 것처럼 봄의 모습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4월인데도......
4 월.
'4 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누군가 그랬다듯이, 나에게도 4 월은 퍽 힘든 달입니다.
그 뜻이야 서로 다른 입장이겠지만......
그런 4 월도 이제 다 가고 있습니다.
4 월이 가면 봄도 가는 건가요?
개인적으로 나는 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올 해의 봄은 조금 색다를 수 있었습니다. 시골로 내려와서 통째로 맞게 될 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올해는 다른 해와는 달리, 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었답니다.
그래서 정말, 그 봄을 통째로 느끼려고 겨울의 끝자락에 맞춰 여기 '둔터니'에 내려왔었는데, 그래서 온 봄을 느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봄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 봄도 이렇게 가는 듯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에겐 많은 것들이 새롭고도 재미있었습니다.
밭에다 직접 씨앗도 심어보고, 산에 나는 나물도 뜯어 먹어보고, 호수의 배도 저어가며 나름대로는 봄을 만끽해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봄이, 이렇게... 비 따라 훌쩍 가는 것 같아 아쉬움도 크기만 한데요,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이 가는 봄이 얼마나 강한 인상으로 나에게 남을 것인지는......
딴에는 내 것으로 만들어보려고 이것저것 시도도 해보고 노력도 해 보았는데,
그런데, 지금 느끼기에는...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쩐지 비 몇 번 오는 걸로 봄이 시들어 버린 느낌이거든요.
게다가 한 창 봄을 만끽하려는데, 걱정거리가 생겨(허기야, 미리 예견된 일이었지만.) 마음이 위축되어 제풀에 시들어버린 느낌도 없지 않구요.
그렇게 아쉽게 이 봄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그 나이만큼의 계절을 맞이하지만, 그 모든 계절의 모습이 다 다르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해마다 반복되는 계절이라도, 정말 찬란하게 아름다운 계절은 그리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거구요.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
사랑만큼이나 소중하고 아쉽게,
오는가 싶더니 그새 가버리는......
아, 인생을...
아, 가는 봄을...
나는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4 . 29
기로가 요즘 이렇게 시골 생활에서의 행복을 맘껏 즐기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3월이야 서울에서 떠나오면서 어느 정도 막음을 해놓고 내려와서 무난하게 넘겼지만,
이제 4월도 말이 다가오는데, 아무런 수입이 없이 지내다 보니, 지금 사는 '夢想?'에서야 이래저래 세상 일 잊고 지낼 수 있는 것 같아도,
현실로 돌아가면, 서울 원룸의 공과금 문제거나 아직도 갚지 못하고 있는 지난 전시회 때 짊어졌던 빚의(평소에 빚을 지지 않는 생활을 해왔던 기로에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한이 다가오는데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마냥 시골 생활을 즐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직접적인(구체적인) 내용을 기로가 홈페이지에 밝히지 않기 때문에,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회원들은 기로의 수심을 알 수가 없는 문제지만,
기로는 하루하루 한숨만 쉬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b, 손님맞이
# '계절의 여왕' 5월
5 월이 왔습니다.
근데, 호수의 물은 더 불어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호수 둔덕이 좁기만 하고, 그만큼 호수가 넓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산은 완전한 녹색을 띠고 있습니다.
산장의 느티나무도 얼마나 푸르른지, 그 집도 '아름다운 숲속의 집'으로 보인답니다.
5월, '계절의 여왕'이라는 좋은 시절이지요.
처음에 이 곳에 이사올 때는 호수 둔덕에 '코스모스', '해바라기' 같은 꽃을 심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마당 한 켠에는 '나팔꽃'도 심을 생각이었는데, 그런 씨앗을 구할 수가 없드라구요.
여기서 가까운 '강진 장'에 가서, 농약집에 물어 봐도 그런 씨앗은 없어서, 겨우 도라지 씨앗만 사왔었거든요.
그리고 벌써 5 월이 왔는데,
최소한 이 즈음에는 씨앗을 뿌려놓아야 하는데, 이 근방에선 아직 내가 찾는 씨앗을 구할 수조차 없습니다.
축대 돌 사이에 '채송화'와, 통나무집과 '夢想?'과의 경계 언덕진 곳에 '분꽃'도 씨앗을 뿌려놓긴 했는데,
싹이 돋아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그것도 이상한데,
그런데, 반갑지 않은 잡초들은 어느덧 마당에도 푸릇푸릇 그 싹이 적지 않게 돋아 나오고 있드라구요.
벌써 '잡초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근데 아무튼,
"요즘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시절여." 라고 키큰 아저씨가 말하기에,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아직은 조금 쌀랑하기도 하고, 그 반면 한낮엔 벌써부터 땀이 나는 때 이른 더위도 있어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나?' 하고 어리둥절해 있던 참인데,
생각해 보니, 지금이 좋은 시절인 것은 맞은 것 같습니다.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에 비하면, 춥지도 않고, 또 푹푹 찌는 더위도 아직은 이르고... 그렇게 봐도, 역시 좋은 시절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한 낮에 방에 앉아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방문이라도 열어 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아름다운 호수 풍경이 그대로 펼쳐집니다.
기분이 좋아져서 음악이라도 틀어 놓으면, 현실 감각도 없어지는 듯합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내가 살고 있다니......'
그러다가 저녁을 먹고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뒤에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당에 나가보면, 이제 뜨거운 햇살도 없는 쾌적한 공기가 피부에 느껴지는 기분도 참 좋습니다.
반가운 손님이라도 있다면,
'내가 만들어 놓은 쉼터에서 상큼한 '비노(스페인 와인)'라도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라도 나눈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방안에 음악을 틀어놓고 말입니다. 아니면, 썩 잘 부르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하모니카라도 불어주면,
아마 내 손님들은... 몹씨 좋아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배에 태워 호수를 한 바퀴 돌아온 뒤라면, 더욱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환상적이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요.
아, 누군가 온다면... 그래 볼 생각입니다.
아직은 모기 등의 해충도 귀찮게 굴지 않아, 선선하게 바람 쐬는 맛도 아주 좋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맑은 하늘엔 별이 총총이 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거든요.
5 . 1
그런 와중에 5월이 왔고,
그런 구체적인 얘기 역시 홈페이지에 밝히지 않고 있던 기로에게는,
월초부터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몽상에 놀러오겠다고 연락을 취해오고 있었다.
그 서막은 서울의 '구 병태'로부터였다.
# 손님맞이
아침엔 쌀랑하다가, 해가 나오면서 날씨는 화창하게 빛났습니다.
아침시간을 보내다가, 밭에 올라가 '옥수수', '토마토', '완두콩', '상추'와 '쑥갓'들이,
'어제 보다 얼마나 더 자랐나?' 하고, 한 바퀴 돌며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덩굴손(잡초)은 닥치는 대로 뽑아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위에서 밭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보니, 산장 할머니가 혼자서 그 너른 밭을 일구고 계셨습니다. 자식들은 '힘드니 그만 두시라' 해도, 할머니 욕심에 가만있으시지를 않는 겁니다.
한 번은 내가, '왜 일을 그렇게 많이 하시느냐?'고 물으니,
"가실(가을)에, 아들네도 주고.. 딸네도 나눠 줄라고, 그려..." 하시더군요.
그렇게, 자식들에게 본인이 농사를 지어 나눠주는 기쁨에, 그 힘든 일을 멈추시지 않는 것이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서 내가 그 쪽으로 가서 할머니 말벗을 해드리고 있는데(그 할머니도 나와 얘기하는 걸 참 좋아하십니다. 그렇게 자기와 말벗을 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거든요.), 핸드폰 소리가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으니, 지난 번 이사 올 때 이 마을에 나보다 먼저 도착했었던 '구 병태'였습니다.
그는 대뜸,
"지금 어딘데, 집에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소?" 하고 물어서,
"밭에 풀을 뽑다가, 산장할머니 말벗을 해드리고 있다오." 하니,
"아, 좋겠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침은 먹었냐고 물어서, 그랬다니까, 언제 일어났냐고 묻습니다.
사실 나는 새벽 4 시 반에 일어났었거든요. 그래서,
"여기는 시골이라, 나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진다오." 하니,
"지금, 나 약 올리는 거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내가 하는 말들이 다 좋아 들리고 또 부러워 보인다는 겁니다.
내가 뭐, 과장하거나 일부러 꾸민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직장(학교 선생님)에서 그런 말을 듣노라면,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바쁜 일과 중에 잠깐 짬을 내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그에겐, 내가 무슨 얘길 해도... 숨통 터지듯, 자신도 당장 해보고 싶은 부러운 일들일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그도 이런 자연과 함께 하는 생활을 무척 좋아하고 동경하는 성향이니까요. 게다가 그가 전에 왔을 때,
"너무 좋다!" 하고 돌아갔었거든요.
그러니, 그에겐 여기서 나에게 벌어진 일들이 다 좋은 식으로만 보고 들리는 것이겠지요.
전화를 끊고, 잠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나는,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에 겨워하며 살고 있나?' 하고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가 온다고 합니다.
처음 여기에 왔다간 뒤, 그 동안에도... 몇 번을 온다고 벼르더니,
드디어 '어린이 날'을 낀 연휴는 놓칠 수가 없다며, 만사를 제치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것도, 두 쌍을 더 데리고 온다니, 모두 세 부부... 여섯 명이 오나 봅니다.
그런 말을 해오긴 했는데, 서울에서 오려면 시간도 걸리지만, 이런 연휴엔 교통지옥이라, 정말 올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은 갖지 않고 있었는데, 이렇게 최종적인 통보를 해 오니, 내 마음이 조금 바빠집니다.
학교에 시험이 있어서 일찍 끝나는 관계로, 내일 오전 10 시쯤에 서울에서 출발할 거라면서요.
그런 대손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지......
이번 연휴는 그렇습니다.
미국인 친구도 가족이 내려온다는 메일이 왔었지만(그도, 내가 이사 오는 처음부터 온다고 했는데, 내가 나중에 따뜻할 때 오라는 바람에 늦추어서),
서울에서 많은 손님이 오기로 돼있다고 하니, 약간은 실망한 투로 다시 한 번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연휴를 맞아 여기에 몰려오려는 것을 보면, 내 주변의 사람들(내가 여기 산다는 걸 아는)에게는 시간 넉넉히 갖고 한 번 들러보고 싶은 곳으로 여겨지는가 봅니다.
그런 곳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고, 아무튼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뭐, 부산을 떨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나를 찾아오는 귀한 사람들이니... 조금 정갈하게는 맞아야겠지요.
그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다 갈 수 있도록 여기저기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지만요.
아직은 때가 일러 풍성한 푸성귀는 없지만, 엊그제 산에 가서 따와 그들을 위해 냉장고에 보관 중인 드릅에 취나물(이파리 몇 개 맛을 보았더니, 산에서 따온 것이라 향기가 너무 짙고 좋았습니다.), 그리고 요 앞 호숫가에 나가 돌미나리(이 것도 향기가 너무 좋음)에, 씀바귀, 그리고 민들레 이파리 등을 따다가 쌈밥으로 한 끼는 대접하려고 준비해 놓았답니다. 그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것들도 있겠지만(나에게도 그랬었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서) 이렇게 물 좋고 공기 좋은 산마을에서 나는 것들이니, 아무 데서나 맛 볼 수 있는 것들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때 마침 며칠 전에 형 내외분이 오면서 잘 익어가는 김치와 초장을 한 병 담아 와서, 쌈장도 넉넉하고...
이런 곳에 와서는 고기네 뭐네 하는 것보다도 그렇게 먹는 것이 진짜 맛일 것입니다. 게다가 구 병태는 그런 걸 너무 좋아하거든요. 그런 맛도 즐길 줄 알면서 말입니다.
잠자리가 조금 문제이긴 하지만, 방이 두 개이니... 군불을 넉넉히 때 주고, 안방엔 여자들 다른 큰 작업방엔 남자들을 때려 뭉쳐 몰아넣으면(?) 될 겁니다. 이불이 넉넉치 않다는 말에 자신들이 덮을 담요 등은 다들 알아서 가져오겠다고 했으니,
나름대로는 마음 편히 즐기고 갈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 부근의 좋은 곳도 두어 곳 안내하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동원해서... 성의껏 만들어 먹으면서 휴일을 보내면 되겠지요. 아마, 그들에겐 그저 이 마을 주위에서만 놀다 간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맑은 호수를 낀 워낙 시원한 풍광인데다, 이런저런 나물도 캐고 산책도 하면서......
좌우간 그들에 맞춰 되는대로 보낼 계획입니다.
그렇게 이번 '황금연휴'엔 내 손님들이 날 찾아온답니다.
늘 까불면서(?) 나와 티격태격 대는 '서 창모'는 못 온다고 하니(여름 방학에는 꼭 올 거라고 했는데), 조금 아쉽긴 해도......
5 . 2
호수에 물이 불자 조금씩 둔덕의 땅을 덮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호수가 넓어지니, 기로는 배를 타고 나가면서 그 전보다 약간은 센 물살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배는 노를 젓는 대로 가는 게 아니고, 물과 바람결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물이 불어나 호수가 더 커진 것 같으면서부터, 기로는 조금 두려운 생각도 들어... 요즘엔 항상 친구 상범이 만약을 위해 자신의 동력선에 비치해 놓았던 구명조끼를 입고 배를 타곤 했다.
오늘도 마을이 잘 안 보이는 곳까지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배를 띄워놓고 기로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리고 돌아와 오늘은 작업 방에서 자기로 했다.
내일 손님들이 오기 때문에 오랜만에 작업 방에 불을 땠던 것인데, 방바닥이 별로 따뜻한 기색이 없어서 보일러를 약하게 틀어 놓기까지 했다.
컴퓨터가 있는 안방(작은 방)에서 지내다가 큰방(작업방)에 와서 앉아있으니, 기로는 기분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런데, 몇 시간을 스케치북만 펴놓고 앉아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방 한 구석에 놓여있던 기타를 들고, 오랜만에 한 번 튕겨 보니 손이 영 낯설기만 했다.
하모니카를 불면서부터는 별로 기타를 잡지 않았더니, 먼지만 뿌옇게 쌓여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기타를 내려놓으면서는,
'내일부터 한 이틀은 손님들과 함께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손님들이 오는 날이었다.
아침에, 토마토 지줏대를 해 주기 위한 나무를 자르러 기로는 뒷산 쪽으로 올라갔다.
뒷산엔 이미 마을 사람들이 터를 고르느라 나무를 베어놓았던 것들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두께가 일정하게, 나무들 중의 가지들을 골라 약 120cm 정도 되게 열 개를 잘라 들고 돌아오는데,
산장 집 할머니가 밭에 나오면서,
"가만 보믄, 화가 선상도 참 부지런 혀..." 하는 것이었다.
"아, 예... 제 부모님들이 그러셨거든요..." 기로는 조금 멋쩍게 대답을 했는데, 그러면서, "아... 할머니 밭의 상추 좀 파실 수 없습니까?" 하고, '마침 잘 됐다!'며 물었다.
"뭐 허는디 상추가 필요혀?" 하고 할머니가 물으면서, "어차피 솎아줘야 헝게... 좀 뽑아 가셔..." 했다.
"아이, 할머니... 힘들여 농사지은 것을 제가 공짜로 얻어먹기가 미안해서 그런 거거든요? 그리고 오늘은 서울에서 손님들이 오는데, 그 사람들하고 먹으려고 그러니 조금만 파세요..." 하자,
"그게, 먼 소리여?" 할머니는 펄쩍 뛰며, "그렇게 팔라고 허믄 안 줄 거여..." 하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산장 집에서 박 만석이 상추를 뽑아다 먹으라고 했던 걸, 딱 한 번 뜯어다 먹은 뒤 다시는 뜯어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기로의 입장에서는 정말, 그렇게 할머니가 힘들여 농사짓는데 본인은 하는 일도 없이 공짜로만 얻어먹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또, 자신이 상추를 사겠다고 하면,
'할머니가 곤란해 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산장 할머니 밭의 상추를 보니, 구 병태가 좋아할 법한 '애상추'라서... 그리고 어차피 솎아주어야 할 것 같아,
팔라고 했던 것인데,
산장 할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상추밭으로 가더니, 바로 상추를 솎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 역시 어쨌거나 따라가 몇 개 솎아 내는데,
기로가 뽑는 것은 뿌리는 남고 잎만 떨어져서 상추를 버린 꼴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능숙한 솜씨로 금방 한 아름의 상추를 솎아내기에,
'아, 저렇게 별로 힘도 안 들이고 솎아내시는 걸 보면, 그런 기술이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게 아닌 모양이구나......' 하기도 했다.
"자, 이 상추를 지금 바로 다듬어서 씻은 뒤, 비닐 봉다리(봉지)에 넣어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다가, 손님들이 오믄 꺼내서 먹으믄... 마침 맞을 거여." 하셨다.
"글쎄요... 상추는 저녁에나 먹을 것 같은데요?" 하자,
"그려도 지금 뽑아다 씻어 놓는 게, 상추가 싱싱허게 살아날 것여..." 하고 알려주었다.
'아, 그런 것이로구나......' 하고 기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 할머니, 지난 번 고구마는 참 달아서... 잘 먹었습니다. 근데, 올해도 고구마를 심을 건가요?" 하고 묻자,
"잉... 말, 잘 나왔네..." 하면서, "올 가실(을)에는 참말로 고구마 좀 팔아 주셔!" 하는 것이었다.
사실 전에 기로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다.
그 집 고구마를 먹어보니, 재래종 '물고구마'인데다가 달아서,
"혹시 올 가을에, 고구마를 많이 캐시면... 제가 조금 사야겠다."고 하면서, "또 서울에서 손님들이 오면, 제가 얘기를 해서... 얼마간은 팔아드릴 수도 있을지 모르거든요?" 했던 것에 대한 확인 물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 기로는,
"아,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오늘 내려오거든요? 근데, 혹시 할머니 댁 고구마가 남아 있습니까? 그러면, 조금만 주세요... 오늘 그 사람들에게 맛을 보인 뒤, 가을에 사가라면 되겠네요." 했더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할머니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더니, 고구마 한 봉지를 내 왔다.
그러니까, 기로는 아침에 토마토 지줏대 꺾으러 올라갔다가, 상추와 고구마를 얻어가지고 내려왔던 것이다.
오늘 올 손님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거라면서......
그런데 그 이후의, 그러니까 손님들이 도착한 다음부터 떠날 때까지의 기록은 없다.
왜냐면,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그리고 그들과 어울려 함께 하느라... 기록할 틈이 없었던 것으로,
이미 그들이 오기 전의 기로의 마음 가짐이 그런(위에 나온 글) 자세였기 때문에, 그렇게 손님들을 대접했던 것으로 가늠할 수 있겠다.
그리고는 손님들이 떠난 뒤부터의 기록이 있는데......
(어차피 이 '몽상별곡(夢想別曲)'은 기로의 일기에 따라 얘기가 전개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들은 갔다.
새벽안개 속으로 빨려가듯 차 몇 대가 마을길을 올라가는 것으로......
'아, 그들은...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일까?' 하고 기로는 차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 중 '송 종표'는 기로에게,
"장 선생, 이제... 혼자 남아서, 허전하겠네요." 하고 위로 비슷한 말을 했지만,
기로는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들이 온 것은 온 것이고, 또 가버렸다고 마음이 허전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태는 아니다. 내가 그렇게 변해 버린 것 같다. 무덤덤하기만 하니......' 하면서는, '그만큼 나는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도 떠나길 잘 하는 사람 아닌가. 다만, 조금 안타까운 것은... 구 병태는 이 호수의 안개를 보고 싶어 했는데, 그들이 머물었던 이틀 동안은 평소와 달리 그런 안개도 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좀 아쉽긴 하다......' 하고 있었다.
# 한 사람의 역할
오늘, '夢想?'의 마루에 앉아 마을 사람들과 막걸리를 조금 마셨습니다.
한창 더울 시간에 자리를 마련했는데, 시골이라 그랬겠지만... 그 느낌은 더욱 정겨웠던 것 같습니다.
내 개인적으론 술마실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냉장고에 남겨진 막걸리가 몇 병은 있었거든요.(어제 손님들(전주에 사는 친구의 손님들을 포함한)이 가져온)
그런데, 때마침 반장과 키큰 아저씨가 바람쐬러 이쪽으로 슬슬 걸어 오길래 내가 불렀었지요.
산장아저씨도 부르면 이 동네 남자들이 다 모였을 텐데,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 분은 오늘 바빴거든요.
연휴라 산장을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서, 옆에서 거들어 줘야할 일이 많은데다가 그 분 개인적으로도 술을 썩 좋아하지는 않아(키큰 아저씨도 동의함) 부르지 않았던 거지요.
호수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키큰 아저씨는,
"장씨가 이 동네에 이사온 뒤로, 이렇게... 재미난 일이 가끔 생겨서 참 좋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반장도 동의하더군요.
나는 멋쩍어서, 그저 웃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이 마을에 온 이래, 주민이라 해봤자 열몇 명 사는 마을에... 뭔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벌써, 어제만 해도... 내 서울에서 온 손님들이 반장 집에 가서 토종꿀 몇 병을 사갔거든요.
이 동네는 토종 벌을 키워 꿀을 따는 산골인데, 자신들이 비축해 놓은 꿀 등을 판매할 마땅한 판로가 없어 창고에 쳐 박아 놓고있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손님들을 데려가 팔아주니... 그들에게는 고마운 일일 겁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올 가을에도, 이 산골에서 생산할 한국 토종 고추와 고구마, 그리고 곶감 대추 등... 이런저런 우리 도시 사람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우리 재래 농산물이 많을 터여서, 그런 것들을 팔아주기로 약속도 돼 있기 때문입니다.
벌써, 내 손님들도 그런 쪽에 관심을 갖고(그리고 이미 내 형제들도)... '가을이 되면 알아봐 달라.'고, 나에게 부탁까지 해온 상태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양측을 연결시켜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요.
물론, 엊그제 고구마와 상추를 얻어왔던 산장할머니께도 이미 조그만 보답은 했습니다.
내 손님들이 사온 맛있어 보이는 '파운드 케익'도 갖다 드린데다가, 올 가을엔 고구마도 사갈 거라는 내 손님들의 확답도(그들도 내가 삶아 놓은 고구마 맛을 보았음) 있었으니까요.
할머니의 정이 이미 그들에게도 맛으로 느껴진(고구마와 상추, 돈나물 등을 모두 맛보았으니) 뒤니까요.
아무튼 내 손님들도 산에서 고사리도 조금 꺾고, 이런 저런 나물에... 게다가 탄성을 지르며 먹었던 요 호숫가의 '돌미나리' 등을 챙겨, 각자 몇 봉지씩 바리바리 차에 싣고 돌아갔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나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것이... 조금은 떳떳해진 기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에서 이사 온 사람이, 이 마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물론, 굳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한... 내 인위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살다보니 벌어졌던 일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내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날마다 배를 타고 호수에서 노니는 사람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각인될까봐서 찝찝했었는데, 가끔은 이런 일도 엮어주면... 조금이나마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한 사람이... 어느 날 낯선 시골 마을에 이사 왔어도,
그 사람에 맞는 역할은 생겨나는 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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