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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지막 권면
살전 5:23-28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마지막 시간입니다.
<한 번에 정리하는 데살로니가 전서>
지금까지 살펴본 데살로니가 전서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환상 중에 만난 마게도냐 사람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수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등지에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고
‘드로아’라는 항구도시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거기서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행16:9-10).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아시아로 가려했던
자신의 계획을 접고 순종하기로 합니다.
이것이 유럽에 복음이 들어가게 던 배경입니다.
2. 최초의 교회(빕립보)
그래서 유럽에 첫 발을 내딛은 곳이 마게도냐의 빌립보입니다.
거기서 유럽 최초의 회심자,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녀의 집에 첫 교회를 세웁니다.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그러던 중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을 고쳐준 것이
빌미가 되어 송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종의 주인은 점으로 큰 이익을 보는 자였기 때문).
결국 무참히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절망하지 않고 그날 밤에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그러자 놀라운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행16:25-26). 그러나 도망치지 않았고
그 결과로 간수의 집을 구원하는 감동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3.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더 이상 빌립보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습니다.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무려 160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고난과 능욕의 상처가 아직 완전히 치유된 상태가 아니었음으로
데살로니가로 가는 여정은 매우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7:1-3).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간 동안(세 안식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있었고, 약간의 유대인들도
바울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졌습니다(행17: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 일은 유대인들의 반발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가르치지 못하고 야손이란 사람의 집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불량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야손의 집을 침입하여 바울의 일행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정보를 미리 알고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야손과 몇몇 성도들이 잡혀 읍장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읍장에게 “이 사람들이 예수라고 하는
또 다른 황제를 추대해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려는
선동자들을 받아들였다”며 은닉죄로 고발을 했습니다.
그들의 바울의 죄목을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와
같은 죄목(반역죄)으로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들을 숨겨준 죄도 반역지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야손 일행은 구속되지는 않았지만 보석금을 내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행17:5-9).
4. 데살로니가를 떠나는 바울 일행
이 사건으로 바울과 실라는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바울의 일행은
밤에 베뢰아로 가게 되었습니다(행 17장).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은 또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행히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러워서(신사적)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행17:11-12).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까지
좇아와서 훼방을 놓았습니다.
결국 바울은 혼자서 베뢰아를 떠나 아덴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와 합류했습니다.
5. 디모데를 파송
아직도 어린 교회를 이렇게 핍박 앞에 놓아두고 떠나는 것이
바울에게는 신경이 너무 쓰였습니다.
더구나 그 교회의 형제들이 새로 믿게 되었는데
믿음이 완전히 서기도 전에 그들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때문에 바울은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 그래서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되질 않았습니다.
살전 2:17-18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왜 길이 막혔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다”고 극단적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아 매우 절망적인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대안을 씁니다. 자시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바로 디모데입니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로
파송한 것입니다(아덴에서 파송).
6.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를 향해 갔는데 여기에서
클라우디오 칙령으로 인해 로마에서 추방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행18:2).
(로마의 4대 황제 클라우디오 칙령, “모든 유대인은
로마에서 떠나라”는 것. B.C. 49년).
이 때 고린도의 상황은 매우 불확실하여
바울의 마음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선교활동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몹시 괴로운 상태였습니다.
이 때 데살로니가로 갔던 디모데가 돌아와
그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이 살전3:7-9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살전3:7-9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그가 처해 있던 ‘고난’(궁핍)과
그를 짓눌렀던 ‘역경’(환난)에서 해방되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다시 사는 보람을 느꼈다”(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 보고를 받은 바울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그 시기는 대략 AD 51년 경입니다.
모든 서신 중에 가장 먼저 기록한 서신입니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책).
<서신의 내용>
서신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칭찬입니다.
살전1:6-7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둘째는 지연된 종말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살전4: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에 깨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5:1-11).
셋째는 성도들의 생활에 대한 훈계와 권면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살전4: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그 구체적 권면은 신약의 십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5:12절 이하).
<마지막 당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중보기도 요청입니다.
25절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 동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편지를 쓴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게 동일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롬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고후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엡6:18-20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골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이 기도 요청은 한마디로 바울의 선교사역이
만만치 않음을 엿보게 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바울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 드뭅니다.
그의 믿음을 따라갈 사람이 드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도 외에는
자신을 세울 힘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도들의 중보기도의 힘을 믿고 의지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은 마땅히 목회자의 사역에 동참하여
그를 도와야 합니다. 목회자가 신학을 공부하고
나름 성령의 체험을 가지고 있더라도 여전히
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격려와 사랑,
그리고 도움이 없이는
목회자도 언제든지 낙심하고 스러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늘 내가 목회자를 어떻게 도울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가 목회자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도는 물질이나 육체적인 봉사로서 목회자의 사역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도움은 중보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를 위한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우심과 능력이
목회자에게 임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죽을 자리에
있었던 조카 롯을 살렸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도 광야에서 몇 차례
하나님의 진노로 죽을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중보기도의 힘을 아시는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기도부탁을 하셨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기도의 동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의 기도로 여러분이 영적으로 날마다
성장하고 하나님의 듯을 이루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여러분의 중보기도로 저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힘입어 목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형제에 대한 사랑의 요청입니다.
26절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여기서 ‘입맞춤’이란 중동지역의 일반적인 인사입니다.
사랑과 존경, 그리고 화해와 서약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입맞춤’에 ‘거룩하게’이라는
부사를 추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어의 의미는 형용사적입니다.
곧 ‘거룩한 입맞춤’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단순한 인사나 형식적인 입맞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애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나타내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롬16: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고전16: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시대가 달라져서, 또는 문화가 달라 그것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담고 있는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거룩한 지체들이 모인 곳입니다. 반드시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고 서로 섬기며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거룩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셋째, 복음에 대한 열정의 요청입니다.
27절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특별히 주목해야 할 문장이 있습니다.
“내가 주를 힘입어”입니다. 바울은 항상 주님을 힘입어
그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자신의 모든 행위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라”고 하였을까요?
예, 이 편지는 개인적인 편지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 전체를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골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즉 이 편지는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복음의 확장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또 당시는 그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아직 성경이 완성된 시기도 아니었지만,
지금 우리와 같이 개인용 성경책을 갖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모일 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읽히고 들려질 때 비로소
진정한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당신의 본성과 능력을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수여하는 생명의 말씀이며,
우리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옮겨놓는 해방의 말씀이며,
우리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자유의 말씀이며,
어떠한 장벽과 장애도 뛰어 넘게 하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러한 말씀이 진정우리의 삶 속에
뚫고 들어와 살아 운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성경을 가지고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읽고 들을 때 그 능력을 발휘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지만 그 구원을 가능케 하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롬0:17, 신6:6-7).
<맺는 말씀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제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합니다.
2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이와 같은 축도로
서신의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도의 삶의 알파와
오메가여 처음과 끝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구원이 주님의 은혜로 시작되었으며
장차 받을 구원도 주님의 은혜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항상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기억하셔서 더욱 풍요롭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