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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걷고 | 삼계리-계살피계곡- ▲문복산- 마당바위-하늘문바위-삼계리 1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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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후
"삼계리(개살피골)" 에서
4.5km 걸어왔다.
"운문령 5.2km" 갈림길
좌측으로 →
"경주" 방면의 산군들 ~
"불송골봉" 뒤로
"삼강봉 ~ 백운산 ~ 고헌산" ~
"고헌산, 학대산"
"문복산 1.80km" →
잠시후
"헬기장" 을 지나고
2분 후
"문복산/ 1,014.7m
교체가 시급한
낡아버린 안내도
"드린바위" 를 조망하고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 왕복 10분 정도 거리 ◀
"삼강봉 ~ 백운산 ~ 고헌산" ~
"고헌산, 학대산"
"서담골봉 2.2km" →
"대현3리 쉼터 2.2km" →
잠시 내려오면
"대현3리 쉼터 2.1km"
"드린바위 0.7km" →
조금 내려오면
나무 뒤에 숨은 이정표
"드린바위" 방향은 없으나
좁은 등로가 보인다.
♠ 좌측에 있는
또 다른 이정표
♠ 여기는 "경주 대현리" 로
표기되어 있다.
2분 정도 내려오면
"드린바위" 가 보인다.
"낙동정맥" 을 바라보며
시계 방향으로 ~
22년 5월에 올라왔던
"드린바위" 뒤로
"불송골봉" 능선 뒤로
"삼강봉 ~ 백운산 ~ 고헌산" ~
"드린바위"
오늘 저 곳으로 돌아 오르려 했는데
그냥 이 곳에서 눈요기만 하기로!!
"학대산" 으로 가는 능선
☞ ☞ 둘러보고 뒤돌아 올라간다.
당겨본 "드린바위"
아쉬움은 남는다.
▶▶ 다시 돌아온
"문복산"
우측으로 꺽어 내려간다.
"삼계리 (마당바위)"
"4km 1.1km" →
3분 후
"문복산 05 표지목"
4분 후
긴 바위 지나고
2분 후
우측에 보이는 의자 쉼터
3분 후
★★★
주의가 요망되는 곳
우측으로 꺽어 내려간다.
3분 후
계곡을 살짝 건너
좌측으로 내려가면
"삼계리 (개살피골) 3.3km" 갈림길
능선을 따라간다.
"삼계리 (마당바위)"
"3.2km 0.3km" →
4분 후
"문복산 04 표지목"
곧 이어서
"마당바위"
지나온 방향부터 ~
"문복산" ~
능선따라 ~
"학대산" 능선 뒤로
"상운산" 능선 ~
1분 후
곧 폐목이 될 것 같은
뿌리가 뽑혀있는 나무!!
1분 후
"문복산 03 표지목"
"하늘문바위"
멋진 한 그루를 보며
위로 올라
우측의 "옹강산" 부터 ~
시계 방향으로 ~
능선을 따라
"문복산" ~
"문복산" ~
"학대산" 능선 ~
멀리 "운문산"
아래로 내려오면
이게 "하늘문" 인가??
♠ 안쪽에서 바깥으로
3분 후
큰 바위 뒤에 뿌리를 내리고
1분 후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2분 후
암반릉을 지나고
2분 후
"헬기장" 이 있는
"문복산 02 표지목"
잠시후
등로에서 벗어난
좌측에서 조망을 하고
다시 등로를 이어간다.
♠ 좌측 조망터
"학대산, 헬기장" 능선 ~
"헬기장" 능선 뒤로
멀리 보이는
"가지산"
"상운산, 천문봉" 능선 뒤로
"운문산"
좌측 멀리 보이는
"가지산"
5분 (가파른내림) 후
"문복산 01 표지목"
<8번부터~1번까지 지난다>
"헬기장" 모습
7분 후
거목 한 그루와
큰 바위
옆에 선바위
1분 후
평탄한 곳을 지나고
2분 후
특이한 거목 지나고
4분 후
리본 많은 곳을 지나
좌측 11시 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간다.
20분 후
묘지를 지나면서
아래 건물이 보인다.
잠시후
"문복산 (개살피골) 4.5km" 갈림길
우측으로 →
"삼계리 회관 0.3km" →
1분 후
직진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꺽어 내려간다.
♠ 직진해도 합류한다.
2분 후
문복산 등산로 안내도
♠ 뒤돌아 본 내려온 등로
잡풀이 무성한 평지
"학대산" 방향을 바라보며
시계 방향으로 ~
건너편의
"삼계봉" 능선 ~
"삼계리회관" 으로 가는 길이
잡풀로 보이지 않고
급수탑을 바라보며
우측으로 꺽어 내려간다.
1분 후
"쌍두봉, 황등산" 능선
당겨보고
1분 후
주차해 둔 곳이 보이는
날머리이다.
♠ 우측에 보이는
"용둔봉"
살짝 보이는
"옹강산"
주변에 있는
"화랑정신 발상지 기념상"
殺 臨 交 事 事 世
生 戰 友 親 君 俗
有 無 以 以 以 五
擇 退 信 孝 忠 戒
- 나무위키 검색 -
1. 개요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 기록된 다섯 가지 계율로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에게 귀산과 추항 두 청년이 찾아와서
'평생 마음에 새길 경구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시해 주었다.
원광이 직접 이 오계를 창안한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존재하던
오계를 강조해서 이야기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드물게 줄여서 '오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내용
● 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 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3.사상적 배경
언뜻보기에는 원광법사라는 스님이 가르쳤고,
충효를 말하고 있어서
유교와 불교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기 신라 사회에서 유교와 불교는
아직 그 뿌리는 깊이 내렸다고 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이
진평왕의 즉위 불과 30년전인 지증왕 때이며,
그전까지 사용했던 각종 호칭(특히 차차웅)이
신권정치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신라에서는 아직도 샤머니즘적인 무속신앙이 지배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신라 특유의 신앙을 고신도사상(古神道思想)
혹은 풍류(風流)라고 불렀는데,
세속오계는 이러한 당시 신라인 특유의 사상이 압축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4. 해석
사군이충과 사친이효는
유교적 미덕인 충과 효를 강조하고 있는 항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정통 유교의 입장과는 반대로 충이 효보다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라인들이 지니고 있던 강한 공동체 의식을 찾을 수 있다.
교우이신 역시
단순한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하는
유교의 그것보다 훨씬 강한 성격이었다.
살생유택은
불교의 영향이 깊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불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최대한 인간다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임전무퇴는
전쟁이 많았던 6~7세기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매우 중요시되었던 사상으로,
원광법사에게 세속오계를 전수받은 귀산과 추항은 이 계율에 따라
훗날 벌어진 백제와의 아막성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사기가 고무된 신라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승리하여 신라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백제군은 말 한 필, 수레 한 대조차 돌아가지 못했고
지휘관인 해수는 단신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진평왕은 귀산을 사후 나마에 추증하였고,
추항을 사후 대사로 추증하였다.
어떻게 보면
반굴, 관창의 선배격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삼국사기 열전에는 이렇게 7세기 신라의 인물 중 불리한 전투에서 분투해 전사한 후
아군에게 용기를 주는 식의 이야기를 지닌 인물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쳐서 살아남은
김원술, 김흥원 등은 임전무퇴를 지키지 못한 것이 평생 치욕으로 남게 된다.
세속오계에 대한 서술은
삼국사기의 인용 고문헌 중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근거를 둔 이야기로 추정된다.
5. 평가
세속오계는
고신도사상적 무속신앙을 통하여
신과 인간이 합일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이룩된 순수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공동체의식과 철저한 의리정신, 숭고한 희생정신,
그리고 선량한 인간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을 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랑도사상의 구체적 실천 덕목을 약여(躍如)하게 부각시키고
이념적 체계를 가다듬게 함으로써
화랑도 발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리하여
직접적으로는 신라로 하여금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하고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천년왕조의 영광을 누리게 하였고,
간접적으로는 후대에 와서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거세게 밀어닥친 외래문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 민족 특유의 순수 선량하고도 의연한 민족성을 이어오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적 전통사상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고려왕조의 처절한 항몽정신(抗蒙精神)과 조선왕조의 의리사상, 한말의 의병정신,
그리고 일제하에서의 독립정신 등으로 이어지는
불굴의 민족정기의 맥락은
모두 이 세속오계의 정신을 통해 튼튼하게 다져진 것이라 하겠다.
- 세속오계 [世俗五戒]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검색 -
세속 오계(世俗五戒), 혹은 오계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의 요청을 받아 알려준
다섯 가지 수신계(修身戒)이다.
오늘날 화랑도의 윤리적 지침 및 실천 이념으로 알려져 있다.
■ 배경 ■
승려 원광이 수행을 하고 돌아오자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서
“우리는 속세의 사람이니 사군자와 교유하는 데 필요한
심신수양의 계를 알려 달라.” 라고 요청한다.
이때 원광과 귀산 추항은 모두 화랑이 아니었다.
이에 원광이 말하기를
“불계로는 보살계가 있어 이를 십계로 삼고 있으나, …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라며 알려 준다.
이때 원광이 지었다는 말은 없고
“세속오계가 있으니”라고 하여
이미 남이 만든 계율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 내용 ■
1. 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2.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어야 한다.
3. 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4. 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5. 살생유택(殺生有擇) :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 살생유택의 구체적 내용 ■
위와 같은 내용을 들은 귀산은 원광에게
살생유택의 계율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질문하였다.
이에 원광은 동물을 잡을 때
꼭 필요한 만큼만 잡아야 한다는 뜻이라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철에는 살생하지 말 것.
● 가축을 죽이지 말 것.
● 작은 동물을 죽이지 말 것.
● 꼭 필요한 만큼만 잡고, 많이 죽이지 말 것.
그리고 이를 세속의 좋은 계율(世俗之善戒)이라 하니,
귀산은 이를 이해하고 돌아갔다.